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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는 죽었습니다 (롬 7: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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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박충웅 목사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다면 내가 탐식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에 이르매 죄는 사라아니고 나는 죽었도다.(롬 7:7-10)”

우리는 바울 사도의 말씀을 오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율법에서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급한 사람은 ‘율법이 악한 것이냐?’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여기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라고 말한 것입니다. 다시 읽어 보십시오. 인간은 지저분합니다. 죄가 쓰리게 보다 더 더럽습니다. 그래서 어느 작가는 인간을 구토라 했습니다. “비탈에 선 나무”처럼 불안하다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위험을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쁜 소식(복음)을 주셨습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십자가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입니다. 우리는 황홀하게 변하신 부활만 생각합니다. 십자가 없는 영광은 없습니다.(no cross no glory)우리는 예수님께서 달리신 십자가를 아무런 생각 없이 봅니다. 그렇다면 율법은 아무 쓸데가 없습니까? 율법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 율법이 악할 수 없습니다. 그런 율법이 인간을 죽게 한다면 호해가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만일 이런 율법에 오해가 없다면 그것이야 말로 이상합니다. 원인은 인간의 죄에 있습니다. 죄가 있는 곳에는 언제든지 곤란한 일이 일어납니다. 죄를 정면으로부터 취급하고 복음에 오해가 일어날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율법이 죄라면 다 놀랄 것은 뻔한 일입니다. 너무 난폭한 표현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율법 때문에 죄의 욕정이 우리들의 지혜 속에서 역사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에서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이 죄가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본래 사람을 살리는 것이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은 사람을 살리는 길입니다. 성경에 금, 고도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 꿀보다 더 달도다.(19:10)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죄 때문에 율법의 역할도 또한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죄가 있는 곳에서 하나님의 심정이 그 죄를 파헤치고 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삽니다. 내가 이제는 죽어야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성이 살아 있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자신을 죽여야 합니다. 자기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우리는 늘 우리의 정욕이 우리를 지배 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끝없는 전쟁입니다. 마귀, 세상, 자기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전쟁은 삶과 죽음만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 싸움은 하루 이틀에 끝나는 전쟁이 아닙니다. 일반 전쟁은 군인만 싸웁니다. 우리의 영적 전쟁은 모두가 다 군인입니다. 그래서 늘 싸워 반드시 승리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싸움은 내가 죽어야 이긴다는 것입니다. 역설 같지만 진리입니다.


전에 말씀드렸습니다. 지금 문명과 과학이 엄청 발달했습니다. 그런데도 아직 모르는 세계가 더 많습니다. 서울 수의과 대학 황우석 교수에게 정부에서 450억을 주어 연구하게 했습니다. 생명공학입니다. 쉽게 어떻게 하면 인간이 병을 극복하고 건강하게 잘 살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가 날마다 죽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다들 죽음을 싫어합니다. 그런데 내 속에 있는 육신의 정요,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문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의 최대의 적은 나 자신입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을 떠나라 세상과 친해라. 내 고집과 방법이 최고다. 늘 그렇게 끌고 갑니다. 우리는 변해야 합니다. 죽어야 합니다. 살아 있을 때, 아프다, 괴롭다, 외롭다, 슬프다, 행복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런데 죽은 사람에게는 이런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변화산에서 죽음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도 고통과 고민이었습니다. 시시각각 좁혀오는 고통의 시간에 몸부림 치셨습니다. 그는 땀을 피 쏟듯이 쏟으셨습니다. 고민하여 죽게 되셨습니다. 그는 “아버지여 이 잔을 제가 마셔야 합니까? 피할 길을 주십시오.”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와 다른 장면이 나옵니다. “하오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게 해 주세요.”하셨습니다. 10월 2일 선배목사님이 오셨습니다. 그는 매우 지쳐 있었습니다. 이전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70세에 총회 법대로 은퇴하셨습니다. 그는 이 일이 너무 섭섭하셨답니다. 그는 하나님께 “하나님 우리 총회가 두 가지 하나는 신사 참배를 결의 한 것 다른 하나는 70세 정년제를 결의한 것.”이라 했답니다. 저는 우리 총회나 한국 교회에서 정년제를 말하기도 전에 부산 중앙교회에서 70세 정년제를 자체적으로 결의를 해서 실시했습니다. 저는 선배님께 “목사님 마음을 비우십시오.”하면서 위로의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는 비우는 것을 노력합시다. 세상의 것으로 채워져 있으면 말씀과 주님이 자리 잡지 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죽음을 받아들이시면서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는 혈기, 분노가 앞서면 불행합니다. 거기 항상 기뻐하며 범사에 감사가 있겠습니까? 어림없습니다. 프랑스의 작가 Jean Pouel(진. 폴)이 프랑스적인 삶에서 이런 말이 나옵니다. “나의 이름은 폴 블릭, 나이는 54세 상반되는 두 세계 존재의 두 갈래 길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난처한 나이가 되었다. 내 얼굴은 하루가 다르게 세월의 자잘한 흔적들로 덮여간다. 규칙적으로 칼슘을 섭취하고 다른 사람들처럼 담배도 끊었다. 혼자 사는 나는 저녁도 혼자 먹고 그렇게 홀로 늙어간다. 두 자식들, 그리고 손자 녀석과 관계를 유지하려고 애 쓰지만 ....” 이 소설 “프랑스적인 삶(Une vie francaise)”은 자화상입니다. 꼭 이런 가을처럼 쓸쓸하지요. 한 가닥 회한이나 후회의 감정 없이, 자신의 존재에 치명적인 획을 그었던 형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하여 포로의 주인공을 지금까지의 사신의 삶을 되돌아봅니다. 우리 언제 이렇게 될지 모르지요. 나를 죽입시다. 자기를 죽입시다. 아직도 내가 살아있습니까? 수술할 때 산사람에게는 칼을 대지 못합니다. 잠깐 약으로 그의 삶을 죽음 비슷한 상태로 만들어야 수술이 가능합니다. 우리는 살아 있다고 자랑합니다. 정작 죽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우리는 가정불화, 인간관계의 갈등, 자살, 모든 원인은 바로 “나”때문입니다. 내가 너무 강해서 그렇습니다. 내 욕심이 너무 많은 탓입니다. 내가 죽어야 합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일대기 “사랑의 원자탄”을 아시지요. 그 책을 영문으로 번역사면서 제목을 “씨앗은 반드시 죽어야 한다.(The seed must die)”라고 했습니다. 그는 다 버렸습니다. 두 아들도 바쳤습니다. 그는 평생 나병환자의 친구였고 아버지였습니다. 일본 사람들 압제 앞에서 믿음의 지킴이었습니다. 그는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구원의 사랑을 믿었습니다. 어느 프랑스 작가가 쓴 아주 짧은 소설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는 거기서 이런 말을 합니다. “대개 사랑은 자멸한다. 사랑하는 여자와 남자 사이에는 언제나 깊은 오해가 있기 때문이다.”라고 합니다. 아주 작은 먼지만한 실수나 약점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끝까지 밝히겠다고 하이에나처럼 물고 늘어지기 때문입니다. 물론 자기를 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일찍이 이 비밀을 알았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렸습니다. 세상적인 미련과 아쉬움을 갖지 않기로 했습니다. 오직 더 큰 사랑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존 번연’이 지은 “하늘가는 길(천로역정)”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이 소설을 제 2의 성경이라고 합니다. 주인공 기독도(성도)는 깨달았습니다. 장차 이세상은 망한다는 것입니다. 저 영원한 도성 하나님나라로 떠납니다. 여러 사람에게 권했습니다. 다들 비웃습니다. 이 좋은 세상, 먹고, 마시고, 즐기고, 취하고 이게 낙원이고 천국이야. 조롱했습니다. 그나마 그의 말을 이해하는 몇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보다 더 어려운 것은 달콤하고 멋지고 그럴듯한 유혹이었습니다. 여자도 있었습니다. 명예는 물론입니다. 그 좋은 돈 보따리의 유혹은 정말 거절하기 힘들었습니다. 친구들은 하나, 둘 떨어졌습니다. 그래도 그는 눈과 귀를 막고 세상을 거절했습니다. 그는 외롭고 지쳤습니다. 그런데 그가 진 짐이 너무 무거웠습니다. 높은 산입니다. 죽을힘을 다해 정상을 향해 오릅니다. 온 몸은 땀으로 뒤범벅입니다. 그는 눈을 들어 정상을 보았습니다. 거기 예수님의 십자가가 보입니다.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이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주님을 찬송 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험악하여도 나주님만 바라보리.(찬송가 455장)” 이상합니다. 홀가분합니다. 보니 등 뒤에 무거운 짐 보따리가 떨어져 저 산 밑으로 내려갑니다. 바로 죄의 짐이었습니다. 우리를 좌절하고 죽게 하는 것도 역시 죄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합니다. 우리는 죽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세례란 과거에 내가 죽고 새로운 내가 태어나는 것입니다. 죄를 예수님의 보혈로 씻고 깨끗하게 되는 예식입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합니다. 썩어야 합니다. 거기서 싹이 나옵니다. 내가 죽어야 합니다. 먼저 내가 변해야 합니다. 우리는 늘 자기와의 싸움을 합니다. 내 정과 욕(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야야 합니다. 그게 바로 사는 길입니다. 성 프랜시스는 이런 과정을 어렵게 이긴 청빈의 사도였습니다. 우리는 “내”가 제일입니까? “내”가 하나님입니까? “내”가 절대 표준이 아닙니다. 나는 죽어야 합니다. 내가 묻혀야 합니다. 내 뜻대로 안된다고 뒤 엎어 버린다면 그는 대단히 위험한 성격의 사람입니다. 늘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오늘도 제 자신을 죽이게 해 주세요.” 바울 사도는 “나는 날마다 죽노라.”했습니다. 가인은 아벨을 죽였습니다. 죽일만한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반항했습니다. “네 동생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는 “하나님 제가 제 동생 아벨을 지키는 자이니까?”이런 시건방진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방금 들판에서 돌로 죽였습니다. 그래요 형이 동생을 지키는 사람 맞지 않습니까? 저는 우리 교인을 위해기도 합니다. 장로님, 안수집사님, 부장, 찬양대.... 사람들은 모릅니다. 어느 목사가 매일 기도하는 사람 있습니까? 그런데 어느 교회 목사님이 속상하데요! 자기는 늘 기도하는데 단 한번 기도 받으러 가면서 돈 봉투 들고 간다고.... 그럴 수도 있지만.. 그것도 죽여야 합니다. 다들 너무 자기중심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봅시다. 그는 외롭게 사셨습니다. 자기를 따르려는 사람에게 “예수도 굴이 있고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건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성질 좀 죽입시다. 혈기 죽여야 합니다. 욕심을 죽여야 합니다. 우리는 낮은 데로 임해야 합니다. 이것 때문에 수치와 망신을 당하기도 합니다. 항상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을 감사해야 합니다.

맺는 말 : 저는 오늘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오늘 성례주일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십자가는 그렇게 쉽게 아무렇게나 노래 부를 대상이 아닙니다. 그가 우리의 허물 때문에 찔리셨습니다. 그가 우리의 죄악 때문에 상하셨습니다. 우리는 왜 죽지 못합니까? 너무 기가 살아 있지요. 너무 혈기방정하지요. 우리는 아직도 육적인 “내”가 살아있습니다. 나를 저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용세하세요. 용서를 비세요. 무릎을 꿇을 수 없습니까? 자존심 때문입니까? 하나님 용서해 주세요. 하시면서 엎드려 봅시다. 너무 “내”가 강해요. 알량한 자존심, 이게 적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 합시다. 바울은 다 버렸습니다. 그는 철저하게 예수님의 길을 갔습니다. 우리도 그 길을 가야 합니다. 우리는 늘 진리의 빛이신 예수님만 바라봅시다. 항상 우리는 죽어야 합니다. 정과 욕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그게 사는 길입니다. 항상 진리와 함께 마귀, 세상, 나 자신과 싸워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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