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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위기 극복하기 (왕하 19: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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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한용근 목사

  얼마 전 일제 시대에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의 손자가 국가를 대상으로 자기 할아버지 소유의 땅을 돌려 달라고 배상청구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소식이 알려지자 이곳 저곳에서 날 리가 났습니다. 그 손자는 시끄러워지자 잠시 캐나다로 갔습니다. 그리고, 조용해진 틈을 타서 다시 재판을 걸어 소송에서 이겨 이완용 소유의 땅을 팔아먹고 캐나다로 갔다고 합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것입니까? 이런 일들을 보면 정말 하나님께서 왜 가만히 계신 것일까?라고 생각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얼마나 많은 질문들을 하나님께 던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죽음의 문제, 절망의 문제, 응답없는 기도의 문제, 가난의 문제, 질병의 문제와 미움의 문제, 폭력의 문제, 인생의 계획에도 없었던 뜻하지 않은 갑작스런 문제 등. 지금 여러분은 어떤 질문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유대 나라 히스기야 왕의 위기를 만나게 됩니다. 히스기야가 왕이 된지 14년이 되는 714년 사마리아를 점령하고 있었던 아시리아는 세력을 확장하여 드디어 유대 나라를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히스기야 왕의 나이는 39이었습니다. 히스기야가 맞서야할 아시리아는 이집트와 유럽과 인도까지 점령한 강대국이었고, 이 강대국을 겨우 강원도만한 작은 유대 나라가 나가 싸워 이길 수 있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본문이 기록될 때는 이미 모든 유대 나라의 성은 아시리아의 손에 넘어 가 있었고, 이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성은 유대 나라의 수도 예루살렘 성 외에는 없었습니다. 당시 아시리아의 원정대장은 랍사게라는 사람이었습니다. 랍사게는 굳게 닫힌 성을 수만의 군사로 둘러싸고 개미새끼 하나 출입하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그리고는 날마다 성을 무너뜨리겠다는 군사적인 시위와 위협 속에서, 어느날 교만과 거짓으로 가득한 항복을 요구하는 장문의 편지를 히스기야에게 보냈습니다.

  이 상황에서 히스기야기야 인간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방법은 오직 항복하고, 나라의 멸망을 바라보는 것 외에는 없었습니다. 그에는 군사도 없었습니다. 그들을 회유하고 돌이킬 은이나 금도 없었습니다. 그는 산을 무너뜨릴 것과 같은 힘을 자긴 거대한 아시리아의 힘 앞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인간 그 자체였습니다. 이렇게 무능한 한 인간인 히스기야가 어느 날 아침 성에 올라 성밖을 바라보는 순간 입을 다물지 못할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을 치기 위해 올라 왔던 아시리아의 군인들 18만 5천명이 성 밖의 이곳 저곳에서 모두 주검으로 쓰러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느 누가 이런 일이 일어 날 것이라고 상상이나 할 수 있었습니까? 어느 누가 18만 5천의 군사가 하루 아침에 시체로 변할 수 있다고 생각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 날 수 있었습니까? 어떻게 이 놀라운 기적의 역사가 일어 날 수 있었던 것입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인생의 위기 속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이 나타나기를 축원합니다.

  그가 어떻게 이 위기 속에서 엄청난 인생의 역전을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로 그는 무엇보다 인생의 위기 속에서 하나님을 결코 원망하지 않고 현실적인 자신의 운명을 감사로 받아 들였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위기나 고난 그리고 생각지 않은 일들에 부닥치면 평안할 동안에는 생각지도 않았던 많은 질문들을 하나님 앞으로 가져오곤 합니다. 그 질문들을 보면 "왜 하필 내가 이 짐을 져야 합니까?“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벌을 받아야 합니까?“ ”도대체 하나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뜻이 무엇입니까?“ 너무나도 많은 질문들을 소나기처럼 퍼부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질문과 원망을 쏟아 붙는다고 해서 지금 내 현실의 상황이 바뀌는 것일까요?

  히스기야의 현실은 19:3절에 아주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오늘은 곤란고 책벌과 능욕의 날이라 아이가 임산하였으나 해산할 힘이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어린 여자 아이가 아이를 가져서 10개월이 되어 아이를 낳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너무나도 어린 아이가 아기를 가졌기 때문에 소리를 지르고 고함을 치고 몸에 힘을 주어도 아이가 낳을 수 없는 고통에 고통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히스기야의 현재의 고통이었습니다. 그는 이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그대로 자신의 현실의 아픔과 고통과 능욕 받음을 인정했습니다.  그는 우리가 위기 속에서 또는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흔히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처럼 "왜 이런 환경과 상황을 주셨느냐? 왜 하필 많은 왕들 중에서 나에게 이런 위기를 주셨느냐?"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에서 승리한 하나님의 사람들의 공통점은 결코 자신의 처지와 환경을 하나님 앞에서 원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 앞에 있는 삶의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감사로 환경을 극복하여 나갔습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그는 얼마든지 원망할 수 있고, 하나님께 많은 질문을 던질 수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 앞에 놓여 있는 인생의 고난과 사망의 골짜기를 그대로 걸어가면서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오히려 형들이 자신을 이집트에 노예로 판 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노예의 삶을 인정했습니다. 그는 노예로서 열심히 일했고, 주인은 그의 열심을 인정해서 감독자로 삼을 정도였습니다. 그는 또한 옥에서 죄수로 몇 년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가 옥에 갇혔을 때 얼마든지 하나님을 향해 “내가 이렇게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뜻대로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않았는데....”라고 하면서 여러 가지로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요셉은 감옥에 있을 때에 더욱 충성을 다했고, 옥사장에게 인정을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의로운 욥 역시 “왜 내가 이런 운명에 놓여야 하느냐? 왜 하나님께서 내 자산을 모조리 가져 가셨느냐? 왜 내 몸은 이렇게 병이 들었느냐?” 라고 끊임없이 자신의 처지에 대해 원통해하면서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당하고 있는 고통을 “왜 하필이면 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여러분은 욥이나 요셉처럼 반대로 감사하고 그 운명 속에서 열심을 내어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들고 눈을 들어 그분께 영광 돌릴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하느냐하는 것은 여러분의 마음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운명은 예정되어 있는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이 주신 환경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느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집트에서 모세의 인도함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 살아서 가나안 땅에 들어간 사람은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는 없었습니다. 약 300만이 넘는 사람들이 이집트의 노예에서 해방되어 어떻게 단 두 사람만이 가나안 땅에 들어 갈 수 있었단 말입니까? 삶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원망할 것인가? 아니면, 기쁘고 즐겁게 감사함으로 삶을 즐겁게 살 것인가?는 여러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히스기야 왕은 자신 앞에 있는 인생을 그대로 긍정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가 자신의 삶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그가 발견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오늘 제가 두 번째로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그가 발견한 것은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는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항복을 권유하는 아시리아의 왕 산헤립의 편지를 들고 하나님의 성전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그 서신을 넓게 하나님 앞에 펼쳤습니다. 편지를 펼친 그는 무릎을 꿇고 눈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천하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이여, 내 기도에 귀를 기울여 주시옵소서. 눈을 떠서 하나님을 훼방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무시하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이름을 저주하고 있는 저 아시리아의 왕 산헤립이 보낸 이 편지를 보시옵소서. 저는 저들을 이길 힘이 없습니다. 이제 이 나라를 구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외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사 저 이방인들로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알게 하소서”

  히스기야는 위기 속에서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는 것을 철저하게 믿었습니다. 여러분, 진실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죽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는 살아 있는 하나님을 믿고 그분을 의지하는 사람들입니다. 예레미야 33:2-3절에는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죽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도 살아 계시고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 그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볼펜의 대명사로 알려진 모나미 153볼펜은 1963년 5월 1일에 탄생했습니다. 볼펜을 생산할 수 있는 공장도 기술도 없었던 상태에서 도산의 위기에서 송삼석 회장이 기도하면서 직접붙인 것이 모나미 153볼펜입니다. 송회장은 회사가 가장 어려웠을 때 기도원에 올라가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도하면서 생각해보니 그간 사업을 하면서 하나님 앞에 범죄한 것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는 첫째로 주일을 온전히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 회개했습니다. 둘째는 돈을 많이 벌고도 십일조를 하지 않은 것을 회개했습니다. 셋째는 새벽기도하지 않은 것을 회개했습니다. “내가 새벽마다 주님 앞에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했습니다. 이제 새벽기도를 하겠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설 것을 서원한 후에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있는데, 요한복음 21:1-14절의 말씀이 눈에 들어 왔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이 지시한곳에서 그물을 던졌더니 153마리의 고기를 잡았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모나미 153’이라는 볼펜을 만들겠습니다. 하나님, 이 볼펜이 모든 사람의 손, 아니 전 세계에 있는 모든 사람의 손에 다 들려지기 원합니다.” 기도하고 난 후 그는 목표를 크게 잡고 “50억 자루가 팔리게 해주세요!”라고 기도를 마쳤습니다. 망해가는 회가가 볼펜 50억 자루를 판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는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고 확신했습니다.

  우리도 살아 계신 그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히스기야는 16절에서 “여호와여 귀를 기울이소서. 여호와여 눈을 떠서 보시옵소서. 산헤립이 사신 하나님을 훼방하러 보낸 말을 들으시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히스기야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때문에 그는 항복을 강요하는 편지를 들고 성전으로 올라가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편지를 펼쳐 놓고 기도를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살아서 지켜보고 계십니다. 여러분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그분의 이름을 끝까지 의지하여 승리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번 그리스 아테네 올림픽에서 우리들에게 마지막으로 금메달을 안겨준 선수는 남자 80Kg급 이상에 출전한 문대성 선수입니다. 그는 결승에서 1라운드 2분 10초 만에 전광석화가 같은 왼발 뒤후리기로 그리스의 알렉산드로 니콜라이디스를 매트에 눕혀 KO 승을 거두었습니다. 그 후에 그는 태극기를 들고 매트에 오라와 태극기를 넓게 펼쳐 놓고 무릎을 꿇고 태극기에 엎드려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 장면은 TV를 통헤 세계에 보여졌습니다. 그가 우승할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결승에 올라 왔을 때 이미 그의 왼쪽 다리는 발목과 무릎을 크게 다친 상태여서 결승에 나간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습니다. 그는 3분 3회전을 모두 뛸 수 없는 상황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그는 경기에 앞서 라커룸에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번 결승에서 단 번에 상대를 쓰러뜨리게 해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 반드시 영광을 돌리겠습니다.” 그리고, 그의 기도는 응답되었습니다. 그의 왼발은 부상으로 고통 중에 있었지만 놀랍게도 상대는 부상으로 힘이 없는 왼발 뒤후리기라는 기술에 의해서 KO패를 당한 것입니다. 문대성 선수가 이런 기적을 체험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고백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로 결심했기 때문입니다.

  히스기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19절에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우리를 그 손에서 구원하옵소서 그리하시면 천하만국이 주 여호와는 홀로 하나님이신 줄 알리이다 하니라”는 말씀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민족의 위기를 단순히 구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민족이 구원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구원받는 기적을 통해 세상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은 진실로 살아 계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의 영광이 세상에 나타나기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이처럼 기도의 응답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할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다니엘의 기도와 한나의 기도, 솔로몬의 기도, 아브라함의 기도, 모세의 기도, 예수님께서 하신 기도들의 공통점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에 드러내기 위한 기도였습니다. 분명히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마6:33)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믿는다면 이제부터 우리의 기도는 달라져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자신의 욕심을 이루려는 기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이제부터 여러분의 기도는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기도를 통해 기적을 체험하고 기적을 일으키고,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드러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따라 합시다. "기도를 통해 기적을 체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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