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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공하라(4) (롬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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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고신일 목사

13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로마서 15:13) 
 
<목회기도>

세상을 만드시고 우리를 살게 하신 하나님
넉넉함을 느끼는 가을에 주인공으로 살게 하심 감사합니다.
하나님, 우리의 세상살이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 가정을 흔들고, 일터를 흔들고, 교회를 흔들고
나라를 흔드는 일과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흔드는 일도, 흔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견고하게 하시옵소서. 흔들리지 않게 붙드시옵소서.
다니엘처럼 할 일은 하게 하시고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처럼 하지 말 것은 하지 않고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연약하여 넘어져도 아주 엎드러지지 않게 하시고
일어날 믿음의 용기와 담력과 힘을 주시옵소서.
세상에 살며 수고하던 몸, 지고 가야 하는 짐진 이들이 왔습니다.
영적으로 새롭게 하시고 강하게 하시어
우는 사자처럼 삼키려 다가서는 마귀를 물리치며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 군대에, 객지에, 외국에 나가 있음으로
우리와 함께 있지 못한 이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하나님 저들을 돌보아 주시옵소서. 상함이 없는 은총으로 지켜 주시옵소서.
병상의 환자들을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와 함께 있는 기쁨을 주시옵소서.
이 시간 설교하는 부족한 종을 능력으로 붙들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할렐루야!
오늘 한날도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서리 내리고, 단풍 들고, 낙엽 뒹굴고…
시간은 가고 세월은 흘러갑니다.
 
여러분은 어떤 생각으로 사십니까?
어떤 소원이 있으신지요? 소망이 무엇인지요?
 
소원(所願)과 소망(所望)은 다른 것입니다.
소원이란 자신의 필요에 근거하는 것이요, 소망은 하나님의 마음에 근거하는 것입니다.
소원은 현재에서 출발하고, 소망은 하나님의 약속에서 출발합니다.
소원은 자기 자신의 이기적인 생각에 머무르는 것이고,
소망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들이는 믿음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뜻에 내 마음을 두는 것입니다.
 
보통 세상 사람들은 세상적인 조건과 제도에 소망을 둡니다.
그러나 세상 조건과 제도는 우리에게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인생을 걸만큼 절대적인 것도 아닙니다.
사실 이 세상의 정치, 경제, 사회, 심지어 교육과 도덕까지도
이제 기대할 것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느 시대에, 어느 당의 정치가 선했습니까?
어떤 정치인이 우리에게 기쁨과 감동을 주었습니까?
어떤 제도가 사람들의 소망을 만족 시켜 주었고
경제가, 기업이, 기업가들이 세상을 편안하게 해 준 때가 있습니까?
어떤 교육이 인간을 인간되게 했고
어떤 의학이 인간이 병들지 않고 죽지 않게 했습니까?
설령 오래 살기만 한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행복할 것 같습니까?
이 세상에는 우리가 완전히 내맡길 만한 것이 없습니다.
 
사람은 배고플 때 먹고 싶은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굉장한 생존력이 발동합니다.
사람은 배고파 굶어죽을 정도가 되면 못 먹는 것이 없습니다.
잘 먹지 않는 아이들 며칠동안 굶겨 보세요.
반찬타령 하는 아이들 군대가서 이틀만 지나보세요.
배가 고프지 않기 때문에 먹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이 배고프면 벌레와 쥐까지 잡아먹습니다.
심지어 사람도 먹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런데 먹고 싶은 욕망이 어느 정도 채워지고 나면
입고 싶은 욕망, 가지고 싶은 욕망이 생깁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도 어느 정도 채워지고 나면…
허영과 사치, 방종과 타락, 무질서, 공허함… 으로 가득차게 됩니다.
허무라고 하는 절망의 심연(深淵)으로 깊이 빠져 들어갑니다.
흔히 잘 산다고 하는 나라, 복지 국가, GNP가 높은 나라들에 많은 것,
높은 비율이 자살이요, 자살율입니다.
이런 세상에 사는 여러분은 소망을 어디에 두고 사십니까?
 
 
소망의 근원 하나님
 
사전적 의미의 소망은 [바라는 바, 희망, 꿈]을 뜻합니다.
카알라일(T. Carlyle, 1795~1881)은 "인간은 희망에 기초를 둔 존재"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희망을 가진 존재'라는 뜻입니다.
 
신약성경이 기록된 헬라어(Greek)에서는 인간을 [안트로포스]라고 합니다.
이 안트로포스라는 단어에는 '위를 쳐다보는 존재'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인간은 하늘을 향한 존재, 소망을 가진 존재라는 뜻입니다.
 
<사람>이란 단어대로 표현하면 위를 보지 않는 사람, 소망을 갖지 않은 사람은
키에르 케고르(S.A. Kerkggard, 1813~55)가 말한 대로
"죽음에 이르는 병"이 들어 [절망]에 빠진 존재가 아니라
아예 사람이기를 포기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인 여러분은 어디에 소망을 두고 사십니까?
 
오늘 본문 말씀에도 [소망]이란 단어가 있습니다.
본문 로마서 15장 13절은 사실상 [축복기도]입니다.
    (Bible Knowledge Commentary 24, [로마서], 참조)
본문 앞부분에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서로 용납할 것을 교훈 한 뒤에
모든 성도들은 성령의 능력 안에서 소망을 갖도록 축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소망의 하나님(God of hope)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15:13) 했습니다.
하나님은 소망을 베푸시는 분이시며, 소망의 대상이 되시고,
소망의 근원이 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약속하시고, 성취하시는 분이시기에
우리의 소망의 대상이 되십니다.
 
기쁨은 소망이 성취되어 가는 과정에서 느끼는 감동의 순간입니다.
그리고 평강은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말씀하시고 약속하신) 것들이
이루어 질 것(성취될 것)을 확신하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참조, 롬5:1, 빌4:7, 히11:1)
 
그런데 이 세상에는 슬픔이 많을 뿐만 아니라 역경도 많습니다.
때로는 악인이 오히려 잘 되는 것 같고
불의와 압제가 승리하는 것 같아 보이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래도 예수 믿는 사람은 역경 중에서도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아무 이유도 없이 미움 받을 때가 있고
아무 이유도 없이 미운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분이 저를 만나서 "나는 고신일목사가 밉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이 저를 왜 미워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왜 밉냐고? 그랬더니 이유없이 싫다고 하더군요.
참으로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저도 그분을 가끔 뵐 때마다 미운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이렇듯 이상하게 미움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10대부터 70대까지 세대별 얄미운 여자의 유형이 소개된 것을 책에서 보았습니다.
어떤 여자가 얄미운 여자일까요?
10대 - 공부도 잘하고 얼굴도 예쁜 여자가 얄미운 여자
20대 - 성형수술을 하고도 표시 안 나는 여자
30대 - 처녀 시절 엉터리로 살며 이 남자, 저 남자… 연애 많이 하고
      결국 두루 갖춘 좋은 남자와 결혼하여 잘 사는 여자
40대 - 놀러갈 데 다 가고, 할 것 다하고, 자녀들에게 새벽밥 한 번 지어주지 않는데…
      아이들이 알아서 일류대학에 척척 들어간 여자
50대 - 잘 먹는데도 날씬한 여자
60대 - 남편이 돈 많이 벌어 놓고 먼저 죽어 혼자된 여자
70대 - 이 모든 것을 다 갖춘 여자
 
여러분은 얄미움의 대상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을 얄밉다고 생각합니까?
 
 
하나님, 왜…?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왜 미움 받는 지, 왜 고통 당하는 지,
왜 겪어야 하는 지 이유도 모르면서 당하는 일이 많습니다.
어떤 때는 너무 황당해서 '왜 이런 일이 생기는지' 답답할 때가 많습니다.
 
성경에 보면 스데반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고 신실한 초대교회의 집사였습니다.
그런데 스데반 집사는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는 그때 침묵하셨습니다.
- 모세를 비방하기만 해도 문둥병이 들게 하신 하나님이시고(민 12:8~10),
- 머리가 빠진(대머리) 엘리사를 조롱한 아이들에게
  암콤(bear)을 보내어 찢게 하신 하나님이시고(왕하 2:23~24),
- 독사에게 물린 사도 바울을 살리신 하나님이신데(행 28:3~5),
스데반이 죽을 때는 철저하게 침묵하셨습니다. 그땐 왜 잠잠하셨을까요?
 
사실 이해되지 않는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갈등도 되고,
심한 경우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의심이 생기기도 합니다.
 
[어떤 분이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봉사하다가 집으로 찬송을 부르며 가던 중
가방을 날치기 당했습니다.  그분은 집에 가서 실컷 울었답니다.
가방 속에 들어 있는 물건 때문이 아니라,
그런 상황에서 자기를 지켜주지 않은 하나님이 야속해서 울었답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하시고서는,
"악한 자가 너를 만지지도 못하리라"고 말씀하시고서는.
"하나님, 이럴 수가 있어요?" 하는 생각이 들어 원망하며 울었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생활 가운데 "하나님 이럴 수 있어요?" 할 때가 있습니다.
어느 때입니까?
예측하지 못했던 큰 병으로 고통 당할 때…,
큰 근심이 생겼을 때…,
사랑하는 사람의 급작스러운 죽음을 보았을 때…
철석같이 믿었던 사람에게 배반을 당했을 때…
어처구니없는 현실을 맞은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 항의합니다.
"하나님, 왜 도와 주시지 않습니까?"
"하나님, 왜 막아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하나님, 왜 지켜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우리의 의문은 크게 2가지입니다.
첫째는, 우리가 위기를 만나고 위험을 당할 때
    하나님은 어디서 무엇을 하셨느냐는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은 왜 답이 없이 침묵하고 계시느냐 하는 하소연입니다.
 
세상에는 이해하지 못할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하박국 선지자도 하나님께 "하나님, 어찌하여…? 얼마나…?" 하며 항변했습니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가장 특별한 것 하나는 죽음의 문제입니다.
물론, 우리는 유한한 인간이기에 영원히 살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 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보다도 일찍 죽을까?
- 왜? 신앙생활 잘 하는 사람들이 불의한 사람조차도 걸리지 않는 몹쓸 병으로 죽을까?
- 왜? 남의 육신과 가정과 생명을 망친 파렴치한도 멀쩡한데
      믿는 사람이 그렇게 비참하게 죽어야 하느냐? 하는 답답함이 있습니다.
 
우리는 믿는 사람들의 안타까운 죽음으로 의아해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비단 죽음뿐이겠습니까?
믿는 사람들에게 닥치는 불의의 사고, 질병, 실패, 환난을 당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하리로다"하신 말씀은 무엇입니까?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치 아니하리라"(눅21:18) 고 하지 않았습니까?
 
성도들의 슬픔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의심으로, 하나님 보호에 대한 원망으로,
하나님 존재에 대한 불신으로, 하나님을 향한 분노에까지 이르게 합니다.
 
그런데 그런 비극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우리들의 생각으로 한다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어떻게 돌아가셔야 했을까요?
예수님 같은 의인, 예수님 같은 성인,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분의 죽음은 어느 누구의 죽음보다도 고상해야 했고, 아름다워야 했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곱게 곱게, 오래 오래 사시다가
그가 운명할 때는 하늘에 무지개가 뜬다든가, 꽃구름이 피고, 유성이 떨어지고…
각 나라에서 조문객들이 줄을 잇고,
많은 사람들의 애도 가운데 멋진 장례식이 치러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은 처형이었습니다.
조롱받는 죽음, 저주받은 죽음이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의 눈에는 형벌이요 비극이었습니다.
그의 장례식은 조문객도 없이 초라한 사형 당한 죄수의 장례식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죽었다고 해서 그 죽음이 그분의 죄 값입니까?
예수님이 그런 죽음을 당했다고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은 것입니까? 아닙니다.
 
세상에는 "왜"라고 해야 할 일이 참으로 많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 나입니까?", "왜 내 자식입니까?", "왜 우리 가정입니까?"
"왜 내 사업입니까?" "왜 내 일터입니까?"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왜"가 있을 수 없습니다.
"왜"는 과거 집착이요, "왜"는 의심이요, "왜"는 반항입니다.
비참한 지경에서도 입술로 범죄하지 않는 욥을 보십시오.(욥2:10)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의 결국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롬8:28)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도 않으면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를 기대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하나님께 맡기고 사는 우리에게 더 좋은 것으로 준비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왜, 왜, 왜"하는 그 자리에도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죽음의 수용소였던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노벨상 수상자인
[엘리 위젤(Elie Wiesel, 1928~)]이 쓴 [The Night]라는 작품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두 유대 남자와 한 유대 어린이가 교수형을 받게 되는데,
다른 유대인들은 그것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했습니다.
두 어른들은 쉽게 목숨을 거두었으나 어린아이는 목숨이 끊어지지 않아
오랫동안 고통을 당하다가 죽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것을 지켜보던 한 유대인이
"하나님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하고 울부짖었습니다.
그때 엘리 위젤은 그 책에서 "하나님은 지금 어디 계시느냐고?
하나님은 지금 저 교수대 위에서 함께 처형 받고 계신다"고 답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의 고통의 현장에 함께 계십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느브갓네살 왕의 신상에 절하지 않는 다는 이유로 풀무불 속에 던져졌습니다.
그때 풀무불이 얼마나 뜨거웠던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떠밀던 사람이 타서 죽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느브갓네살 왕이 놀라 급히 일어나
  "우리가 결박하여 불 가운데 던진 자는 세 사람이 아니었느냐?
  그런데 저 네 번째 사람은 누구냐?"고 물었습니다.(단3:1~30)
하나님께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당하는 고통의 현장에 함께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으로 언제든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기쁨이나, 슬픔이나, 삶이나, 죽음이나…
하나님 뜻대로 사는 사람과 함께 하십니다.
어떤 경우에도 함께 해 주시는 언약의 하나님이요, 사랑의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즐거움의 소망
 
잠언 10장 28절에 "의인의 소망은 즐거움을 이루어도
                  악인의 소망은 끊어지느니라"(잠10:28)는 말씀이 있으며,
로마서 12장 12절에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롬12:12)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즐거움을 이루는 소망은 하나님을 향한 소망입니다.
세상의 금과 재물에 소망을 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딤전6:17, 4:10, 5:5, 행24:15, 시78:7, 렘50:7)
하나님께 두는 소망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소망을 의미합니다.
 
예수 믿어 하나님을 소망하는 자, 소망의 하나님을 바라보며 사는 자는 달라야 합니다.
역사를 구분할 때 예수님 이전 시대를 BC(Before Christ),
예수님 이후 시대를 AD(Anno Domini, In the Year of our Lord)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믿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우리 삶에도
예수 믿기 이전(BC)과 예수 믿은 후(AD)가 있습니다.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기 이전의 삶과 이후의 삶이 달라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보면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후5:17) 했습니다.
예수님 만나기 이전의 삶은 지나갔습니다. 지나갔습니까?
예수님 만난 이후의 삶이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새 사람이 되었습니까?
이 두 질문에 '아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된 사람은 어디서든, 언제든 하나님께 소망을 둔 사람답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고 세상 사람들에게는 기쁨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로버트 슐러(Robert H. Schuller) 목사님은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가'에 대해 세 가지로 설명했습니다.
첫 번째는 내가 하고 있는 일이, 하려고 하는 일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인가?
두 번째는 내가 하고 있는 일이, 하려고 하는 일이 이웃에게 유익을 주는 일인가?
세 번째는 내가 하고 있는 일이, 하려고 하는 일이
자신에게도 유익을 주며 만족한 것인가?…를 생각해 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삶을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낙심치 않는 소망
 
그리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은 낙심치 말아야 합니다.
로마서 8장 25절에는 "참음으로 기다리라"는 말씀이 있고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찌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갈6:9)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라" (살후3:13)
 
소망이 있는 사람은 낙심치 말아야 합니다.
특별히 하나님을 소망으로 삼고 사는 사람은 낙심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낙심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소망을 가진 다니엘은 사자굴 속에 들어가더라도 해야 할 것을 했습니다.
소망을 가진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풀무불에 들어간다 해도
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무시무시한 죽음의 공포에서도 버틸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소망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죽더라도 죽음이 끝이 아니며 그 다음이 약속된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영어에 '에서 신드롬(Esau Syndrome)'이란 말이 있습니다.
에서는 성경에 나오는 야곱의 형 에서를 뜻합니다.
에서는 배가 조금 고팠을 때, 동생 야곱에게
장자의 권리, 즉 아버지로부터 가문을 이어받는 위대한 권한을 동생에게 양보하고
팥죽 한 그릇을 얻어먹었던 사람입니다.
에서는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았습니다.
에서는 현재를 위하여 미래를 무시한 사람입니다.
에서는 현실적 안전과 만족을 얻기 위해 꿈과 희망을 그리고 내일을…
팥죽 한 그릇에 내던진 대표적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에서 신드롬이란 말은, 현실에 급급한 사람, 미래와 꿈,
그리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을 경시하는 사람들의 경향을 뜻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살다보면 배고플 수 있습니다. 절망감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팥죽 한 그릇과 내 장래와, 하나님께서 내게 약속하신 복과 영생의 세계를
바꿀 가능성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도, 아무리 배고프고 힘들고 어렵다할지라도,
팥죽 한 그릇과 내 장래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과 바꿀 수는 없습니다.
바꿔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소망하고, 소망의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아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가정, 교회, 일터에 흔들림이 많습니다. 찌르는 가시가 많습니다.
그러나 소망이신 하나님을 간직함에, 소망이신 하나님을 믿고 가는 신앙생활에,
소망이신 하나님의 약속된 복을 바라보고
참고 견디는 소망의 성공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미래가 약속된다면, 약속된 미래에 대한 확신이 있다면
어떤 어려움도 참고 견딜 수 있습니다.
약속된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장래를 내던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한국 전쟁 취재로 퓰리처상을 받은 히긴스(Marguerite Higgins)라는
종군기자가 한국전쟁을 취재하던 중에
중공군과의 대전으로 몹시 지친 UN군에 속한 해병중대를 찾아갔습니다.
그 추위에 얼어붙은 콩을 씹고 있는 지치고 지친 어느 미군 병사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이라면 어떤 소원을 말하고 싶소?"
병사는 "내일을 주시오(Give me tomorrow.)"라고 대답했습니다.
미래가 약속된다면 오늘의 고통은 문제가 아니라는 답변이었던 것입니다.
내일이 보장되어 있다면, 내일이 약속되어 있다면
지금 비록 추위에 떨고 얼어붙은 콩을 먹어도 견딜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천국백성이요, 소망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장미를 아름답다고 말할 때, 줄기에 붙은 가시를 보고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의 인생의 가시만 보고 한탄합니다.
가시가 있다고 불평하고, 가시 때문이라고 핑계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가시 위에 핀 꽃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가시, 삶의 가시… 그 가시에 얽매인 자가 아니라.
눈을 들어 피어난, 피어날 꽃을 바라보며 소망이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여러분의 삶을 이 세상의 가치 기준 대로가 아니라
하나님께 두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소망이신 하나님을 믿는 소망의 성공자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배고파도, 고통스러워도, 당장 어려워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일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을 팥죽 같은 것과 바꾸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거룩한 주일 말씀을 들은 성도들,
소망의 성공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소망의 성공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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