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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께서 사울과 함께 하시는가? (삼상 15: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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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황요한 목사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처럼, 우리들의 경제나 사람들의 인심이 추석 명절 만큼만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가진 자나 그렇지 못한 모두에게 명절은 사람의 마음을 들뜨게 하기 충분합니다. 고향을 방문하고자 계획하는 이들이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방문하지 못하는 이들이나 모두 마음은 이미 고향에 가 있을 줄로 생각이 됩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정서적으로나 인간적으로 고향이 한없이 편안함을 제공해 주는 이유는 이 고향의 중심에는 언제나 부모님들이 자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이 형제요, 친구요, 그런 삶의 언저리에서 잊을 수 없는 이들이 있기에 고향은 언제나 따뜻함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지요. 각박한 삶으로 분주하다보면 관심 밖에 있었던 것 같은 우리의 고향들이 명절이 되면 본능처럼 기억되고 찾아지는 것도 놀라운 하나님의 창조적 섭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좋은 명절을 앞두고 우리 모두는 오늘 추수감사주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 여름에는 맥추절을 통하여, 가을에는 수장절을 통하여 한 해 중 가장 소중한 첫 곡식을 거두어 드린 후에 하나님께 감사로 제사를 드림으로써 삶을 인도하신 하나님을 잊지 않고 있음을 고백을 한 줄로 믿습니다.

영국에서 국교도의 박해를 피해 신앙의 자유를 원했던 청교도들이1620년 9월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102명이 플리머스를 떠나 66일간 항해 끝에 아메리카 대륙에1620년 12월 26일에 무사히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이때에 청교도 지도자 William Bradford는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이곳에 우리를 오게 하시고 아름다운 항구와 평화로운 땅에 정착하도록 인도하신 하늘의 하나님의 축복에 대해 무릎을 끓고 기도했습니다."

바로 그 해 겨울은 매우 고통스러웠습니다. 왜냐하면 추위와 배고픔과 질병, 그리고 인디언들의 공격으로 그들의 절반이 땅에 묻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고생스러웠던 그 해 겨울 초대 총독 John Carver도 사망하자 그의 후계자 William Bradford가 총독을 계승하여 30년 이상을 재임하며 공동체를 이끌었습니다. 그의 지도 아래 청교도들은 영국에서 가져왔던 씨앗들을 심게 되었는데, 감사하게도 콩과 옥수수 씨앗은 인디언들로부터 받아 심었습니다. 그리고 첫 수확을 거두게 되었을 때 그들은 먼저 추수감사절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드렸습니다.

한국교회의 선교의 문을 열었던 아펜젤러나 언더우드에 의하여 시작된 추수감사절기는 바로 신대륙에 도착한 청교도들의 신앙적 유산을 물려받은 아름다운 전통이 되었습니다. 다만 시기적으로 11월 셋째주일은 우리나라 계절상 모든 추수가 이미 끝난 후이기에 너무 늦음감이 있어 문제점으로 지적되어왔습니다.

이에 저는 시기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고민하던 중 평안의교회를 개척하던 1983년 부터 매년 추석절기가 다가오는 주일을 추수감사주일로 제정하여 지금까지 지켜오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추석은 절기상으로 햇 곡식과 많은 과일을 추수하는 시기이며, 더구나 세상사람들은 첫 곡식을 가지고 조상에게 드리는 차례상 마련에 정성을 다하는 풍습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의 사람들은 바로 이런 면에서 신앙의 바른 안목을 가지고, 먼저 우리에게 맏물을 추수하게 하신 창조주 하나님께 먼저 감사의 제사를 드리며, 나아가 한 해 동안의 삶을 주의 길로 인도하심을 기억하며 먼저 감사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지난 21년 동안 추수감사주일을 추석을 앞둔 주일에 지키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시기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중심인 줄로 믿습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여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분주하고 각박한 사회 속에서 살다 보면 감사의 언어나 감사의 고백을 잃어버리고 살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장로님 기도하신 것처럼 우리는 어느 덧 삶의 분주함에 쫓겨서 불평함 속에서 우리는 그 언어가 습관적으로 되어 버렸습니다. 감사라고 하는 것은 뒤돌아 볼 겨를도 없을 만큼 우리는 분주하게 살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감사의 절기를 통해서 우리의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하나님 앞에 지금까지의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컸는지, 지금까지 도우셨던 하나님의 손길이 얼마나 귀한 것이었는가를 확인하고, 찬양하기를 원합니다.

이런 말씀을 들으면 한 해 동안의 내 삶은 참으로 야곱의 고백한 것처럼 험한 세월뿐이었노라고, 혹은 어떤 분들은 한 해 동안의 길이 광야의 길처럼 어렵고 힘든 길이었노라고, 그래서 감사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 고백한 교독문의 말씀처럼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 감사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광야의 길을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감사에 대한 새로운 도전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작은 것보다 많을 것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내가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있는 나의 존재, 내가 하나님 앞에 오늘 예배 할 수 있는 나의 실존, 바로 그 자체가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가장 감사해야할 제목인 줄로 믿습니다.

광야의 길을 걸어가면서도 한 시간도 지금 광야의 길을 걸어갈 수 없는 그런 상황을 그들은 무려 40년 동안을 걸으면서도, 때로는 그들에게도 불평과 불만이 있었고, 그들을 인도하는 모세의 리더쉽에 대해서 불만족하고, 불평하는 이들이 있었으나, 결국 광야의 길을 마친 이후에 한 목소리로 고백하기를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하나님을 찬송하자. 지난 우리의 시간들이 광야의 길이었다 할 지라도 이제 분명 하나님께 감사로 영광을 돌려드리는 감사의 회복의 시간, 바로 추수 감사의 주일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사무엘상 15장의 말씀, 저는 ‘하나님께서 사울과 함께 하시는가?’라고 하는 질문을 제목으로 삼았습니다. 이 사울이라고 하는 중요한 인물을 여러분 자신으로 대입을 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가?’

여러분은 제가 사울이라는 말을 할 때마다 여러분 자신을 대입해서 말씀을 들으시기를 권면하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서 사울왕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아말렉을 진멸하라. 아말렉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홍해를 건너고, 광야를 건너면서도 불기둥으로 구름기둥으로 도우셨던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감격으로 광야의 길에서 만난 첫 번째 이스라엘의 대적이기도 합니다.

아말렉 군사들을 향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전쟁에 대한 준비가 아니라, 기도에 대한 준비였고, 하나님을 향한 부르짖음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모세는 기도했고, 아론과 훌은 그 피곤한 양 팔을 들어주었고, 바위로 그를 앉혀 주었습니다. 여호수아와 뽑혀진 용사들은 나아가서 싸웠습니다. 하지만 성경의 말씀의 분위기로 보면 여호수아와 군사들이 용맹했기 때문에 이긴 것이 아니라 모세의 기도가, 그리고 모세의 연약한 두 팔을 보조해 주었던 아론과 훌의 동역된 사역의 모습이 그들로 하여금 승리의 개가를 울려서 여호와 닛시, 여호와의 승리를 높이 찬송하게 된 계기가 된 줄로 믿습니다.

이제 그 아말렉을 다시 한 번 진멸하라고 하는 말씀을 명령으로 받았습니다. 사울왕이 백성을 소집하고, 계수해 보니까 보병이 20만이었습니다. 유대민족만 1만명이 모였습니다. 적지 않은 군사였습니다. 그리고 사울왕은 아말렉과의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전쟁이었기 때문에, 21만의 군사이기 때문에 승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스라엘 민족의 손에 붙혀주셨기에 이스라엘민족이 승리한 줄로 믿습니다.

지금 문제는 하나님께서 아말렉을 진멸하라라고 하는 명령을 내리시는 것은 이미 승리는 보장을 해 주셨고, 승리하는 방법만을 제시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도 남김없이 진멸해 버려라. 그들에게 각종 보화와 각종 좋은 것들, 유목민들에게 있어서 가장 탐나는 것은 소와 양떼였습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은 그와의 전쟁에서 이기면서 그 좋은 소와 양떼들을 좋은 것들만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가치 없고 낮은 것은 다 죽여 버리고, 진멸해 버렸다고 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 사무엘선지자가 사울왕을 만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만나기 전에 사무엘에게 말씀하십니다. ‘걱정스럽다.’ ‘왜 그렇습니까?’ ‘사울이 나의 명령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전쟁을 명하셨고, 전쟁의 승리를 보장하셨고, 이제 어떻게 승리하는가에 대한 방법을 알려주셨는데, 방법에 있어서 사울은 자의적으로 행동을 했습니다.

유목민들에게 소떼와 양떼는 정말 외면할 수 없는 유혹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진멸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다름 아니라 세상과의 영적 전쟁에서 유혹받지 말라고 하는 하나님의 강력한 요구의 말씀이었습니다. 유목민들에게 소떼와 양떼는 당연히 유혹받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알고 계셨고, 당부하셨습니다. 유혹받지 않도록, 진멸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울왕은 낮은 것들, 천한 것들은 진멸하고, 좋은 것들은 소떼와 양떼는 살려서 가지고 왔습니다. 사울왕을 만나려고 하는 사무엘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후회스럽다.’ ‘왜이십니까?’ ‘사울이 나의 말을 청종하지 아니하는구나.’ 하나님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왕이 되었기 때문에, 사울이 변했다는 것입니다.

사울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인데, 왕이라고 하는 위치에 올라선 후에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거나, 하나님의 주어진 명령들을 취사선택하려고 하는 어이없는 행동들을 취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후회하신다는 말씀을 듣고 사무엘선지자는 너무나도 마음이 슬펐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세울 때에는 너무나도 마음이 합한 사람이었는데, 왜 사울이 왕이 된 후에 저렇게 변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던 사울이 왜 이제는 후회하실만한 존재가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가난할 때는 참으로 신앙이 순수하였는데, 부자가 되고 나니까 신앙의 순수함이 사라져 버렸어요. 낮은 지위에 있을 때는 신앙이 순수했는데, 사회적인 지위가 높아지고 나니까 사람이 달라졌어요. 죄송한 표현이지만 무식할 때는 순수한 신앙이었는데, 좀 배우고 나니까, 대학교 나오고, 대학원 나오고 나니까 사람이 달라졌어요. 교만해지고, 뻣뻣해 졌어요. 집사일 때는 순종했는데, 권사가 되니까 조금 건방져지고, 장로가 되니까 아주 교만해 졌어요. 현실적으로 제가 없는 이야기 하는 거 아닙니다. 왜 사람이 달라지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17절 하나님께서 당신을 왕으로 세우신 것은 당신 스스로가 낮게 여길 때, 다시 말하면 당신이 왕으로 선택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당신의 외모가 준수하고, 키가 큰 이유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당신을 백성들 머리로 삼으셨는데, 이제 스스로 겸손하였던 당신이 이제는 하나님 앞에서 교만함으로 인해서 하나님께 당신을 버리는 동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겸손입니다. 교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시는 이유는 겸손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시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라 교만인 줄로 믿습니다. 경제적으로 실패했다고 우리를 버리십니까? 사회적으로 실패했다고 우리를 버리십니까? 대학원을 나오지 않았다고, 박사가 아니라고 여러분을 버리신 적이 있습니까? 문제는 그것이 아니라 우리가 교만하여졌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무엘이 밤새도록 눈물로 사울왕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역시 훌륭한 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왕을 이제 버리시겠다고 하는 말씀을 들은 사무엘선지자는 밤새도록 기도했습니다. 성경에는 기도의 내용은 나와있지 않지만, 밤새도록 중보기도 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어떤 기도를 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이 사울, 하나님의 마음에 합해서 겸손히 하나님 앞에 가장 중요한 왕의 선택의 동기가 되어서 선택이 되었던 사울, 그런데 왜 이렇게 사울이 변했습니까? 하나님 사울의 교만을 깨뜨려 주시고, 사울이 다시금 겸손의 자리로 돌아가게 하셔서 하나님 앞에, 백성들 앞에 인정받는 종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얼마나 기도했겠습니까?

밤새도록 기도한 사무엘 선지자가 아침 일찍 사울왕을 만나러 갔습니다. 아무래도 권면하러 갔을 거예요. 왕을 찾으러 가 보니까 왕은 자리에 없었습니다. 측근들이 말합니다. 왕께서 갈멜산으로 가셨습니다. 거기는 왜 가셨는데,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나서 승리의 승전비를 자기의 이름으로 갈멜산에 세우고, 그 공적비를 세운 것 제막식 하러 가셨습니다. 그 말을 들은 사무엘 제사장 기가 막혔습니다. 자기를 위하여 공적비를 세우려고 갈멜산으로 갔다는 거예요. 너무 많이 달라졌잖아요. 사울이 변해도 너무 많이 변했잖아요. 그러나 사울은 이미 자신의 모습은 볼 수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 자신이 여러분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까? 그래서 매일 매일 말씀을 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빛이니이다. 여러분, 여러분의 삶을 매일매일 비쳐주는 것이 말씀이라는 말이예요. 이 말은 사울이 하나님의 말씀안에서 신실하던 삶이, 왕이 되고 나서 어느 덧 바뻤겠지요. 분주했겠지요.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서 말씀으로 자기를 비추어 보던 삶에서 멀어져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셔도 그 중에서 구미에 맞는 것만 선택하는 사울이 되었습니다. 길갈에서 사울왕과 사무엘이 만났습니다. 사무엘이 묻습니다. 내 귀에 들리는 소리가 아무래도 이것이 소떼, 양떼 소리인데,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사울왕이 말합니다. 여호와께 제사 지내려고 남겨두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기를 망우리 공동묘지에 가면 죽은 사람들 다 이유가 있답니다. 다 억울한 이유가 있어요. 지금 하나님의 종 앞에서 사울왕이 변명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 제사 드리려고 남겨놓았습니다. 여러분, 성경을 고 부분만 딱 떼어서 우리가 만약에 액자에 표구를 했다면 얼마나 멋있고, 훌륭한 말씀이 되겠습니까? 하나님께 제사 드리려고, 좋은 것들을 남겨 놓았습니다. 만약 그 내용을 표구를 여러분 가정에 놓아 두었다면 그 문구만으로는 훌륭한 고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앞뒤의 문맥을 살펴야 합니다. 그 말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숨겨진 의도가 있습니다. 그 숨겨진 의도가 무엇입니까? 나를 위하여.... 그래서 그는 이미 전쟁이 끝나고, 전쟁의 분위기가 끝나기도 전에 갈멜산에 자신의 전쟁의 공적비를 세워놓고 돌아왔습니다.

왕의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겸손으로 출발한 그가 이제는 겸손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왕의 두 번째 문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명령을 청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했느냐고, 사무엘 선지자가 다시 한 번 반문하자 사울왕이 하는 말이 19절에 보면 왕의 소리, 백성의 소리, 다시 말하면 백성들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따랐습니다. 양떼와 소떼를 진멸하려고 하니까 주변의 백성들, 그 백성들은 바로 전쟁에 참여했던 백성들입니다.

측근들이겠지요. 그들이 말합니다. ‘이 멀쩡한 소 떼, 이 멀쩡한 양 떼는 왜 죽입니까?’ ‘하나님께서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서 이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하나도 남김없이 진멸하라고 하셨어.’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립니까?’ 이 소 떼와 양떼를 끌고 가면 우리 민족이 얼마나 유익할 텐데, 이 멀쩡한 것을 죽입니까? 왕이 고백합니다. 백성들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했나이다. 왕은 이제 하나님의 명령은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백성들의 말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바울이 고백합니다. 수없이 많은 핍박과 고난의 현장에서 이제 더 이상 네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증거하는 일을 중단하라. 그렇지 않으면 죽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네가 포기한다면 풀어주겠다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고백하지 않습니까? 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랴? 사람을 기쁘게 하랴?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려면 하나님의 종이 아니니라.

진정으로 사울이 하나님의 종이었다면, 진정으로 사울이 하나님이 세우신 일꾼이었다면,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해야 하는데, 그는 어느 덧 사람들을 두려워하고, 사람들의 말을 청종하기를 시작을 했어요.

사무엘선지자가 사울왕에게 권면합니다. 22절에서 23절 말씀입니다. 왕이여, 순종하는 것이 제사보다 낫습니다. 같이 하겠습니다. 순종하는 것이 제사보다 낫습니다. 청종하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습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사울왕에게 이 두가지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를 위해서 밤새도록 눈물로 기도했던 애정이 있고, 따뜻한 마음을 가졌던 사무엘입니다. 사울왕이 잘 못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사무엘입니다. 자기 손으로 기름을 부어서 왕으로 세웠던 사무엘입니다.

그가 눈물로 고백하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왕이여, 순종하는 것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는 것을 몰랐습니까? 왕이 하나님을 위해서 소떼와 양떼를 좋은 것을 가져왔다고 칩시다. 물론 그것은 거짓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이 전쟁에 임할 때 왕에게 주신 명령이 뭐였습니까? 하나도 남김없이 진멸하라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왕은 그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고, 왕이 스스로 판단해서, 정확하게 말하면 백성들의 요구에 굴복해서 소떼와 양떼를 가져오지 않았습니까?

불순종은 우상숭배의 죄와 같습니다. 완고함은 우상숭배의 죄와 같습니다. 사무엘선지자는 두 번이나 반복해서 강조를 하고 있습니다. 불순종하고 있는 것, 완고한 것, 그것은 우상숭배와 같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이 있는데, 그 중에 가장 싫어하는 것이 우상숭배인 줄 믿습니다.

그래서 열 가지 계명을 주시면서도 첫 번째, 두 번째 계명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거나, 하나님을 대신한 어떤 것을 형상을 만들어 절하거나 섬기는 것을 우리 하나님은 용납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상숭배를 가장 싫어하신 우상숭배의 이상의 잘못을 행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까?

이 말을 듣자 사울왕이 회개합니다. 24절에서 25절을 보면 사울왕이 회개하는데, 사실은 그 회개는 거짓된 회개였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이유는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하기 때문이라고 변명하면서 회개합니다. 회개는 변명하는 시간이 아니지요. 회개는 자기의 입장을 설명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30절에 가서 사울왕은 회개한다고 하면서 사무엘선지자에게 뭐라고 말합니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당신이 나와 함께 저 백성들과 백성의 장로들, 지도자들 앞에 가면 나의 체면을 한번 세워주세요. 자신의 왕으로써의 체면을 유지하기에 지금 그는 급급하고 있어요. 그를 위해서 밤새도록 눈물로 기도했던 사무엘, 그를 위해서 중보기도하면서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했던 사무엘이었지만, 이제 더 이상 사무엘은 도와줄 수가 없게 되었어요.

26절에서 35절까지는 사무엘선지자의 결단의 모습이 나옵니다. 26절입니다. 이제 나는 왕과 함께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이제는 왕과 함께 행동하지 않겠습니다. 여전히 왕은 사무엘선지자가 백성들 앞에서 자기가 여전히 왕임을 증명해 주기를 바라고 있지만, 사무엘선지자는 이제는 왕과 함께 있지 않겠습니다. 결별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23절과 26절에서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을 버렸듯이 하나님께서도 당신을 버려 이스라엘왕이 되지 못하게 하노라.

이 이야기를 듣고 나서 사울왕은 너무나도 놀랐습니다. 사무엘선지자의 옷을 붙잡고, 애원합니다.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얼마나 애원했는지 사울왕은 사무엘선지자의 옷을 붙잡고 애원하다가 사무엘선지자의 옷이 다 찢어졌다고 그랬습니다. 하지만 사무엘선지자도 이제는 마음을 정한 후입니다. 냉정하게 돌아서고 있습니다. 33절에 보면 모두를 진멸하라고 그랬는데, 아말렉의 왕 아각을 생포하여 오고, 소떼와 양떼를 끌고 왔는데, 길갈에서 사무엘선지자는 아말렉의 왕 아각을 죽이게 됩니다. 사울이 순종하지 않았던 그 부분들을 그는 대신해서 하나님의 명령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절에 보면 죽는 날까지 사울왕을 만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떠난 사울, 하나님의 종이 외면한 사울, 이제부터 사울은 외롭고도 불행한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축복이 무엇인가요? 적은 것보다 많은 것이 축복인가요? 좁은 것보다 넓은 것이 축복인가요? 저는 여러분들이 진정한 성도의 축복을 결론으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인생, 주의 종이 인정하는 성도, 진정한 축복의 사람인 줄 믿습니다.

여호와로 자기 기업을 삼은 백성은 복이 있도다. 여호와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때때로 그 분이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시더라도, 때때로 그 분이 사막의 길을 걷게 하시더라도, 때때로 그 분이 실패와 좌절의 길을 걷게 하시더라도 그 하나님으로 여러분의 기업을 삼고, 그 하나님을 바라보며 어떤 상황 속에서라도 백성들의 말을 청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살아계신 말씀을 청종하는 그 성도들의 삶이 진정한 복된 삶인 줄 믿고, 이번 명절을 맞이해서 사랑하는 평안의 모든 성도들이 진정한 하나님의 복과 은혜와 감사를 회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자비하신 하나님,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므로 우리가 물질적 감사만 회복할 것이 아니라 진정한 우리의 삶을 회복하는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회복하는 복된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겸손으로 우리를 불렀던 그 하나님께서 교만으로 우리를 버리심을 기억하게 하시고, 결단코 주님 앞에 교만한 모습으로 우리의 모든 삶을 자신의 생각과 방법대로 취사선택하는 아전인수격인 신앙의 삶을 아니하도록 주님 인도해 주시옵소서. 순종이 제사보다 나음을 기억하게 하시며 불순종이 우상숭배보다 더 큰 죄임을 깨닫게 하시며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주님이 복 주시는 성도의 삶이 무엇인가를 기억하며 회복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이번 추석명절을 통하여 이 평안의 모든 성도들 가정에 하나님 주시는 영적, 물적 역사들이 회복되게 하시고, 특별히 가정마다 평안과 기쁨이 회복되는 복된 명절 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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