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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카드 (빌 2: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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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황금성 목사

요즘 대형할인마트와 카드회사와 수수료 인상 문제를 놓고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대형마트에서는 가맹점 계약을 파기하고 해당 카드를 받지 않는다고 선언했습니다. 이 때문에 소비자들이 많은 불편을 겪게 되었습니다.

이제 카드는 우리 생활 깊이 들어와 있습니다. 사람마다 지갑을 열어보면 카드가 수두룩합니다. 신용카드 한 두 개씩은 가지고 있습니다. 거기다 교통카드, 주유카드, 핸드폰 멤버십카드, 항공사 마일리지 카드, 빵집 고객카드, 미장원 카드, 공중전화 카드, 백화점 카드, 대형할인점 마일리지 적립카드, 신분증, 면허증······ 카드만 해도 십여 장이나 됩니다.

신용카드는 현금 대신 지불 수단이 됩니다. 또 마일리지도 적립이 되고, 할인 혜택을 받기도합니다.

그런데 요즘 불경기와 겹쳐서 신용 불량자가 사백만 명 가까이 되고 있습니다. 신용불량자가 되면 신용카드를 사용할 수 없게 됩니다. 경제 활동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어 많은 고충이 따르게 됩니다.

이렇게 카드는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축구 경기에서 심판이 사용하는 카드는 선수를 통제하는 데 씁니다. 붉은색 카드는 선수를 경기장 밖으로 내쫓을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영원히 부도나지 않을 카드 하나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설교 제목에 있듯이 그 카드는 예수카드입니다.

여러분! 살면서 필요 적절한 때에 이 예수 카드를 사용해 보십시오.

믿는 백성들은 예수 이름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골로새서 3:17 말씀입니다.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의 이름을 사용할 권세를 주셨습니다. 말할 때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라고 했습니다. 일할 때 예수의 이름으로 일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하실 말씀을 우리 입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실 일들을 우리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9-11 절 말씀을 다시 읽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빌립보서 2:9-11>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입니다.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십니다. 하늘에 있는 천사들, 땅에 있는 인간들, 땅 아래 있는 악령들까지도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예배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 이름을 어디에 사용할 수 있을까요?

첫째, 우리는 예수카드로 예배합니다.

예배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것입니다. 예배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모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잇는 중보의 제물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드릴 수 있습니다.

천하만물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예배함을 뜻합니다. 예수님이 왜 예배의 대상이 될까요? 그것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예수님을 지극히 높였기 때문입니다. 본문 9 절에 말씀에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지극히 높이신 까닭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스스로 지극히 낮아지셨기 때문입니다. 6 절은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기 전 모습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본래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이셨습니다. 성부 하나님과 같이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입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것을 성육신이라고 말합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더 이상 낮아질 수 없는 곳까지 낮아지셨습니다. 십자가는 자기 비하의 극치입니다.

6 절에 나오는 본체라는 단어와, 7 절에 형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여기서 본체와 형체는 헬라어로 같은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몰페라는 단어인데 영어로 번역하면 패션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패션이라는 단어를 잘못 쓰고 있습니다. 원래 패션이란 말은 멋을 부린다는 뜻이 아닙니다. 패션이란 정당한 자격을 가진 사람이 거기에 맞는 옷을 입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군인이 장교 훈련을 마치고 임관식을 하게 됩니다. 그 때는 장교 복장을 하는 것이 장교의 패션인 것입니다. 배우가 연기를 하기 위해서 장교 복장을 빌려 입는 것은 패션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본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패션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신성이 똑같으신 진정한 하나님이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종의 형체를 입으셨다는 것은 임시로 사람의 모습을 한 것이 아닙니다. 출생과 성장 과정을 거쳐서 진정한 사람이 되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진정한 하나님인 동시에 진정한 사람이십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스스로 자기를 비우셨습니다. 비우심이란 하나님의 형체이신 예수님이 인간이 되기 위해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셨다는 것입니다.

또한 8 절에 보면 예수님은 낮추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완성하기 위해서 죽기까지 낮추셨습니다. 십자가에 잔인하게 못 박혀 죽는 자리입니다. 인간의 자리에서 이보다 낮은 자리는 없습니다. 강제로 붙들려 십자가에 못 박힌 채로 죽어가는 자리입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 앞에서 조금도 자기를 방어할 수 없는 자리입니다. 발가벗긴 채로 두 팔을 벌리고 항복한 약하고 약한 자의 자리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처참한 상황까지 낮아지셨습니다. 그러기까지 하나님께 순종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예수님의 이름을 지극히 높이신 것입니다.

그 높임의 내용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신 것입니다. 뛰어난 이름은 하나님 자신의 이름입니다. 그것은 야훼입니다. 유대인들은 야훼가 너무 거룩한 이름이라 발음하지 못하고 대신 아도나이라고 읽었습니다. 헬라어로 아도나이는 퀴리오스입니다. 즉 하나님은 예수님을 지극히 높여 자신의 이름 퀴리오스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퀴리오스는 주님으로 번역합니다. 그래서 11 절에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게 하십니다. 이 퀴리오스를 말할 때는 무릎을 꿇게 하십니다.

무릎을 꿇고 퀴리오스를 고백하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우주의 모든 존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예배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주이시다’라고 부르짖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드릴 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르짖습니다. 그의 십자가의 은혜를 체험하면서 그 구원의 감격을 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카드를 사용하는 두 번째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이름을 주로 고백합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롬 10:13)

하나님이 천하만민을 예수를 주로 부르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지극히 낮아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지극히 높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를 위한 구원의 은혜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 죄값을 죽음으로 치루셨습니다. 나 대신 죽은 대속의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이 은혜를 깨달은 자들은 예수님을 주로 고백해야 합니다.

마음속으로가 아니라 입으로 직접 예수는 나의 주시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이것이 최고의 예배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라고 해야 예배가 됩니다.

만약 여러분 가운데 예배를 드리는 자리에 앉아있지만 예수 이름을 고백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예배가 아닙니다. 그냥 예배드리는 자리에 앉아 있는 것뿐입니다. 예배자가 되려면, 예배를 드리려면 우리 입술로 예수 이름을 고백해야 합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롬 10:9-10)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퀴리오스로 고백하십시오. “예수는 나의 ‘주’이십니다.”

이 주 고백은 두 가지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는 예수님은 나의 생명을 구해주신 구원자이십니다. 또 하나는 예수님은 내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내 인생의 주인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겠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 이름이 고백하는 것에 용기가 필요합니까? 예수를 주로 고백하면 누가 흉봅니까?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데 속는 기분이 듭니까? 예수가 나의 주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짝하여 살기 때문에 이 고백을 하지 못합니다. 예수를 주로 고백하면 세상 즐거움을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묶인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을 포기해야 합니다. 예수를 주로 고백하면 이제 예수님께 묶입니다. 묶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길만이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 외에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이 없습니다. 예수를 주로 고백하지 않는 것은 불신입니다. 입으로 부인하지 않고 침묵했다고 용서되지 않습니다.

구원은 예수 이름을 주로 고백하는 조건입니다. 예수는 나의 주라고 고백하십시오.


셋째, 예수카드로 예수 이름을 선포하십시오.

예수 이름을 고백한 사람은 이제 예수 이름을 선포하게 됩니다. 선포라는 것은 어떤 현장에서든지 예수 이름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머무는 모든 곳에는 예수 이름이 그 현장에 선포되어야 합니다.

환자가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선포하십시오. 눈물을 흘리는 자가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선포하십시오. 억울한 일을 당한 자가 있습니까? 귀신들린 자가 있습니까? 정의가 꺾이고 불의가 판을 치는 현장입니까? 다툼이 일어나는 현장입니까? 주리고 목마른 자가 힘들어 하고 있습니까? 그런 현장에 예수를 믿는 내가 서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선포해야 합니다.

예수 이름 선포는 그냥 현장에 예수님의 이름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 분의 이름으로 일을 마무리 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을 크게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놀라운 예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예루살렘 성전에 기도하기 위해 들어갔습니다. 성전 문 가운데 한 앉은뱅이가 구걸을 했습니다. 그는 하루 종일 그 곳에 앉아 손을 내밀고 구걸했습니다.
베드로가 성전에 들어서자 역시 손을 내밀었습니다. 마침 베드로는 호주머니가 비어있었습니다. 베드로는 그 앉은뱅이를 쳐다보았습니다. 베드로는 손을 내밀어 그의 손을 잡았습니다. 그리곤 자기를 주목해서 보라고 말했습니다. 두 사람은 눈을 맞췄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행 3:6)

그 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평생 서보지 못했던 그가 다리에 힘을 얻고 섰습니다. 걸었습니다. 뛰었습니다.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예수의 이름을 가장 무서워하는 존재가 있습니다. 그것은 마귀입니다. 마귀는 예수 이름에 벌벌 떠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이름이 선포되는 곳에 마귀는 쫓겨 나갑니다.
예수 이름을 선포하는 현장에는 주님이 계십니다. 그곳에 죄의 권세는 떠나갑니다. 능력의 주님이 현장을 장악하십니다.

어떤 자리에서든지 당당하게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드러냅시다. 빛은 어두움 앞에서 감추지 못합니다. 빛은 어두움을 이깁니다. 예수 이름을 선포하고 자랑하기를 주저할 이유가 없습니다.

상대가 깡패면 어떻습니까? 상대가 마녀 같으면 어떻습니까?

다윗이 골리앗을 때려눕힌 것처럼, 우리가 예수카드를 내놓으면 저들은 나가떨어집니다.

두꺼비가 얼마나 흉하게 생겼습니까? 두꺼비는 위험에 닥치면 개구리처럼 펄쩍 뛰어 도망치지 못합니다. 그래서 몸을 팽창시키고 머리를 숙여 적의 코앞에 다가섭니다. 부포톡신이라는 독을 내뿜기도 합니다. 동작이 느린 약점 때문에 겁주는 모습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두꺼비도 겁먹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이름을 선포하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어두운 곳에 주님의 빛을 비취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이름을 선포하면 죽어가는 영혼이 생명을 얻습니다.
넷째, 우리는 예수카드로 찬양합니다.

오늘 본문은 찬양시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본문은 초대교회 때 불렀던 찬송가 가사였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본문을 헬라어로 읽으면 운율이 있는 시로 되어 있습니다.

찬양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본문 마지막 11 절은 이렇게 마무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찬양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방법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찬양 받기에 가장 합당한 이름입니다. 이 세상 이름 중 가장 뛰어난 이름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찬양하면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가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걷고 뛰었습니다. 그 다음에 그 사람이 한 행동은 찬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성전 안으로 뛰어 들어 갔습니다. 본래 장애인은 성전 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부정한 자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는 평생 성전 문 앞에 구걸했습니다. 그는 언제나 문 앞에서 성전을 자유롭게 들어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그의 평생소원은 불구가 치유되는 것보다, 성전 안에 들어가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어나 걷게 되자 제일 먼저 성전 안에 뛰어 들어갔습니다. 그가 팔짝거리면서 뛰었습니다. 그는 그를 낫게 하신 예수님의 이름을 찬양했습니다.

이 일은 얼른 보면 베드로의 능력으로 고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는 베드로를 찬양하지 않았습니다. 예수의 이름을 찬양했습니다.

구경하던 사람들은 그 광경을 보고 모두 놀라워했습니다. 이 앉은뱅이 되었던 자는 아주 유명한 거지였습니다. 나이가 마흔 살쯤 되니 거의 40 년을 한 결 같이 성전 문을 지킨 사람입니다. 그가 앉은뱅이였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 그가 지금 걷고 뛰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낫게 한 베드로를 쳐다보았습니다. 베드로는 그런 시선을 의식했습니다. 그래서 소리쳤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내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나를 주목하느냐?”

베드로는 사람들에게 분명히 했습니다. 내가 낫게 한 것이 아니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낫게 한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이 날 예수님의 이름을 자랑하면 한 설교를 듣고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말씀을 들을 자 중에 믿기로 결심한 사람이 남자만 오천 명이나 되었습니다. 앉은뱅이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치료된 것은 물론 기적입니다. 그러나 오천 명이 예수를 믿게 된 것은 더 놀라운 기적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카드를 사용할 권세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이 예수카드를 쓰는 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예배할 때, 고백할 때, 선포할 때, 찬양할 때 감격과 은혜와 기쁨이 가득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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