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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름다운 성숙을 위하여 (약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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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덕재 목사

야고보서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기록한 서신입니다. 야고보라는 이름은 구약 성경의 야곱이라는 이름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는 예수님께서 사역하실 때에는 거의 언급이 없었지만, <행15장>에서 이방인이 성령받은 것에 대하여 논의하는 과정을 보면,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야고보를 베드로와 요한과 같이 초기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이라고 지칭하였습니다<갈2:7>.

흥미로운 것은 야고보가 자신을 소개할 때에, “예수님의 동생 나 야고보는” 이라고 소개하지 않고 “예수님의 종 야고보는”이라고 소개합니다<약1:1>. 육신적 관계를 통하여 자신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의 영적인 관계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identity)을 확고히 하였음을 가르쳐 줍니다.

배경, 빽(back)을 내세워 자신을 과시하려는 모습이 아니라, 나는 그리스도께 매인 사람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무엇하는 사람이라고 알고 있습니까? 여러분 자신의 정체성을 어디에서 찾고 있습니까?
세상의 지위에서 정체성을 찾는 사람은 흔들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 내가 하나님의 자녀이고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신분의식을 확실히 세워보십시오. 은혜 속에서 강건해지는 생명을 누립니다.

전설에 의하면 야고보는 기도를 많이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짧은 야고보서에도 기도를 강조하는 흔적이 곳곳에 보입니다. 기도를 너무 많이 해서 무릎이 낙타무릎처럼 되었다는 사람의 효시(嚆矢)가 바로 야고보를 말합니다.

야고보는 A.D. 62년에 순교당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의 탁월한 복음 증거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예루살렘의 바리새인들이 야고보를 성전에서 밀어 떨어뜨린 후 몽둥이로 쳐서 죽게 하였다고 합니다.

야고보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 사역할 당시는 교회에게는 매우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아직 교회의 역사가 짧아 복음의 가치관이 교회생활에서 완전히 뿌리내리지 않은 시기이기 때문에, 말이 많고 변화가 많은 때입니다. 또 예루살렘 교회에는 개종한 유대인들이 많아서 그들 중에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었지만, 여전히 율법의 그늘아래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 교회에 찾아왔지만, 바른 믿음을 갖지 않은 사람들을 인하여 혼돈스러운 모습도 많이 있었습니다. 

이런 어려운 배경이 야고보에게는 신앙과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하여 명확한 개념을 더욱 분명히 품을 수 있게 하였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그렇지만, 야고보서는 예루살렘 교회를 위하여 쓴 편지가 아니라, “흩어져 있는 열 두 지파”<약1:1>에게 주어진 편지입니다. 원래 열 두 지파는 이스라엘 백성들, 유대 나라를 지칭하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야고보가 열 두 지파라고 표현하였을 때는, 흩어져있는 육신적 유대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 중에 예수님을 믿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이 서신이 그리스도인 유대인들을 위하여 쓰여진 증거는 서신 내에 많이 보여집니다.

또 특정의 인물이나 특정의 교회에게 주어진 편지가 아니라, 보편적인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특별한 환경적 배경이나 사건과 연관된 기록은 거의 없고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과 삶에 대한 보편적인 원리를 가르쳐 주는 서신입니다. 그래서 서신이라기보다는 한편의 설교, 그리스도인의 생활 지침이라고 보면 알맞습니다.

흔히 야고보서를 생각하면, 로마서와 대조하여 믿음과 행위의 논쟁으로 관심이 빠지기 잘 하는데, 야고보서를 그렇게만 보는 것은 숲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입니다.

야고보서는 실제적인 서신입니다. 로마서처럼 교리에 대한 논리적, 근원적 추론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마음가짐과 생활에 대하여 구체적인 지침을 가르쳐 주는 서신입니다.

종교개혁의 주축이었던 마틴 루터가 야고보서를 지칭하여 “지푸라기 성경”이라고 표현하였고 성경에서 없앴으면 좋겠다고 말한 것은 종교개혁의 기치에 치우친, 감정적 대응이었던 것같습니다. 오늘날에도 로마서와 야고보서를 서로 모순인 것처럼 문제삼거나 말하거나 주장하는 학자는 없습니다.

야고보서는 그리스도인의 마음가짐과 생활에 대한 실제적인 서신입니다.

야고보서가 구체적으로 다루는 주제들은 이런 것들입니다. 시련과 시험을 이기는 것, 성질을 다루어야 한다는 것,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것, 말을 조심해서 해야 하는 것,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말아야 하는 것, 돈을 잘 다스려야 하는 것, 인생의 미래에 대하여 올바른 관점을 갖는 것, 순결한 지혜, 겸손, 사랑의 기도 등등  이런 주제들은 우리를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으로 세워주는 덕목들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내용 전체를 “그리스도인의 영적 성숙”이라고 묶을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는 그리스도인의 마음가짐과 생활이 아름답게 성숙하는 필요성을 역설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무엇보다도, 영적인 성숙은 바른 믿음의 기초 위에서 가능합니다. 야고보서의 마음가짐과 삶의 성숙의 멧세지를 피상적으로만 보면, 율법적이고 도덕적 가르침과 똑같은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영적 성숙은 참된 믿음, 바른 믿음위에서만 가능함을 면면히 나타내 줍니다.

영적 성숙은 사실 오늘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주제입니다. 영적 성숙의 기초가 되는 바른 믿음은 한국교회에 더욱 절실히 필요로 하는 주제입니다.

어제 KBS에서 방송하기 전부터 논란이 되었던, “선교 120주년, 한국교회는 위기인가?” 프로그램도 한국교회,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성숙하기를 촉구하는 하나의 멧세지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성숙을 도외시한 채, 성장에만 치우쳐 온 한국교회는, 마치 체력은 약하여지고 덩치만 커진 비만인처럼, 이제는 성장도 위기를 맞이했다는 진단이라 받아들여집니다.

예) 나의 체중

사실 우리가 삶에서 겪는 문제의 많은 해결은 성숙에 달려 있습니다. 삶의 모든 문제가 미성숙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영적 성숙은 삶에서 겪는 많은 문제들, 갈등들, 어려움들을 지혜롭게, 부드럽게 감당하게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삶의 갈등과 고통을 안고 있습니다. 그런데, 삶의 갈등과 고통은 환경이 변화되고 상황이 호전되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이젠 경험으로 잘 아시지 않습니까? 하나의 상황이 좀 나아지면, 다른 쪽에서 신경쓰이는 일이 솟아나고 한쪽 여건이 괜찮아진다면 다른 쪽 여건이 기울어지고 삶이 그런 것이라는 것 아시지 않습니까? 서른 즈음이면 이 인생현실은 다 깨닫지요?

예) 누에와 고치 - 중학교 2학년 때에 짝꿍이 김제군 공덕면에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토요일에 1박 2일로 그 친구집에 놀러갔습니다. 그 친구 집은 뽕나무 단지를 운영하며 누에를 키우고 있었습니다. 밤에 자는데 비오는 소리가 들려서 잠이 깨서 내일 놀기는 틀렸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왠 걸 아침 햇살이 비춰 오는 것입니다.

사실인 즉, 누에가 뽕잎을 갉아먹는 소리가 마치 비오는 소리처럼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하도 신기해서 누에치는 방에 가 보았습니다. 누에가 뽕잎을 먹고 자라면 고치를 칩니다. 자기 몸을 실로 둘러서 아이들 엄지 손가락 만한 하얀 타원형의 고치를 만듭니다. 그 속에서 애벌레가 번데기로 변신합니다. 이 고치를 푸욱 삶으면 뿔고 뿔은 고치에서 실을 뽑아내서 만든 것이 비단이고 안에 삶아진 번데기라 우리가 맛있게 군것질하는 뻔데기입니다.

그냥 놔 두면 이 뻔데기가 안에서 나방이 되어 고치를 뚫고 나옵니다. 많은 누에들이 뽕잎을 먹고 자라고 있었고 한쪽에는 뻔데기의 허물을 벗고 나방이 되어 나오려고 애를 쓰고 있었습니다.

제가 호기심에 손가락으로 몇 마리의 허물을 벗겨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 친구가 그러면 나방이 죽는다고 하더군요. 힘들어보여도 가만히 놔 두어야지, 쉽게 없애면, 오히려 죽는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형상으로 닮아가게 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헤치는, 지난한 몸짓을 하도록 허락하십니다.

곡식과 과일이 가을이 되면, 무르익습니다. 그러나 오곡백과가 가을에만 무르익고 성숙하는 것이 아닙니다. 곡물과 과일이 무르익기 위하여는, 봄의 솟아오르는 땅의 기운, 여름의 뜨거운 땡볕, 쏟아지는 폭우와 거센 태풍, 가을의 따가운 햇살까지 아니 그 이전 겨울, 동토 아래에서 인내하며 강건해지는 과정까지 다 필요합니다.

이 진리를 탈무드에서는 이렇게 표현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단련하신다. 어떤 자는 재물로, 어떤 자는 빈곤으로. 재물이 있는 자에게는 그 재물이 필요한 사람에게 인색하지 않은가를. 빈곤한 자에게는 순수하고 불평없이 스스로 고뇌의 운명을 견디고 있는가를.”

그러므로 오늘 당신에게 주어지는 삶의 모든 가시덤불과 엉겅퀴들 거부하려고만 하지 마십시오. “이런 것 없애 주십시오”라고 기도만 하지 마십시오. 도리어 이 모든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사용하여서 당신을 성숙케 하시는, 아름다운 예수님의 형상을 닮도록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아버지와 아들이 사막을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준비해 온 물은 바닥이 나고 가도 가도 뜨거운 햇빛과 사막뿐이었습니다. 지칠대로 지친 두 사람, 아들은 더 이상 못가겠다고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아버지는 그를 격려하며 말했습니다. “힘내거라. 가다 보면 반드시 사람이 사는 마을이 나타날 것이다.”

다시 길을 가던 두 사람 앞에 무덤이 하나 나타났습니다. 무덤을 본 아들이 겁에 질려 다시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아버지, 저 무덤을 보세요. 누군가 우리처럼 지쳐서 죽어버린 것일 거예요. 이젠 우리도 죽을 거예요.”

그러나 아버지의 대답은 달랐습니다. “아니야. 무덤이 있다는 것은 가까운 곳에 사람이 있다는 증거야. 틀림없이 멀지 않은 곳에 마을이 있을 거다.”

성숙한 사람과 아직 미성숙한 이런 차이가 납니다.

미숙한 사람은 자기와 닮은 사람만 좋아하고 성숙한 사람은 자기와 다른 사람도 좋아합니다.

미숙한 사람은 인연도 악연으로 만들고 성숙한 사람은 악연이야말로 인연으로 나아가는 징검다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미숙한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만 찾지만 성숙한 사람은 꼭 해야만 했던 일들로부터 훨씬 더 많은 것을 배우며 삽니다.

미숙한 사람은 고난이나 불행한 환경을 견디지 못하지만 성숙한 사람은 바람과 물결은 항상 유능한 항해사의 편에 있다고 믿으며 그것을 거부하지 않습니다.

미숙한 사람은 좋고 싫고를 따지지만 성숙한 사람은 옳고 그르고를 선택해 서 삽니다.

미숙한 사람은 조그마한 불행도 현미경으로 확대해서 보지만 성숙한 사람은 큰 불행도 망원경으로 들여다 봅니다.

미숙한 사람은 자신의 과거를 바라보지만 성숙한 사람은 미래를 내다봅니다.

미숙한 사람은 특별한 일들에만 관심을 가지려 하지만 성숙한 사람은 평범하고 작은 일에서 더 많이 배웁니다.

미숙한 사람은 자신이 선택하려는 그 하나만을 보지만 성숙한 사람은 선택에서 제외되는 나머지까지 살필 줄 압니다.

미숙한 사람은 구름만 쳐다보지만 성숙한 사람은 구름에 가려진 태양을 바라봅니다.

미숙한 사람은 세상은 개선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으로 가득 차 있다고 불평하지만 성숙한 사람은 자신을 먼저 변화시키는 데서 세상의 변혁을 꿈꿉니다.

미숙한 사람은 모든 상황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지만 성숙한 사람은 긍정적으로 세상을 맞이합니다.

공감이 되십니까? 이 구분을 보면, 여러분에게도 성숙이 절실히 필요하지 않습니까?
성숙한 사람은 아름답습니다. 성숙은 내 자신의 삶을 아름답게 느껴지게 할 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바라보는 내 삶의 모습도 아름답게 느끼게 합니다.
성숙한 사람은 아름답게 합니다. 자신의 마음을 아름답게 만들고 자신의 삶의 주변을, 자신이 만나는 사람을 아름답게 하고, 자신이 속한 세상을 아름답게 합니다.

가을, 겨울 밤이 깊어가듯이 성숙을 향한 우리의 갈망과 기도도 깊어갔으면 좋겠습니다. 아름답게 성숙한 우리들의 모습에 대한 소망도 더욱 깊어져가는 은혜스런 계절이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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