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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엇보다 귀한 자녀(16) (엡 6:4, 빌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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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동호 목사

I. 공자 논어에 군자유어의 소인유어이(君子兪於義 小人兪於利)라는 말이 있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말 중에 하나인데 그 뜻은 군자는 '의를 따라 생각하고 소인은 이익을 따라 생각한다.'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33절의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말씀과 같은 의미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희 교회 이름은 높은 뜻 숭의교회 입니다. 우리가 교회 이름으로 내세운 높은 뜻은 하나님의 뜻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교회를 설명하려고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는 교회’라는 표현을 씁니다.

예수님은 주기도문에서 우리들에게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라 일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이 곧 하나님의 나라’라는 이해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앞에서 인용한 마태복음 6장 33절에서도 ‘그의 나라와 의’라는 표현을 하고 계시는데 이와 같은 표현을 통해서도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의 즉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라는 확실한 이해를 가지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내 뜻과 욕심이 이루어지는 곳이 천국이라는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하나님의 의와 뜻보다는 나의 이익과 그것에 대한 욕심을 앞세우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천국의 삶은 利에 있는 것이 아니라 義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만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기 위하여 우리가 욕심을 부려야 할 것은 利가 아니라 義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슨 일을 할 때마다 그것이 우리에게 이익이 되는가 손해가 되는가를 살피기 이전에 먼저 그것이 옳은 일인가 옳지 않은 일인가를 살펴야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대부분 그렇지 않습니다. 이익과 손해에 대해서는 철두철미 하면서도 정의와 불의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는 면이 많습니다. 대충대충 넘어가려고 하는 면이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그렇게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죄 즉 불의와 싸워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싸워도 보통 싸우는 것이 아니라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히12:4) 핍박을 받는 한이 있어도 의를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 5:10)

저는 크리스천의 가장 중요한 삶 중에 하나가 ‘도전과 싸움’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개신교인들을 영어로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고 합니다. 우리 개신교는 신앙의 가장 중요한 면을 불의에 대한 항의와 항거로 삼고 있는 종교입니다. 저는 protestant라는 말이 참 좋습니다. protest라는 말이 참 좋습니다. 긴 것은 기라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 하는 것, 옳지 못한 것에 대하여 동의하지 아니하고, 타협하지 아니하고,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아닌 것은 아니라 할 수 있는 용기가 좋습니다.

저는 그래서 사울 왕 까지도 겁을 먹고 피하고 있는 골리앗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나아가 싸워 승리한 다윗이 좋습니다. 저는 신앙을 싸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싸워야 할 것과 싸우지 못하는 것을 불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땅히 싸워야 할 가나안과의 싸움을 피했기 때문에 일주일면 들어갈 가나안을 들어가지 못하고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해야만 했던 것이며, 40년 후에도 마땅히 싸워야 할 싸움을 회피했던 사람들은 하나도 그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 신앙의 모토 중에 하나는 ‘정면 돌파’ 입니다. ‘싸우면 7일, 도망가면 40년’입니다.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지만 저도 비겁한 것이 싫습니다.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라며 대충대충 두루뭉수리 하게 사는 것이 싫습니다.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싸우고 의를 위해서라면 핍박을 받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있는 신앙인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II. 저는 요즘 신문을 잘 보지 않습니다. 어쩌다 봐도 대충대충 봅니다. 가만 보면 저만 그러는 것 같지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문을 잘 보지 않고 봐도 저처럼 대충대충 보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신문을 보고 텔레비전 뉴스를 보고 있으면 피곤하고 짜증이 자꾸 나기 때문입니다.

요즘 우리 사회는 그 어떤 때보다도 보수와 진보가 양극으로 나뉘어 끊임없이 갈등하고 대립하고 있습니다. 저는 본래 싸우는 것을 좋아하는 스타일(?)인데 왜 요즘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싸움에 짜증을 내고 피곤해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싸움의 내용과 핵심이 대부분 정의에 관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예로, 조금 다루기가 조심스럽습니다만, 국보법 폐지 문제를 들고 싶습니다. 국보법 폐지에 찬성하는 것은 정의이고, 국보법 폐지에 반대하는 것은 불의입니까? 반대로 국보법 폐지를 반대하는 것은 정의이고, 국보법 폐지를 찬성하는 것은 불의입니까?

국보법 문제는 매우 중요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저는 그것이 정의와 불의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의와 불의의 문제라고 하면 정의로운 문제에는 정의로운 사람들만 모이게 되고, 불의한 문제에는 불의한 사람들만 모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문제에는 한쪽으로만 사람이 모이는 것이 아닙니다.

국보법의 문제가 정의와 불의의 문제라면, 그것을 어떻게 주장하는가에 따라 정의로운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정확하게 분리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볼 때 국보법의 문제는 매우 중요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국보법 폐지의 찬성과 반대만을 놓고 정의로운 사람인가 그렇지 못한 사람인가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제가 객관적으로 볼 때 국보법 폐지를 반대하는 사람들에게도 일리가 있고, 찬성하는 사람에게도 일리가 있습니다. 국보법 폐지를 반대하는 사람들 중에도 정의로운 사람들이 있고, 찬성하는 사람들 중에도 정의로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똑같이 정의로운 마음을 가지고 살려고 하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국보법 폐지와 같은 문제에 관해서는 의견이 서로 달라지는 것을 우리는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와 같은 문제를 정의와 불의에 관한 문제인 것으로 생각하고 극단적인 싸움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것은 정의와 불의의 문제가 아닌데, 마치 자기가 주장하는 것만이 정의인 것처럼 생각하고 자기와 다른 주장은 불의인 것처럼 생각하고 서로 극단적인 전투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와 같은 싸움은 감동을 주지 못하고 짜증과 피곤함을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행정수도 이전에 대한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행정수도를 이전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정의이고 그것에 반대하는 것은 불의입니까? 반대로 행정수도를 이전하는 것에 반대하는 것은 정의이고 그것을 찬성하는 것은 불의입니까? 행정수도 이전의 문제는 중요한 문제이기는 하지만 정의와 불의의 문제는 아닙니다.

국보법 폐지 문제나 행정수도 이전의 문제는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누구나 다 자기 생각과 주장과 판단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누구나 다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문제는 누구나 다 나와 같이 생각해야 한다는 것은 옳지 않은 생각이요 매우 위험한 생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기와 다른 의견과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 대하여 좀 열린 마음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와 다른 의견과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존중할 줄 아는 마음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나와 다른 의견과 생각에도 얼마든지 일리가 있을 수 있다는 면을 처음부터 인정하고 나와 다른 의견과 생각을 가진 사람에 대하여 너그러울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열린 마음’이라는 말이 좋습니다.

사람에 따라 어떤 사람은 보수적인 경향을 가진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진보적인 경향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사람은 왼 손 잡이로 태어나고, 어떤 사람은 오른 손 잡이로 태어나는 사람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사회도 보면 보수가 있고 진보가 있습니다. 저는 그것이 정상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문제는 보수든 진보든 다 닫힌 보수와 닫힌 진보라는데 있습니다. 보수도 닫히고 막혔습니다. 꽉 막히고 닫혔습니다. 진보도 마찬가지입니다. 꽉 막히고 꽉 닫혔습니다. 생각하고 판단하는 식은 전혀 다른데 자기 생각만 옳다고 고집하고 상대방을 몰아붙이고 정죄하는 것은 보수와 진보가 하나도 다를 것이 없이 꼭 닮았습니다.

사람들이 상대방에 대하여 너그럽지 못합니다. 너무 공격적입니다. 정의와 불의에 문제에 대하여는 단호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문제에 대해서는 서로 의견이 달라 토론할 수 있지만, 분명한 자기주장을 하면서도 자기와 다른 주장을 하는 사람에 대하여 열려 있어야만 합니다. 그것을 우리는 너그러움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단호함과 너그러움이 조화 될 때 사람은 온전하여 집니다. 무조건 단호하기만 해서도 안 됩니다. 무조건 너그럽기만 하여서도 안 됩니다.

맥아더 장군은 자녀를 위한 기도문에서 ‘참된 힘이 너그러움에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녀에게 ‘너그러움’을 가르치고 싶어 했습니다. 얼마나 중요한 이야기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진리와 정의에 대하여 단호해야 하는 것을 배우는 동시에 그렇지 않은 문제에 대해서는 너그러워야 한다는 것을 스스로 배우고 자녀들에게 가르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요즘 우리들의 문제는 단호해야 할 것에는 너그럽고, 너그러워야 할 것에 대해서는 단호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인 빌립보서 4장 5절에 보면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관용이 곧 ‘너그러움’입니다. 그래서 공동번역에서는 이 ‘관용’이라는 말을 ‘너그러움’이라는 말로 번역해 놓았습니다.

관용이라는 말로 번역이 된 너그러움을 영어성경 킹 제임스 버전에서는 moderation라는 말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moderation 이라는 말은 완화, 절제 또는 감속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미국에서는 회의의 의장을 chairman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moderator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교단의 총회장도 영어로 moderator라고 합니다.

너그러움이란 moderation을 의미합니다. 이쪽 말과 저쪽 말을 잘 경청하고 인정 하며,양쪽의 주장을 잘 이해하여 서로에게 중재하고 서로 합의하여 보다 선한 결론을 이끌어 내는 것이 moderation이고 그 일을 하는 것이 moderator가 할 일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지도자의 가장 크고 중요한 성품이 너그러움 (moderation)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너그러움을 관용(tolerance)이라고 번역한 것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관용(寬容)이라는 말은 너그럽게 용납한다는 뜻입니다. 관용은 나와 다른 생각도 너그럽게 용납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 실수하고 잘못한 것에 대해서도 너그럽게 용납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관용(寬容)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이야기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서울 동노회에 있는 영세 교회의 목사이셨던 김종수 목사님 이야기입니다.

김 목사님은 대학생 때 꽤나 어머니 속을 썩였던 아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밤낮 술에 취해 다니고 어머니에게 술 시름을 시키고 주정까지 하였던 아들이었답니다. 그런 아들을 위해 늘 기도하였던 어머니의 기도 때문에 김 목사님이 회개하고 어머니 품으로 돌아옵니다.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는 아들에게 그 어머니가 하셨던 말씀은 ‘괜찮아, 다 모르고 그랬는데 뭐’였습니다.

‘괜찮아, 다 모르고 그랬는데 뭐’. 이것이 바로 관용(寬容) 즉 너그러움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너그러움은 지도자의 마음이며, 어른의 마음이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 사회에 가장 필요한 마음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그 어른의 마음이 없습니다. 지도자(moderator)의 마음이 없습니다. ‘괜찮아, 다 모르고 그랬는데 뭐’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사는 것이 짜증스럽고 피곤한 것입니다.

영어 성경 리빙 바이블에서는 관용과 너그러움이라는 단어를 'unselfish considerate' 비이기적인 동정심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제가 여기서 유의하는 단어는 ‘unselfish'라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너그럽지 못한 이유는 우리가 너무 이기적이기 때문입니다.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것만 생각하는 사람은 너그러운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매사를 이익을 따라서만 생각하는 사람을 공자는 소인이라고 하였습니다. 너그러운 사람은 unselfish한 사람입니다. 자기 이익만을 생각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공자는 그와 같은 사람을 군자라고 하였습니다.

III.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공의와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쉽게 공의와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이 두 속성은 자석의 양극과 같아서 서로 조화되기가 얼마나 어려운 개념인지 모릅니다. 공의를 생각하다보면 사랑을 놓치게 되고, 사랑을 생각하다보면 공의를 놓치게 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단호함과 너그러움’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단호 하시면서도 너그러우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이 단호함과 너그러움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마태복음 5장 10절에서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으라고 말씀하시고, 히브리서 12장 4절에서는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너그러운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빌 4:5)

오늘 우리나라의 문제는 어른 없다는 것입니다. 지도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나라의 대통령까지도 moderator가 되지 못하고 자기 색깔을 분명히 하는 사람이 됨으로 이와 같이 세상이 혼란하고 어려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국회 청문회 스타는 색깔이 분명하고 자기주장을 명확하게 하는 사람이 스타가 됩니다. 그러나 청문회 스타와 대통령의 자리는 다릅니다. 대통령의 자리는 청문회 스타 자리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크고 중요한 자리입니다. 우리나라의 문제는 대통령이 청문회 스타 수준이라는데 있습니다. 대통령이 moderator가 되지 못하니 국론이 분열되고 닫힌 보수와 닫힌 진보의 갈등이 연출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어른이 필요합니다.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moderator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교회는 가만 보면 참 똑똑하고 유능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는 똑똑하고 유능한 사람이 좋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무섭습니다. 저들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과 같은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다이너마이트가 산업을 위하여 쓰여 지면 많은 것들이 건설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쟁에 쓰여 지게 되면 많은 것들이 파괴되고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게 됩니다. 오늘 설교는 우리 사회에도 필요한 설교이지만 특히 우리 사랑하는 높은 뜻 숭의교회에 필요한 말씀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어른이 필요합니다.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moderator가 필요합니다. 그것을 위하여 단호함과 함께 너그러움을 공부해야만 합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고,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우는 것을 배우는 동시에 관용을 훈련하고 연습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너희 관용을 많은 사람에게 알게 하라’ 말씀하셨고, 맥아더 장군은 사랑하는 자녀를 위하여 ‘참된 힘은 너그러움에 있다는 것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자기의 이익만 생각하는 좁은 마음을 버리고 (unselfish) 너그러운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어 세상을 화해시키고 교회를 화해시키는 진정한 어른과 지도자(moderator)가 되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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