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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더 나은 의”(2) (마 5:2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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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노강국 목사

마 5:21-48까지는 여섯 개의 율법 조항에 따른 예수님의 해석입니다.  이는 물론 율법의 많은 조항들 중에서 대표성을 띈 것으로 채택된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에 대해 Eugene Boring 박사는 그의 마태복음서 주석에서 이를 “사랑”의 관점으로 정리한 것을 소개해 봅니다.

(1) 5:21-26 : 살인 - 사랑은 적의가 없음을 보이는 것이다(Love Shows No Hostility).
(2) 5:27-30 : 간음 - 사랑은 약탈이 아니다(Love Is Not Predatory).
(3) 5:31-32 : 이혼 - 결혼 안에서의 사랑(Love in Marriage).
(4) 5:33-37 : 맹세 - 사랑은 무조건적인 성실함(Love Is Unconditionally Truthful).
(5) 5:38-42 : 원수 갚음 - 사랑은 앙갚음이 아닌 것(Love Does Not Retaliate).
(6) 5:43-48 : 이웃 사랑 - 사랑은 원수에게까지 확대되는 것 (Love Extends to the Enemy).

이렇게 “사랑”이라는 관점에서 이를 해석한 데에는 예수님의 율법이해는 “사랑”이라는 안목을 가지고 보아야 바로 볼 수 있다는 점을 인식시키고자 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오늘은 이 중에서 두 번째로 언급된 간음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성(性, Sex)에 대한 동, 서양의 입장 차이부터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들의 의식에는 서양적인 의미의 성에 대한 이해가 깊이 자리 잡고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에 나타난 성의식(Consciousness of Sex)은 서양적인 입장보다는 동양적인 입장에 서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동, 서양의 성에 대한 입장의 차이를 먼저 생각해 보는 것이 성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1. 성에 대한 동, 서양의 견해 차이

몇 년 전, Clinton 대통령의 성추문(sex scandal) 사건이 있었습니다. 만일 이와 같은 사건이 한국에서 벌어졌으면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습니다. 아마 미국과는 다른 결과가 나타났으리라고 생각됩니다. 그만큼 성에 대한 입장이 동양과 서양에는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미국의 영성신학자 Richard Foster 박사는 그의 책 "돈, 섹스, 권력“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마틴 루터는 다음과 같이 명민하게 피력하였다. 즉 ‘세 가지의 회심이 필요하다. 가슴의 회심, 정신의 회심 그리고 돈지갑의 회심이다.’ 이 세 가지 가운데 우리 현대인들로서는 돈지갑의 회심이 가장 어려운 것 같다. 우리로서는 돈에 대해서 이야기하기조차도 힘들다. 나는 최근 둘 다 심리학자인 어느 부부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들은 자녀들 앞에서 성(sex)과 죽음에 대해 그리고 여러 가지 모양의 어려운 주제들에 대하여 개방적이고 솔직하게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러나 그들이 막상 돈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싶을 때는 침실로 가서 문을 닫고서야 이야기를 하곤 했다는 것이다. 정신 요법사들이 환자들과 더불어 해서는 안 되는 일들에 대하여 목록을 작성한 조사서를 보면, 환자에게 돈을 빌려주는 일이 환자를 애무하거나, 키스하거나 심지어 성교를 하는 일보다 더 큰 금기였다고 한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성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동, 서양에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왜 이러한 차이가 나타나는 것일까요?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성의 문제를 ‘본능으로 보느냐?’ 아니면 ‘본능은 아니라고 보느냐’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에 대한 서양의 사고방식은 이를 본능으로 보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동양의 사고방식에서는 성을 본능으로까지 보는 것 같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본능으로 보느냐, 아니냐”의 차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만일 본능으로 본다면 이는 극복할 수 없다고 여기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배고픔의 경우는 본능입니다. 일시적으로 밥을 안 먹을 수는 있겠지만, 밥을 먹지 않고는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배고픔을 해결하고자 하는 것은 본능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섹스의 문제가 본능이 아닌 것으로 본다는 것은 이 섹스의 문제란 어렵기는 하여도 극복의 가능성이 있다고 여기게 될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서양적 사고방식에서는 이 성의 문제는 극복의 대상이라기보다는 해소시켜야 할 대상이 될 것입니다. 즉, 성의 문제는 어차피 해결이 안 되는 본능의 문제이므로 이는 잘 해소시킴으로써 성의 문제를 극복해야 된다는 입장으로 정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서양에서 성의 문제를 본능의 문제로 보는 시각은 아마도 정신 분석학자 프로이드 (Freud, 1856-1939)의 영향이 컸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프로이드는 인간의 성에 대한 관심을 본능적인 것으로 분석해 내었기 때문입니다. 이 때부터 서양 세계에 있어서는 성을 본능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으리라 여겨집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성의 문제를 취급하게 된다면 오늘 본문의 예수님의 말씀은 사실상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씀이 되리라 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성 특히 간음의 문제를 다루시면서 이의 행위나 결과만을 문제 삼지 않고, 이의 동기까지 문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간음의 문제를 생각할 때 우리는 먼저 우리의 시각을 바꾸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즉 성의 문제는 본능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으로 말입니다. 즉, 성의 문제는 자연적인 것이기 때문에 극복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훈련으로 그리고 이성에 대한 바른 인식으로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성격의 것임을 먼저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2.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에 대한 예수님의 반제(Antithesis)

유대인들이 금과옥조로 여기는 십계명의 제 7계명은 “간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7계명을 예수님께서는 문제를 삼으셨습니다. 오늘 본문 27-28절에서 이를 알 수 있습니다.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이 7계명에 대한 반론인 것입니다. “너희는 ~~하게 들었으나,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표현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보실 때, 그 당시 사람들이 제 7계명에 대해 이해하고 있는 모습에 무슨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그러나 나는 ~~하게 말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문제가 되는 내용이 과연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이렇게 확대 해석합니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그 당시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의 말씀대로 실제로 간음만 하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간음하지 말라”고 하니 간음하지 않는데 뭐가 문제가 되느냐는 질문이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에 충실해서 간음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은 마땅하고 타당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 그 당시 사회에 대한 예수님의 진단인 것입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의 말씀대로 실제로 간음만 하지 않으면 된다고만 생각하고 행동한다고 할 때, 이는 비록 간음하는 행위는  나타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이것이 과연 하나님께서 주신 이 7계명의 정신에 합당한 것이냐 하는 것이 예수님의 질문인 것입니다.

실제로 그 당시 유대교 랍비들도 “여자들을 쳐다보면 간음할 마음이 생길수도 있으니 여자들을 아예 쳐다보지 말라”라고 가르치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당시에는 여자들은 남자에게는 위험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유대교 랍비들의 가르침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랍비들의 가르침을 받은 유대인들은 여자란 위험한 존재라고 여겼기에 피하고자 했고, 특히 경건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여인이 가까이 오는 것을 보면 숫제 눈을 감아버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길에 걸어갈 때도 여인들이 앞에 걸어가는 것을 보면 가던 길을 멈추고 서서 한참 기다렸다가 다시 제 갈 길로 가기도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뒤따라가다가 음탕한 마음이 들지 모른다고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여인들과 인사도 나누지 않고, 여인들이 친절을 베푸는 것을 허용하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낯선 여인과 한자리에 있게 될 경우도 피했습니다. 왜냐하면 여인의 목소리와 머리카락 자체가 부도덕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예수님에게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털로 닦는 여인을 그렇게 하도록 놔둔 예수님을 유대인들은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았겠습니까? 특히 신앙적으로 경건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일수록 이러한 경향이 더 심했습니다. 심지어 어떤 바리새인들은 이렇게 자기 자신을 은근히 자랑하기도 하였답니다. “내가 말이야, 길을 가는데, 어떤 여자가 오고 있지 않겠어. 얼핏 보니, 상당히 미인이었어. 나는 그만 길에 서서 눈을 감아 버렸지. 음욕에 빠지지 않도록 그 여자를 보지 않기 위해서 말이야.”

그 당시 이러한 모습들은 바로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키기 위한 유대인들의 모습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이러한 모습과 자세가 과연 하나님께서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주신 이유가 되겠느냐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질문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보실 때,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이런 식으로 지키는 것은 바로 여자를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는 비인간적인 자세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자들 한갓 남자의 정욕을 시험하는 대상으로밖에 여기지 않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따지고 싶었던 것은 바로 이 점입니다. 물론 여자를 성적인 도구로만 여기는 것도 바른 자세는 아닙니다만, 또한 여자를 자기의 정욕을 test하는 도구로만 여기게 된다면 이 역시 비인간적인 자세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당시 남성들의 이러한 여성에 대한 자세에 대해 항의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간음의 문제를 더 깊이 원천적인 것으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비록 겉으로 드러나게 간음하지 않았더라도, 마음으로 간음을 피한다는 명목으로 여자를 인간답게 대하지 아니하는 모습 자체가 간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을 볼 때, 예수님은 여인들을 어떻게 대하셨습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참으로 자연스럽게 대하셨습니다. 여인들을 피해야 할 상대로 대하지 않으셨습니다. 아주 자연스럽게 그들과 인격적으로 대화하시고 삶을 교통하셨습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게도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으니, 가서는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 8:11)고 따뜻하게 타이르시기도 하였습니다. 아주 자연스럽게 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남성들에게 요구하는 모습은 바로 이렇게 한 인간으로서 자연스럽게 그리고 인격적으로 여성들을 대할 수 있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3. 해결의 시도

그러면 이러한 간음의 문제를 예수님은 어떻게 해결하려고 하셨을까요? 우리는 이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말씀에서 그 해결점을 찾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아주 엄격한 말씀이지만 여기에는 나름대로 생각할 수 있는 여유로운 표현이 나옵니다. 그것은 “품는다”는 단어입니다. 영어 성경에는 단순히 “anyone who looks at a woman lustfully(음탕한 시선으로 여자를 쳐다보는 사람)"라고 되어 있어서 이 의미를 느끼기는 어렵지만, 우리말 번역의 ”음욕을 품고“라는 표현은 그 표현의 깊이를 더해주는 번역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말의 아주 훌륭한 점이라 하겠습니다. 여기서 ”품는다‘는 말은 어떤 계속성이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닭이 계란을 품으면 병아리가 나온다”는 표현에서처럼 이 “품는다”는 말이 주는 뉴앙스는 이러한 결과가 도출되기까지의 시간성이 요구되는 표현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간음의 문제의 해결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러한 음욕이 계속해서 진행되지 않도록 그 계속성을 멈추라는 것입니다.

이는 그 다음에 계속되는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확인됩니다.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 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 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이 말씀은 이러한 행위가 계속되지 않도록 단절시키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느긋하게 대처하는 어떤 여유를 지니라는 의미도 아닙니다. 우리는 이를 예수님께서  “지옥”이라는 강한 표현을 쓰신 데에서 알 수 있습니다. 즉, “음욕을 품지 않는 모습”을 이러한 긴박감과 철저함을 간직하면서 행하라는 표현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 문제를 오늘날 다루는 데 있어서 우리가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것은 이 말씀을 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성적인 문제에 대해 위압감이나 거부감을 주려고 하는 의도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프로이드가 이러한 성의 문제를 본능의 문제로 다루게 된 데에는 그 당시 기독교의 엄격한 성에 대한 금기라든지 성에 대한 억압적인 분위기에 대한 반작용이 강하게 있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있습니다. 또한 그 당시 교회가 성에 대한 이해를 강압적인 요구와 더불어 가르쳤기 때문에 이에 대한 사회의 반작용이 이러한 프로이드의 견해를 따르게 하였다는 견해도 있는 것입니다. 이는 자녀 교육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나는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성에 대해 강박관념을 가지고 자란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서 성에 대해 절제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심하게 오용하는 경우가 많다는 연구 결과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특히 성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이러한 강박 관념적인 자세나 방종적인 자세는 둘 다 극복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점을 간파하신 것입니다. 이성 간에 인간적이고, 인격적인 바른 관계를 자연스럽게 지니도록 하는 것이 “간음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계명의 진정한 뜻임을 가르치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의 생각을 잘 간직하여 우리들의 삶 속에서 특히 이성간의 관계에서 더 나은 의의 모습을 간직하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함께하시는 그래서 더 나은 의가 이루어지는 현실을 가꾸어나가야 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 인간들의 삶을 더욱 자연스럽고 풍요롭게 이끄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이신 줄 압니다. 우리 사람들은 남, 여 간에 우리의 삶을 영위해 나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인간사에 이러한 남, 여로 인한 많은 문제들도 생기는 줄 압니다. 하지만, 이러한 현실 가운데에서 우리 기독인들은 사람을 남, 여로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바르게 깨닫고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나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그러기 위해서 더 나은 의의 모습을 간직해야 할 줄 아오니, 성령께서 함께 하여 주셔서 이러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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