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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은 사랑이시라(7) “아람의 나환자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하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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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명혁 목사

  지난 주일 가나안의 개를 아브라함의 딸로 만들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설교를 했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아람의 나환자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설교를 합니다. 저는 가나안의 개 사건과 아람의 나환자 사건에 2중적 3중적 4중적 공통점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스스로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죄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방식이 어쩌면 이렇게도 시공을 초월해서 같을 수가 있을까? 생각하며 스스로 감탄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두 사건의 공통점들을 살피며 설교를 합니다.  .

  첫째 공통점은 두 사람이 살던 곳이 저주의 땅 가나안 즉 수리아였습니다.  가나안의 개가 살던 두로와 시돈은 수리아 지역의 베니게 해안이었고 아람의 나환자가 설던 곳은 수리아 지역의 내륙인 다메섹이었습니다. 수리아와 아람은 같은 지역을 가리킵니다. 두 사람이 살던 곳은 해변이든 내륙이든 모두 저주 받은 이방의 땅 수리아였습니다. 수리아 즉 아람은 이스라엘과는 원수 지간이었습니다. 열왕기상 20장을 보면 아람 왕 벤하닷이 사마리아와 이스라엘을 치러와서 이스라엘 왕에게 이렇게 호통을 쳤습니다. “네 은 금은 내 것이요 네 처들과 네 자녀들의 아름다운 자도 내 것이니라.” 이스라엘 왕은 꼼짝하지 못하고 그에게 무릎을 꿇으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스라엘 왕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내 주 왕이여 왕의 말씀 같이 나와 나의 것은 다 왕의 것이니이다”(왕상21:4). 가나안의 개나 아람의 나환자는 이스라엘과 원수 지간인 저주의 땅 수리아에 살고 있었습니다. 마치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미신과 무지와 저주의 땅 조선에 살고 있었던 것과 꼭 같습니다. 이제 저주의 땅 아람 즉 수리아 다메섹에 살던 군대장관 나아만에게 임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세 가지로 나누어 말씀 드리겠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그곳으로 이스라엘의 작은 계집아이 하나를 보냈습니다.

  가나안의 개에게는 그의 아들 예수님을 보내셨고 아람의 군대장관에게는 이스라엘 땅에 살던 작은 계집아이 하나를 보내셨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나 북한에 살고 있는 불쌍한 개 한 마리에게 하나님께서 그의 사자들을 보내셨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모두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에 사로잡혀서 인종을 차별하면서 살지만, 하나님은 오래 전부터 민족주의나 국가주의를 초월해서 모든 민족 모든 나라에 그의 사자들을 보내시곤 했습니다. 원수의 나라 애굽에 요셉을 보내셨고, 원수의 나라 앗수르에 요나를 보내셨습니다. 지난 주일 말씀 드린 대로 저주의 땅 서리남에 유스티니안 벨츠를 보내셨고, 저주의 땅 인도에 윌리암 캐리를 보내셨고, 저주의 땅 조선에 토마스, 언더우드, 아펜셀라 선교사들을 보내셨습니다. 가나안의 개 한 마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아람의 나환자 한 사람을 살리시기 위해서 그의 종들을 보내셨습니다. 

  이스라엘 땅에 살던 작은 계집아이 하나가 자원해서 아람에 선교사로 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을 쳐 들어온 아람군대에게 포로로 붙잡혀서 그곳으로  간 것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우리를 포로로 붙잡아서 이곳 저곳으로 보내시기도 합니다. 영국 서해안에 살던 패트릭을 해적들이 붙잡아 아일랜드로 가게도 하셨습니다. 그래서 패트릭은 아일랜드 복음화의 선구자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땅에 살던 작은 계집아이 하나가 포로로 붙잡혀 아람으로 간 것은 우연한 일도 아니었고 불행한 일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숨은 손길에 의해서 붙잡혀서 그곳으로 간 것이었습니다.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그곳으로 붙잡혀 간 것이었습니다. 제가 만 11살 때 부모와 고향을 떠나 남한으로 온 것도 하나님의 숨은 손길에 붙잡혀서 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붙잡혀 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포로로 붙잡혀 온 그 작은 계집 아이는 자기가 수종들던 아람왕의 군대장관 나아만의 아내를 충성스럽고 착하게 섬겼습니다. 고향과 가족을 떠난 슬픔과 고통과 시련을 눈물로 삼키면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수종드는 주인이 문둥병에 걸린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나아만에게 구원의 손길을 펴시고 계셨습니다. 처음에는 나아만으로 하여금 세상의 부귀영화와 권력을 모두 누리게 했습니다. 이웃 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게도 했습니다. “아람 왕의 군대장관 나아만은 그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저로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그러나 나아만은 갑자기 저주의 병인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저는 큰 용사나 문둥병자더라.” 하나님은 때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불행과 비극을 잠시 동안 가져다 주시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불행과 비극이 바로 하나님을 찾게 하고 만나게 하고 알게 하는 계기로 삼으십니다.

  박범순 집사님의 경우도 그렇고 안흥규 장로님의 경우도 그렇고 김 무 집사님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문둥병에 걸린 나아만으로 하여금 포로로 잡혀 온 그 작은 계집아이를 만나게 하셨습니다. 불행과 비극에 처한 박범순씨가 저를 만난 것처럼 불행과 비극에 처한 나아만 장군이 작은 계집아이 하나를 만났습니다. 이름도 없는 작은 계집아이는 자기 주인이 문둥병에 걸린 사실을 알자 잘 됐다고 좋아하는 대신 그를 불쌍히 여기는 착한 마음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주인님이 이스라엘에 계셨더면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우리 주인님의 병을 고쳐주실수 있을텐데요?” 그 작은 계집아이는 충고를 한 것도 아니었고 설교를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어린 아이 같은 단순한 믿음을 가지고, 주인에 대한 순수한 사랑을 가지고, 기도하는 마음과 소원하는 마음으로, 사랑의 말 한 마디를 한 것뿐이었습니다. 이름없는  작은 소녀는 그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소녀는 자기의 사명을 다한 것이었습니다. 불행과 절망에 처해 있던 이방 사람 하나를 옳은 데로 돌아오게 했습니다. 군대장관 나아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를 찾아가게 만들었습니다.

  기독교는 힘으로 누르는 종교가 아니고 착함과 사랑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종교입니다. 요사이 기독교가 힘으로 누르려는 경향을 띄는데 그것은 큰 잘못입니다. 기독교는 약함의 종교이고 착함의 종교이고 사랑과 눈물의 종교이고 감화와 감동의 종교입니다. 작은 계집아이는 그에게 주어진 착함과 하나님 증거의 사명을 다 이루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작은 계집아이를 아람의 군대장관 나아만의 집으로 보낸 것은 나아만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나타내 보이신 것이었습니다. 슬픔과 고통에 처해있던 작은 계집아이를 전도의 도구로 사용하신 것은 그 소녀에 대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나타내 보이신 것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은 불행과 슬픔과 고통과 절망에 빠져 있던 두 사람 모두에게 지극한 사랑을 나타내 보이신 것이었습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나아만의 자존심을 여지 없이 무너뜨리셨습니다.

  지난 주일 예수님께서 가나안의 개를 살리시기 위해서 가나안 여자의 자존심과 체면을 여지 없이 무너뜨리셨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아람의 나환자를 살리시기 위해서 나아만의 자존심과 체면을 여지 없이 무너뜨리셨습니다. 아람의 군대장관 문둥병자 나아만이 많은 예물을 가지고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엘리사를 찾아왔을 때 엘리사는 그를 맞으러 집 밖으로 나오지도 않았습니다. 마치 예수님이 가나안 여자에게 한 마디 말도 하지 않고 그를 전적으로 무시한 것처럼,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는 자기를 찾아온 군대장관 나아만을 맞지도 않고 그를 전적으로 무시했습니다. 그리고 사환을 보내서 이렇게 말하게 했습니다.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번 씻으라”(삼하5:10). 아주 무례한 언행이었습니다. 국가적 예절에도 어긋나는 언행이었습니다.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갔다고 했습니다.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가로되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다메섹강 아마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이켜 분한 모양으로 떠나니”(삼하5:11,12) 아주 당연한 반응이었습니다. 나아만은 강대국의 군대장관이라는 자기의 자존심과 체면을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그의 종들을 통해서 그의 자존심과 체면을 여지 없이 무너뜨리게 만드셨습니다. 그것이 그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나아만의 종들이 겸손하게 그에게 나아와서 무릎을 꿇고 이렇게 진언을 했습니다. “그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을 명하여 큰 일을 행하라 하였더면 행치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아주 지혜로운 진언이었습니다. 결국 나아만은 그의 자존심과 체면을 모두 접고 요단강에 가서 일곱번 몸을 잠그며 몸을 씻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죄인들의 자존심과 체면을 여지 없이 무너뜨리시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를 살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수가성 여인을 살리는 길도, 가나안의 개를 살리는 길도, 아람의 문둥병자를 살리는 길도, 모두 그들의 자존심과 체면을 무너뜨리는 길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주일 말씀 드린 대로 의사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사람을 죽입니다. 의사가 병자를 살리기 위해서, 병자를 수술을 하기 위해서, 병자를 마취 시켜 죽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면 의사도 하나님도 우리를 살리지 못합니다. 지난 주일 말씀 드린 대로 수 많은 사람들이 알량한 자존심과 체면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에서 끊어지곤 합니다. 박종순 목사님의 말씀을 다시 인용합니다. “여러분! 예수 믿고 기도하는데 뭐 그리 체면과 자존심이 중요합니까? 체면 때문에 자존심 때문에 예수를 포기하고 기도를 포기하는 게 옳습니까, 아니면 체면을 접더라도 자존심을 접더라도 예수 믿고 기도하는 게 좋습니까?” 가나안 여자도 결국 자기의 자존심을 모두 접었고, 아람의 문둥병자도 결국 자기의 자존심을 모두 접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알량한 자존심과 체면을 여지없이 무너뜨려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입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나아만을 구원하시고 그를 자기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나아만은 기도도 할 줄 모르는 이방의 한 마리 저주 받았던 개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그가 한 것은 별 것이 아니었는데 그에게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그가 한 것은 작은 소녀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를 찾아간 것뿐이었습니다. 그가 한 것은 엘리사가 하라는 대로 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번 잠그고 씻은 것뿐이었습니다. 들을 귀가 없는 사람이나, 엘리사를 찾아가지 않고 집에 들어 누어 있는 사람이나,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사람이 하라고 시키는 대로 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나아만이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하라는 대로 했을 때 그는 치유와 구원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대로 요단강에 일곱번 몸을 잠그니 그 살이 여전하여 어린아이의 살 같아서 깨끗하게 되었더라”(삼하5:14). 나아만은 이제 천하에 여호와 하나님밖에는 참 신이 없음을 고백하며 오직 그에게 경배할 것을 선언했습니다. 참으로 귀한 신앙고백이요 선언이었습니다. “나아만이 모든 종자와 함께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도로 와서 그 앞에 서서 가로되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 청컨대 노새 두 바리에 실을 흙을 당신의 종에게 주소서 이제부터는 종이 번제든지 다른 제든지 다른 신에게는 드리지 아니하고 다만 여호와께 드리겠나이다”(삼하5:15,17). 아람의 문둥병자 나아만은 이제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고 경배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는 그의 가는 길을 축복했습니다. “엘리사가 가로되 너는 평안히 가라 저가 엘리사를 떠나 조금 진행하니라”(삼하5:19).

  우리는 나아만의 그 후의 행적을 알지 못합니다. 아람으로 돌아가서 우상숭배에 부딪히며 많은 어려움을 당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새로 얻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그의 신앙을 버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나아만은 아람으로 돌아가서 자기가 이스라엘에서 싫고 온 흙으로 다메섹에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제단을 하나 쌓았다고 합니다. 나아만은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 사실을 후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지적하셨습니다. “선지사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니라”(눅4:27). 이것이 하나님의 역설적이고 모순되고 불가해한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함부로 사람을 판단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먼 곳에 있는 지극히 무가치한 사람까지 사랑하시고 구원하십니다. 이스라엘과 원수였던 수리아의 다메섹에 살던 문둥병자까지 사랑하시고 구원하셨습니다. 저는 이런 추측까지 해 봅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왜 하필 다메섹에서 부르셨을까? 그 옛날 아람의 나환자 나아만을 부르시고 구원하신 같은 장소에서 사울을 부르신 데에는 어떤 특별한 의미는 없을까? 이것은 저의 지나친 상상이지만 하나님의 역설적이고 모순되는 사랑의 성격을 우리들에게 알려주시는 한 가지 싸인 일지도 모릅니다.  가장 가치 없는 원수 같은 사람도 부르시고 사랑하신다는 하나님의 역설적이고 모순되는 사랑을 알려주시기 위해서인지도 모릅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역설적이고 모순되는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은 첫째 수리아 아람으로 이스라엘의 작은 계집아이 하나를 보내신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은 둘째 수리아 군대장관 나아만의 자존심과 체면과 오만을 여지 없이 무너뜨려 주신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은 셋째 나아만을 문둥병에서 치료하시고 그를 여호와 하나님만을 경배하는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주시고 바로 그곳에 복음이 계속해서 전파되게 하신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상한 방향으로 나타나십니다. 우리가 할 것은 가나안의 개처럼 또는 아람의 나환자처럼 그저 주님 앞에 나아와서 자존심과 체면을 모두 접고 명하시는 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물에 들어가라고 하면 물에 들어가고 먼 곳으로 가라고 하면 갈 수 있는 순종과 믿음을 주시옵소서.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나를 고쳐주시고 나를 구원하시고 나를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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