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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시대에 적합한 성도의 생활 (삿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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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창인 목사

본문 말씀의 무대가 된 사사시대는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아 땅에 들어간 여호수아 시대까지를 신정시대라 칭하며 이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통치한 시대입니다. 이 신정시대에 이어 여호수아가 죽은 후 사울을 왕으로 세울 때까지를 사사시대라 일컫습니다. 한 시대가 끝나고 다른 한 시대가 열리는 새 시대라 할 수 있겠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삶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해서 이들이 어떻게 살아갔는지, 새로운 시대에 적합한 생활이 무엇인지 본문의 말씀 가운데서 찾아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I. 기도의 생활(1-2절)

첫째, 혼란의 때에 기도(1절 상반절)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혼란의 때에 기도의 생활이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1절 상반절에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막새 시대가 시작되는 사사 시대 초엽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큰 혼란이 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인도하였고 모세를 뒤이어 여호수아가 그 백성들을 거느리고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했습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강력한 지도자 모세와 여호수아가 백성들을 차례로 인도하고 통솔해 주었습니다. 이 두 지도자가 죽은 후에 아직 후계자를 세움 받지 못한 상황에서, 사방의 적들 가운데 살면서 지도자를 잃어버리고 얼마나 큰 혼란이 왔겠습니까? 12지파가 모여 살고 있었지만 12지파 가운데 가나안 땅에서 기업을 얻은 지파는 사실상 다섯 지파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일곱 지파는 아직도 한 곳에 모여 천막을 치고 살았습니다. 이제는 만나도 내리지 않고 농사도 지을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먹을 것조차 구할 수 없는 위급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위급하고 혼란한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여 회의를 한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즉 기도할 문제라 생각하고 기도한 것입니다. 즉 위급한 상황에 놓였을 때 이들은 기도했습니다. 조직을 하지 않았습니다. 조직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시대는 기도로 시작해야 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도 하루 일을 시작하기 전에,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기도로 시작하는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 합심하여 기도(1절 하반절)

1절 하반절을 보면 "우리 중에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리이까?" 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미 땅을 얻은 자손이나 땅을 얻지 못한 자손이나 합심하여 기도했다는 말씀입니다. 혼자 기도하는 것도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합심하여 기도하는 일은 더욱 귀한 일인 것입니다. 그러나 합심하여 기도하는 일은 더욱 귀한 일인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오순절 성령강림 후 기독교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계속 부흥되어서 그 수가 늘어나가 사도행전 12장의 말씀을 보면 유대인의 관원들은 교회 중 몇몇을 해하려고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죽이고 무교절에 베드로도 붙잡아 옥에 가두고 쇠사슬에 묶어 유월절 후에 백성들 앞에 끌어내어 처단하려고 했습니다. 이 때에 사도행전 12장을 보면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 또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모여 기도하더라" 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합심하여 기도했다는 뜻입니다.

그 날 밤 옥문이 열리고 옥중에 광채가 환히 비추며 천사가 나타나 베드로에게 일어나라고 하자마자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겨지고 옥문이 열렸습니다. 군사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지키는 옥문을 무사히 통과하고 베드로가 따라갈 새 행하는 일이 참인 줄 알지 못하고 환상을 보는가 했습니다. 이에 첫째와 둘째 파수를 지나 성으로 통하는 성문에 이르니 문이 절로 열린지라. 나와 한 거리를 지나매 천사가 곧 떠났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정신이 나서 그 때에 깨닫고 천사를 보내어 주께서 나를 구원시켜 주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이 내용을 보면 베드로가 옥에 갇혀 지도자를 잃고 갈피를 잡지 못해 막막한 때에도 교회는 합심하여 간절히 기도했다는 것이며, 합심하여 기도할 때, 문이란 문은 다 열리고 길이란 길은 다 뚫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가정에 문제가 있을 때 온 가족이 합심하여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시어 형통케 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셋째, 응답 받는 기도(2절)

기도에는 반드시 응답이 있습니다. 2절을 보면 하나님의 응답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중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리이까? 라는 기도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보라 내가 이 땅을 그 손에 붙였노라" 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응답이 더디 온다고 낙심해서 기도를 중단하면 응답을 받지 못합니다.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아야 하며 기도하다가 쉬면 안됩니다.

기도하고 나면 응답이 없는 기도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찾을 때에 아버지의 응답이 더딜 수 있는 것뿐이지, 응답하지 않는 아버지는 없습니다. 그런데 응답 받기 전에 낙심하거나 기도를 중단하면 죄가 된다고 사무엘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응답 받을 때까지 집중적으로 꾸준히 기도하면 응답을 받는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많이 기도했느냐 하면 응답이 올 때까지 기도했습니다. "유다가 먼저 올라가라. 내가 네 손에 이 땅을 붙여 주겠노라" 고 하나님께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응답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응답 받는 기도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혼란의 때에 기도하고 합심해서 기도하고 응답 받는 기도의 생활이 새 시대에 있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II. 협력의 생활(3-4절)

첫째, 가능한 협력(3절 상반절)

3절 상반절 말씀을 보면 "유다가 그 형제 시므온에게 이르되 나의 제비 뽑아 얻은 땅에 나와 함께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자" 는 기록이 있습니다. 본문의 제비 뽑아 얻은 땅은 사실상 얻은 땅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전 야곱의 열두 아들의 자손인 열두 지파 중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두 지파 반이 땅을 얻습니다. 나머지 아홉 지파 반이 요단 강을 건너갑니다. 여호수아 인도 아래 요단 강을 건너서도 두 지파 반만이 땅을 얻고 일곱 지파는 땅을 얻지 못했을 때 여호수아가 "너희가 가나안 땅을 샅샅이 돌아보고 지도를 그려 오라" 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려온 지도를 일곱 조각을 내어 그 그림으로 그린 지도 조각을 제비 뽑은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일곱 지파는 지도상의 땅을 얻었고 여호수아는 나이가 많아 죽었습니다. 그리고 곧 이어 사사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때에 유다 자손이 먼저 올라가라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시므온 지파에게 갔습니다. 다른 일곱 지파가 다 있었지만 먼저 시므온 지파에게 갔습니다. 이것은 유다가 먼저 땅을 차지해야만 지리적으로 그 다음에 다른 지파들이 차례로 차지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시므온 지파를 제쳐놓고는 다른 지파와는 말로는 협력이 가능하나 실제적 협력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가까운 이웃, 손이 닿는 곳, 협력할 수 있는 데서부터 협력이 시작된 것입니다. 즉 가능한 협력입니다.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옛날 몽고 제국을 세운 징기스칸이 그가 죽을 무렵 어마어마한 땅을 차지해 놓고는 다섯 아들을 모이게 했습니다. 그리고 막대기 두 개씩을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들들에게 막대기 한 개씩을 꺾어보라고 하자 모두 쉽게 꺾었습니다. 그러자 징기스칸은 나머지 다섯 막대기를 함께 모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큰아들부터 다섯째까지 꺾어보라고 했지만 아무도 꺾지를 못했습니다. 그러자 징기스칸은 "바로 이것이다. 너희 다섯 형제가 한 사람씩 흩어지면 누구한테나 다 꺾이겠지만 다섯 형제가 모두 뭉치면 아무도 너희를 꺾을 수 없을 것이다. 너희는 다른 사람에게 협력을 구하기 전에 너희의 가장 가까운 형제끼리 협력하라" 고 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교훈입니까? 오늘 본문을 보아도 유다는 먼 곳에서 협력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가장 가까이 협력을 얻을 수 있는 곳에서 찾았습니다. 우리도 먼저 내 가족부터 그 다음에는 성도, 나아가서는 민족끼리 협력하게 되면 새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승리가 약속되어 있습니다.

둘째, 서로의 협력(3절 하반절)

3절 하반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리하면 나도 너의 제비 뽑아 얻은 땅에 함께 가리라 이에 시므온이 그와 함께 가니라." 협력은 협력이되 서로 협력이 되는 것이 있고 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너는 나를 도와달라. 그러나 나는 너를 돕지 않는다면 이것은 서로의 협력이 아닙니다. "네가 나를 도와주면 나도 도움 받은 만큼 너를 도와준다" 이것은 서로의 협력입니다. 본문에서도 유다가 "나와 함께 가나안 사람과 싸우러 가자. 그러면 너의 싸움이 필요할 때 도와 주리라" 고 하였습니다. 즉 서로 서로 협력하자는 말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서로 서로 협력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종이장도 서로 맞들면 낫다" 란 말이 있는 것입니다. 협력 잘하는 집안이 성공하고, 협력 잘하는 교회가 평안하고 협력 잘하는 나라가 흥하는 나라가 됩니다.

셋째, 하나님의 협력(4절)

4절에 보면 "유다가 올라가매 여호와께서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을 그들의 손에 붙이신지라" 고 하였습니다. 사람끼리 협력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께 협력을 얻지 못하면 믿는 자로서는 실패입니다. 가나안의 일곱 족속이 그들간에는 협력이 잘 되었지만 하나님과의 협력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유대 자손들은 열두 지파가 한 자손이기도 했지만 하나님의 협력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가나안의 일곱 족속을 상대하여 이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끼리의 협력도 반드시 필요합니다만 하나님의 협력을 받지 못하면 성공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뿐 아니라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때 문제는 해결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새 시대를 맞이하여 협력의 생활에는 가능한 협력, 서로의 협력, 하나님의 협력의 생활이 있어야 합니다.

III. 참회의 생활(5-7절)

첫째, 불행 중 참회(5-6절)

5절과 6절을 보면 아도니 베섹이 불행 중에 참회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또 베섹에서 아도니 베섹을 만나서 그와 싸워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을 죽이니 아도니 베섹이 도망하는지라. 그를 쫓아가서 잡아 그 수족의 엄지 가락을 끊으매" 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아도니 베섹은 가나안 사람 중에 베섹이라는 조그만 나라의 왕이었습니다. 유대인이 베섹을 쳐들어가서 일만 명의 군사를 다 죽였습니다. 그러자 아도니 베섹이 도망하다가 붙잡혀서 수족의 엄지 가락을 잘리게 됩니다. 수족의 엄지 가락이란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가리키는데 이것은 도망치거나 대항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전에는 왕이었던 아도니 베섹이 이런 처지에 이르니 얼마나 비참하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이런 불행을 당하게 되자 아도니 베섹은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행한 대로 갚으시는구나! 내가 이전의 왕들과 같이 되었구나" 하고 탄식하며 자기 자신을 반성하고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불행이 닥쳐와서 이제는 끝났구나 싶을 때 자기를 돌아보며 반성해 보고 회개하는 것이 새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해야할 일입니다. 불행이 닥칠 때 원망하지 마시고 이 일이 나에게 왜 미쳤는가, 하나님과 나의 관계는 어떤가? 나 자신을 점검해 보고 항상 반성하고 회개하는 기회로 삼는 것이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새 시대에는 불행 중에 참회하는 아도니 베섹과 같이 우리들 삶 속에서도 불행 중에 참회하는 생활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둘째, 신앙적인 참회(7절 상반절)

7절 상반절을 보면 "아도니 베섹이 가로되 옛적에 칠십 왕이 그 수족의 엄지 가락을 찍히고 내 상 아래에서 먹을 것을 줍더니 하나님이 나의 행한 대로 내게 갚으심이로다 하니라" 고 하였는데 아도니 베섹은 바알을 섬기던 사람이었습니다. 즉 우상을 섬기는 일에 앞장을 섰던 사람입니다. 옛적에 조그만 나라이면서도 강력한 군사력으로 칠십 왕을 붙잡아 그들 수족의 엄지 가락을 찍고 아도니 베섹의 상 아래서 먹을 것을 줍게 했습니다. 그러니 그 왕들의 죽기까지의 삶이 오죽했겠습니까?

그러나 이제 아도니 베섹이 그와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되었을 때 "하나님이 나의 행한 대로 갚으심이로다" 하고 고백하며 회개하였다는 말입니다. 이 일은 유대인이 한 것도, 아도니 베섹이 섬기던 바알이 한 것도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런 까닭에 아도니 베섹의 신앙적인 참회는 귀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도 어떠한 문제에 봉착하였을 때 나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하여 항상 우리 자신을 갱신하여 새롭게 할 때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줄 믿어야 합니다.

셋째, 기록된 참회(7절 하반절)

7절 하반절을 보면 "무리가 그를 끌고 예루살렘에 이르렀더니 그가 거기서 죽었더라" 고 하였습니다. 세상에는 3대 참회록이라 일컫는 세 가지 기록이 있습니다.

첫째로 '어거스틴의 참회록' 과 둘째로 '루소의 참회록' 그리고 셋째가 '톨스토이의 참회록'입니다. 그러나 본문에 나오는 아도니 베섹의 참회는 그 한마디 참회가 성경에 기록되어 오늘날 우리가 두고 두고 보면서 얼마나 많은 깨달음과 느낌을 얻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성경을 통해 기록에 남겨 모든 사람에게 깨달음을 주고 은혜를 끼치는 이런 기록된 참회는 참으로 귀한 참회입니다.

이 사건이 주는 오늘의 교훈은 나의 참회의 생활이 다른 사람에게 깨달음을 주고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끼친다면 참으로 귀한 참회의 생활임을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새 시대에는 반드시 참회하고 갱신하는 생활이 있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참회의 생활은 불행 중 참회, 신앙적 참회, 기록된 참회의 생활을 본문이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스라엘은 여호수아의 인도로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그가 죽자 사사 시대가 되면서 새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 새 시대는 그들에게 새로운 삶을 요구하였습니다. 즉 기도의 생활이요, 협력의 생활이며 참회의 생활인 것입니다. 이러한 삶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요구되는 삶입니다. 새 시대에는 새로운 삶으로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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