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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새 생명으로 부르시는 하나님 (출 3:1~8, 요 3:3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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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강석공 목사
 
  모세가 양무리를 이끌고 하나님의 산 호렙 쪽으로 이동했습니다. 왜 모세가 양무리와 함께 풀밭이 아닌 산으로 갔는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산 호렙으로 가야 할 것 같다는 그 어떤 영감 같은 것이 작용하지 않았을까 추측할 뿐입니다. 모든 정황을 종합해 볼 때 하나님과 모세의 호렙 산에서의 만남은 결코 우발적인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하여간 모세가 그 산에 도착했을 때 그는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나무가 타서 사라지지 않는 아주 신기한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모세는 그 놀라운 광경을 보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타는 불꽃 가운데서 마치 기다리기라도 하셨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그를 부르셨습니다. “모세야, 모세야!” “내가 여기 있나이다.” 대답하는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그리고 명령하셨습니다.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이어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소개하셨습니다.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그리고 하나님께서 친히 하실 일을 그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으로 데려가려 하노라.” 친히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내어 약속의 땅 가나안 복지로 인도하시겠다고 선언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가 할 일을 지시하셨습니다.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여기서 우리는 반복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동사에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보고, 듣고, 알고, 그리고 행동하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오늘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들의 대부분이 하나님께서 모르실 것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신다는 사실입니다. 문제가 있다면 우리가 그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있다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누군가 일꾼이 필요했습니다. 왜냐 하면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그 뜻을 실천할 인물이 있을 때 비로소 현실 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펼쳐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모세라는 인물은 그 동안 이스라엘 백성의 고난의 현장에서 너무 떨어져 있었다는 것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간절한 뜻을 그가 얼마나 공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의문이라는 말입니다. 돌이켜 보면 모세도 동족인 히브리 노예들의 고난에 응답하려고 한 적이 있었습니다. 애굽의 왕 바로의 궁정에서 왕자의 신분으로 자란 그가 철이 들어 자기 동족의 고난을 목격했을 때 피끓는 동포애를 발휘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너무 순진했습니다. 때문에 그가 할 수 있었던 것은 동족을 괴롭히는 애굽 사람을 쳐죽이고 도망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십 년이 지난 후 하나님께서 다시금 히브리 노예들의 해방 문제를 끄집어 내셨습니다.

  이제 와서 모세가 과연 그 일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 하나님의 간절한 뜻을 그가 알기나 하고 있겠습니까? 처음에는 어떠했는지 모르지만 사십 년이라는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모세도 모든 것을 잊어버리지 않았을까요? 아니면 고난받고 있는 동족에 대해서 끊임없이 고뇌하고 있었을까요? 아마도 후자였을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산에 얼마나 자주 올라갔는지는 모르지만 그가 양무리를 이끌고 호렙 산으로 올라갔다는 것은 그가 여전히 하나님의 뜻을 찾고 있었다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또 모세가 첫째 아들을 “게르솜”이라고 이름을 지은 것만 보더라도 그가 미디안을 영원히 거할 곳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았던 것이 분명합니다. “게르솜”이 무슨 뜻입니까? “내가 타국에서 나그네가 되었음”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모세를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젊고 혈기가 넘치는 모세는 그대로 방치해 두셨다가 늙고 연약해진 모세를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신을 벗으라는 것은 삶의 주도권을 포기하라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신을 신고 자신의 삶의 영역을 마음대로 다닐 수 있는 권한을 포기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돕는 일꾼으로 그 구원 역사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신을 벗어야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신을 벗은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어져 왔습니다. 자기 자신의 지식과 능력이라는 신을 벗지 않고 있는 동안 하나님의 일은 결코 진전되지 않습니다. 오직 겸손하게 신을 벗는 일꾼이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겸손하게 신을 벗고 순종하는 일꾼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애굽을 탈출한 히브리 노예들이 어째서 광야에서 대부분 죽었습니까? 결론적으로 말해서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 죽었습니다. 때문에 히브리서 기자는 불순종한 그 세대를 닮지 말아야 한다고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비록 히브리 노예들이 애굽에서는 탈출했지만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서 누려야 할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던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종말론적인 최후의 안식에는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때문에 히브리서 기자는 구원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는 그 안식에 들어가기를 위해서 힘써야 한다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장 1절 말씀에 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그 약속의 성취에 이르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이 실패한 그 구약의 안식이 지금까지 유효한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경은 그 안식에 대한 약속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분명히 대답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불순종 때문에 하나님은 다시금 오늘이라고 하는 새로운 시간을 설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사실 구약의 안식은 영생을 가리키는 예표에 불과한 것입니다. 영생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영원토록 하나님과 사귀면서 그 하나님의 품에서 편히 쉬는 것이 바로 성경이 가르치는 영생인 것입니다. 성 어거스틴도 참회록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품에서 쉬기까지 내 영혼은 평안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그 안식을 복음서 기자들은 하늘 나라 또는 하나님의 나라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특히 요한복음서 기자는 영생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안식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그 안식에 들어가는 일에 있어서 이스라엘 백성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새 언약의 공동체인 교회에 하나님의 그 안식이 영생의 약속으로 다시금 주어졌습니다.

  오늘 요한복음서 기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세상에서 영생을 얻는 길이라는 사실을 확증하고 있습니다. 또한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라고 주님이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안다”는 말은 아주 친밀하고 인격적인 사귐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때문에 구원을 받았다는 말은 하나님을 믿고 그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사귈 수 있는 상태에 이르렀다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구원의 목적은 참된 사귐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구원은 또한 하나님의 아들을 믿을 수 있는 능력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어서 구원을 받지만 구원을 받아야만 비로소 그 아들을 믿고 순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는 길은 오직 그 아들을 통해서 주어진 그 구원의 길을 따라가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의 간절한 뜻에 따라서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길만이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그 옛날 광야에서의 그 실패를 다시금 반복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새 생명의 안식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 그 말씀을 전적으로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온전히 순종해야 합니다! 나의 지식이나 나의 경험이나 나의 생각이 아니라 오직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에만 겸손히 순종할 수 있어야 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하여 장차 저 천국에서 맛볼 영원한 안식의 기쁨과 평강을 지금 여기서부터 맛보는 참으로 복된 여러분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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