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바울, 이기풍, 김인호 (행 9:13-22)

  • 잡초 잡초
  • 467
  • 0

첨부 1


- 설교 : 장빈 목사

# 1
1868년 11월 21일, 평양성에 한 아이가 태어납니다. 이 아이는 어려서부터 <신동>이라 불릴 만큼 슬기롭고 총명한 아이였습니다. 여섯 살에 벌써 사서오경을 다 외웠고, 열두 살 때는 백일장에 나가 장원을 하기도 했으며, 묵화에도 탁월한 재능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홍경래의 난 때 역적으로 몰렸던 증조부의 일로, 이 아이는 관직에 나갈 수도 없었고, 어떤 곳에서도 자신의 재능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저 가난한 농민으로 전락한 아버지의 가난을 고스란히 대물림할 수밖에 없는 상황, 결국 이 아이는 극심한 절망 속에서 술과 싸움질로 낙을 삼기 시작하더니, 어느 덧 평양성 최고의 박치기와 돌팔매질 명수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렇게 그는 깡패의 두목이 되어 갔습니다.

이 아이는, 누군가 거드름을 피우며 자기 앞을 지나가는 꼴을 보지 못했습니다. 하루는 평양 좌수의 행렬과 마추졌는데, 말을 타고 거만하게 지나가는 좌수의 모습이 이 아이의 속을 뒤집어 놓았습니다. 순간, 좌수에게 달려든 이 아이, 어느 안전이라고 평양 좌수를 끌어내려 말 아래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말았습니다. 그 일로 이 아이는 꼬박 3개월 동안 목에 칼을 차고 옥살이를 했지요.

당시 평양 거리엔 서양에서 온 선교사들이 있었습니다. 1885년 4월 5일,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이 땅에 첫 발을 디딘 후, 많은 선교사들이 뒤를 이어 한국에 왔던 것입니다.  이 아이는 서양 선교사들도 무척 미워했습니다. 저 서양 귀신들이 우리나라를 삼키려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 이 아이의 앞을 서양 선교사 한 사람이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체구도 좋은데다가, 가슴을 내밀고 도도하게 걸어가는 모습이, 이 아이의 속을 또 뒤집어 놓았습니다. <저 양코배기를 혼내줘야겠다!>고 생각한 이 아이, 휘하의 깡패 친구들을 모아, 그 선교사의 집으로 몰려가, 돌팔매질을 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깡패들은 돌을 던지며 싸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인 일인지, 집안의 모든 것들이 부서지는 소리는 들리는데, 인기척은 없었습니다.

그로부터 한 달 후, 장터를 지나던 이 아이, 일전의 그 양코배기가 서툰 조선말로 무언가를 팔고 있는 듯한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공연히 화간 난 이 아이, 다시 돌을 주어 그에게 다가갑니다. 깡패 두목의 눈에 서린 살기를 알아차린 조선 사람들은 슬금슬금 다 피했지만, 서양 선교사는 영문도 모른 채 그냥 서 있었습니다. 다음 순간, 이 아이 손의 돌이 양코배기를 향해 날았고, 그 돌은 선교사의 턱에 정확하게 명중되었습니다. 이내 턱이 부서져 피를 흘리며 쓰러진 양코배기, 그를 내려다보며, 이 아이는 의기양양 뒷짐을 지고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래도 그 양코배기 선교사가 떠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깡패 아이가 괴롭히면 괴롭힐수록 그는 더욱 열심히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러더니 이듬해엔 교회당을 세운다는 겁니다. 저 유명한 <장대현 교회>인데요, 양코배기 선교사가 평양에 교회당을 세운다는 소식을 들은 이 아이, 결국 대형 사고를 치고 맙니다. 한참 교회당 건축이 진행되던 어느 날, 깡패들을 동원해서 신축중인 교회당 건축현장을 완전히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당시 교인들은 너무나 화가 나서 저들과 맞서 싸우자고 했지만, 서양 선교사는 그런 교인들을 극구 말리면서, 오히려 깡패들에게 잘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이 망나니 깡패 두목의 이름이 바로 이기풍이요, 그의 돌에 맞아 턱에 큰 상처를 입었던 분이 바로 마포 삼열(S. A. Moffet) 선교사입니다. 이런 악연으로, 깡패 이기풍과 마포 삼열 선교사의 소문은 삽시간에 평양 전체로 퍼져 나갔습니다.

# 2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한 후, 온 나라가 기근에 허덕이게 됩니다. 평양성도 예외는 아니어서, 끼니조차 오간 데가 없는 날이 많았습니다. 이런 와중에 기풍이는 평양을 떠나 원주로 갑니다. 그러나 원주에서도 별 뾰쪽한 묘수를 찾지 못한 기풍이, 그림 솜씨를 팔기로 합니다. 담뱃대에 그림을 그려 팔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날도 담뱃대를 한 아름안고 장터로 나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기풍의 눈에 서양 선교사 한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원주에서 복음을 전하던 스왈른(Swallen) 선교사였습니다. 그런데 어인 일인지 그를 본 순간, 기풍의 정신이 아찔해지면서, 그 후로 기풍의 마음에 요동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왜 죄 없는 사람을 그리도 핍박했던가? 어찌 사람이 사람을 그리도 잔인하게 돌로 쳤던가? 그 사람은 그렇게 얻어맞으면서도 왜 한번도 나에게 반항하지 않았을까?>

그러던 어느 날, 그 날도 피를 흘리며 쓰러지던 양코배기 선교사를 생각하다 잠이 들었는데, 갑자기 온 방안이 환해지더니, 예수님이 나타나시어 그에게 한 말씀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기풍아! 기풍아! 왜 나를 핍박하느냐? 너는 나의 증인이 될 사람이다!>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난 이기풍, 그 자리에 엎드려 울기 시작합니다. <기도>란 단어조차 생소한 그였지만, 하염없이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울어도 자기 죄를 씻을 길이 없어 보였습니다. 해서 수소문 끝에 일전에 장터에서 만났던 스왈렌 선교사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선교사 앞에 무릎을 꿇고, 그간의 자초지종을 고백하며, 용서를 구합니다. 그렇게 그는 예수님을 영접했고,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의 나이 스물여섯이었습니다.

스왈렌 선교사와 함께 평양으로 돌아온 이기풍, 즉시 마포삼열 선교사를 찾아가 용서를 구합니다. 그를 본, 마포 삼열 선교사, 돌아온 탕자를 맞이하는 아버지처럼, 이기풍을 안고 감격과 감사의 눈물을 흘립니다. 그 후로 이기풍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하루 종일 평양 시내를 누비며 예수를 전하는 전도자가 된 것입니다. 깡패요 난봉꾼인 이기풍이 예수를 전하는 전도자가 되었다는 소문은 온 평양성을 발칵 뒤집었습니다. 어떤 친구들은 <저가 서양 귀신에 홀렸다!>고 조롱하기도 했습니다. <평양성의 오야봉 이기풍이 예수의 꼬붕이 되어 나나탔다!>고 비웃기도 했습니다. 이젠 이기풍의 시대는 갔다고 멸시하며 오히려 그를 박대하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굴하지 않고, 마포 삼열 선교사와 함께, 저기 함경도까지 돌면서 성경을 보급하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렇게 이기풍은 깡패에서 권서인으로 거듭 태어났던 것입니다.

하지만 복음을 전하면 전할수록 자기 자신이 너무 무식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해서 마침내 1903년, 그는 평양 신학교에 입학하여 본격적으로 신학 수업을 받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1907년, 마침내 이기풍은 한국 최초의 일곱 목사님 중 한 분으로 정식 안수를 받게 됩니다. 그가 난장을 쳐서 한 때 건축이 중단되었었던 장대현 교회에서 말입니다. 그렇게 권서인에서 목사가 되었습니다.

# 3
<길선주, 방기창, 서경조, 송린서, 양전백, 이기풍, 한석진> 1907년 9월 17일, 한국 교회사 최초로 안수를 받은 일곱 목사님의 명단입니다. 이들이 목사 안수를 받음으로써 우리나라에도 최초의 노회가 설립됩니다. 그렇게 회집된 최초의 노회에서, 길선주 목사님이 사회를 보는 가운데, 저들은 역사적인 결정을 합니다. 교회가 서고, 목사가 탄생하자마자, 해외 선교사를 파송키로 한 것입니다. 선교대상지는 당시 탐라국이라 불리던 가장 가까운 나라, 오늘의 제주도요, 파송할 선교사는 바로 이기풍 목사였습니다.

이듬 해 1908년, 이기풍 목사는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제주도를 향해 평양을 떠납니다. 인천항과 군산항을 거쳐 목포항에 도착한 이 목사님, 풍랑이 거세, 거기에 아내와 아이를 남겨 두고, 먼저 제주도를 향해 떠납니다. 그런데 그만 배가 난파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고, 이기풍 목사는 구사일생 살아나 추자도에 상륙하게 됩니다. 이렇게 그는 사도 바울의 여정을 하나씩 그대로 따라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랬습니다. 언제부턴가 이기풍 목사님의 마음엔, 사도 바울처럼 살겠다는 소명감이 불타기 시작했습니다. 살기등등하여 예수를 핍박했던 사울이 바울로 거듭나서 오직 주님의 복음 들고 전 세계를 누볐듯이, 깡패 두목 이기풍도 이제 목사가 되었으니, 우리나라의 땅 끝, 제주도에 이르러 증인이 되겠노라 다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소명감이 투철해도 제주도에서의 복음 전도는 쉽지 않았습니다. 우선 말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거기에 미신이 성했던 풍속과, 또한 육지에서 건너온 외지인에 대한 배타적 풍토, 대원군의 쇄국정책 및 천주교인 박해 등으로 인해, 제주도민들에게 말을 거는 것조차 쉽지 않았습니다. 때론 잠잘 곳도 얻지 못해 한라산 기슭이나 동굴, 심지어 마구간에서 잠을 자기도 했습니다.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해 굶기가 일쑤였고 그러다가 영양실조에 걸려 고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포기할 순 없었습니다. 해서 그 날도 복음을 전하러 바닷가로 나갔습니다. 해녀를 만나 예수 믿으라고 전할 심산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기력이 쇠하여 가다 말고 모래사장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얼마가 지났을까, 누군가 자신을 흔들어 깨우기에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 해녀의 집이었습니다. 바닷가에 쓰러져 있던 그를 해녀가 자기 집으로 데리고 와 살려준 것이었습니다. 그 일이 인연이 되어 드디어 첫 전도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 해녀의 도움으로 지혜를 얻은 이 목사님, 이젠 여기 저기 밭으로 나가 일을 도우면서 제주도민들에게 접근하기 시작했습니다. 며칠이고 함께 일을 해주다가, 기회가 되면, 조심스레 예수를 믿으라고 전했습니다. 문제는 일을 도와줄 땐 좋아하는데, 예수 믿으라는 말만 나오면, 모두가 고개를 젓는 것이었습니다. <설러버려 설러버려, 야가기 끊어지갠> <그만 두라, 그만 둬, 내 목이 달아난다 말이야!>

해도 너무 했습니다. 이젠 더 이상 제주도에 남아 있고 싶질 않았습니다. 너무나 힘이 들었습니다. 해서 하루는 마포 삼열 선교사께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 돌아가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그랬더니 답장이 왔는데, 선교사님의 말이 기가 막혔습니다. <이기풍 목사의 편지를 잘 받았소이다. 그런데 당신이 돌로 때린 내 턱의 흉터가 아직 아물지 않았으니, 이 흉터가 아물 때까지 더욱 분투하시오.> 그 편지를 받고서 이기풍 목사님, 다시 그 자리에 엎드려 대성통곡하며 회개합니다. 그리고 심기일전 다시 제주도 목회를 시작합니다.

# 4
그 후로, 이기풍 목사는 더욱 열심히 밭일을 거들며 복음을 전합니다. 홍수가 나서 떠내려가는 사람들을 목숨 걸고 살려내기도 합니다. 산 속 동굴 안에 사는 구렁이 귀신에게 제물로 바쳐진 소녀를 구하기 위해, 동굴 속으로 들어가 구렁이를 때려잡은 일도 있었습니다. 조금씩 이기풍 목사님을 사랑하고 존경하면서 따르는 무리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께서 결정적인 이적과 기사를 보여 주십니다. 이기풍 목사님의 딸, 이사례씨의 회고록에서 그대로 인용해 보겠습니다.

<하루는 굉장한 미치광이가 뛰어다녔다. 아버지는 이 미치광이를 간신히 달래서 집으로 데리고 왔다. 그는 도둑질을 전문으로 하는 미치광이였다. 아무리 쇠사슬로 묶어 놓아도 어느 틈에 풀고 도망가기가 일쑤였다. 길가는 사람 상투 끝의 은동곳도 감쪽같이 훔쳐내는 기술이 있었다. 아버지는 이런 미치광이를 묶어 놓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다른 때 같으면 미치광이가 도망을 쳤을 텐데 그 날은 엉거주춤 하다가 푹 주저앉았다. 아버지가 미치광이에게 물어보았다. 어제까지 도망치더니 왜 오늘은 도망을 못하는가? 미치광이는 힘없이 고개를 푹 숙이더니,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사실은 언제나 우리 대장이 와서 발에 묶인 쇠사슬을 풀어주었는데 오늘은 천군 천사가 긴 창을 들고 이 집을 빙 둘러싸고 있는 통에 대장이 못 들어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자기 대장이 담에 걸터앉아 있는 것이 보이지 않느냐고 말하는 것이었다. 물론 아버지 눈에는 보일 리가 만무했지만, 아버지는 미치광이가 그 말에 더욱 힘을 얻어 식음을 전폐하고 기도했다. 그날 밤이 깊었을 때 갑자기 이 미치광이가 입에서 거품을 내더니 홱 거꾸러져 축 늘어져 버렸다. 한참 만에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다. 아버지는 미치광이의 손을 힘껏 쥐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이 미치광이는 그 후 예수를 믿고 집사가 되었다. 이 일이 있게 되자 한 입 두 입 말이 퍼져 야소교 목사가 병을 고친다는 소문이 온 제주도 내에 퍼졌다. 교회로 환자가 밀어닥치기 시작했다. 하루는 또 다른 미치광이 처녀를 부모가 두 손을 묶어서 데리고 왔다. 이 미치광이는 언제나 벌거벗은 채 춤을 추며 길을 다녔다. 경찰서에도 몇 번이나 끌려갔다. 그러나 그 지독한 미치광이도 새 사람이 되었다. 그 이름이 정요산인데, 몇 년 후에 전도사가 되어 아버지를 도왔다. 내가 두 번째로 제주도에 갔을 때 이 분에게 많이 업혀 다녔다. 어머니가 항상 이 이야기를 들려줄 때마다 나는 재미있게 들었다.>

그랬습니다.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바울에게 임했던 성령이 이기풍 목사에게 임하여 역사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이기풍 목사는 사도 바울이 체험했던 모든 경험을 다 따라 경험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이기풍 목사는 13년 동안 제주도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애를 썼습니다. 자신의 손으로 최소한 10개 이상의 교회를 개척했고, 1934년에는 제주도에 노회를 조직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 5
제주도 목회를 마친 후 이기풍 목사는 평양으로 돌아가지 않고 전라도 지역에 남아 계속 복음을 전합니다. 마치 예루살렘을 떠나 전 세계를 다니며 복음을 전했던 바울처럼, 광주, 순천, 고흥, 벌교, 여수, 완도 등지를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그랬습니다. 그는 평양 출신이었지만, 제주와 전라의 제단에 그의 인생을 바쳤던 것입니다. 그러나 일제의 식민 통치를 당하던 조국의 역사는 그의 인생 말년을 더 극심한 고난으로 끌고 가고 말았습니다.

1936년경부터 일제는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했습니다.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기독교 세력은 무참히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불행히도 1938년 9월, 제27회 장로회 총회는,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맙니다. 우리나라 기독교 전체가 신사참배를 하기로 결의한 것이지요. 이에 이기풍 목사님은 분연히 일어나 신사참배 결사반대를 외칩니다. 당시 여수 우학리 교회에서 목회하시던 이 목사님, 목사관 바로 뒷산에 신사가 있었기에, 늘 길목을 지키며 신사에 올라가는 조선인들을 막아서곤 했습니다. 해서 신사참배가 있는 날엔, 일본 순사들이 이기풍 목사님을 주재소에 감금하곤 했습니다.

그 후 이기풍 목사님은 순천 노회원들과 함께 조직적인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전개합니다. 이를 빌미로 일제는 1940년 11월 15일 새벽, 순천 노회 소속 목사 17명을 검거하여 투옥시킵니다. 그 중 유독 이기풍 목사님만 여수 경찰서로 끌고 간 저들은, 당시 72세인 노구에 혹독한 고문을 가합니다. 이 목사님은, 미국 선교사들과 함께 활동했다는 빌미로 스파이 활동을 했다는 죄목과, 평소 일본은 곧 망한다는 설교를 자주 했다는 이유로 대역죄까지 가중되어, 말로 할 수 없는 고문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목사님은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당신의 소신과 신앙을 지키다가, 결국 1942년 6월 20일, 바울처럼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당신의 생명을 민족의 제단에 순교의 제물로 바치며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 6
지난 2004년 9월 24일, 밤 여덟시, 대만 반정교회당에선 특별 금요기도회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동광교회 방문단 10명과 반정교회 식구들 40여명, 그리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은 아니지만, 열기만은 뜨거웠습니다. 그 자리에 제가 존경하는 목사님이 서 계셨습니다. 이미 칠순을 넘기신 목사님, 이젠 은퇴하셨으니, 평안히 쉬실 만도 하신데, 그 분은 어려움에 처한 반정교회 성도들을 가슴에 끌어안고 저들에게 조금이라도 위로를 전하시고자 불을 토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요, 입으론 불을 토하시는데, 그 분의 가슴은 울고 계셨습니다. 그 분의 목소리엔 눈물이 베어 있었습니다. 정녕 큰 어르신의 큰 사랑을 체험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아하, 대가의 면모란 이런 것이구나, 큰 깨달음과 가르침을 얻는 순간이었습니다. 바로 우리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김인호 목사님이십니다.

가끔 김인호 목사님께서, 저에게, 제주도에 있는 이기풍 기도원에 한번 다녀오라 하셨습니다. 김 목사님은 기회가 닿기만 하면 그 곳에 가서 기도하고 오신다 하셨습니다. 죄송하게도 아직 저는 그 곳에 가 보지 못했습니다. 솔직히 과문한 탓에 이기풍 기도원이란 이름조차 저에겐 생소했고, 꼭 거기까지 가야 하나?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왜 김 목사님은 많고 많은 기도원 가운데 이기풍 기도원에 가셔서 기도하시는 걸까? 왜 이기풍 목사님이란 분에게 그토록 애정을 보이시나? 궁금해졌습니다.

오늘에서야 저는 김 목사님의 깊은 뜻을 조금 알게 되었습니다. 그랬습니다. 김 목사님의 가슴 속 깊은 곳엔, 이기풍 목사님이 살아계셨던 것입니다. 마치 이기풍 목사님의 가슴 속에 바울이 살아계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해서 김 목사님은 오늘도 충청북도 두평리에 있는 50호 규모의 작은 마을로 복음을 전하러 가신 것입니다. 복음 들고 제주도 벌판을 달리던 이 목사님처럼, 우리 김목사님도 주의 사랑을 담고 방방곡곡 어려운 교회들을 찾아다니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부족한 종에게 그 목사님의 목회 혼을 물려주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김인호 목사님! 저도 그리 하겠습니다. 우리 동광 가족들 모두, 그리 살겠습니다. 한국 교회 최초의 일곱 목사님 가운데 한 분으로 서시어, 오직 복음을 위해 살다 가신 이기풍 목사님처럼, 지금도 그 뒤를 따라 노구의 몸을 이끌고 열정적으로 뛰시는 김인호 목사님처럼, 아니 바울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겠습니다. 사랑하는 이들의 가슴 속에 꺼지지 않는 별빛으로 남겠습니다. 부디 만수무강하옵소서!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