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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진짜 같은 가짜는 안 됩니다. (마 7: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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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박재신 목사
 
  오늘은 우리교회가 설립 된지 18주년이 되는 주일입니다.
  1986년 10월 5일에 첫 예배를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오늘까지 열심히 한다고 했지만 그래서 주의 은혜로 이 만큼 성장했고 자타가 목회 성공했다고 하지만 이 시점에서 저는 한번 자신과 우리 교회의 모습을 돌아보고 싶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자신이 진짜인줄 알았던 사람들이 마지막 날 주님 앞에서 가짜로 판명 나는 모습을 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자신들이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고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권능을 행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훌륭한 사람들입니다.
  능력 있는 사람들입니다. 자타가 공인하는 선지자들이였습니다. 그들을 통해 귀신이 쫓겨 갔습니다. 그리고 많은 이적과 기적이 나타나기도 하였습니다. 이들은 오늘 이 시대의 잘 나가는 부흥 강사일 수도 있고 목회 성공했다고 하는 큰 교회 목회자일 수도 있습니다.
  당연히 그런 분이 강사로 서는 집회에 사람들이 안 모일리 없습니다. 그런 능력 있는 분이 목회하는 교회가 부흥이 안 될 리가 없습니다. 한 번 집회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렸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그들을 모른다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봅시다.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그날에 주님이 모른다 하시면 끝입니다.
  이 땅에서 아무리 잘나가던 사람이라도 그 날에 주님이 모른다 하시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2000년 11월에 복음 가수 이 정림 집사가 우리 교회에 와서 방송실 찬양단 헌신 예배 시간에 찬양 간증 집회를 인도했습니다. 그 때 잊을 수 없는 충격 같은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정림집사가 간증을 하면서 서로 옆 사람을 가리키면서 “당신 가짜 아니야” 라고 물어 보라고 한 것입니다. 
  그 때 갑자기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는 것 같이 느꼈던 기분이 그것입니다.
  마치 도둑질 도둑질하다가 들킨 사람처럼 가슴이 철렁하는 느낌, 나 혼자만 받은 느낌인지 모르지만 아무튼 제게는 어떤 충격과도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정말 “내가 가짜라면 어쩌나?”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진짜 목사라고 생각했는데 주님이 보실 때 너 가짜다 하시면 어쩌나하는 두려움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진짜 장로 진짜 권사, 진짜 집사라고 생각했는데 주님이 보실 때 “너 가짜다” 하시면 그것은 정말 큰일입니다.
  언제가 저의 내자(內子)가 제게 “당신은 하나님이 자신을 평가하는 소리를 들어보았느냐” 고 물었습니다. 그 말에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하나님이 불쌍히 보지 않겠느냐” 라는 말로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야 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귀신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하였어도 하나님이 은혜를 입지 못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진짜 같은 가짜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
  진짜 같은 가짜는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성경은 천국에 들어가는 자가 주여 주여 하는 사람 전부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마 7:21절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라고 했습니다.
  누구든 “주여! 주여!” 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기는 어렵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것은 천국에 들어가는 수는 얼마가 될지는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전부 다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 24:40-41절에 보면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라고 했습니다.
  행 2:21절에 보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하였는데 왜 본문에서는 주의 이름을 불러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못박았을까요?
  이것은 성경의 모순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
  분명히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다는 아닙니다. 주의 이름을 목 놓아 불러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① 주님을 부른다고 다 믿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분명 “주여 주여하는 자마다 ....” 라고 그랬지 “믿는 자마다.... ” 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부르는 것과 믿는 것은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가룟 유다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3년 이나 따라 다녔지만 예수님을 믿지 못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아무리 오래 동안 “주여! 주여!” 라고 부르며 예수님을 따라 다녔어도 그것은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신앙의 경력이 곧 믿음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아무리 오래 동안 교회를 들락 달락 했어도 전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을 아무리 많이 알아도 구원을 받지 못하고 선행을 아무리 많이 해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서기관과 바리새인 같은 사람들입니다. 왜냐면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열심히 주님을 불러도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름을 부르는 것과 믿음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은 무엇입니까?

  영적 싸움입니다.
  살아있다고 하는 것은 싸움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생명이 있는 한 싸움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몸에는 핏속에는 백혈구가 있습니다. 백혈구는 몸 안에 들어오는 나쁜 병원균과 싸우는 우리 몸의 군대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백혈구가 싸우지 않는 병을 혈액 암 또는 밸혈병이라고 합니다. 몸 안에 병균이 들어왔는데도 갑자기 백혈구가 이상한 맘을 먹고 싸우기 싫어하는 병입니다. 병이 들어왔는데 싸울 생각을 안하고  휴전을 하자고 합니다. 그래서 백혈병에 걸리면 죽습니다. 싸움을 멈추면 죽는 것입니다.
  싸움이 있다는 것은 곧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성도들 가운데는 예수 믿으면서 영적으로 싸우려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직 평안만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사탄이 사람을 유혹할 때 즐겨 사용하는 네 마디 말이 있습니다.
  첫째는 “이 정도면 괜찮겠지” 라는 말입니다.
  작은 실수 하나가 사람을 함정에 몰아넣습니다. 큰 물고기도 작은 미끼에 걸려 잡힙니다.
  두 번째는 “딱 한 번만..” 이라는 말입니다.
  사단은 항상 딱 한번이라는 말을 유혹의 미끼로 사용합니다. 딱 한번인데 뭘...이라고 속삭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딱 한 번 선악과를 따 먹었는데 엄청난 저주를 받았습니다.
  세 번째는 “너는 아직 젊어...” 라는 말입니다.
  사단은 더 깊이 영적 생활을 하려고 하는 성도들의 귀에 대고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아직 젊어 좀 나이가 먹으면 전적으로 주님을 위해 헌신하면 되잖아 ..... 사단의 이 말에 속아서 젊은 시절을 허송하고 후회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네 번째 말은 “누구나 다 이렇게 사는데 뭘 그래....”입니다.
  남들 다 편하게 사는 데 뭘 너 혼자 그렇게 특별하게 살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믿어도 적당하게 믿고 교회를 다녀도 적당하게 다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실하게 주님을 믿으려고 하는 사람의 수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평탄하게 신앙생활 하고 싶다. 편안하게 신앙생활하고 싶다” 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죽겠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살아 있다는 것은 끊임없는 싸움을 계속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I.M.F라는 소용돌이에 휘말려있을 때 온 국민이 그것을 헤쳐 나가기 위해 힘을 합했습니다. 그 중에 외국인들에게 인상 깊게 비쳐진 것이 금모으기 운동입니다. 외국의 언론들이 한국의 금모으기 운동을 보도하면서 한국인은 “위기가 닥쳐야 힘이 나오는 민족” 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좋게 들으면 칭찬한 말이지만 듣기에 따라서는 대단히 거북한 말입니다.
  조금 좋아지면 흥청망청 하다가 큰일 났다 싶으면 그때서야 정신 차린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영적으로 조금 여우가 있다고 해서 흥청망청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유가 있을수록 더 경성하고 고삐를 매고 악한 영들과 싸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은 언제나 영적으로 깨어있고 전투를 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날마다 거룩한 싸움을 싸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싸움을 포기하는 순간 그것은 휴전이 아니라 싸움에 패배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여! 주여! 한다고 다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 없이도 주님을 부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치열한 영적 전투가 바로 믿음입니다. 싸운다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는 증거입니다. 

  ② 자신의 필요에만 불렀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주의 이름을 부르고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주의 이름을 자신들의 필요에만 따라 불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부름은 아무리 간절하고 강렬해도 주님의 마음에 그렇게 감동적이지 못합니다.
  약 4:3절에서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주님을 불러도 정욕에 찬 부름은 주님이 응답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필요에는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는 반면 주님의 필요에는 냉담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주님을 단지 자신의 필요를 채우는 도구 정도로만 알면 절대로 주님을 불러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③  성령 없이 이름만 불렀기 때문입니다.
  마 25:11-12절은 또 한 부류의 진짜 같은 가짜들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었습니다. 밤중에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대한 비유의 말씀입니다.  다섯은 등과 기름을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다섯은 등불은 준비했지만 기름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밤이 깊도록 신랑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 새에 등불은 기름이 떨어져 갔습니다.
  기름이 떨어질 무렵 신랑이 온다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처녀들이 불을 밝힐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은 왔고 기름을 준비했던 처녀들은 집안으로 들어갔고 곧 문은 닫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라고 했지만 그들의 애원은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대답하여 가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마 25:11-12)
  대개의 주석가들은 열 처녀들이 들었던 등불은 외형적 신앙생활을 말하고 기름은 성령을 의미한다고 해석합니다.
  그렇습니다.
  외형적인 신앙생활이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이 성령의 기름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성령이 충만하지 않으면 온전한 신앙생활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④ 천국 문은 처음부터 좁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했습니다. 눅 13:23-24절을 읽어 봅시다.
  혹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 저희에게 이르시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 7:14절에서도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라고 했습니다.
  구원의 문은 좁다는 것입니다.
  좁지만 그길 그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야 구원받는 다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받는 구원” 기독교의 기본적 구원교리에 위배되는 것 같은 느낌은 줍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죄 사함을 얻고 구원받아 영생을 보장 받는다는 대속의 원리는 불변하는 성경의 진리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은 구원이 구원 받은 이후에 감당해야 할 성도의 의무나 책임으로부터도 자유를 주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자에게 주시는 죄 사함을 확신한 나머지 구원받은 자가 마땅히 해야 할 어떤 의무나 책임조차도 면제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성도가 좁은 문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구원받은 사람이 가져야 할 마땅한 도리와 책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책망의 소리를 귀담아 들어야합니다.
  “저가 너희에게 일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하리라”(눅13:27)
  행악하는 자들아.... 라고 했습니다.
  주여 주여 하면서 주님을 불렀지만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불렀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악을 행하며 살았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면 세상 살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넓은 문입니다.
  천국의 문은 좁은 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주님의 뜻을 따라 삽시다. 사람들이 우리를 몰라줘도 주님이 알아주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환영받고 주님께 배척받으시렵니까? 좁고 험해도 주님이 인정해 주시는 길을 가야합니다. 그 길은 쉽고 편한 길이 아닙니다. 진짜는 좁은 길 갑니다.
  진짜 같지만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가짜가 되지 맙시다.
  오히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주님과 함께 걷는 좁은 길을 걸어야 합니다.
  선교하고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쉬운일이라면 누군들 못하겠습니까? 18주년을 맞으면서 다시한번 우리 마음의 고삐를 조이는 기회가 되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경제가 어렵다고 말합니다. 직장인은 직장인대로 사업을 하는 사람은 그들 나름대로 먹고 살기 점점 더 어려워진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어떻습니까? 교회의 재정도 넉넉하지 못합니다. 우리교회의 재정이 항상 모자라는 것은 선교하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고통입니다.
  어떻게 하시렵니까?
  낙심하고 절망하고 선교비 줄이고 하나님께 드리는 것 부터 줄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가 감다해야하는것입니다.
  이런때일수록 "천성에 가는길 험하여도 생명길 되나니 은혜로다" 라는 찬송을 불러야 합니다. 좁고 험해도 진리의 길 주님가신길 가는 것이 진짜 믿음입니다.  천국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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