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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참된 교회 (고전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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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양인 목사

먼저, 지난 8년 동안 은혜 가운데서 우리 교회를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저는 ’96년 6월 9일 주일에 저의 아파트 거실에서 첫 예배를 드렸던 일을 잊지 못합니다. 다섯 가정에서 열 명 남짓한 성도님들이 모였는데, 모두 새 교회를 창립하는 일에 동참한다는 사실에 감격했습니다. 그로부터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나날이 성장해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지난날을 돌이켜보면서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매우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실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어찌 오늘 8주년 감사 예배를 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이와 더불어 좋은 성도님들을 만나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저 역시 주님의 양 무리인 성도님들을 성실하게 섬기는 목회자가 되기 위해 힘쓸 것을 약속드립니다.

이 시간 우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된 교회는 어떤 교회인지 상고함으로써 성도님들과 함께 은혜 받기를 원합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교회가 참된 교회입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 교회의 설립자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주의 일꾼들을 통해서 교회를 세우십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다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사도는 고린도교회를 일컬어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교회는 ‘광주 첨단지역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일수밖에 없는 까닭은, 교회의 구성원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는 성도들을 일컬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성도’라고 하는 이유는 주님의 보혈로 죄 씻음 받아 거룩해진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또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롯이 멸망의 도성인 소돔을 빠져 나와 목숨을 건졌듯이, 성도들은 죄악 세상에서 불러냄을 받은 자들입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처럼 행복한 일은 달리 없습니다.

이 땅에 있는 교회는 결점을 지닌 사람들이 모였으므로 완전하지 못합니다. 교회 안에서 다툼이 있기도 하고, 시험 드는 일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교회는 완전하지는 않지만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데 반드시 필요합니다. 누구나 혼자서 주님을 믿게 되는 것이 아니고 교회의 도움을 받아서 주님을 만납니다.

교회는 죄인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뿐 아니라, 구원 받은 성도는 반드시 교회의 일원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의 머리이시고 교회는 주님의 몸이요 성도들은 몸의 지체들이기 때문입니다. 간혹 교회를 떠나 집에서 혼자 신앙생활을 한다는 사람이 있지만 그런 사람치고 신앙생활 제대로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원 둥지에서 잘려나간 나뭇가지와 같아서 영적 생명을 지속해 나갈 수 없습니다.

그런가하면 교회라고 해서 다 하나님의 칭찬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계시록 2장과 3장에 보면, 아시아의 일곱 교회가 나옵니다.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교회가 그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 하나 하나의 영적 실상을 일일이 진단하시고 권면하십니다.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는 책망이 없고 칭찬만 받았으나, 에베소,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교회는 칭찬과 책망을 아울러 받았습니다. 그리고 라오디게아 교회는 칭찬이 없고 책망만 받았습니다. 이와 같은 사정은 오늘날 교회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주님의 칭찬을 받는 교회도 있고, 책망을 받는 교회도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주님께서 보실 때 우리 교회의 영적 상태는 어떠할까요? 주님의 칭찬 받는 교회가 되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의 지체된 성도님들이 하나님을 사랑할 때 참된 교회라는 주님의 칭찬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곧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교회는 어른으로부터 유치부 어린아이에 이르기까지 다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주님의 칭찬 받는 교회가 되도록 합시다.

두 번째로,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의 사귐이 있는 교회가 참된 교회입니다.

교회를 신앙공동체라고 할 때 이는 단순히 성도들의 공동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성도들의 공동체입니다. 이에 대하여 요한일서 1장 3절에는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고 했습니다. 성도들은 모두 한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또 한분 하나님 아버지를 모신 형제들입니다. 마땅히 교회에는 믿음의 형제들 간에 사귐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성도들의 관계를 몸의 지체에 비유합니다. “26)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27)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 12:) 손과 발이 평소에 떨어져 있다고 서로 사귐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둘 중 하나가 다쳐서 고통하게 되면 그 때는 둘이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밀접하게 결합된 지체임을 알게 됩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형제가 기뻐하면 나도 기뻐하고 형제가 아파하면 나도 아픔을 느끼는 사이가 되어야 합니다. 만일 형제가 고통하는 것을 보면서도 아무런 아픔도 느끼지 못한다면 그는 머리로부터 마디를 통해서 연결되어 있는 신경이 끊긴 죽은 지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편지하기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고후 11:29)고 했는데, 이 말씀 속에는 주 안에서 한 지체된 사도의 심정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성도들의 사귐이란 바로 이런 것을 말합니다. 성도들의 사귐은 세상 친구들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교회 안에서 성도들의 사귐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사귐입니다. 성도들의 모임에는 언제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모임은 거룩하고 아름답고 은혜롭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 성도님들의 사귐을 바라보면서 기쁘게 생각합니다. 특히, 이 일에 헌신하는 분들이 구역장님들이십니다. 구역은 사귐의 장(場)입니다. 주 안에서 사귐이 활발할 때 그  구역은 부흥합니다. 혹 보면, 사귐은 있는데 주 안에서의 사귐이 아니라 세상적인 사귐일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사귐은 기어코 형제들의 믿음을 파탄시키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사귐을 갖되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가지십시오. 그뿐 아니라, 우리 교회 전체가 사랑의 교제가 충만한 신앙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성도들이 서로를 존중하고, 먼저 웃으며 인사를 건네고, 먼저 섬기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믿음의 형제들에게 기도를 부탁하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화해의 악수를 나누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성령으로 하나 되는 영적인 사귐을 가져야 합니다. 성도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도하며 말씀을 들음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나 됨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모이기에 힘써야 합니다. 모이지 않고서야 진정한 교제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 하신 주님의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성도들이 모인 곳에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 모임 속에 주님과 성도들의 사귐이 있는 것입니다. 요즘처럼 바쁜 시대에 어떻게 자주 모일 수 있느냐고 반문할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마는 그렇지 않습니다. 바쁠수록 모이는 데 힘써야 합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것은 은혜로운 신앙생활을 포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모이는 것과 관련해서 우리는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을 본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 46절에 보니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라고 했습니다. 아무쪼록 우리 교회는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의 사귐이 있는 교회가 되어서 주님의 칭찬 받는 신앙의 공동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세 번째로, 복음 전파에 힘쓰는 교회가 참된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신 목적은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기 위함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기도 합니다. 마가복음 1장 14절로 15절에 보면 “14)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15)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고 증언합니다.

마태 역시 동일하게 증언합니다. 마태복음 9장 35절에 보니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의 끝도 복음 전파와 관련지어 말씀하셨습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 하신 말씀이 그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승천하시기 직전에 주님께서 하신 마지막 당부의 말씀 역시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 전파를 주님의 지상명령(至上命令)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이곳에 세우신 것은 이 지역 사회에 복음을 전파하고, 또한 세계 선교에도 헌신하게 하기 위함인 줄 믿습니다.

복음 전파는 가까운 데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가까운 데서 점점 먼 곳으로 나가야 합니다. 이 원리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하신 주님의 말씀에도 나와 있습니다.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부터 전도해야 합니다. 나의 가족, 친지, 이웃 사람들을 일차적인 전도 대상으로 삼으십시오. 한 사람을 전도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또 복음의 증인이 될 것이므로 연쇄적으로 복음 전파가 이루어져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지난 8년 동안 우리 성도님들의 가정이 점차적으로 복음화 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전도야말로 가족 사랑을 위한 최상의 방법입니다. 핍박을 겁내지 마시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십시오. 그리할 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 하신 대로, 온 가족이 구원 받는 복된 결과를 얻게 되실 것입니다.

또한 우리 교회는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전도하는데도 힘써야 합니다. 통계적으로 보면, 주일학교에 다니는 어린이들이 어른이 되기까지 변함없이 신앙을 지켜나가는 경우도 있지만, 개 중에는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으로 성장해 나감에 따라서 점점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현상을 대하는 것은 마음 아픈 일입니다.

그러나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생길지라도 우리는 실망하지 말고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의 전도에 힘쓸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를 떠나간 그들이 언젠가는 다시 전도를 받고 교회로 돌아올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살아오면서 한 번도 교회에 다녀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나 나면서부터 타종교를 믿어온 사람들은 전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접촉점을 찾기가 어렵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유년 시절이나 청소년 시절에 교회 생활을 해 본 사람들은 일단 하나님께 대한 인식이 있기 때문에 전도의 접촉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또 그들의 내면 깊은 곳에는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잠재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들으면 그 영혼이 반응을 나타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교회는 멀리 십년, 이십년, 삼십년을 내다보면서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을 전도하는데 힘써야 하겠습니다.

어느 시대나 전도하는 교회는 활기차고 부흥하지만, 전도하지 않는 교회는 침체되고 맙니다. 아직 우리 교회는 빈자리가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선 이 빈자리들을 채우는 데 힘써야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14장에 보면, 전도에 관한 예수님의 비유가 나옵니다.

“16)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17)잔치할 시간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가로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18)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하나는 가로되 나는 밭을 샀으매 불가불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19)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20)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21)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22)종이 가로되 주인이여 명하신대로 하였으되 오히려 자리가 있나이다 23)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24)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정중하게 초청한 사람들은 하나도 오지 않았고, 도리어 초청 받지 못했던 사람들이 그 잔치 자리를 채웠습니다. 나중에는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잔치 자리를 채웠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전도란 예의범절을 갖추어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강권하는 방법도 필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니, 전도는 강권함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강권함이 없는 전도는 결실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강권함이 없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망의 길로 달려가는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을 때 우리는 체면을 무릅쓰고 강권하는 전도를 하게 되며 그리할 때 성령님께서 역사하셔서 불신 영혼을 감화시켜서 복음을 믿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 전파에 힘쓰심으로 우리 교회가 전도하는 교회로서 사명을 감당하게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네 번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대망하는 교회가 참된 교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지 않는 성도는 영적으로 잠자는 사람입니다. 이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재림을 고대하지 않는 교회는 잠자는 교회입니다. 예배당 건물이 크고 훌륭해도, 교인들이 많아도, 많은 사업을 할지라도, 주님의 재림을 대망하지 않는 교회는 기름을 준비하지 않고 신랑을 마중 나간 미련한 다섯 처녀와 같습니다.

초대교회 당시에 교회들은 재림 신앙이 강했습니다. 사도는 고린도교회에 대해서도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이는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언제 강림하실는지 그 때를 알지 못하지만 사도들의 시대와 비교해 볼 때 매우 가까워진 것이 분명합니다.

사도들의 시대에 이미 밤이 깊고 낮이 가깝다고 했으니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은 동트기 직전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혹 보면, 주님의 재림이 가깝다고 하니까 마음이 들떠서 안정된 생활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소위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그들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재림을 갈망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믿음의 준비가 되지 않아서 안절부절 하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재림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마음을 차분히 가지고 차근차근 상급을 준비해 나갑니다. 세상에 속한 번잡한 일에 마음 빼앗기지 않고 교회 중심으로 주의 일에 힘씁니다. 교회 역시 재림 신앙으로 무장한 교회는 교회가 해야 할 본연의 일에 힘씁니다.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교회에 남자 집사님이 한 분 있었는데 어느 중소기업의 대표였습니다. 목사님이 그 집사님을 보고 “집사님, 교회의 부서를 하나 맡아 주시지요” 부탁하였더니 “목사님, 지금은 너무 바빠서 곤란하군요. 나중에 하겠습니다” 하고 사양했습니다. 수년 동안 그런 식으로 바쁘다고 사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집사님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우리는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고 말해야지, 세상의 허탄한 자랑에 빠져 기회를 놓치면 안 됩니다. 주님께서 직분을 주실 때 ‘지금이 내가 일할 때로구나’ 생각하시고 감사한 마음으로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권하기를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전 15:58)고 했습니다. 주님을 위한 수고는 절대로 허사가 되는 법이 없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인정을 바라고 일할 것이 아니라 강림하실 주님의 인정을 바라고 일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사도들과 오백 여 성도들이 보는 데서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리우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가심을 본 그대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것도 생각지 않은 때에 불시에 오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만일 주님께서 오실 때에 우리의 깨어 있는 것을 보시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아무쪼록 우리는 항상 영적으로 깨어 있어 주님께서 언제 강림하시든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기쁨으로 맞이하는 진실한 성도들로 이루어진 참된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 세상에는 셀 수 없으리만치 많은 조직체가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것은 교회입니다. 그것은 교회는 이 땅에 존재하지만 그 소속이 하늘에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들로 이루어진 신앙의 공동체요 사랑의 공동체이므로 고귀한 것입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명망 있는 협회에 회원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일원이 되고 지체가 되는 것은 그 어떠한 명예로운 협회의 회원이 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으리만치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성경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말합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독차지 하는 대상이 교회임을 의미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은 교회를 위해서 예비 된 것입니다.

특히, 계시록에 나오는 정금과 열 두 보석과 진주로 만들어진 새 예루살렘은 교회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 개인 개인을 사랑하시지만 알고 보면 하나님의 백성  중 하나로서 사랑하십니다. 이 때 하나님의 백성은 교회를 말합니다.

요즘 한국인들은 미국 시민권을 얻기 위해서라면 원정출산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만큼 미국 시민이 되면 유익이 많고 영예스럽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지상에 속한 것에 불과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에 속해 있습니다. 교회의 지체된 성도들은 하늘의 시민권을 갖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보니 교회를 일컬어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은혜로운 신앙생활을 하려면 먼저 교회에 대하여 성경적으로 올바로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교회는 성도들에게 어머니와 같은 존재입니다. 우리는 우리 각자가 몸담고 있는 이 교회를 사랑하고 건강하고 은혜로운 신앙의 보금자리로 가꾸어 나가야 합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것은 곧 주님의 몸을 세우는 것을 의미하고, 교회를 해치는 것은 주님의 몸을 상처 내는 것과 같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께서는 8년 전에 이 교회를 세우시고 지금까지 부흥을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믿음과 성령이 충만해서 주님을 더욱 사랑하고 맡기신 사명에 충성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교회가 주님의 마음에 합당한 참된 교회로서 저와 성도님들의 자랑과 영광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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