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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침마다 새로운 것 (애 3:22-26, 딤후 1:7-10, 요 11:3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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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박종화 목사

구약의 말씀: 예레미야 애가 3: 22 ~ 26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디림이 좋도다

서신서의 말씀: 디모데 후서 1:7 ~ 10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복음서의 말씀: 요한 복음서 11:38 ~ 44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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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가을이 되어 결실의 계절로 접어들었음을 아침마다 느낍니다. 무더웠던 날씨가 새벽이 되면 선선할 정도로, 때로는 감기도 들 정도로 서늘하게 바뀌었습니다.

새벽을 생각하면 최근의 열풍 하나를 떠올리게 됩니다. 요즘에 사람들은 사람의 생활방식을 두 가지로 분류합니다. 아침형 인간이 있고, 저녁형 인간이 있다는 거지요. 저는 어느 형에 속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무래도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좋아서가 아니라 교통사정이나 직장의 형편상 어쩔 수 없이 옛날보다는 훨씬 일찍 일어나서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아침형 인간이 되기를 강요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문명, 우리 문화의 변화, 생활상의 변화가 이 속도로 계속 되면, 아마 얼마 안 가서 모두가 다 아침형 인간이 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면 아침형이라는 말 자체가 의미가 없어지지 않습니까? 그러니 그 다음에는 아침형보다 더 빠른 새벽형이 나올 것이고, 그것으로도 부족하면 저녁형이 다시 나오고, 그래서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아침형 인간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아침에 일어나서 그날 하루를 어떻게 출발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제 경우를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저는 예를 들어 아테네 올림픽 때처럼, 개막일을 향하여 마이너스 10일, 9일 하고 세면서 사는 그런 식으로는 살지 않습니다. 저는 아주 평범한 일상을 맞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물 한 잔 마시고 문 열고 제일 먼저 집어오는 것이 신문입니다. 사실 목사라면 형식적으로라도 제일 먼저 성서를 읽고 하루를 시작해야 하는데, 저는 그렇게 못하고 먼저 신문을 읽습니다. 그리고 방송도 듣습니다. 음악도 듣고 뉴스도 듣습니다.

요즘 매일 아침, 신문을 들자마자 제 눈에 들어오는 게 뭐냐 하니까, 어두운 보도들입니다. 아 오늘도 어둡구나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갈등, 대립, 문제, 위기, 이런 걸이 대문짝만한 크기로 신문을 뒤덮고 있습니다. 방송을 들어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창밖을 바라보면 아침 햇빛이 찬란하고 바람은 시원한데, 인간사의 아침은 매일 매일이 어둡습니다. 인간의 아침보다 자연의 아침이 더 순수하고 밝고 아름답습니다. 제가 아침마다 느끼는 감상입니다.

오늘 구약성서 본문에서 예레미야 애가를 쓴 예언자 예레미야는 어둠의 그림자, 갈등, 좌절로 아침을 시작합니다. 민족 전체가 바벨론의 속박 아래 들어갔습니다. 민족만 아니라 가정도 개인도 다 암흑 속에 내몰렸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어둠과 슬픔뿐, 오늘도 완전히 짓밟혀 사는 노예의 삶이 시작될 뿐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가 역설적으로 말합니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역사를 들추면 어둠밖에 없지만, 이 인간 역사 뒤에 계시는 하나님의 손길, 이 인간 역사 앞에서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의지를 본다는 것입니다. 그걸 하나님의 긍휼,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표현합니다. 그것 없이는, 그것을 느끼지 않고는 하루하루 살아갈 수 없습니다.

아침형 인간이 중요한 게 아니라, 무엇으로 아침을 시작하는가가 중요합니까? 일찍 일어나는 것이, 눈을 빨리 뜨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눈을 뜨면 무엇을 향하여 어떻게 하루를 사는지가 중요합니다. 아침형 인간의 미래가 중요한 것이지, 아침형 인간이라는 방식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오늘 성서의 말씀은 우리에게 일상 속의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그 일상의 깊이에 담겨진 역사의 혼, 인간의 아름다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이것을 아침마다 느끼고 감사하라고 가르칩니다.

옛날 우리 사회의 역사 한 토막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때는 1897년 12월 26일, 크리스마스 다음날입니다. 1897년이면, 1884년에 이 땅에 미국의 선교사들이 당도한 뒤에, 처음으로 교회가 세워진 때입니다. 이때 새문안교회가 장로교회로 세워지고, 정동감리교회가 감리교회로 처음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기록을 보았더니 정동감리교회를 봉헌하던 1897년 12월 26일 저녁에, 교회당 봉헌기념 특별강연회가 있었는데, 그 제목이 뭔지 아십니까? 「여성에게 교육을 실시하는 것이 가하느뇨?」 이런 제목입니다. 백 몇 십 년 전이니까,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의 윤리가 엄격할 때인데, 그때에 기독교 선교는 양성평등, 여성교육을 내건 것입니다. 그래서 이 강연회를 딱 붙여놓고 찬반 토론회가 열렸습니다.

찬성 쪽을 대변하는 사람이 서재필 박사였습니다. 미국시민권을 가지고 있었고, 〈독립신문〉을 만든 분입니다. 반대 논리의 대표로 선 사람이 윤치호 선생이었습니다. 두 분 다 유학파이고, 둘 다 미국 문화와 사상을 배워왔지만, 남여 윤리에 관해서는 윤치호 씨가 상당히 전통적인 입장을 유지하고 있어서 반대파에 섰다고 합니다.

기록을 보면 토론한 내용은 대강 이렇습니다. 서재필 씨가 일어나서 미국의 예를 들면서 여성에게 교육을 받게 함으로써, 사회가 어떻게 바뀌고 가정이 어떻게 바뀌었는가를 장황하게 설명합니다. 그러자 윤치호 씨가 나서서 반대 논리를 펴는데, 미국과 한국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성서는 여성을 교육을 하지 말라고 했다고 하면서, 그 근거로 창세기 3장을 듭니다. 하나님이 선악과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셨는데, 하와가 뭘 좀더 알려고 선악과를 따먹은 덕분에 아담도 망하고 하와도 망했다는 겁니다. 그러니 여성은 가르치면 가르칠수록 망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당시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만, 교회에서는 토론을 할 때 성서를 어떻게 읽느냐가 중요합니다. 성서의 권위가 그만큼 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청중 중에 한 여성분이 나섰습니다. 직책은 YWCA 부회장으로, 사람들이 역사학적으로 추론해본 결과 성이 여씨고 이름이 매래, 여매래라는 분이었습니다. 이분이 일어나서 큰소리로 하는 말이, “성서를 인용하는 것은 좋지만, 왜 하필 창세기 3장의 하와 이야기만 인용합니까?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서에 보면 구세주 예수를 탄생시킨 위대한 여성 마리아가 있지 않습니까? 마리아 같은 여자가 없이 어떻게 구세주가 탄생합니까?” 했답니다. 군중 속에서 큰 박수가 나왔다고 합니다.

제가 오늘 이 이야기를 드린 이유는 똑 같이 유학하고 서구 문화를 경험했지만, 여성의 교육문제를 놓고 완전히 생각이 다르듯이, 똑같은 아침형이라 하더라도 무엇을 지향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완전히 다르게 된다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함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과거청산, 친일청산, 국가보안법 개폐 등 온갖 것을 고치자고 난리입니다. 그래서 사회가 완전히 두 쪽으로 쪼개진 것 같습니다. 아침마다 모두가 쪼개지는 이야기, 전부 다투는 이야기를 보고 듣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바꾸어야 할 것은 바꿀 수 있으면 다 바꿔야 하지만, 우리는 너무 어제 또는 과거에 집착하면서 바꿈을 이야기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미래를 향하여 살아가는데, 왜 우리 사회에는 내일에 관한 토론은 없고 어제 이야기만 넘칩니까? 미래의 밝은 희망을 바라보면서 오늘 무엇을 바꿀 것인지를 논의한다면, 아마 불필요한 갈등은 줄어들 수 있지 않습니까? 선진화란 미래 지향의 선진화입니다. 후진성이란 과거지향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다 선진사회에서 살고 싶어 하면서도 미래 이야기는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와를 보고 여성의 교육을 생각하는 사람과 마리아를 보고 여성의 교육을 생각하는 사람의 근본적인 차이가 무엇이냐 하면, 미래지향적이냐 아니면 과거지향적이냐 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사회가 기왕이면 내일을 바라보면서 과거를 심판하고 오늘을 판단했으면 좋겠습니다. 내일은 우리 모두의 것입니다.

“아침에 잠에서 깨어났더니 눈앞에 보이는 것은 바빌론의 포학한 식민지 통치뿐입니다. 여기서 새로운 것을, 새로운 희망을 볼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과거의 아름다웠던 시절을 뒤돌아봐도 소용없습니다. 주님의 사랑, 주님의 긍휼, 주님의 진실하심을 믿고 내일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예레미야의 외침입니다. 이런 외침이 오늘 우리의 외침이 되어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지금의 문명은 놀랍게 발전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자연을  너무 낭비하다 보니까 공기오염이나 대기오염을 초래했을 뿐만 아니라, 이제 물까지 부족해서 앞으로 큰 문제가 되리라는 보고서가 여기저기서 발표된다고 합니다. 사실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는 심각한 일입니다. 그런데 어떤 지질학자가 써낸 보고서를 읽어보고서, 저는 전문가는 아니지만, 아하, 희망이 없지는 않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질학자의 보고서를 간단히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현재 지구에서 바다를 빼고서 강이나 호수의 물, 우리가 식수로 사용할 수 있는, 지상에 표출된 식수의 양과, 지하 깊이 묻혀 있는 개발되지 않은 물의 양을 비교해보았더니, 지상에 표출된 물은 전체의 3%밖에 안 되고 97%는 여전히 땅 아래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지하수를 과도하게 개발하여 3% 대 97%대로 비율이 바뀔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수만 년 동안 먹고 마셨음에도 불구하고 97%는 여전히 땅 속에 잠재적 가능성으로 보장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지하수를 파기도 하지만, 자연적으로 땅 속에서 물이 솟구쳐 나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러분, 세계를 돌아다니다 보면 지하에서 물이 터져 나와서 샘을 이루는 경우를 보셨을 텐데, 그것을 아르테시안 웰(Artesian well), 아르테시안 우물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부르는 원인을 찾아보니까, 12세기 경에 프랑스의 한 촌락 도시인 ‘아르또와’(Artois)라는 동네에서 일어난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그 동네에서 갑자기 지하 600미터에서 물이 솟아올랐는데,  그 물이 지상 90미터까지 솟구쳤다고 합니다. 얼마 동안 지속되었는지에 관한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이때 당시 지하에서 솟구쳐 나온 물이 하루에 약 378만 리터였다고 합니다. 이게 말하자면 지하분수입니다. 그래서 이 분수를 가리켜서 아르또와의 샘물, 아르테시안 웰,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12세기에 있었던 일이니까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지금도 분출하는 것들이 있고, 게다가 일본처럼 지진이 일어나서 분출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우리가 손으로 만지고 먹고 마실 수 있는 물보다 엄청나게 많은 97%의 물이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매장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물의 잠재성이 97%나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일을 위한 물은 엄청나게 많다는 뜻입니다. 어제의 아픔도 있었고 오늘의 어려움도 있지만, 내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저장해놓은 창조의 잠재력은 우리한테 무한대로 열려있다는 뜻입니다.

이 사실을 생각하면서 성서를 다시 읽어보십시다. 하나님이 우리한테 줄 생명의 잠재력은 땅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도 있지 않습니까? 그 하늘에 있는 내일의 양식은 얼마나 크고 아름답겠습니까? 땅의 양식과 하늘의 양식을 다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얼마나 많은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까? 이렇게 생각해보면 오늘 당하는 고통이 괴롭고 슬프지만, 내일에 열려있는 무한한 가능성 앞에서,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침에 일어나서 무한대로 열려 있는 미래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한 구절의 찬송으로, 한 절의 성서 말씀으로, 한마디의 기도로 찬양을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사회의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 중에 하나는 바로 이런 미래의 가능성에 눈을 뜨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침마다 이 생각을 호흡처럼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는 과거와 현재에 인간의 가장 아픈 곳, 힘든 곳, 절망적인 곳, 오늘 디모데후서 말씀에 따르면, 인간의 모든 고난 가운데 함께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목적은 고난 속에 머무르기 위함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 잉태되는 내일의 무한한 희망을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아까 3% 대 97%의 이야기를 했는데, 오늘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께서 마르다의 여동생 나사로를 살려주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사로가 죽어서 나흘 동안 무덤 안에 있었는데 예수께서 살려내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는 예수께서 인간의 고난을 다 겪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는 증언을 하기 위한 전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요한복음의 이 이야기를 보면서 잠시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인간이 살아있는 동안의 그 고난의 세월이 얼마나 깁니까? 그런데, 성서에 나타난 죽음의 시간은 아주 짧은 것 같습니다. 예수에게는 사흘, 나사로는 나흘 아닙니까? 우리의 수고가 끝나고 죽은 뒤의 세월이 인간의 계산법으로 수십 년, 수백 년일 수 있겠지만, 신앙의 눈으로 보면 사흘로 압축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3 대 97은 지구의 물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는, 고통과 죽음에 묶일 수 있는 역사가 3이라면 생명과 부활에 담길 역사는 97이나 될 것입니다. 내일은 항상 열려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열려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잠시 그리스도도 함께 고난을 당하나,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한 부활의 영광에 동참하게 될 것이라는 놀라운 선언을 2천 년 전부터 매 주일마다 듣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예수를 믿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울상을 하고 매일 아침을 시작해야 합니까? 예레미야가 다시 말합니다. 우리가 만들고, 이민족이 만든 이 역사는 아침마다 어둠 가운데 시작될 수 있지만, 그 어둠의 터널 건너편에는 주님의 위대한 사랑, 주님의 긍휼의 역사가 기다립니다. 그 역사는 나를 아침마다 새롭게 합니다.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신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재능도, 신앙의 깊이도, 희망의 높이도, 사랑의 넓이도, 현재로서는 작은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오늘 매일을 시작하면서 미리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합니다. 미래는 열려있고, 그 미래는 우리가 가질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제가 언젠가 설교에서 말씀드렸습니다만, 유대인들이 나치 수용소에 갇혀서도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 중에 하나는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아침마다 눈을 뜨고 수용소 창을 내다보면 절망의 창살과 죽음의 철조망을 보았고, 그런 절망 가운데서 아침을 맞는 사람들은 조금씩 조금씩 죽어갔습니다. 그러나 창살 너머, 철조망 건너편에 핀 작은 들국화를 아침마다 본 사람은 조금씩 조금씩 생명을 연장해 갔습니다. 2차대전이 끝났을 때 이런 사람만 살아남았습니다. 정신병리학자 빅터 프랭클의 자전적 이야기입니다.

매일 아침마다 우리 인간의 삶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대의 사랑, 이 사랑으로 우리는 살 수 있습니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긴장으로 맞이하는 아침이 아니라, 자연스럽고 일상적이며 희망을 품고 있는 아침, 하나님이 주신 아침, 우리 모두가 즐겨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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