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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천사의 얼굴 (행 6: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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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박봉수 목사
 
사람의 얼굴에는 여러 가지 얼굴이 담겨져 있습니다.

첫째로, 육체적인 얼굴입니다. 이것을 용모(容貌)라고 합니다. 거울 앞에 서면 늘 자신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얼굴이지만 오래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화장을 하거나 악세사리로 포인트를 줘보기도 합니다. 그래도 아니면 성형수술을 하기도 합니다.

어떤 분들은 거울 앞에 서면 자신만만한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얼굴인데도 자꾸 보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소위 얼짱들이죠. 그런데 이런 분들은 늘 잘생겼다는 소리를 들어왔기 때문에 자기 잘난 맛에 삽니다. 그래서 공주병, 왕자병에 걸리기 쉽습니다. 어떤 분들은 하도 꼴불견이어서 사람들이 꼴값한다고 비난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우리가 용모를 잘 관리하는 일은 중요하겠습니다. 남들에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비쳐지는 일은 좋은 일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인위적으로 아름답게 꾸미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할 수는 없겠습니다.

둘째로, 정신적인 얼굴입니다. 이것을 표정(表情)이라고 합니다. 사람의 마음 상태가 얼굴에 나타나게 되는데 이것을 표정이라고 합니다.

많은 학자들은 표정과 감정의 관계를 연구해왔습니다. 대표적인 학자로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에크만(Ekman) 박사는 얼굴표정과 사람의 감정을 객관적으로 식별해 낼 수 있는 기준을 발표한 바가 있습니다. 이 분은 사람의 감정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저마다 같은 표정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행복한 감정은 몇 가지 특징이 있답니다. 우선 입 가장자리가 뒤로 당겨지고 위로 올라간답니다. 그리고 입이 자연스럽게 벌어지고 이가 보인답니다. 거기에다 뺨이 올라간답니다. 자세히 보면 아래 눈꺼풀 밑에 주름이 생기고, 눈초리의 주름이 눈의 바깥 가장자리로부터 바깥쪽을 행해 생긴답니다.

사실 용모보다는 표정이 더 중요합니다. 처음 만날 때 얼마간은 용모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지나면 표정에 더 관심을 기울입니다. 밝은 표정, 행복한 표정은 모두를 행복하게 해줍니다. 가정의 분위기는 가족들의 표정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교회의 분위기 역시 교인들의 표정만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표정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표정을 밝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표정을 관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셋째로, 영적 얼굴입니다. 우리 얼굴에는 용모와 표정 외에 또 다른 얼굴이 나타나있습니다. 영적 분위기입니다. 그 사람의 영적 상태를 알 수 있는 영적인 얼굴입니다.

창 4:5-6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가인이 얼굴빛이 변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얼굴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출 34:29-30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자기 손에 들과 시내 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씀하였음을 인하여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아론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를 볼 때에 모세의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남을 보고 그에게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하더니...”

이 두 가지 가인과 모세의 예를 보면 사람의 얼굴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용모가 달라진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표정이 달라진 것이 아닙니다. 가인의 경우 그 얼굴에 영적인 그늘이 드리워 진 것이고, 다른 하는 영적인 광채가 나타난 것입니다.

이런 변화는 하나님과의 관계 때문에 나타납니다. 가인이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져 가면서 그 얼굴에 영적인 어두운 그늘이 짙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벨을 죽이고 나자 영적 어둠이 그 얼굴을 뒤덮어버렸습니다. 모세는 40일 동안 오직 하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가 있었습니다. 그 얼굴에 누구라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의 영적 광채가 빛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렇게 얼굴에 영적 광채가 나는 상태를 천사의 얼굴과 같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니까 모세는 천사의 얼굴을 하고 나타난 것입니다. 반대로 가인은 마귀의 얼굴을 한 것입니다.

제가 목사 안수 받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일입니다. 교회 나온 지 얼마 안 된 분이 제게 와서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목사님! 목사님은 목사님 같지가 않아요? TV나 무대에 나오는 분 같아요?”
집에 와서 곰곰 생각해 봤습니다. 그분은 아마도 저 듣기 좋으라고 나름대로 칭찬이라고 한 것입니다. 다른 목사 보다 조금 잘 생겨서 그저 TV에 나오는 조연이나 엑스트라 정도 아니면 삼류 가수 정도로 생겼다고 나름대로 칭찬한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지금까지도 그 말이 마음에 걸려있습니다. 목사가 목사처럼 보여야지 삼류 가수처럼 보여서 되겠는가?
그런데 최근에 신나는 일이 생겼습니다. 머리를 깎으려고 목욕탕 안에 있는 이발소에 갔습니다. 처음 본 이발사입니다. 이분이 머리를 깎다 말고 제가 조용하게 속삭이는 것입니다. “목사님이시죠?” “아니 어떻게 아셨어요?” “저도 교회 다니거든요 감이라는 게 있죠!”
집에 와서 곰곰 생각해 봤습니다. 도대체 그분이 뭘 보고 내가 목사라는 것을 알아차렸을까? 내가 이발소에서 기도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들으라고 찬송을 부른 것도 아니고 그저 눈을 감고 가만히 앉아있었을 뿐인데...
어쨌든 기분이 무척 좋았습니다. 처음에는 목사 같지 않은 목사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목사 된지 15년이 지나니까 이제 목사처럼 보이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너무 부담스러워서 그 이발소는 다시 가지 않기로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얼굴이 변해야 합니다. 주님과 동행하면서 점점 천사의 얼굴처럼 변해 가야 합니다. 우리 얼굴 안에 드리워 있는 영적 그늘이 걷혀야 합니다. 우리의 얼굴이 영적으로 빛이 나야 합니다. 이것은 표정보다 중요합니다. 물론 용모보다도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얼굴,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얼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이런 얼굴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바로 스데반의 얼굴입니다. 15절을 보면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고 했습니다. 스데반을 죽이려고 모인 사람들 스데반이 어떻게 처벌 받는가를 보려고 모인 사람들 그들이 스데반의 얼굴을 보니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는 말입니다.

우리도 스데반의 얼굴을 조금 더 자세하게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도대체 천사의 얼굴 같은 스데반의 얼굴은 어떤 얼굴이었을까요? 그 얼굴은 사람들에게 어떤 얼굴로 비쳐졌을 까요?

1. 고난 중에 빛난 얼굴

행 6:8을 보면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라고 했습니다. 스데반은 교회 안에 구제 일을 보도록 집사로 세워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교회 밖 민간에서는 사도들처럼 복음을 전하며 큰 기사와 표적을 행했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거센 박해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스데반의 복음 전파에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논리적으로 반박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10절을 보니까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저희가 능히 당치 못하여...”라고 했습니다. 도저히 스데반을 논리적으로 반박해서 이길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공작을 꾸밉니다.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사람들을 사주했습니다.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우리가 들었노라” 둘째, 당시 유대인들과 지도자들을 격동시켰습니다.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그래서 스데반은 공회에 체포되어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셋째, 거짓 증인을 세웠습니다.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마지 아니 하는 도다.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 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너무 억울한 상황입니다. 게다가 스데반에게 감당키 어려운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잘못하다가는 돌에 맞아 죽을지 모르는 위급한 상황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스데반은 7장 마지막 부분을 보면 끔찍하게도 돌에 맞아 순교하고 맙니다.

지금 이런 상황입니다. 벌벌 떨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의 얼굴이 천사처럼 빛이 났다는 것입니다. 불안과 공포와 절망이 거세게 밀려드는 그런 순간입니다. 그러나 그런 순간에서도 그의 얼굴에는 평안이 넘쳤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빛이 났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인간적으로 정말 힘들고 어려운 순간에도 우리의 얼굴에는 여전히 평안을 잃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눈물의 골짜기를 지나는 동안에도 우리의 얼굴에는 기쁨의 흔적이 사라지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감당키 어려운 절망의 순간에도 영적인 어둠이 우리를 사로잡지 못하게 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얼굴에서 영적이 그늘을 몰아내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얼굴에 영적인 광채가 나타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성령으로 조명된 얼굴

스데반이 어떻게 이런 절망의 순간, 공포의 순간에도 천사와 같은 얼굴을 할 수 있었을까요? 누가는 7:55절에서 이렇게 답을 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스데반이 남다른 용기가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스데반이 원래 영적으로 남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도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요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두려워할 줄도 알았고 죽음 앞에 떨 줄도 알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성령이 충만하고 그가 온전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 절박한 순간에도 그의 얼굴에는 두려움과 절망의 그늘 대신 천사와 같은 평안과 기쁨의 광채가 났던 것입니다. 성령이 스데반의 얼굴을 밝게 비춰주신 것입니다.

어떤 분이 영상에 비친 제 얼굴이 실물보다 미남으로 나온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어떤 분은 제가 영상 미남이랍니다. 가까이서 실물을 보면 별거 아니랍니다. 기분은 좋지 않지만 사실입니다. 저 3층 위를 보시면 저를 비치기 위해 여러 개 조명이 설치되어있습니다. 제가 바라보면 눈이 부셔서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 빛이 저를 비춰주고 비춰진 모습을 영상이 담기 때문에 화면에 제 얼굴이 나옵니다. 조명을 끄면 너무 흐려서 얼굴을 분간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이 우리 심령을 조명해 주시면 우리 얼굴에 천사의 얼굴이 나타납니다. 우리 심령이 성령으로 충만하면 우리 얼굴이 변합니다. 천사처럼 변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 심령을 조명하지 않으시면 우리 얼굴에는 천사의 얼굴이 사라집니다. 사람이 얼굴이 되고 심하면 저 가인처럼 마귀의 얼굴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성령께서 우리 얼굴

3. 깊은 인상을 남긴 얼굴

행 7장 스데반의 순교 장면을 자세히 살펴보면 누가의 숨겨진 의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7:58절을 보면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쌔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지금 사람들이 공회에서 끌고 성밖으로 끌고 나갔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기 위해서 옷을 벗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벗은 옷을 사울의 발 앞에 두었다는 것입니다.

왜 갑자기 여기에서 사울이라는 사람의 이름이 나올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는 당시 산헤드린 공회의 회장이었던 대제사장 가야바의 이름이 나옵니다. 당시 행정수반이었던 총독 빌라도의 이름이 나옵니다. 십자가 처형을 결정한 책임자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런데 스데반의 순교에는 산헤드린 공회 책임자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물론 당시 총독의 이름도 나오지 않습니다. 뜻밖의 인물 사울의 이름이 나옵니다.

신약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대체로 이 문제에 대해서 두 가지 답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사울이 산헤드린 공회의 명령을 받아서 처형을 집행하는 책임을 맡은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답에는 한 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예수님 십자가 당시 처형 때도 책임자인 로마 군인은 단지 백부장이라는 직함만 나올 뿐 이름이 소개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도 사울이라는 이름이 구지 소개될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하나는 사울이 이 때 충격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의 얼굴에 서린 천사의 얼굴을 보고 심경에 큰 변화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순교하는 장면을 보고 이미 그 심령에 주의 일꾼일 될 변화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도 이 해석에 동의합니다. 사울이 변화되어 바울이 되기 전에 기독교인들을 수없이 박해했습니다. 그 중에 가장 인상에 남았던 장면이 바로 이 장면이었을 것입니다. 극심한 공포와 절망의 순간에도 천사의 얼굴을 할 수 있었다는 것, 죽어가면서도 저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할 수 있었다는 것...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이었을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는가?’ “도대체 이들은 어떻게 이토록 절망의 순간에도 이럴 수 있는가?”

그렇습니다. 우리는 말로만 전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 많은 경우 우리 얼굴로 전도합니다. 우리 얼굴에 드리워있는 천사의 얼굴 이것이 감동을 줍니다. 이것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2차 대전 시 다니엘 폴링이라는 젊은 군목이 전투에 참가하기 위해 군함을 타게 됐답니다. 떠나면서 아버지에게 이렇게 부탁했답니다. “제가 군함을 타고 전장에 나갑니다. 살아서 돌아오기 보다는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을 지킬 수 있게 기도해 주십시오”
그 군함은 유감스럽게도 전장터에 도착하기도 전에 적군의 어뢰에 맞아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승선인원 9백 4명 중에 6백 78명이 배와 함께 수장되고 말았습니다. 배가 침몰해 갈 때 이 폴링을 비롯해 군목들은 구명대를 다른 사람들에게 양보하고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찬양하며 바다 속으로 사라져갔답니다. 그 때 구명대를 양보 받고 살아난 군인들이 훗날 이렇게 말했답니다. 그들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 당시 살아남은 사람들은 이들을 대신해서 복음 전하는 일에 헌신하게 되었고 그들의 그 얼굴을 평생 기억하며 주를 위해 충성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얼굴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비쳐질까요? 스데반처럼, 폴링이라는 젊은 군목처럼 천사의 얼굴로 비쳐질 수 있을까요? 혹시 우리 얼굴 속에 마귀의 얼굴이 묻어나고 있지는 않을까요?

우리 얼굴에는 여러 가지 얼굴이 담겨져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용모 곧 육체적인 얼굴이 있습니다. 기왕이면 깔끔하고 아름다운 모습이면 좋겠죠? 이것보다 더 중요한 얼굴이 표정 곧 정신적인 얼굴입니다. 할 수 있으면 우리 표정이 밝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더욱 더 중요한 얼굴이 있습니다. 바로 영적 얼굴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갈수록 밝게 빛나고 멀어질수록 어두워지는 얼굴입니다. 때론 천사처럼 보이기도 하고 때론 마귀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의 얼굴이 천사와 같은 얼굴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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