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요한복음 21장(17) 넉넉한 마음의 축복 (요 21:20-22)

  • 잡초 잡초
  • 310
  • 0

첨부 1


- 설교 : 이한규 목사

< 자기를 극복하며 사십시오 >

인생은 바둑판과 같습니다. 이길 때도 있고 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번 졌다고 그만두면 바둑이 늘 수 없습니다. 한판 지면 그 다음 판에 이기면 됩니다. 실패가 있다고 너무 빨리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얼굴에 철판을 깔 때도 필요하듯이 마음에 철판을 깔 때도 필요합니다. 어떤 시련과 상처가 있어도 “그래도 나는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번의 실패로 나를 단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 마음을 붙잡아야 합니다. 내 인생의 최고의 적은 내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내 안의 내가 무너지지 않게 하소서!”

적을 밖에서 찾으면 다 적으로 보이게 됩니다. 남편이나 아내까지 나를 힘들게 하는 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물론 다른 사람 때문에 속이 상할 수는 있지만 인생의 적을 밖에서 찾지 말아야 합니다. 내 마음과 생각을 지키지 못하면 다 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남을 정복하는 능력을 구하지 말고 나를 정복하는 능력을 구해야 합니다.

진짜 원수는 배우자나 자녀가 아니고, 부모나 시부모가 아닙니다. 진짜 원수는 나 자신입니다. 배우자나 자녀나 부모를 바꾸려고 하지 말고 나를 바꾸려야 해야 합니다. 모세가 40년 동안 기도해도 바로는 바뀌지 않았습니다. 출애굽의 축복은 바로가 바뀌어서 얻은 것이 아니라 모세가 바뀌어서 얻은 것입니다. 내가 바뀌면 저주가 축복이 되고, 원수가 친구로 변하게 됩니다.

어떤 목사님이 한때 “나사렛 예수!”하고 벌떡 넘어지게 했다가 어느 날부터 그런 목회를 하지 않았습니다. 일부 교인들은 “왜 목사님이 옛날처럼 능력을 보여주지 않나?”고 불평했습니다. 그러나 넘어진 사람들이 계속 넘어지면서도 옷을 툭툭 털고 일어난 후에는 다시 옛날처럼 똑같이 행동하니까 그 모습에 회의를 느끼고 “내 생애에 다시는 그 짓을 안 한다!”고 결심했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의 변화입니다. 능력이 있어도 마음이 변하지 않으면 세상 사람들의 조롱의 대상이 됩니다. 그러나 마음이 변하면 “그 삶이 부럽다. 존경스럽다.”고 하면서 보는 사람도 믿음을 추구하게 될 것입니다. 능력보다 마음이 중요합니다. 마음이 못된 사람이 능력 받으면 더 큰 불행을 초래합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가장 큰 과제는 자기를 극복하고 자기 마음의 변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사실을 중요성을 잘 보여줍니다.

< “너는 나를 따르라!”는 말씀의 의미 >

18-19절 말씀에서 주님은 베드로에게 “십자가의 죽음을 각오하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주님을 따르는데 뒤를 돌아보니까 사도 요한도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주님께 “이 사람은 어떻게 되지요?” 하고 물었습니다.

베드로의 이 질문을 보면 사도 요한의 앞날에 대한 궁금함보다 평소에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던 사도 요한이 자기보다 더 잘되지는 않을까 하는 시기심도 있었던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거의 면박하듯이 베드로를 질책하셨습니다. “네가 무슨 상관이냐? 너를 나를 따르라!” 이 말씀에서 “너는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의 말씀일까요?

1. 비교하지 말라

주님은 성도가 서로 비교해서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을 참으로 싫어하십니다. 영적 전투에서 형제가 서로 협력해도 쉽지 않은 싸움인데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면 사단이 얼마나 좋아하겠습니까? 시기와 인간 타락의 가장 뚜렷한 표시입니다. 아담이 타락한 후, 카인이 아벨을 죽이는 인류 최초의 살인 사건이 시기와 질투 때문에 벌어졌습니다.

우리는 비교해가면서 살지 말아야 합니다. 요한은 요한대로 주님을 따르고, 베드로는 베드로대로 주님을 따르고, 나는 나대로 주님을 따르면 됩니다. 우리는 주님과의 관계를 ‘삼각관계의 상대적인 관계’로 하지 말고 ‘일대일 관계의 절대적인 관계’로 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성공을 보고 나에 대해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그 사람’이 될 이유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나만의 특징이 있고 나만의 성공 길이 있습니다. 기죽을 필요도 없고, 우쭐할 필요도 없습니다. 나답게 살면 됩니다. 은혜를 체험했다는 말은 비교의식이 없어졌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남이 자기보다 잘 되는 것을 참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은혜 받고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나의 운명에는 초연해야 하고 나의 사명에는 집중해야 합니다. 잘 나가는 다른 사람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누가 어떻게 되든지 나의 사명에 충실한 것이 중요합니다. 내 사명에 충실하면 나에게도 그 사람 이상으로 성공하는 길이 반드시 있게 될 것입니다.

2. 자신감을 가지라

오늘 본문을 보면 베드로는 약간 자기 연민에 빠진 것 같습니다. 주님의 말씀과 여러 정황을 보건대 자신은 순교의 십자가를 지고, 사도 요한은 순교의 십자가를 지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자 마치 자기는 소외된 느낌, 처량한 느낌이 들었을 것입니다. “내 처지가 왜 이렇게 되었나? 이게 무슨 꼴인가?” 그러나 십자가는 소외된 표시가 아니라 더 축복 받은 표시입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입니다. 내가 부족한 점이 있는 만큼 하나님께서 풍성하게 해주시는 점이 있습니다. 우리의 짧은 생각으로 하나님의 선하심과 공평하심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겉으로는 대단하게 사는 것 같은 사람도 마음은 시커멓게 탄 사람이 많습니다.

얼마 전 김정일 위원장의 처 고영희 씨의 사망 관련 보도에 의하면 김정일 위원장이 권력 승계 후 심한 스트레스를 느끼고, 어느 날 책상 위에 놓인 총으로 자살하려고 할 때 고영희 씨가 “당신 무슨 생각을 하는 거예요?”하고 총을 빼앗아 그를 살렸다고 합니다. 북한의 모든 권력을 가진 그가 돈과 권력이 없는 우리보다 100배, 1000배 행복할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는 말입니다. 조선시대 왕의 평균 수명이 34세였다고 합니다. 그만큼 속이 탔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자신감을 가져야 합니다. 어떤 일을 당해도 우울하게 될 필요가 없습니다. 나를 가치 있게 생각하고, 나쁜 일 다음에는 좋은 일이 있는 것이라고 낙관하고, 아무리 어려워도 사는 길이 있다고 생각하고, 나는 누구보다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또한 죄를 지었을 때도 모든 사람에게 다 죄와 허물이 있다고 생각하고 지나친 죄의식을 가지는 마음도 버려야 합니다.

물론 누구에게나 열등감은 있습니다. 문제는 그 열등감을 얼마나 잘 극복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열등감을 잘 극복하면 그 열등감을 얼마든지 자기 발전의 계기로 삼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배우지 못한 열등감을 잘 극복해서 나중에는 성경 베드로전후서를 썼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을 잘 할 줄 모르는 열등감을 잘 극복해서 탁월한 글 솜씨로 수많은 성경을 쓰고 기독교의 뼈대를 세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열등감을 극복하고 자신감을 가져야 합니다.

3. 남을 인정하라

주님은 본문 22절에서 “요한을 다른 방식으로 그의 길을 가게 해도 너는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즉 나의 사명도 인식해야 하지만 남의 사명도 인정해주라는 뜻입니다.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뜻이 계셔서 창조한 존재입니다. 그 하나님의 시각을 가지고 남을 인정해줄 때 나도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열등감에 사로잡히지도 말아야 하지만 우월감에 사로잡히지도 말아야 합니다. 나를 남처럼 만들 필요도 없고, 남을 나처럼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내 것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되 남의 것까지 내 구미에 맞춰 뜯어고치고야 말겠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조용히 기도하는 사람이 소리 내어 기도하는 사람에게 고치라고 하지 말고, 소리 내어 기도하는 사람이 조용히 기도하는 사람에게 고치라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마다 엑셀 같은 사람도 필요하고, 브레이크 같은 사람도 필요합니다. 조용한 사람도 필요하고 요란한 사람도 필요합니다. 내가 남처럼 될 필요도 없고, 남을 나처럼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남의 부족한 점이 보이면 내가 그 점을 메워주면 됩니다.

한 부부가 바다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넓은 바다를 보니 마음이 확 트이고 연애 시절이 생각났습니다. 넓은 모래사장에서 부부는 서로 업어 주자고 했습니다. 먼저 남편이 아내를 업자 아내가 감격하고 미안해서 "여보, 나 너무 무겁지?"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남편이 “머리는 돌이고, 심장은 강심장이고, 몸은 요크셔니까 당연히 무겁지!”라고 농담을 했습니다.

그 말에 아내가 삐쳐서 남편을 업어주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남편이 그래도 업어달라고 했습니다. 아내가 할 수 없이 업어주었습니다. 그때 남편이 미안해서 “여보, 나 가볍지?”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아내가 “머리는 비었고, 입은 가볍고, 손까지 빈손이니 당연히 가볍지!”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일로 그 후유증이 한 달 이상 갔다고 합니다.

우리는 상대방의 약점을 힘써 감추어주고, 장점을 격려하며 인정해주어야 합니다. 그처럼 남을 인정해주고 나를 낮추는 겸손한 삶은 요새 사람들에게는 별로 매력이 없는 삶이지만 하나님은 그 삶에 큰 매력을 느끼십니다. 사람들은 열심히 자기 PR을 해야 뜬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남 PR을 해줄 때 더 뜨게 하십니다.

나를 낮추고 남을 높여주면 지금 당장은 낮아지고 손해 보는 것 같지만 주님은 반드시 높여주시고 은혜와 축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보다 남을 낫게 여겨주고, 특히 사람을 외모로 평가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보잘것없어 보이는 사람도 깊이 사귀면 그 속에 보석이 감추어져 있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항상 그런 고운 마음을 가지고 남을 소중하게 보고 남의 장점을 기쁘게 인정해줄 때 나를 향한 하나님의 인정과 축복이 따라오게 될 것입니다.

4. 주님만 바라보고 살라

우리는 주님을 따를 때 곁눈질하지 말고 세상과 물질을 따라가지 말고, 사람도 따라가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은 믿을 존재가 아닙니다. 그냥 믿어주어야 할 존재입니다. 사람의 일이 얼마나 변화가 심한지 모릅니다. 그리고 사람이 할 수 있는 것도 거의 없습니다. 인맥보다 신맥이 중요하고, 그렇기에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 예배와 기도가 중요합니다.

어느 날, 한 교회 성도가 교회에 강아지를 데리고 왔다가 안내 위원들이 “저희들에게 맡겨 놓으세요! 잘 맡아주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강아지 잘 맡아달라고 신신당부하고 예배실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20분쯤 후에 예배 도중에 나왔습니다. 강아지 생각으로 불안해서 도저히 예배를 드릴 수 없었다는 얘기였습니다.

살다보면 우리를 염려하게 하는 그런 애지중지하는 강아지 같은 것들이 많습니다. 그런 것들이 주님보다 크게 보이면 반드시 근심과 염려가 생깁니다. 그러나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강아지 같은 것들이 하나씩 내 곁을 떠나도, 주님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을 떼지 않으면 “나를 따르라!”고 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가장 선한 길로 잘 인도하실 것입니다.

요새 살기 힘들다고 자포자기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능력이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능력의 원천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능력의 원천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의 말씀을 듣기를 기뻐하고, 주님께 열심히 기도하는 존재가 될 때 우리는 엄청난 가능성을 가진 존재가 됩니다.

우리는 주님께 ‘올인’해야 합니다. 그처럼 자신을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일에 온전히 던질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얻게 되고, 우리의 기도는 능력 있는 기도가 될 것이고, 우리 안에 있는 숨겨진 보화들이 드러나게 되면서 놀라운 축복의 열매들이 주어질 것입니다.

초본 식물인 대나무가 높이 자랄 수 있는 이유는 마디 때문입니다. 아무리 연약해 보이는 사람도 고난의 순간을 주님 바라보고 잘 통과하면 그것이 마디가 되어 어느 누구라도 큰 인물로 자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올인 하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존재가 된다면 우리는 누구보다 성공적인 사람이 될 것입니다.

< 자신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사십시오 >

살다 보면 남이 나보다 더 못한 것 같은데 더 성공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그 성공을 부러워하고 불행을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남의 성공을 우리의 성공을 위한 자극제로 활용하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의 성공 때문에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헌신하는 삶’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를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그런 성공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성공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진짜 성공은 누가 더 하나님의 사명을 잘 이행했고, 누가 더 예수님을 닮았는가 하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돈과 권력과 실력은 없어도 신앙과 인격과 주님의 성품과 사명을 향한 열정이 있으면 그는 최고로 성공한 사람입니다.

물론 남이 가진 것을 내가 가지지 못하고, 남이 누리는 것을 내가 누리지 못할 때 속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속상한 일은 내 존재의 목적대로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 존재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 그리고 교회사랑과 영혼구원 같은 것들입니다. 그런 존재의 목적에서 이탈하지만 않으면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쓰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존재의 목적에서 이탈하면 내 영혼은 돛대와 삿대가 없는 배처럼 됩니다. 환경을 물결 따라 감정도 요동치면서 자만과 자학 사이를 쉽게 오갑니다. 일이 잘 되면 금방 자만하고, 일이 안 되면 금방 자학합니다. 자만도 병이지만 자학도 병입니다. 아무 것도 아니면서 대단한 사람처럼 생각하는 것도 잘못이고, 반대로 하나님의 자녀이면서 근심하고, 두려워하고, 함부로 몸을 굴리며 사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남에 대해서는 잠깐 실망할 수 있지만 자신에 대해서는 한 순간도 실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포자기는 자기 스스로에게 가하는 폭력입니다. 왜 사람들이 자포자기에 빠집니까? 남의 떡을 크게 보면서 자신의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누가 일을 멋지게 해내는 것을 보고 부러워하면서도 자기 속에 있는 가능성을 보고, 또 그것을 갈고 닦는 일에는 소홀히 하는 사람은 불행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잠언 21장 25절 말씀을 보면 “게으른 사람은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정욕과 포부만 키우다가 그 정욕 때문에 죽는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남을 부러워하기만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시간을 보내면 영혼도 죽고, 행복도 죽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아름다움과 가능성이 있습니다. 꽃밭에는 소박한 민들레도 있고, 아름다운 장미도 있습니다. 그러나 민들레는 장미를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아마 장미가 민들레의 생명력을 더 부러워할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의 성공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겉으로는 몰라도 속으로는 그들이 예배와 기도가 있는 우리를 더 부러워할 것입니다. 세상의 위대한 성공보다 하나님 앞에서의 진실한 신앙이 더 소중한 것입니다.

< 사명을 따라 자기답게 사십시오 >

왜 사람들의 삶에 권태와 공허가 생깁니까? 내 영혼과 사명은 생각하지 않고 성공하려고 하니까 쉽게 지치고 실망하게 됩니다. 그래도 성공해 보겠다고 쉴 새 없이 달리다가, 실패하면 실패 때문에 울고, 성공하면 공허 때문에 울게 됩니다. 어느 누구든지 영혼을 채우는 말씀과 기도가 없고 선교와 구제의 사명을 외면하면 사람은 점점 공허하게 되고, 점점 불행하게 됩니다. 잘 산다는 것은 남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사명을 생각하며 자기답게 사는 것입니다.

사명을 따라 산다는 것은 대개 배고픈 일입니다. 전후사방에서 시련의 비바람이 몰아칠 수도 있습니다. 목숨을 걸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명을 따라 살 때 하나님은 그의 삶을 책임지시고 그의 인생을 보람 되게 하실 것입니다.

지난주에 두 분의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월요일에 만난 목사님은 신학교 동창이자 14년 동안 친구로 지내는 목사님이었습니다. 항상 쾌활하게 지내는 목사님이었고, 공동체에 활력을 불어넣고 동료 목사님들에게 끊임없이 웃음을 선사하는 목사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얼굴이 아주 어두웠습니다. 말도 별로 안했습니다. 아버님이 위암 말기라서 잠깐 한국을 방문했는데 그분으로부터 아주 딱한 사연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최근 가정적으로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문제는 교회 목회를 포기하고 선교 사역을 하면서 생긴 배고픔이 문제였습니다. 미국 뉴욕 땅에서 혼자가 되었습니다. 월세를 마련할 돈도 없어서 여기저기 전전하며 다닌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최근에 극빈자 의료 보험을 통해 검진한 결과 간경화 초기 증세로 안정이 필요하다는 진단이 나왔습니다.

저와 정길진 목사님이 “목사님! 그렇게 미국에서 외롭고 쓸쓸하게 살지 말고 한국으로 들어와서 선교사역을 같이 하자!”고 말했습니다. 아무래도 우리 곁에 두어야 안심이 될 것 같았습니다. 옆에서 이창영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한국에서 조그만 오피스텔을 얻고 살려면 최소한 100만 원은 있어야 하는데...” 제가 다시 말했습니다. “먹는 문제는 다음에 생각하자! 오직 사명만 생각하자! 우리 요삼일육선교회에서도 최대한 목사님을 돕겠다.”

그날 4명의 목사 가운데 성령의 큰 위로가 있었습니다. 위로 받는 사람도 위로 받았고, 위로하는 사람도 위로 받았습니다. 누군가의 사명을 위해 후원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처럼 삶에 위로와 보람이 되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저는 그때 사명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께서 죽음과 같은 고통 속에서도 사는 길을 열어주신다는 확신을 친구 목사님에게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이틀 전 금요일에는 아프가니스탄으로 이번 주중에 선교를 떠나는 CMA 8호 선교사인 이영동 목사님 부부를 만났습니다. 최근 아프가니스탄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같은 회교권 나라인 카자흐스탄에서 지난 13일, 15일 연속해서 한국인 선교사가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착잡했습니다.

고생문으로 자처해서 들어가는 그 부부를 위해 해줄 말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저 두 손을 꼭 붙잡고 말했습니다. “목사님! 사모님! 저희가 최선을 다해 기도하겠습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겸양하지 마시고 즉시 연락해주세요.” 사명의 길은 때로 큰 어려움이 예상되는 길이지만 그 길은 가장 보람된 길이고 가장 자기답게 사는 복된 길이 될 것입니다.

< 여러분들의 적극적인 후원과 관심이 필요합니다 >
국민은행 284-21-0264-873 이한규(요삼일육선교회)

우리는 복사판으로 살지 말고 원판으로 살아야 합니다. ‘나’는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어느 누구도 나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부자이지만 나도 부자입니다. 생각해보면 내 자산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심지어는 내 과거의 불행과 수치도 자산이고, 현재의 고난도 내 자산입니다. 그 자산을 잘 활용하고 승화하면 우리는 누구나 세상에 축복을 전하는 멋있는 선교의 도구들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보면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밑천을 다 까먹고 껍데기만 남은 모습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선교의 사명을 가지고 일어서야 합니다. 우리가 마음만 준비되면 하나님은 새로운 밑천을 허락해주실 것입니다. 때로 고난을 당하고, 때로 하나님의 질책을 받아도 하나님은 우리의 가능성을 결코 빼앗아가지 않으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주님이 베드로에게 심한 질책을 하셨지만 베드로는 그 일 때문에 주님께 섭섭해 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제자들 중에 나이가 제일 많았고, 심지어는 주님보다도 나이가 많았지만 언제든지 대표적으로 욕을 먹을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 넉넉한 마음으로 주님을 끝까지 붙잡았을 때 주님은 베드로를 역사상 가장 복된 존재로 만들어주셨습니다. 항상 자신에 대한 넉넉한 마음과 주님에 대한 열정적인 사랑과 선교의 사명을 가지고 축복의 길을 예비하는 분들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