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하나님은 사랑이시라(8) 지쳐서 죽게 된 자를 일어나 달리는 자로 (왕..

  • 잡초 잡초
  • 215
  • 0

첨부 1


- 설교 : 김명혁 목사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가나안의 개를 아브라함의 딸로 만들어주셨고 하나님의 사랑은 아람의 나환자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셨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지쳐서 쓸어져 죽게 된 한 사람을 일으켜서 달리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설교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가 지쳐서 쓸어져 죽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로뎀 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했습니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소서.” 그리고는 들어 누어서 잠을 잤습니다. 사명도 포기하고 삶도 포기하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들어 누어서 잠만 잤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두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일을 너무 열심히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갈멜 산에 올라가서 바알 선지자들 사백 오십 명과 싸우느라 몸과 마음과 혼을 모두 쏟아 부으면서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소서 내게 응답하소서” 이렇게 부르짖으며 기도했을 때 여호와의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모두 태우고 도랑의 물을 핥았다고 했습니다.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는 바알의 선지자들을 잡아서 기손 시내로 데리고 가서 거기서 모두 죽였다고 했습니다.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는 갈멜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비오기를 일곱 번이나 간절하게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얼마 후 하늘에 손바닥만한 작은 구름이 일어나고 바람이 불더니 갑자기 큰 비가 쏟아져 내렸다고 했습니다.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엘리야가 너무 신이 나서 허리를 동이고 아합 왕에게 까지 달려갔다고 했습니다.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일을 너무 열심히 했습니다. 그것이 결코 잘못은 아닙니다. 그러나 엘리야도 몸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몸이 피곤해서 지쳐서 쓸어지게 되었습니다.

  둘째는 이세벨의 반대와 공격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아합 왕의 아내 이세벨은 엘리야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엘리야를 싫어했습니다. 자기에게 무릎을 꿇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자기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이세벨은 엘리야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엘리야는 기가 막혔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자기와 함께 하심을 똑똑히 보고도 이세벨이 자기에게 대드는 것을 보고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기가 막히면 쓸어질 수 밖에 없지요. 기가 막히면 숨을 못 쉬게 되고 숨을 못 쉬면 쓸어지게 되지요.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가 몸이 지치고 기가 막혀서 그만 쓸어지고 말았습니다. 쓸어져서 죽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탈진 상태는 모든 사람에게 옵니다. 바로 다섯 주 전인 지난 8월 22일 주일 오후 제가 갑자기 몸과 마음이 피곤해지고 지쳐서 주저 앉은 일이 있었습니다. 저도 일을 좀 열심히 해서 몸이 지쳤고 그리고 마음이 불편해져서 주저 앉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모든 것이 귀찮게 느껴졌습니다. 바로 그날 아침 남포교회의 박영선 목사님도 지쳐서 쓸어졌다고 했습니다. 그날 1부 예배를 마치고 가슴이 꽉 막혀서 더 이상 서 있을 수가 없었다고 후에 저에게 조용히 이야기 했습니다. 그래서 부 목사님들에게 2부 3부 4부 예배를 맡기고 갑자기 시골로 떠나버렸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일이 한 두 번 있은 것이 아니라고 저에게 조용히 말했습니다. 몸이 너무 지치고 속이 너무 상해서 교회를 떠나려고 했던 일이 40 번이나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충격적인 말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탈진 현상은 목회자들에게만 오는 것은 아닙니다. 각박한 경쟁 사회에서 쉬지도 못하고 열심히 일하다 보면 몸이 지쳐서 탈진할 수도 있고, 동료나 주위 사람들로부터 무시와 비난을 받을 때는 마음이 상해서 탈진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약하기 때문에 각박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지쳐서 쓸어질 수가 있습니다. 선교사들에게도 농어촌 사역자들에게도 이와 같은 탈진 상태가 오고, 일반 평신도들에게도 이와 같은 탈진 상태가 올 수 있습니다. 모두 다 집어치우고 싶은 허탈감과 무력감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와 같은 탈진 상태에 빠질 때 하나님은 우리를 그대로 내버려두시지 않고 우리를 찾아오셔서 다시 일으켜 주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다시 힘있게 달려가게 만들어 주십니다. 지쳐서 쓸어진 엘리야에게 까마귀를 보내어 떡과 고기를 먹게도 하셨고, 하나님의 사자를 보내어 어루만져 주시기도 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 순교 기념관에 엘리야의 까마귀란 제목의 사진이 한 장 걸려 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과 가족이 신사참배 반대의 이유로 애양원에서 쫓겨나 있었을 때, 함께 애양원에서 쫓겨난 나환자 성도 대 여섯 명이 날마다 구걸을 해다가 손양원 목사님의 식구들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 드렸다고 합니다. 그 대 여섯 명 나환자 성도들의 사진이 걸려있습니다. 이것이 친밀하고 섬세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지쳐서 쓸어져 죽게 된 자에게 누군가를 보내어 용기를 주시고 일으켜 주시고 다시 달리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친밀하고 세밀한 사랑입니다. 이제 지쳐서 쓸어져 죽게 된 엘리야를 찾아오셔서 그를 일으켜 주신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찾아오셔서 그를 어루만져주셨습니다. 5절에는 “천사가” 어루만졌다고 했고 7절에서는 “여호와의 사자가” 다시 어루만졌다고 했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천사와 여호와의 사자는 같은 분인데 여호와의 사자는 구약시대에 나타나셨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그의 사자이시고 그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엘리야에게 보내어 그를 어루만져주셨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어루만져주셨다고 말해도 될 것입니다. 영어 성경은 touched 라고 했습니다. 손을 내밀어 접촉했다는 말입니다. 야단을 치시지도 않았고 설교를 하시지도 않았고 그저 손을 내밀어 접촉하시며 어루만져주셨습니다. 마치 동내 아이들에게 매를 맞고 집에 와서 울다가 지쳐서 쓸어져 잠을 자고 있는 어린 아이의 머리와 몸에 손을 얹고 쓰다듬으며 어루만지는 엄마와 같은 행동이었습니다.

  접촉하며 어루만지는 행동이 단순한 행동같이 보이지만 그것은 인간의 존재와 관련되는 매우 중요한 행동입니다. 인간은 근원적으로 접촉의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우주 만물이 모두 접촉의 존재입니다. 접촉이 없이는 인간도 우주도 존재할 수도 없고 생명을 유지할 수도 없습니다. 어린 아기는 엄마의 접촉과 어루만짐이 없이는 생명을 유지할 수도 없고 건강하게 자랄 수도 없습니다. 인간과 우주는 근원적으로 접촉의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손을 펴실 때 하늘도 해도 달도 별들도 그리고 사람도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주님의 손 가락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주의 손 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보오니”(시8:3). “하늘 영광 떠나서” 복음찬송은 주님의 손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하늘의 별 만드신 그 손 위에 못 박혔네.” 미켈란젤로는 “아담의 창조” 라는 유명한 그림을 그렸는데 그 그림에서 길게 내민 하나님의 손을 그렸습니다. 인간을 향해 길게 내민 창조주 하나님의 손이 아담의 손끝을 접촉하므로 아담이 사람이 되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 그림을 이렇게 해설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른 손을 길게 뻗어 최초의 인간인 아담의 손가락을 건드려 그의 육체 속에 영혼이 깃들 게 하려는 창조의 극적 순간이 그려져 있다. 두 손가락은 곧 맞닿을 태세다. 하나님이 손을 길게 뻗치자 아담의 손가락에 채 닿기도 전에 이 최초의 사람은 마치 깊은 잠에서 막 깨어난 듯 그의 창조주인 아버지 하나님의 자애로운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 그리고 이 해설가는 그 그림에 이런 제목을 달았습니다. “맞닿는 손가락, 영혼의 시작.”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손가락이 맞닿을 때 우리의 영혼은 시작되고 우리의 생명은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손은 창조의 손이요 구속의 손이기 때문에 그 손이 우리를 어루만지면 우리는 죽었다가도 살아나고 치쳐서 쓸어졌다가도 다시 일어납니다. 죄와 질병과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졌다가도 거기서 건짐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한 문둥병자에게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실 때 문둥병자는 병에서 고침을 받았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장모의 손을 만지실 때 베드로의 장모는 열병에서 고침을 받았습니다. 열 두 해 혈루증으로 앓던 한 여자가 자기의 손을 내밀어 예수님의 겉옷 가를 만졌을 때 그 여자는 병에서 고침을 받았습니다. 손가락의 접촉은 놀라운 일을 만들어냅니다. 하나님께서 손을 내밀어 우리를 어루만져주시면 놀라운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지쳐서 쓸어져 죽게 된 엘리야를 찾아와서 당신의 손을 길게 내밀어 그를 어루만져주셨을 때 그는 마치 깊은 잠에서 깨어난 듯 사랑의 손길을 느끼며 위로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일어나서 먹으라는 사랑과 위로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는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물과 떡을 먹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엘리야에게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일어나서 먹으라.” “일어나서 먹으라.”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주시고 만져주실 뿐 아니라 우리를 먹여주십니다. “일어나서 먹으라”는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 디베랴 바다가에 지쳐서 쓸어져 있던 일곱 제자들을 찾아와서 하신 말씀을 연상케 합니다. 그 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요21:12). 엘리야에게는 숯불에 구운 떡과 병에 담긴 물을 먹여주셨고, 일곱 제자들에게는 숯불에 구운 생선과 떡을 먹여주셨습니다. 저는 떡과 물과 생선은 모두 예수님의 살과 피와 생명을 상징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피와 물을 쏟으셨고 살을 찢기셨는데 그것은 모두 우리들을 살리시기 위해서 주신 생명의 양식이었습니다. 나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고 말씀하시면서 자기의 살과 피와 물을 모두 쏟아 우리를 먹여주셨습니다. 우리는 먹어야 살 수가 있습니다. 먹어야 힘을 얻고 먹어야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들을 먹여주십니다. 육신의 양식도 먹여주시고 영혼의 양식도 먹여주십니다. 보리떡과 생선을 만들어 육신의 양식을 먹여주셨고, 살과 피와 물을 주시면서 영혼의 양식을 먹여주셨습니다. 우리는 먹어야 삽니다. 먹어야 힘을 얻고 다시 일어나게 됩니다. 우선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양식을 받아 먹어야 하고 그리고 까마귀를 통해서 누군가를 통해서 보내주시는 육신의 양식도 받아 먹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쳐서 쓸어져 있는 엘리야를 살리시기 위해서 까마귀를 통해서 육신의 양식을 먹여주셨고 천사를 통해서 영혼의 양식을 먹여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사명은 생명보다 귀한 것입니다. 사명은 생명을 살게 만듭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일어나서 먹고 길을 가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일어나서 먹으라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 박윤선 목사님은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엘리야가 앞으로 걸어갈 여정이 먼 것을 그에게 알게 하는 것이다.” 다시 사명을 부여하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감옥에 갇혀 있던 사도 바울에게 그가 갈 길이 아직 남아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로마에까지 멀리 걸어가야 한다고 말씀했습니다.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행23:11). 그래서 사도 바울은 혼과 지쳐서 쓸어져 있다가도 다시 용기를 얻어 일어나 달려가곤 했습니다. 사명은 우리로 하여금 일어나서 달려가게 만듭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엘리야는 일어나서 달려갔습니다. 보통 달려 간 것이 아닙니다.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주 사십야를 행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모세를 이어 받아 하나님이 주시는 역사적이고 시대적인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모세의 산 하나님의 산 호렙으로 달려 갔습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사명을 주시는 한 우리는 다시 일어나고 다시 일어나서 달려갈 수가 있습니다. 깨진 질그릇과 같은 우리들에게 사명을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나타납니다. 그 사랑의 색깔은 가지각색입니다. 무지개 색보다도 찬란하게 아름답고, 단풍 색보다도 진하게 아름답고, 푸른 하늘의 흰구름 색보다도 신비하게 아름답습니다. 그 사랑의 색깔을 우리는 다 그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느 찬송가 작사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 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 어찌 다 쓸까 저 하늘 높이 쌓아도 채우지 못하리.” 우리를 찾아와서 어루만져주시는 사랑, 우리에게 떡과 물을 먹여주시는 사랑, 그리고 우리를 일으켜 달려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손과 몸과 마음을 열어 가득히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그 사랑을 만지고 받고 누리며 눈물로 감사의 제사를 드리며 행복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