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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마 9: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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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양인 목사

하나님의 법에 의해 정죄 받은 인간들

사람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은 아마 ‘당신은 죄인이라’는 말이 아닐까 합니다. 왜냐하면 죄인으로 판명나면 법에 의해 벌을 받게 되기 때문이지요. 또 내가 처벌 받은 사실을 이웃사람들에게 알려지면 불명예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사람은 누구나 다 죄인이라고 말씀합니다. 로마서 3장 10절로 12절에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고 했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적용하는 기준은 국법이 아닙니다. 사실상 국법은 완전한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국가를 다스리는데 필요한 최소한도의 기준을 정한 것에 불과합니다. 요즘 우리나라 사람들이 국가보안법의 존폐를 놓고 논쟁하는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듯이, 법 가운데는 악법도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이 우리에게 적용하는 기준이 도덕률이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은 법으로 정해 놓은 것이 아니고 일종의 도덕률에 해당합니다. 도덕이라고 해서 어느 나라나 똑같은 것이 아닙니다. 동서양이 차이가 나고, 민족에 따라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도덕도 최고의 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양심을 기준으로 하면 되지 않을까요? 실정법이나 도덕에 비해서 양심은 훨씬 차원이 높은 기준인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서 양심의 수준에 차이가 나기도 합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양심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물며 거룩하신 하나님의 기준에 비추어 보아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사람은 있을 수 없습니다.




자신의 죄인 됨을 알아야 하는 이유

성경이 인간의 죄인 됨을 일깨워주는 이유는 그것이 구원을 받는데 필수 조건이 되기 때문입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마 9:12) 하신 주님의 말씀처럼, 자신이 병든 사실을 알게 된 사람이라야 병원을 찾아가서 치료를 받으려 할 것입니다. 이는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는 육신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영혼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몸으로 죄를 짓지만, 알고 보면 몸은 영혼이 부리는 도구에 불과하므로 그 책임이 영혼에게 있습니다.

성경은 사람은 누구나 죄인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마음이 완악한 것이 그 원인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죄를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자기의 의로움을 자랑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서기관들과 바라새인들이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 뿐 아니라, 장로들의 유전도 철저하게 지키노라고 자부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솔로몬은 성전을 지어 하나님께 봉헌하는 자리에서 간구하기를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대하 6:36)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요한일서 1장 8절에 보니 “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사람치고 실수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죄를 짓되 알고도 짓고 모르고도 짓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율법을 완전무결하게 지킨다고 자랑했습니다.

완전히 지킬 수 없는 것을 완전히 지키는 것처럼 보이려니까 자연히 위선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 생활을 열심히 한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큰 거리나 시장에 서서 큰 소리로 기도했는가 하면, 구제에 힘쓰는 것을 보이기 위해 사람들이 보는 데서 구제하기를 좋아했습니다.




두 종류의 사람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하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두 사람이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갔는데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다른 하나는 세리였습니다. 바리새인은 따로 서서 기도하기를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않음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세리가 바리새인보다 의롭다하심을 받고 집으로 내려갔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보는 데서 의로운척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보아주시지는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외모를 보시지 않고 중심을 살피시는 분이십니다. 사람의 눈은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시기를 “화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죄인 됨을 인정하지 않고 의인인체 위선적으로 행하는 것을 주님께서는 가장 미워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당시 유대 사회에서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받던 세리나 창기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용납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들이 스스로를 죄인으로 인정하고 변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거듭나야 하는 이유

서양 격언에 “죄를 짓는 것은 인간이고 용서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죄를 짓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속에는 인류의 조상 아담의 부패한 본성이 잠재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아담으로부터 원죄를 유전 받았습니다. 다윗은 말하기를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고 했습니다. 그가 충성스런 신하 우리아를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은 악행을 저지른 것은 우연히 어쩌다가 저지른 실수가 아니라, 그의 타고난 죄성에서 비롯된 필연적인 결과라는 고백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타고난 죄성으로 인하여 자연스럽게 죄를 짓는 것입니다. 타고난 피부 색갈을 어찌할 수 없듯이, 사람은 타고난 죄성을 없이할 방법이 없습니다.

아무리 수양을 하고 고행을 하고 도를 깨쳐도 그것으로 죄를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들은 철학이나 도덕이나 예의나 종교와 같은 것들을 고안해 내어 제법 고상한 척하면서 의시대지만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 14:12) 하신 대로 인간들이 고안해 낸 방법으로는 죄를 없애지 못함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죄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하나님의 방법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마련하신 구원의 도리는 죄와 허물로 죽었던 영이 새 생명으로 태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이를 ‘거듭난다’ 혹은 ‘중생(重生)한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밤중에 찾아온 바리새인이요 유대인의 관원인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거듭나는 것이 무엇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다시 날 수 있습니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라고 반문했습니다.

여러분, 한번 태어난 사람이 어떻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무슨 방법을 사용할지라도 그것은 절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면 “거듭나야 한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거듭나는 것은 니고데모가 생각한 것처럼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차원의 일입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영이 새롭게 태어나는 것 곧 영적인 신생(新生)을 말합니다. 인간으로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능히 성령의 능력으로 죽은 영을 살아나게 하십니다.

그러면 누가 이 같은 은혜를 받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오는 사람이라야 합니다. 성경에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한 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자신의 죄인 됨을 고백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죄 사함의 은총과 함께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특권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마태복음 9장 9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세관에 앉아 사무 보던 마태를 부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고 하셨을 때 마태는 즉시 일어나서 주님을 따라나섰습니다. 그 날 저녁, 마태는 자기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동료 세리들과 예수님 일행을 초대하였습니다. 세리 생활을 청산하고 예수님의 제자로 새 출발하는 것을 자축하는 자리였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잔치가 그리 순조롭지 못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고 비난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세리와는 같은 자리에 있는 것조차도 불결하게 여기는데, 예수님은 세리의 집에 초대되어 죄인들과 함께 앉아서 음식을 잡수시니까, 바리새인들이 그런 좋은 기회를 놓칠 리가 만무합니다. 제자들은 할 말이 없었습니다. 무슨 떳떳하지 못한 일을 하다가 들킨 것처럼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들으시고 이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율법을 주신 목적

바리새인들은 스스로를 윤리적으로나 종교적으로 건강한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율법의 모든 계명을 온전히 지키기 때문에 의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사람이 율법을 온전히 지켜 행한다면 그로 인해 구원을 얻습니다. 율법에는 분명히 “너희는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 나는 여호와니라”(레 18:5)고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율법을 다 지켜 행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그러면 인간들이 지킬 수 없는 율법을 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로마서 3장 19절로 20절에 이같이 말씀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은 율법을 통해서 우리 자신의 추함과 죄인 됨과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구원에 이를 수 없는 무력한 존재임을 깨닫게 하려는 데 있습니다. 율법은 거울과 같습니다. 거울을 들여다보아야 얼굴에 무엇이 묻었는지 알 수 있듯이, 우리는 율법에 자신을 비추어 보아야만 비로소 자신의 상태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율법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나 자신이 추악한 죄인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거울을 보고 얼굴에 오물이 묻은 것을 알게 된 사람은 곧바로  물로 얼굴을 씻을 것입니다. 그런데 죄를 없애는 것은 얼굴에 묻은 오물을 씻어내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얼굴에 묻은 오물은 물로 씻어낼 수 있지만, 우리 영혼의 죄악은 달리 씻어낼 길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스스로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려고 합니다. 그러나 율법의 내용을 올바로 아는 사람은 며칠 못가서 자신의 능력으로는 도무지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절망에 빠지고 맙니다.




하나님의 기준과 사람의 기준

중요한 것은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통상적인 기준에 의하면, 다른 사람을 죽이지 않은 사람은 “살인하지 말라”는 여섯 번째 계명을 어기지 않았다고 할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 사회에서 상식으로 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준은 이것과 같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21)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2)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또 우리는 실질적으로 타인과 간음을 행치 않았으면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일곱 번째 계명을 어기지 않은 것으로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준은 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27)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8)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날과 같이 향락을 산업화하는 이 시대에 예수님의 기준에 의해서 이 계명을 지켰노라고 자부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는 불륜을 부추기고 칭송하는 시대입니다. 세인들의 칭송을 받는 예술 작품은 거의 다 부도덕한 주제를 작품화한 것입니다.

율법을 하나님의 기준에 의해서 적용해야 하는 이유는 율법의 제정자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곧 입법자의 의도대로 법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심판주가 되시기도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인간적인 기준으로 율법을 적용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준에 우리 자신을 적용해 본다면 그 누구를 막론하고 자신의 무능함을 발견하고 절망하고 말 것입니다.




절망을 통한 소망

하나님의 계명 앞에서 전적으로 무능한 자신을 발견한 사람은 이같이 탄식할 것입니다. “9)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10)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 18)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 24)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 7:)

이 얼마나 절망적인 탄식입니까? 이 보다 더 한 비참함을 어디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실은 이 지극히 비극적이고 비참한 일로 보이는 것이 하나님의 한없는 은혜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해서 이루시고자 하신 목적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죄인 됨과 전적 무능을 절실하게 깨달은 사람이라야 두 손 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와 항복하고 하나님의 선처를 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님 앞에서는 다 죄인입니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누가 누구보다 선하다는 식으로 판단할 수 있을는지 몰라도 하나님의 절대적인 기준에 비추어 보면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은 죄인입니다. 그렇지만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오해한 나머지 자기들은 율법을 다 지켜 행해서 의인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병자가 스스로 건강하다고 여긴다고 병자가 아닌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병을 부인하면 할수록 병세를 더욱 악화시킬 뿐입니다. 신앙의 세계도 이와 같아서 바리새인들은 스스로를 건강한 자라고 여겼기 때문에 영혼의 의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했습니다. 그러나 자기들의 비참한 영적 실상을 자인하였던 세리들과 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와 긍휼을 입을 수 있었습니다.




영혼의 의사이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을 거절하지 않으시고 용납하신 것은 의사가 병자를 기피하지 않고 가까이 하는 이치와 같습니다. 그것은 죽어가는 자를 살리기 위함입니다. 아니 그 이상입니다. 우리 사회의 어디를 가보아도 병을 거저 고쳐주는 병원은 없습니다. 약을 거저 주는 곳도 없습니다. 의사들도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또 병원도 수익을 위한 하나의 사업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값없이 영혼의 병자들을 고쳐주십니다. 만일 구원을 돈 주고 사야 한다면, 가난한 사람들은 구원 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시려고’ 오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눅 4:18). 만일 심오한 종교적인 진리를 깨달아야만 구원을 받는다면 보통 사람들은 애당초 구원을 기대하지도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걱정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불러 회개시키려고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와 구원 받는데 무슨 까다로운 조건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고 하셨습니다. 초막절을 지키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을 적에,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님께서는 서서 외치시기를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고 하셨습니다(요 7:).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이면 누구나 예수님께로 나아올 수 있습니다. 목마른 사람은 누구든지 예수님께로 나아와서 생수를 받아 마실 수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들려 인격이 파탄되었던 여자였으나 예수님께서는 그를 불쌍히 여기셔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랬더니 버림받았던 가련한 그가 많은 사람을 선한 길로 이끄는 감화를 끼치는 성도가 되었습니다. 이천년 교회사를 살펴볼 때 막달라 마리아처럼 헌신적인 성도를 찾아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던 한 강도는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을 향하여 얼굴을 돌리고 호소했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그 때 예수님께서 그 강도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고 하셨습니다.




복음의 핵심

구원은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절대로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의 방법으로는 극히 쉽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됩니다. 이에 대하여 요한복음 3장 14절로 17절에 이같이 말씀합니다. “14)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7)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바로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교만을 버리고 마음을 겸손하게 가지면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누구나 복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사람이라도 얼마든지 듣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만하면 복음을 들어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권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구원으로 들어가는 최초의 관문입니다. 돌같이 굳고 완고한 마음을 회개할 때 복음이 그 심령 속에서 역사하게 됩니다.

다시금 말씀합니다. 구원의 도리는 지극히 간단합니다. “9)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10)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1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 10:) 하신 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할 때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말갛게 씻겨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아무리 흉악한 죄라도, 아무리 많은 죄라도, 흰 눈같이, 양털 같이 만들어 주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죄책에 억눌려 지내던 사람이 죄에서 해방되어 속죄의 기쁨을 누리며 살게 됩니다. 발목에 쇠사슬이 매여 옴짝달싹 못하던 독수리가 쇠사슬이 끊어지자 힘찬 날개 짓을 하며 창공을 날아오르듯이, 죄 사함 받은 영혼은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어 의의 태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날아오릅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부여 받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아바’란 아람어로 ‘아빠’를 가리킵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가장 친근한 호칭인 “아빠” 라고 부르다니 이처럼 파격적인 은혜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끝맺는 말

사랑하는 성도님들, 이 세상에서 아무리 성공했다고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실패한 인생에 불과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그 사람은 이 세상을 떠나는 날 영원한 멸망에 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이 세상에서 아무리 보잘것없는 자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성공한 인생입니다. 그에게는 영생이 보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조용히 율법에 비추어 자신의 영적 상태를 진단해 보십시오. 그리하여 스스로 의롭다고 여겼던 바리새인과 같이 되지 마시고 자신의 죄인 됨을 솔직히 고백하였던 세리와 같이 주님 앞에 죄를 자백하고 사죄의 은총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내일로 미루지 마시고, 지금 기회를 붙잡으십시오. 여러분 모두,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구원을 받아 누리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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