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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위로부터 난 지혜의 사람 (약 3: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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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박춘수 목사

세계에서 가장 지혜로운 민족으로 우리가 꼽고 있는 민족이 있는데 바로 유대인들입니다.
유대인의 지혜문서인 탈무드에 보면 이런 지혜의 글이 소개됩니다.
아주 훌륭한 랍비가 있었습니다.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었습니다.그의 행실은 고결하고 친절하며 자애심이 넘쳤습니다. 주의력도 깊고 하나님도 열심히
공경했습니다.걸을 때에는 거미 한 마리 밟지 않도록 조심했고,하나님이 만들어놓은 물건을 깨뜨리지 않도록 신중하게 행동했습니다.제자들도 물론 그를 매우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80세가 되던 어느날 그의 몸은 갑자기 쇠약해져서 노쇠하여 버렸습니다.그도 물론 그 사실을 깨닫고 자기의 죽음이 가까워졌음을 알았습니다. 제자들이 그의 머리 맡에 모이자 그는 울기 시작했습니다.제자들을 깜짝 놀라 물었습니다.
“선생님 왜 우십니까? 선생님께서는 단 하루도 공부하시지 않은 날이 없지 않습니까? 제자들을 가르치시지 않는 날도 없으셨고 자선을 베푸시지 않은 날도 없으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 나라에서 가장 존경받는 훌륭한 분이십니다.하나님을 가장 깊이 공경하신 분이시고 정치와 같은 오염된 세계에는 한 한번도 관계하신 적이 없습니다. 선생님께서 우실 이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랍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울고 있는 거라네 내가 죽는 순간에 하나님이 나에게 너는 공부를 했느냐? 하나님에게 기도했느냐? 자선을 베풀었느냐? 바른 행동을 했느냐? 라고 물으시면 나는 한결같이 네라고 대답할 수 있네.그러나 남들과 같이 섞여서 함께 살았느냐라고 물으시면 나는 아니오라고 밖에 대답할 말이 없네.그래서 나는 울고 있다네”라고 했답니다.
지금 이 시대에 하나님으로부터 난 지혜의 사람이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누가 지혜자인가? 누가 총명자인가 우리에게 질문합니다.
왜 이 질문을 하고 있습니까? 당시에 교회 속에서 잘못된 거짓된 지혜의 사람들이 자신들이 지혜있는 사람인것처럼 뽐내고 사람들을 가르치고 행세하였습니다.특히 그 당시에는 지식으로 남을 가르치면서 자기를 가르치지 않고 거짓된 지혜로 공동체에 문제를 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런 문제 앞에서 하늘로부터 온 지혜가 있다고 합니다. 그 지혜는 참지혜요 그 지혜는 하나님을 닮은 온전한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과연 위로부터 난 지혜의 사람은 어떤 모습입니까?
하늘로부터 난 참지혜로 행하는 사람은 자신과 남에게 분명히 큰 유익을 주는 복을 경험합니다. 지혜로운 믿음을 갖고 삶을 사는 사람들은 분명히 이 세상에서 다릅니다.

1. 하늘이 주지 않는 땅에 속한 거짓된 지혜가 있습니다.

14절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라고 합니다.
여기 하늘로부터 온지혜와 다른 지혜를 소개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알려고 할때 가장 좋은 방법은 비교하여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여기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인 거짓된 지혜는 나타나는 시기와 다툼의 외적인 행함의 모습이 있습니다.
마음의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습니까? 그것의 기원이 어디입니까? 하나님이 아닌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라고 합니다.

그 당시 세상은 헬라철학과 사상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교회 속에 이방 특히 헬라철학의 영향으로 교회의 진리가 많이 왜곡되었습니다. 특히 헬라철학은 굉장히 철학과 같은 지식을 앞세우면서 이론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 기준의 지혜로운 사람은 논쟁을 잘하고 지식을 통해서 말을 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지혜의 사람들이 가는 곳마나 다툼과 분쟁이 있었습니다. 본문에서 야고보는 분명하게 지적합니다. 이런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료 정욕적이요 마귀적인 거짓지혜라고 합니다.

여러분 거짓지혜의 가장 특징이 무엇입니까? 마음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다고 합니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거짓된 지혜는 시기합니다.그로 인해서 다툼의 삶을 살아갑니다.

C.S 루이스라고 하는 유명한 기독교 사상가가 쓴 “일곱가지 악과 선”이라는 책에 보면 시기심의 죄에 대해서 가장 혐오스러운 악덕이라고 합니다.시기심이란 다른 사람들이 잘 되는 것을 한탄한다라고 합니다. 다른 누군가 성공하면 성난방울뱀처럼 대가리를 치켜세우면서 분노하면 시기심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죤 크리스소톰은 “시기는 의복을 갉아먹는 좀벌레처럼 사람을 갉아 먹는다”라고 합니다.시기심의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고급자동차를 갖는 것,지위가 높아지는 것, 아주 악기를 잘 연주하여 박수를 받는 것, 성공하여 신문에 이름이 나는 것 모든 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바실이라는 사람은 시기심은 가장 미개한 형태의 증오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주로 언제 시기합니까? 잘난 사람을 보면 시기합니다.
구약에 사울왕이 그랬습니다. 사울왕은 이스라엘의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신하 다윗이 전쟁터에서 골리앗장군을 죽이고 돌아오자 많은 사람들이 다윗을 높이면서 환영합니다. “사울의 죽인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삼상18:9) 하였습니다. 이것이 문제의 발달이 되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임금은 사울인데 사울은 천천이고 다윗을 만만이다라고 하자 사울은 “왜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거의 더 얻을 것이 나라밖에 무엇이냐”(삼상18:8)라고 하면서 다윗을 시기하고 분노합니다. 이때부터 다윗과 사울의 관계는 서로 원수의 관계가 됩니다. 사울의 인생의 모든 에너지가 시기심 때문에 소모됩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정신병에 걸릴정도가 되었습니다. 다윗을 죽이려고 매일 쫓아다니다가 시간 더 버리고 나중에는 지도자로서 모든 행복을 다 도둑맞습니다.

여러분 사울은 왕으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행복을 시기심 때문에 다 빼앗기고 맙니다. 그 마음하나만 고치면 얼마나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었습니까? 그런데 시기심 때문에 결국 자멸하고 맙니다.
종종 교회 속에서 남이 잘되는 것을 보아주지를 못합니다. 누가 좀 봉사를 잘 하려고 하면 “언제부터 지가 청소했냐”라고 합니다. 교회 찬양대에서 찬양좀하려고 하면 “잘난척한다”고 합니다. 열심히 양육받고 훈련받아서 변화되려고 하면 “집안일도 못하면서 교회일만 열심이다”라고 합니다. 다른 집안 아들이 잘되는 것은 실수라고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자녀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복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이것은 정말 믿음의 사람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런 시기심이 단순한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시기심은 위로부터 온지혜가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라고 합니다. 시기의 영은 곧 세상의 영 곧 마귀의 영으로 인해서 되어지는 영적인 심각한 죄입니다. 우리의 옛사람을 다스린 세상의 영인 마귀는 절대로 남을 칭찬하거나 남을 축복하지 못합니다.

만약에 성경의 사울이 한번만이라고 다윗을 진정으로 축복하엿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람들이 다윗이 만만이고 자신이 천천이다라고 할때에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위대한 지도자를 선물로 주었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다윗을 축복하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결국 그 축복의 마음과 말을 하지 못한 사울은 버림받고 말았습니다.
스스로는 믿음이 있다고 하는데 이유없이 자꾸 남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있다면 나의 믿음은 나의 지혜는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속에서 형제를 험담하시면 안됩니다. 자꾸 남을 깍아내리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지헤 하나님이 주신 영은 남을 잘되게 하고 남을 축복하게 하는 영이십니다. 만일 나의 마음 속에 시기심이 있다면 이것은 악한 영의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요란과 악한일에 내가 드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런 모습이 나에게 있다면 이제 내가 선택해야 합니다. 모든 시기의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지혜의 사람으로 새롭게 세워져야 할 줄로 믿습니다.

2. 위로부터난 참지혜의 사람은 온유함으로 선한 증거를 보입니다.

13절 “저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여기 위로부터 난 참지혜의 사람은 말을 잘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지식의 사람도 아닙니다. 참지혜의 사람은 총명의 사람은 온유함으로 선행이 있는 사람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온유함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화를 낼 줄 안다. 그러나 정당한 대상을 향하여 정당한 정도로,정당한 때에,정당한 목적으로,정당한 방법으로 화를 낼줄 아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다”라고 했습니다.
본래 온유의 이 단어는 사나운 짐승을 훈련시킬때 사용되었습니다. 사자나 이리같은 것을 들에서 훈련시킬때 잘 훈련이 되면 주인이 “온유해졌어”라고 말을 합니다. 힘이 잘 조절되어 유익한 목적을 위해서 사용되도록 훈련된 힘이 온유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온유함이 특징입니다. 예수님께서 온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자니”라고 하시면서 온유함의 선한 증거를 우리에게 보이셨습니다.주님이 주시는 온유함의 지혜는 철저하게 남을 위해서 남의 도움을 주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그 지식으로 남을 섬기고 그 몸으로 남을 섬기고 그 능력으로 남을 살리는 삶을 살아갑니다.우리 주님이 그러셨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온유함이 그렇게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지 못합니다.

그런데 정말 강한 것은 온유함입니다.운동을 할때 보십시오. 너무 힘을 주어 배트를 흔들거나 주먹을 휘둘러 보십시오. 야구의 경우에는 폭투가 나옵니다.권투의 경우에는 금방 지키고 맙니다. 축구의 경우에도 다리에 너무 힘을 주면 볼이 헛나기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강한 것은 쉽게 부르진다고 말을 합니다. 우리의 마음도 너무 힘을 주면 어떻게 됩니까?
결국 강하게 나오면 강하게 부딪히게 됩니다.
목회를 하면서 제가 느낀 것이 장기목회를 하시고 목회를 잘 하시는 목사님들을 만나보면 온유하시다는 것입니다. 웬만한 일에도 표정이 변하지 않고 유하게 모든 것을 물흐르듯이 유하게 목회를 하십니다. 그러니까 장기목회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리스도인들이 외유내강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마음은 강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외적인 말과 태도는 정말 주드러워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같이 경쟁사회에서 이런 온유함의 모습은 너무 손해보는 것같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도 종종 손해보려고 하지 않고 양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본질적인 것이 아닌데도 나의 것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하고 손해보지 않으려고 하고 꼭 내주장을 하여서 이기려고 합니다. 그렇지만 결과는 오히려 손해를 봅니다.

성경에 보면 온유함의 삶으로 삶의 선한 열매를 맺은 대표적인 증인이 있는데 바로 이삭입니다. 이삭이 흉년을 만나서 그랄로 이주하게 됩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농사하였는데 하나님께서 100배의 결실을 맺게 하셨습니다. 이상한 것은 그 흉년 때에 이삭이 샘을 파면 물이 펑펑 쏟아져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흉년때에 이삭은 양과 소떼을 크게 벌어서 부자가 됩니다. 그러자 그랄 사람들이 시기하여 결국은 평지에서 그랄골짜기로 밀려납니다. 그런데 그랄골짜기에서 우물을 파니까 또 물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삭의 종들이 우물을 파서 물이 나오자 그랄 목자들이 와서 ‘이 물은 우리 것이다’라고 하면서 빼앗습니다. 이렇게 3번씩이나 뺏앗습니다. 여러분 우물을 파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수일이 걸릴 수 도 있습니다. 그리고 목축업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물은 생명입니다. 흉년의 상황에서 물을 얻는 것은 생명줄과 같습니다. 그런데 3번이나 우물을 빼앗기면서도 이삭은 온유함으로 다투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이삭이 온유함으로 행하고 났을때 그 밤에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나타나서 복을 주십니다. 그리고 이삭을 괴롭히고 우물을 빼앗던 그랄의 왕 아비멜렉이 이삭을 찾아와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의 사이에 맹세를 세워 언약을 맺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너는 여호와께서 복을 받은 자로다”라고 합니다.

구약의 이삭은 예수님의 온유함을 가장 잘 보여주는 증인 것습니다. 신약에 오신 예수님은 어떻습니까? 정죄를 당하시고 골고다 언덕에 십자가를 지시면서 올라가실 때 그분은 온몸에 말할 수 없는 고통과 괴로움을 당하면서도 자기를 위해서 천사를 동원하고 만물을 다스릴 수 있는 능력과 권세를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를 위해서 온유하신 것입니다.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온유함으로 끝까지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많은 경우에 교회가 말과 지식으로 난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온유함으로 끝까지 선한 증거를 실천해보이는 것보다 말과 지식으로 자신을 증명하려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진짜 참지혜는 마음의 온유함으로 선행을 행합니다. 비록 손해가 있고 분노의 상황이지만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지혜인 온유로 선행을 실천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온유한 사람이 결국 땅을 기업으로 얻고 하나님의 복을 경험하는 것을 봅니다.
끝까지 온유함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을 행하시는 삶으로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그때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기업의 참여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위로부터 난 지혜는 균형잡힌 온전한 인격으로 열매를 맺습니다.

17절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여기 보면 위로부터 난 지혜의 사람은 균형잡힌 온전한 인격의 모습입니다.
우선 첫째 성결합니다. 다음에 화평 셋째 관용 넷째 양순 다섯째 긍휼 여섯째 선한 열매 일곱째 편벽이 없으면 여덟째 거짓이 없다라고 합니다. 이것이 위로부터 난 하나님의 지혜를 갖은 자들의 외적인 모습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참지혜는 결코 수학공식을 더 하나 많이 외우고 외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꾀가 많아서 이 사람 저 사람을 자 조정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여기 참지혜의 사람은 결국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서 균형있는 인격으로 성장한 사람입니다. 나에게 성결이 있습니까? 죄로부터 멀어진 깨끗한 삶의 인격이 있습니까? 하늘이 준 지혜의 사람입니다. 나에게 관용이 있습니까? 하늘이 준 지혜의 사람입니다.

이렇게 균형잡힌 인격의 사람으로 인해서 결국에 맺어지는 가장 중요한 열매가 무엇입니까? 바로 화평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모든 사역을 통해서 결국 최종적으로 이루신 외적인 열매가 무엇입니까? 화평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하나님과 하나되게 하시고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되게 하시고 남자와 여자가 하나되게 하시고 백인종과 흑인종도 하나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안에 진정으로 거하는 사람이 있는 곳에는 하나되는 화평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반대로 세상을은 어떻습니까? 왜 가정이 깨어지고 직장이 노사가 하나되지 못하고 사회에 분란이 일어납니까? 왜 나라가 자꾸 서로 싸우고 분란이 일어납니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 세상을 다스리는 영인 마귀는 자꾸 우리를 화평하게 하기보다는 분쟁을 일으키게 합니다.
그 사람이 위로부터 난 지혜의 사람인가 아닌가 외적인 가장 중요한 표징이 바로 화평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세상이 주는 지혜와 지식과 방법으로 살아가면 화평할 수 없습니다.
종종 교회에서조차도 하나님이 주신 지혜가 아닌 세상의 지혜로 우리가 화평을 깨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보통 2가지의 경우가 교회의 화평을 깹니다.

내가 주장하려고 할때 교회의 화평이 깨어집니다.세상지혜는 나를 드러내려고 하고 하나님이 주신 지혜는 주님을 드러내려고 합니다. 어떤 분들은 내가 교회에서 일을 많이 한 것으로 권리를 주장하려고 합니다. 어떤 분들은 교회에서 헌금을 많이 낸 것으로 주장하려고 합니다. 어떤 분들은 내가 오래 믿었다는 것으로 어떤 분들은 직분으로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려고 합니다. 내가 많이 봉사하셨습니까? 내가 많이 헌금하셨습니까? 내가 직분자입니까? 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셔야 합니다. 나보다 못한 사람보고 내가 과시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내가 더많이 봉사하고 충성햇으므로 교회에서 대장이 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언제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남보다 내가 더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꾸 교회에서 나를 내세우고 높이려고 하는 못된 죄악의 본능이 우리 속에 있습니다. 나의 은사를 통한 봉사 나의 물질을 통한 봉사 나의 삶을 통한 모든 섬김이 화평을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다음에 교회에서 화평이 깨어지는 이유는 쉽게 분노하여 함부로 말을 할 때 깨어집니다. 세상지혜는 급한 감정으로 분노하면서 과격한 말을 합니다. 야고보서에서 우리에게 아주 조심하며 경계하는 감정이 바로 분노입니다. 그래서 약1:20에서는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느니라”고 합니다. 성내는 이유가 아무리 의롭고 정당한 것이라고 하여도 화를 내면 의를 이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 종종 교회에서 의를 주장하고 의를 이룬다고 생각하면서 싸우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분노로 싸워서는 의를 이루지 못합니다. 오늘 본문 18절에 말씀하는 것처럼 의의 열매는 오직 화평을 심을때 거둘 수 있습니다.
제가 늘 말씀드리는 것인데 교회 속에서 비본질적인 것과 비생산적인 것에 너무 연연하여서 그것 때문에 싸우지 않기를 바랍니다.

제가 신혼초기에 시시한 문제 때문에 부부싸움을 했었습니다. 우리 집사람과 저는 기질도 다르고 성격도 다릅니다. 그래서 집에서 살아가는 방식 살림살이 방식이 다릅니다. 많이 싸운 것 중에 설거지 문제 치약짜는 문제 청소하는 문제들이었습니다. 저는 자랄 때 너무 깔끔한 어머니의 엄한 교육 속에 자라서 더러운 것을 못봅니다. 그런데 저희 집사람은 별로 그런 것 신경쓰지 않습니다. 나는 먼저 일을 해놓고 쉬자는 편이고 집사람은 대화하고 쉬었다고 일을 하는 편이었습니다. 때때로 지금도 이 문제가 서로 충동할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이겨내고 있습니다.
지금 제가 깨달은 것이 무엇인가 하면 제일 중요한 것은 화평한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화평한 가정이 제일입니다. 화평한 교회가 제일입니다. 아무리 청소를 잘하여놓고 장식을 잘해놓아도 화평하지 못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교회당을 멋잇게 지어놓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도 화평하지 못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할수 있거든 모든 사람과 화평한 사람이 정말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핍박하는 자 나의 원수까지도 화평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참된 지혜의 사람입니다.

요즘 우리나라가 정치적으로 어려운 상황입니다.
수도이전문제,국가보안법철폐문제등으로 인해서 서로가 하나되지 못하고 나라가 분열되어져있습니다.이때 과연 교회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교회의 가장 주요한 역할은 서로 하나되도록 화평케하는 역할이 되어야 합니다. 무엇이 옳고 그르고를 판단하여 성명성를 말하기 이전에 나라와 백성이 하나되도록 영적으로 힘을 모아야 할때입니다.
저와여러분들이 하나님이 주신 지혜인 온유함과 지혜의 열매를 통해서 하나님의 평화를 이땅에 이루어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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