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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놀라운 구원 (눅 23:3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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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서해원 목사

오늘은 여러분에게 먼저 질문을 하고 시작하겠습니다. "여러분은 구원을 받으셨습니까?" 그렇다면 "오늘 밤 죽어도 천국에 갈 것을 믿으십니까?" 우리는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천국 가는 것에 있어서는 자신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 우리가 예수님을 개인의 구세주로 영접했으면, 오늘 밤 죽어도 천국에 갑니다. 구원은 천국과 결코 분리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면 놀랄 일이 3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우선, 내가 천국에 와 있다는 사실에 놀란다는 것입니다. 지난 주 청남대를 다녀왔는데 정말 근사하고 아름다웠습니다. 거기에서 모두 대통령과 영부인처럼 걸어보았습니다. 천국을 청남대와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좋은 곳에 내가 와 있으니 놀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 놀랄 일은 꼭 와야 할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열심히 교회생활, 신앙생활을 잘한 것 같은데 천국에서 아무리 찾아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놀랄 만한 일입니다. 셋째 놀랄 일은 도저히 올 것 같지 않던 사람이 보인 것입니다. 못된 짓하고, 엄청난 죄를 지어 모두가 고개를 흔들었던 사람인데 그 사람이 천국에 와 있는 것입니다. 이것 또한 놀랄 일이 아닐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언급된 십자가의 강도가 그런 사람입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 양쪽 옆에 있던 두 사람 중에 한 강도는 예수님을 비방하고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오른편에 있는 강도는 주님을 믿었습니다. 주님께서 강도에게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낙원'은 천국을 가리킵니다. 강도는 극적으로 천국에 갔습니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이 십자가에서 생긴 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구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열매를 생각하며 보내는 계절에 오늘 우리가 생각할 것은 '구원'입니다. 본문은 구원의 몇 가지 중요한 특징을 알려줍니다. 과연 그것이 무엇일까요?

첫째, 노력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자기 힘이나 공로나 의지로 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구원의 특징이요,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본질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십자가에서 강도가 한 일이 무엇입니까? 그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할 수가 없었습니다. 십자가에 손과 발이 묶여 있고, 이제 곧 물과 피를 쏟으며 죽어야 하는데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그가 한 것은 오직 주님께 이렇게 말한 것뿐입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이 말도 강도는 참 조심스럽고 겸손하게 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자기를 깨닫는 자의 솔직한 고백입니다. 그는 주님께 오직 자기를 기억해 달라는 말밖에 하지 않았습니다. 구원을 위해 그가 한 일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구원을 받아 천국에 갔습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구원은 힘으로 되지 않고, 인간적인 생각이나, 노력으로 되지 않습니다.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이요, 은혜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주시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구원은 인간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수고나 땀이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구원에 있어서 우리 쪽에서 필요한 '믿음' 조차도 은혜보다 앞서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 은혜를 인하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보다 먼저 나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구원의 근거, 모든 것의 출발과 근원이 하나님입니다. 내 노력이 아니기에 아무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누가 누구를 판단할 수도 없습니다.

인간의 노력이 있습니다. 그 노력으로 인간의 위대함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 노력으로 하늘도 날아다닐 수 있게 되었고, 바다 깊은 곳도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힘센 동물도 인간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그 뛰어난 머리로 인간을 복제하는 일까지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든 인간의 머리와 기술이 얼마나 더 발전할 지 모를 일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인간이 뛰어나도 인간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인간이 다 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 능력의 한계, 바로 이것이 바로 믿음의 동기입니다.

구원이 그렇습니다. 아무리 인간이 구원을 받으려고 머리를 쓰고, 노력을 해도 구원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가장 귀한 선물이 '은혜'입니다. 우리는 은혜로 구원받고, 또 은혜를 삽니다. 은혜를 받으면 살고, 은혜를 받지 못하면 병들고 문제가 생깁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은혜만은 주지 못합니다. 은혜는 오직 하나님만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오늘도 그 은혜가 우리에게 임합니다. 그 은혜로 구원을 받고, 그 은혜로 우리가 힘을 얻습니다. 세상이 알지 못하고, 결코 주지 못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여러분과 저의 심령에 촉촉이 임하기를 소원합니다.

둘째, 과거를 묻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의 특징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십자가에서 주님은 그가 강도인 것을 알았습니다. 강도가 41절에서 고백한 것처럼, 지금 그는 자기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고 있습니다. 또한 이것은 당연한 결과라고 말합니다. 죄를 지었으니 벌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 강도가 주님께 나를 생각해 달라고 말할 때, 주님은 그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을 위한 주님의 선포입니다. 이 말씀은 한마디 한마디가 귀한 의미가 있습니다. 우선, 주님은 '너'라고 말씀하시면서 구원이 개인적으로 임하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또한, '나와 함께' 라고 하시면서 구원이 결국 영원토록 주님과 함께 가는 길인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낙원'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궁극적으로 구원의 완성이 천국인 것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구원의 의미를 알리는 말씀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이 바로 '오늘'입니다. 이것이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을 주목하십시오. 이 말씀을 통해 구원이 영원한 현재라는 것을 일깨워준 것입니다. 주님은 강도의 과거를 캐묻지 않았습니다. 왜 강도질했느냐고, 왜 평생 이렇게 살았느냐고 질책하지 않았습니다. 과거가 어떠했든지 지금 이 순간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구원입니다. 우리가 주 앞에 나가면 하나님은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지금 내가 주 앞에 서 있는 사실만이 중요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1:18)...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 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43:25)

다윗은 과거 죄의 용서를 체험하고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옮기셨으며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의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시103:10-14)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과거가 어떠하든지 오늘 주님을 중심으로 받아드리면 용서를 받습니다. 아무리 추악한 과거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더러운 과거라도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죄를 멀리하시고, 기억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리 추악한 과거라도 문제가 되지 않고, 아무리 화려한 과거라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세계에는 영원한 오늘만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받은 구원이요, 용서요, 사랑입니다. 이제 오늘,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좀 더 바르고 참된 나의 오늘을 만들어 가도록 헌신하고 다짐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포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에서 구원받은 강도를 보면서 마지막으로 배우는 구원의 특징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강도의 상황이 어떻습니까? 그는 지금 몇 시간, 몇 분이면 죽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오기까지 강도가 어떻게 살아왔습니까? 그도 우리처럼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의 사랑을 받고, 주변의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런 사람이 자라면서 비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부모를 거역하고, 사람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영원한 진리인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자기 멋대로, 마음대로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산 것입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처형될 만큼 큰 죄를 지었습니다.

당시 정치범을 제외하고 아무에게나 십자가를 지게 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의 처형이 너무나 잔인한 것이기에 웬만한 사람에게는 이 처형을 언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로마시민권을 가진 사람은 아무리 흉악범이라도 십자가형은 받지 않았습니다. 이런 시대에 주님 외에 십자가를 지었으니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짐작이 갑니다. 모든 사람이 십자가를 지는 그를 안타까워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처참하게 죽었을 때도 애도하지 않았습니다.

한마디로 사람들은 강도를 포기하고 있었습니다. 부모도, 친구도, 사회도, 그를 포기했습니다. 그렇게 그는 쓸쓸히 죽는 자리까지 왔습니다. 그래서 이제 얼마 있으면 인생이 끝나는 상황입니다. 그런 때에 그가 주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던 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은 포기했지만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에게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에게 구원이 필요하고 천국으로 가야 했기에 마지막 순간에 주님을 영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결국 모든 사람은 포기했지만 포기하지 않은 하나님의 열정이 그를 구원했고, 천국으로 인도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바로 이것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우리가 마지막까지 포기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구원은 죽는 순간까지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종종 어떤 사람을 보면서 저 사람은 도저히 안돼, 구제불능이야, 하고 손을 놓고, 고개를 흔들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해도 정말 안 되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할만큼 하고, 모든 정성과 힘을 기울였는데도 성과가 없고, 오히려 나빠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을 행하다가 중단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손을 놓을 때도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포기하지 않으면 우리도 포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내 남편과 아내와 자녀의 구원의 문제로 고민하십니까? 눈물로 간절히 기도하고 계십니까? 기도하면서 낙망하지 마십시오.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이 구원입니다.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반드시 돌아옵니다.

신앙인의 삶은 포기할 수 없는 삶입니다. 하나님이 끝났다고 말하기 전에 내가 마침표를 찍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예수 믿고 포기할 권리가 없는 사람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안 된다, 끝났다, 포기하라고 해도 우리는 포기할 수 없습니다. 한 순간에 역전시키시고, 회복시키는 하나님이심을 우리가 믿기에,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라도 좌절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지금 힘들고 어려우십니까? 사업과 직장의 어려움으로, 육신의 질병으로, 마음의 괴로움으로, 관계의 어려움으로, 낙심하고, 괴로워하고, 한숨쉬고 있습니까? 울 기력도 없이 지치고 힘드십니까? 내 인생에 밑바닥을 친 것으로 생각하십시오. 밑바닥을 치면 이제 올라갈 일만 남은 것입니다. 조금씩 올라갑니다. 나아질 것입니다. 용기를 가지십시오. 하나님께서 반드시 일으키시고, 해결하시고, 역전시키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 중에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이란 노래가 있습니다. '놀라운 은혜' (Amazing grace)라는 이 노래는 '존 뉴톤'이란 사람이 만든 노래입니다. 그는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잡아다가 미국에 팔아 넘긴 일을 하던 사람입니다. 그가 어느 날 물에 빠져 죽을 뻔했을 때, 주님을 개인의 구세주로 영접했습니다. 그런 뒤에 그는 그 직업을 버리고 목사가 되어 노예제도 폐지를 위해 평생 싸우며 살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깊은 수렁에서 건지진 구원을 '놀라운 은혜'로 잊지 않고 가슴 깊은 곳에서 늘 이 노래를 부르며 살았던 것입니다. 그 뒤 많은 사람들이 이 노래를 부르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가운데 잊지 못할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런던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당시 공연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변화를 축하하려고 모인 자리였습니다. 대부분 록밴드인 시끄럽고 광적인 노래들로 짜여진 순서에 무슨 이유에서인지 제작진은 오페라 가수 제시 노만을 마지막순서로 짜 놓았습니다. 도열한 스피커 광음으로 장장 열 두 시간 동안 군중의 귀를 때려 이미 술과 마약에 취한 팬들의 흥분을 고조시키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마지막으로 제시 노만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모든 조명이 꺼지고 악단도 없고 악기도 없고 오직 제시만이 무대에 섰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엄숙한 분위기를 싫어하며 록음악을 더 듣자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이런 소리를 들으면서도 제시 노만은 아카펠라로 아주 천천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1절이 끝날 무렵 수만 명의 팬들은 노만이 부르는 노래 앞에 돌연 침묵에 잠기고 있었습니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하며 노래가 2절에 이르자 군중들은 그 노래에 빨려 들어갔고, 3절을 부를 때 그들은 모두 같이 따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4절을 부를 때 모든 사람은 일어섰고, 모두가 흐느껴 울며, 부둥켜안고, 스타디움이 흔들거리도록 힘차게 같이 불렀습니다.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 찬양하리라"

놀라운 은혜였습니다. 그야말로 'amazing grace' 가 임한 것입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은혜, 놀라운 은혜가 있습니다. 이제 그 놀라운 은혜가 우리에게 임할 줄로 믿습니다. 놀라운 구원이 이 가을에 여기에 임할 줄로 믿습니다. 놀라운 은혜가 우리의 심령에, 가정에, 교회에, 이 민족 위에, 세계와 열방 가운데 임할 줄로 믿습니다. 이 은혜를 사모하면서, 우리 모두 이 찬송을 함께 부르며 한 주간을 힘있게 시작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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