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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적극적인 믿음으로 삽시다 (계 3: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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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황영복 목사

제임스 마펫이라고 하는 사람이「어제」라는 책에서 신앙생활을 두가지로 정의했습니다.  한가지는, 신앙생활이란 미래를 바라보는 생활이라고 하므로 구체적인 소망의 생활이라고 정의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과거로부터 현재를 생각하고, 현재로부터 미래를 예측한다는 일반 학문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의 생활이란 미래로 부터 현재를 사는 삶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서 최종적인 평가를 받을 종말을 생각하고 오늘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결코 과거에 쫓기며 사는 것도, 현재에 미쳐 돌아가는 삶도 아닙니다. 멀어지는 세상에 대해서 결코 아쉬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까워지는 소망의 세계를 바라보며 사는 삶이요, 가까워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사는 삶이 곧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그래서 비록 몸은 이 땅에 살고 있지만 우리의 의식과 마음만은 저 하늘나라에 두고 사는 삶인것니다. 참된 소망을 저 미래에 두는 삶인 것니다. 하늘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땅에서 사는 사람들이 곧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할 수 있니다. 그러므로 얼마든지 여유있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이고, 자유한 인생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 두번째는, 신앙생활이란 미치는 생활이라고 했습니다.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이 전부가 되어 사는 믿음의 삶이라고 저는 정의하고 싶습니다. 바울도 사도행전에 보면, 미쳤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예수님도 마가복음 3장에서 미쳤다는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여기서 미쳤다고 하는 말은 이성을 잃고, 정신을 잃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어떤 일에 열중하면서 그 외의 일은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한가지 일에 몰두하고 그것을 즐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사람이 볼 때에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심지어 안쓰러워 보이기까지 합니다마는 정작 본인은 행복합니다. 이런 상태가 제가 말하는 미쳤다는 의미입니다.

아주 유명한 선수로 알려진 헝가리의 축구선수 가운데 푸스카스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내가 공을 차고 있지 않을 때는 축구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는 때입니다. 내가 축구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지 않는 때는 축구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때입니다. 나는 축구외에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고, 생각한 일도 없습니다. 축구를 생각할 때가 가장 행복합니다.”이것을 가리켜서 미쳤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 모택동이 이런 말을 했다지 않습니까?“공산주의자는 꿈을 꾸어도 공산주의 꿈을 꾸어야 한다. 만약에 다른 꿈을 꾸었으면 사상비판을 받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이 말을 바꾸면, 그리스도인들은 꿈을 꾸어도 예수 꿈을 꾸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무슨 생각들을 하시고 잠자리에 들었기에 매일밤마다 꿈자리가 뒤숭숭한 꿈 이야기만 하시는 것입니까? 여러분들은 신앙생활하면서 예수님에게 또는 교회 일에 미쳤다는 말을 들어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 말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아직도 넌 크리스챤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느 한 순간만이라도 그리스도에게 미친 바 되고서야 비로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진정으로 살 수 있게 됩니다.

여러분, 크리스챤이라고 하는 말의 뜻이 무엇입니까?‘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 따르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즉, 쉬운말로 그리스도에게 미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사람이란 무엇엔가 미쳐 살아야 행복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아직도 덜 미쳤고, 미칠 만한 그 무엇을 찾지 못해서 불행을 느끼고 불안을 느끼고, 재미가 없는 것입니다. 나의 정열을 불사를만한 일과 대상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얼마나 정열적이고 적극적인 삶을 살아 오셨습니까? 얼마나 무엇엔가 끌리는 삶을 살아 오셨습니까? 누가 여러분을 포로했으면, 무엇에 포로된 삶을 살아 오셨습니까? 무엇에 미쳐 살아 오셨습니까? 사도 바울은 빌 3장에서 고백합니다.“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되었노라”고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포로가 되었노라고 말입니다. 여기에 바로 그의 행복함의 비결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라오디게아 교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책망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저들의 행위를 고발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저들의 소극적이고 미지근한 자세를 고발하고 있는 말씀입니다.15절에 보면,“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그랬습니다. 저들의 행위, 저들의 삶, 저들의 자세, 저들의 신앙생활이 어떠했더란 말입니까? 한마디로 미지근 했다는 것입니다.“네가 차지도 않고 더웁지도 않도다”그랬습니다. 이 차지도 않고 그렇다고 뜨겁지도 않은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검은 색도 아니고 그렇다고 흰색도 아닌 회색이었습니다. 적극적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소극적인 것도 아닌 여기에 문제가 있음을 예수님이 지적하신 것입니다.‘르베레 장군’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독인군들이 폴란드를 점령했을 때에 거기서 많은 사람들을 죽입니다. 그러나 폴란드는 독립을 하기 위해서 많은 저항군들이 생겨나 지하에서 활동들을 합니다. 한 번은 그 저항군들이 체포되어서 지금 사형장으로 끌려 가고 있습니다. 그때에 한 사람이 소리를 지릅니다. 자기는 억울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저항군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저 이쪽 저쪽 돌아다니면서 장사한 죄 밖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때에 옆에 있던 저항군 중에 한 사람이 한마디 했습니다. 새겨 들을만한 말이라 생각되어 소개해 봅니다.‘이 나라가 나라를 빼앗기고 5년 동안 나라를 찾기 위해 이렇게 저항을 하면서 수백만이 죽어갔는데, 당신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니? 그러므로 당신은 죽어 마땅하오’아무일도 하지 않았으니까 죽어야지? 안그렇습니까? 남들은 피를 흘리며 쓰러질 때에 당신은 어디에 있었으며, 무엇을 했느냐는 것이지요.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 변명의 이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이것처럼 비겁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 눅 10장을 보십시오. 강도 만나 쓰러진 그 옆을 제사장이 지나갔고, 레위인이 못본채 하고 지나갔습니다. 훗날 이들은 예수님께 강변할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일도 아니했노라고, 우리는 강도가 아니라고, 우리는 종교적인 행사를 위해서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었노라고, 그렇다고 저들의 행위가 옳은 것입니까? 정당화 될 수 있는 것입니까? 아무일도 하지 않은 그것이 그 순간에는 죄가 됨을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의 사람의 비유를 통해서 지적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로마서 14장 23절에 “믿음으로 좆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고 분명히 선언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 주님이 말씀합니다. 19절에서“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고, 적극적인 믿음의 사람이 되라고 권고합니다. 15절에서도“나는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고 권고합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소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향해서 대단히 거창한 것을 기대하는 것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우리들의 신앙생활이 좀 더 열심을 가지고 뜨거워지기를 원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들의 신앙자세가 좀더 적극적이기를 원하고 있을 뿐입니다. 만약에 이것도 저것도 아닌, 미지근한 상태에 계속 머무를려고 하면,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빼앗는다”고, 하나님은 적극적인 사람들을 좋아하십니다. 뜨거운 삶 열심있는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사랑하십니다. 열심있는 사람들을 통해서 자신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반대로 마귀가 좋아하는 사람은 항상 미지근한 사람들입니다. 자!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들의 신앙 생활, 믿음에 어디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까? 이렇게 비겁하게 신앙생활하게 된 원인이 어디에 있다는 것입니까? 라오데ㅣ게아 교회 성도 처럼 미지근하게 된 근본적인 문제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1. 나는 부자라는 교만한 생각 때문에 책망을 받았습니다.

17절에 보면,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자신들의 삶을 진단합니다. 여기서부터 빗나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자와 가난한 자, 어느 쪽이 정의감이 강할 것 같습니까? 가난한 사람들이 무게가 더 있습입니다. 배고픈 사람의 코가 예민하듯이 부자들에게서 정의감을 찾아 보기란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저들의 생각 자체가 느긋합니다.‘세상은 다 그렇고 그런 것 아니냐?’는 생각이 통상적입니다. 그래서 불의와 적당하게 타협하곤 합니다. 뇌물도 껌값이라는 명목으로 꿀꺽 삼키기도 하고, 물론 삼키다가 목에 걸리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부담없이 주고 받습니다. 오늘날도 진정한 개혁의 걸림돌은 기득권을 가진 세력들이 대부분 입니다. 저들은 개혁을 원치 않습니다. 세상이 뒤 바뀌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저 이대로를 좋다고 평가하곤 합니다. 이 꿈속에서 영원히 깨이지 않게 하소서를 바랄 뿐입니다.

교회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 전에 한국교회성장연구원에서 전국에 있는 목회자 4백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목회의 고충을 묻는 질문에 1위가 무엇으로 나타났는지 아십니까?‘중직자들이 개혁을 원치 않는다’48%였습니다. 변화를 원치 않습니다. 이것은 국가적으로도 교회적으로도 공통된 현상입니다. 개인적으로 마찬가지입니다. 배부르고 등 따스하다 보니, 옛날 가난했을 때 모양, 새벽이고 저녁이고 성전에 나가서 하나님께 전적으로 매달리며, 부르짖을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뭔가 좀 부족하다고 느끼고, 아쉽다는 생각이 들어야 열심도 내고 부르짖어 기도 할텐데 말입니다. 아쉬운 것이 없다 보니 굳이 부지런을 떨어야 할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것입니다. 전에 같았으면, 성수주일은 절대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상대적인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쉽게 말하면 일이 있으면 얼마든지 빠질 수 있다는 생각으로 빠뀌었습니다. 차선이 얼마든지 최선이 될 수 있다는 무서운 생각으로 바뀐 것입니다. 전에 같았으면 수요일도 빠지면 안된다는 생각이었습니다만 무슨 소리요. 어느 사이에 이같은 생각은 벌써 골동품이 되어 버렸고, 느긋해 지고 말았습니다. 이제 수요일 정도는 지켜도 그만 안지켜도 그만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히려 새벽기도와 수요일은 누가 만들어 놓았느냐는 불평입니다. 심지어 성경은 조금 보아 가지고, 수요일은 성경에도 없다나요? 제딴에는 또 성경적으로 믿는다고 교만을 떨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갓잖은 생각이요, 가소로운 생각입니까? 그러다 보니 도대체가 신앙생활에 열정이 없습니다. 적극성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경고합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 가는 것보다도 더 어렵다고 말입니다. 오히려 역설적으로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음을 강조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사람이 정녕 복이 있음도 강조하고 있습니다.

2. 부담없이 신앙생활 하겠다는 태도 때문에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18절에 보면,‘사라’는 말이 세번 강조되고 있습니다. 투자하라는 것입니다.  값을 지불하라는 것입니다.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흰옷을 사서 벌거벗은 수치를 가리우라는 것입니다.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는 것입니다. 금보다 귀한 믿음에도, 성결한 삶을 사는데도, 영적인 세계를 바라봄에도 그만한 댓가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거져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연단의 과정을 통하여 값진 믿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치형성이라고 하는 것은 투자한 만큼만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아시지요? 돈의 가치라고 하는 것도 내가 피땀 흘려 번 돈이라야만 가능합니다. 거져 얻은 돈이니까 껌값 어쩌고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땀 흘리지 않고 얻으려는 불한당의 마음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지지 않고 부활의 영광만을 얻겠다는 미신적인 생각이 문제입니다. 그래 예수님은 이 문제와 관련하여 눅14:26,7절에 보면,“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저 편하게만, 그저 부담없이 신앙생활하겠다는 여기에 나약함의 원인이 있고,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오늘날 안타깝게도 개척교회들이 문을 닫고, 미자립교회들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것 아십니까? 사람들이 그런 교회 가기를 꺼려하고 있습니다. 왜요? 우선 부담스러우니까 말입니다. 그래 사회현상이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습니다. 빈익빈 부익부현상 말입니다. 대형교회는 점점 부흥하고, 소형교회는 점점 줄어드는가 하면, 아예 문을 닫고 있습니다. 한 때는, 서울 경기지방에만 한달에 200교회가 문을 닫는 것으로 집계되기도 했습니다. 반대로 대형교회는 수평 이동으로 메어 터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현대인들이 대형교회를 선호하는 이유에 대해서 설문조사한 것이 발표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우선 대형교회는 자기 은신처가 될 수 있어서 찾아 간다는 것입니다. 헌금 많이 하지 않아도 되고, 강요하지 않아서 좋고, 몸으로 봉사하지 않아도 누가 뭐라는 사람이 없어서 좋고, 이것 하라 저것 하라 사사건건 간섭받지 않아서 좋다는 것입니다. 일종의 자기책임을 회피하기에는, 익명의 그리스도인으로 남기에는 대형교회보다 좋은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누가 왔는지, 누가 갔는지조차 모릅니다. 여러분! 이것이 과연 좋은 신앙, 참된 신앙 생활이라고 주님께서 인정해 줄 것입니까? 그러다 보니 나약한 신앙인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비겁한 신앙인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적당주의 신앙인, 매사에 소극적인 교인이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섬기는 일과는 겉도는 싸이드 맨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물론 자신을 위한 구원에는 도움이 될련지 모르나 하늘 나라를 이 땅위에 건설함에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오능 본문에 성경은 경고하고 있습니다. 불로 연단한 금을 사라는 것입니다. 시련과 고난을 두려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가치있는 일을 위해서라면 그만한 댓가를 지불 할 각오를 하면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사명감으로 섬기며, 봉사의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주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손해까지 감수하겠다는 마음, 여기에 신앙 성장의 축복이 있습니다. 부담감을 버리는 것은 충성된 사명자의 삶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야고보서 2장 26절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무것도 행하지 않으면서 스스로 믿음이 있다고 착각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형식적이고 의식적인 믿음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생동감이 넘치고 그리스도의 짐을 내가 나뉘지는 사명자로 앞장서는 살아있는 믿음을 소유하시기를 소원합니다.

3. 마음의 문을 열지 않기 때문에 책망을 받았습니다.

본문 20절에 보면,“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마음의 문을 열기만 하면, 주님이 내 안에서 역사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로 하여금 능력의 사람이 되게 하고, 지혜의 사람이 되게 하고, 나로 적극적인 사람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마음의 빗장을 지르고 살아왔는데, 이제는 그 빗장을 과감하고 풀어 제치라는 것입니다. 내 힘만 가지고 할려고 하니까 작심삼일 아닙니까? 그러나 주님으로 내 안에서 일하시게 하고, 역사하시도록 영접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진정 풍성한 삶을 사는 비결이 있는 것입니다.

베스트셀러 1위를 한국에서 차지한 책이 있습니다. 일전에 소개드린 바 있는 오토 다케군이 쓴「오체불만족」이라는 책입니다. 우선 그 책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표지에서부터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책입니다. 팔다리도 없는 청년이 있다고 해봐야 오센티도 안되니 차라리 없다는 표현이 나을 것입니다. 그런 그가 전동휠체어에 타서 활짝 웃고 있는 그 모습을 보면 어두운 그림자라고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명량한 모습입니다. 행복한 모습입니다. 그 비결에 대해서 그는 다음과 같이 간증합니다. 마음을 열고 살기 때문에 가능했노라고 말합니다. 마음을 열고 보니 장애인이기 때문에 오히려 친구가 더 많았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면서 마음을 닫고 사니까 문제지, 마음을 열고 보니 모두가 친구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늘 사지가 멀쩡하고 건강한 우리들을 향해서 한마디 합니다. 그 옹졸한 마음좀 열고 살라고 말입니다. 마음의 장벽부터 무너뜨리라고 말입니다. 언제까지 좁쌀 영감모양 닫혀진 마음을 가지고 살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마음만 열어도 세상이 달라 보이고, 사람들이 달라 보이는데 말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혹시 홀만 헌트(Holman Hunt)라는 사람이 그린‘세상의 빛(The light of the world)’이란 성화를 보신 분이 있습니까? 머리에 가시관을 쓰신 예수님이 왼손에는 등불을 들고, 못박힌 자국이 난 오른 손으로는 굳게 닫힌 문을 노크하고 계시는 모습말입니다. 그 그림에서 놓쳐서는 안될 중요한 포인트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여러분, 밀레가 그린 만종이란 그림을 제대로 감상하는 방법은 부부가 서있는 뒷편, 저 멀리 교회당에서 들려오는 종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 홀만 헌트가 그린 그림에는 한 사람이 등불을 들고 굳게 닫혀있어 보이는 문 밖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노크하시는 예수님의 그림을 제대로 감상하실려면, 문을 자세히 보아야 합니다. 그 문에는 문밖에 손잡이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 문은 꼭 안에서만 열게끔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강제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강제로 열고 들어 가시는 분이 아닙니다. 누군가 안에서 열어 주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이 들어가셔서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예수님과 더불어 먹고 마실 수 있습니다.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요, 나의 삶을 책임지시고 이끌고 나가시는 것은 주님의 하실 일입니다. 마음의 문을 열어 주지 않으면 은혜도 믿음도 축복도 들어 갈 수가 없습니다. 태평양 바다에 병한개가 있다고 가정합시다. 이 빈병에 마개가 닫혀 있으면 물이 한 방울도 들어갈 수가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인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마음의 문을 여는데 필요한 것은 결단이 요구되는 것은 회개와 결단입니다. 나의 교만과 아집 때문에 예수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받아들이 못하고 삽니다. 나 자신을 버리고, 죄악되 삶을 버리는 결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영접하고 그의 주권에 순종할 때 하나님 자녀가 되는 권세를 가지고 세상을 이기는 믿음, 승리의 삶을 살수 있게 됩니다. 진정한 믿음은 겸손한 마음과 온유한 마음으로 진리를 향하여 그리스도를 향하여 마음의 문을 여는 것입니다.

현대인의 결정적인 약점은 불신입니다. 남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오직 자신만을 믿고, 자신의 주장과 의지대로 삽니다. 그래서 시끄럽고 불화가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래서 진정으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이제 마음의 문을 열고 조용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함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우리가 뜨거워 질 수 있는 비결은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내 중심에 영접하는 여기에 있습니다. 여기에 적극적이고 창조적이고 퐁성한 삶을 사는 비결이 있습니다. 이제 바라기는 지금까지의 미지근한 나의 신앙생활을 여기서 청산하고, 예수님을 나의 삶의 중심에 영접하여 주인이 되게 하시기를 부탁합니다.

믿음의 적극적인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위해 영적 교만을 버리고, 부담없이 신앙 생활 하겠다는 안일한 자세를 버리고, 불신하고 죄악된 삶을 청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엠마오로 내려간 제자들의 마음이 뜨거워 졌던 것처럼 열심을 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이시간에 우리의 마음의 문을 노크하시는 주님!
이시간 우리들의 마음의 문을 활짝 여옵니다. 내 마음 중심에 좌정하시사 다스려 주옵소서. 이제부터는 교만하지 아니하고,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주와 더불어 동행하는 가운데 좀더 풍성한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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