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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일은 주님을 위해 (요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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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한규 목사

< 샛길은 더 막히는 길입니다 >

인간은 다 약합니다. 강하다는 사람도 다 약합니다. 어떤 스턴트맨은 나이아가라 폭포를 세 번이나 떨어져 내리고 살아서 매스컴이 ‘죽음을 정복한 사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뉴욕 시내를 걷다가 꼬마가 먹다 버린 바나나 껍질에 미끄러져 뇌진탕으로 사망했습니다. 이 세상에 아무도 자기 인생을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리 잘 나가는 사람도 살다보면 막히는 길을 만납니다. 내가 잘해도 남이 막습니다. 가끔 자동차 사고 때문에 도로가 꽉 막힙니다. 그처럼 내가 아무리 운전을 잘해도 남이 사고를 치면 나도 길이 막히게 됩니다.

요새 나이 많은 샐러리맨들은 가끔 이런 소리를 듣는다고 합니다. “아직 안 미쳤어요?” 위에서는 호시탐탐 자르려고 하고, 밑에서는 밀치고 올라오니까 속상한 일을 많이 당합니다. 그래도 그냥 다니자니 속이 썩고, 안 다니자니 처자식이 웁니다. 그처럼 길이 잘 안 보이니까 미치기 일보 직전이라고 합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저분은 명문대를 나왔다는데 50이 다 되도록 부장이고, 잘리지 않으려고 저렇게 비굴할 정도로 허리를 굽히는데 아무래도 정상적으로 가면 안 되겠구나!” 그래서 요령을 피우고 샛길을 찾습니다. 그러나 머리가 빠른 사람이 그 사람뿐입니까? 그처럼 너도나도 샛길을 찾으니까 나중에는 샛길이 더 막힙니다.

지금 곳곳에 길이 막혀 있습니다. 왜 길이 막합니까? 여러 가지 이유를 말하지만 사실상 그 근본 원인은 죄 때문입니다. 아무리 좋은 기술을 개발하고, 좋은 사상을 발굴해도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사람에게는 길이 없습니다.

공산주의도 처음에는 화려하게 등장했습니다. 산업혁명 후, 많은 사람들이 도시로 몰리면서 품값이 크게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근로자는 노예처럼 일해도 살기 힘들었고, 조금만 불평하면 그냥 쫓겨났습니다. 마르크스는 그 모습을 보면서 인간을 인간답게 살게 하겠다고 공산주의를 주창했습니다. 그렇게 출발되었기에 겉으로 보면 자본주의보다 더 인간미가 더 있어 보였습니다. 그래서 급속히 많은 사람들을 그 사상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있는 경제적 불행의 근본적인 원인은 자본주의 때문이 아닙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이 문제입니다. 그 죄의 문제를 처리하지 않으면 자본주의도 행복을 줄 수 없고, 공산주의도 행복을 줄 수 없고, 인간이 만든 어떤 종교나 윤리나 사상도 행복을 줄 수 없습니다. 인간의 모든 절망의 원인을 계속 추적하다 보면 결국 만나는 것은 죄입니다.

< 주님을 영접할 때 하나님이 감동하십니다 >

우리에게 왜 예수님이 소중합니까? 십자가의 피로 죄 값을 치르시고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주시고, 구원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 목적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예수님이 하신 가장 위대한 일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신 일이었습니다.

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까?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사랑하십니까? 성경은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했기 때문에 최소한 천하보다 귀하게 생각하고 사랑하십니다. 그처럼 하나님은 ‘우리’라는 잔을 천하보다 크게 만드셨기 때문에 천하를 다 얻어서 ‘우리’라는 컵에 부어도 인생의 컵은 차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 것으로는 사람을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솔로몬은 전도서 1장에서 “물은 계속해서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한다”고 고백했습니다. 당시 세상의 엄청난 부귀와 영화와 쾌락이 그에게 흘러들었지만 그것들이 그의 영혼을 채우지 못하는 것을 알고 그는 전도서에서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고 했습니다. 없는 사람이 ‘헛되고 헛되다!“고 하면 웃기는 말로 들리겠지만 솔로몬이 ”헛되고 헛되다!“고 하면 마음 깊이 새겨들어야 합니다.

소유로 인한 기쁨은 잠시뿐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어리석은 일은 세상 것으로 자기를 채우려는 모습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오직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야 채워질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만납니까? 인간의 어떤 착한 행위로도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기독교는 ‘지성이면 감천’이 아닙니다. 우리의 정성과 착한 일로 하나님을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는 사랑으로 이미 먼저 움직이셨습니다. 그 사실을 믿고 예수님을 영접해야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주시고 영혼의 진정한 자유를 주십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부와 명예와 권력을 원하지만 죄 위에 쌓여진 부와 명성과 권력은 허무한 것이고, 오히려 저주가 됩니다. 그러므로 부와 명성은 얻지 못해도 죄의 문제를 처리하고 구원받고 영혼의 자유는 얻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 구원과 영혼의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 안에서 그 일을 기필코 이루셨습니다.

오늘 본문 25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예수님의 행하신 일이 너무 많아서 다 기록할 수도 없지만 사실상 다 알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의 사랑’입니다.

< 허기진 영혼을 채우시는 예수님 >

우리는 지난 5개월에 걸쳐 요한복음 21장을 보았습니다. 요한복음 21장을 보면 예수님은 어떤 분인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복습하는 의미로 몇 가지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다시 기회를 주시는 주님

주님은 실패한 제자들에게 다시 찾아오셔서 그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 사실을 생각하면 우리는 실패에 놀랄 필요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 실패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실패의 원인은 분석하고 반성하되 그 실패 때문에 자신을 실패자로 비하하지 말아야 합니다. 실패를 잘 요리하면 오히려 실패는 창조와 성숙의 기회가 되고, 주님을 더 깊이 체험하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2. 빈 손 인생을 찾아주시는 주님

요한복음 21장을 보면 제자들이 밤새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새벽이 되었을 때 주님은 빈손의 제자들을 찾아주셨습니다. 우리가 빈손이면 사람들은 외면하지만 주님은 그때 더 가까이 오십니다. 영적인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신앙이 좋다고 생각하면 주님은 외면하시지만 내 신앙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주님은 가까이 찾아오십니다.

3. 용서하시고 용납하시는 주님

요한복음 21장 전체를 보면 주님의 용서의 흔적이 곳곳에 배여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복되고 아름다운 삶은 용서하는 삶입니다. 용서와 화해를 모르면 아무리 잘나가는 인생도 결국 불행한 인생입니다.

4. 조용히 사랑을 베푸시는 주님

요한복음 21장을 보면 ‘요란한 큰 소리’는 없지만 조용한 가운데 곳곳에 주님의 사랑의 펼쳐져 있습니다. 특히 갈릴리 바닷가에서 있었던 사랑의 비치파티는 제자들에게는 영원히 잊지 못할 은혜 받은 시은소(施恩所)였습니다. 그때 제자들은 주님의 사랑으로 그들의 허기진 영혼을 채울 수 있었습니다. 이 주님의 사랑이 없이 우리는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 희생은 희생 이상의 축복을 부릅니다 >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행복은 소유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약간은 상관이 있습니다. 그러나 행복과 더 상관이 있는 것은 인격과 마음이고, 가장 상관이 있는 것은 신앙입니다. 왜냐하면 행복은 궁극적으로 주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소유는 본질적인 축복이 아니라 부수적인 축복입니다. 그 소유가 본질적인 신앙의 축복까지 훼손하면 그 소유의 축복은 반드시 저주로 변하게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주님을 붙들기 위해서라면 과감히 소유까지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알고 나서 자기의 모든 자랑거리를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배설물은 빠질수록 시원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빠져야 더욱 새롭고 신선한 것이 채워지게 됩니다.

어느 날, 더러운 곳에 살던 애벌레가 나비가 되어 하늘을 날게 되었습니다. 날다가 아래를 보니까 다른 애벌레들이 배설물 속에 있었습니다. 그때 생각합니다. “내가 옛날에 저곳에 있으면서 좋다고 했구나!” 우리는 배설물을 좋아하는 미성숙한 애벌레가 아니라 날개를 가지고 창공을 나는 나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 믿고 얻게 된 가장 큰 축복 중의 하나가 높은 데서 날 수 있는 영적인 날개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나비처럼 항상 하나님의 높은 시야와 관심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소유에 관심이 없고, 우리의 인격에 관심이 있습니다. 물론 믿음의 축복에는 부분적으로 소유의 축복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사람에게 많은 것을 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내게 주시지 않을지라도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이 진짜 믿음입니다. 그런 믿음 가운데 역사가 일어납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인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금 신상에 절하지 않으면 불가마에 던져 죽이겠다”는 왕의 말을 듣고 말했습니다. “불가마에 던져도 하나님께서 지켜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의 신상에 절하지 않겠습니다.” 그래서 결국 불가마에 던져졌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구원해주시고 높여주셨습니다. 우리도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라고 고백하며 신앙 때문에 어떤 희생도 감수하면 하나님은 그 희생한 것 이상의 축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만사형통을 바라고, 신비한 능력을 더 원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변화된 삶을 더 원하십니다. 능력과 은사를 보여주어도 마음과 입술이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세상에 매여 세상 사람처럼 산다면 그것은 허무한 신앙놀음과 같습니다.

< 자유는 ‘주님께 매임’에 있습니다 >

사람이 무엇에 매여 사느냐 하는 것은 그의 행복을 위해서 대단히 중요합니다. 어떤 분은 미신에 매여 삽니다. 미신은 믿으면 믿을수록 자유를 잃고 불행하게 됩니다. 함부로 이사도 못 갑니다. 점쟁이에게 찾아가 이사 날짜도 물어야 합니다. 결혼도 아무 때나 못합니다. 심한 사람은 영기가 막힌다고 못도 아무 데나 박지 못합니다. 그래서 미신은 믿으면 믿을수록 두려움과 불안이 더 많아집니다.

왜 점쟁이들이 이상한 말로 불안과 두려움을 줍니까? 그래야 영혼의 자유를 빼앗고 마음대로 끌고 다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점을 치러 온 사람에게 평강과 위로의 말을 해주는 점쟁이는 없습니다. 그러면 어디에서 복채가 나옵니까? 사람의 영혼을 얽매는 데는 많은 얘기도 필요 없습니다. 한 마디만 하면 됩니다. “남편 조심해! 3년까지가 고비야!”

인생이란 크고 작은 사건의 연속입니다. 하물며 3년 동안 전혀 사건이 없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어떤 사건에도 하나님이 붙들어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점쟁이의 말 한 마디를 즉시 물리치지 않고 영접하면 믿음 다 팔아먹고 3년 동안은 불안과 두려움에 싸여 영혼의 노예처럼 살게 됩니다. 그처럼 미신은 믿으면 믿을수록 자유를 잃고, 불행하게 됩니다.

결국 사람들이 자유를 잃고 불행하게 되는 이유는 진정한 자유를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고 엉뚱한 말에 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매이면 축복 받는 인생이 되지만 저주의 말에 매이면 저주 받는 인생이 되고 세상과 사단에 매이게 됩니다.

야곱의 식구들이 7년 흉년을 피해서 애굽 땅에 내려갔습니다. 아들 요셉이 총리로 있으니 먹고 사는 문제는 다 해결되었지만 7년 후에는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냥 살기 좋은 애굽의 고센 땅에 정착했습니다. 그 뒤 어떻게 되었습니까? 처음에는 잘 사는 것 같았지만 요셉이 죽고 그 자손들은 다 애굽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잘 살겠다고 세상을 찾으면 처음에는 잘 사는 것 같아도 곧 세상의 노예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종이 되지 말고 주님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주의 종이기에 “주님 뜻이라면 다 잃어도 좋습니다”라고 해야 합니다. 욥은 모든 것을 다 잃었지만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어다(욥 1:21)”라고 철저한 종의 고백을 했습니다. 주님께서 주셨으니 주님께서 마음대로 하시라는 것입니다. 그런 고백을 통해서 욥은 다 얻었을 때보다 다 잃었을 때 하나님께 최고로 영광을 돌렸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청지기의 고백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저의 것을 가지고 마음대로 요리하세요. 물질도, 자녀도, 재능도, 시간도, 저의 목숨도 주님께서 주신 것이니 마음대로 요리해 사용하세요.” 그런 고백을 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불행을 주시겠습니까? 그런 고백이 없이 다 자기 것인 줄 알고 사는 자에게 불행과 저주와 사단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입니다.

< 내일은 주님을 위해 >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목적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주님이 보여주신 은혜와 사랑을 책에 기록하려면 지구 전체가 책꽂이라도 그 책을 다 채우기에 부족하다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저는 이 말을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보이지 않는 책들이 되어야 한다”는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사랑은 항상 사명으로 발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의 사랑을 회복시켜 주신 궁극적인 목적은 사실 그의 사명을 회복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만일 우리가 은혜와 사랑과 축복을 받고도 사명에 관심을 두지 않으면 그 은혜와 사랑과 축복은 오히려 진노로 가는 통로가 됩니다. 우리는 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축복하셨는지 그 목적을 결코 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얼마 전에 어떤 분은 요삼일육선교회에 선교헌금을 보내면서 이런 메일을 보냈습니다. “목사님! 인터넷을 통해 목사님의 주일 예배 말씀을 죽 읽고 나면 얼마나 은혜가 되는지 모릅니다. 그 은혜를 표현할 길을 찾다가 목사님의 선교 비전에 동참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희 가정을 축복하신 것은 선교에 동참하라는 뜻인 줄 압니다. 지금은 적은 심부름밖에 못하지만 나중에는 더 큰 심부름을 할 날이 오기를 기대합니다.”

그분은 선교를 ‘하나님의 심부름’이라고 했습니다. 그 글을 보면서 그분이 누군지 몰라도 그가 가진 행복과 보람은 저도 같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삶에서 그런 소중한 목표가 없다면 얼마나 허무한지 모릅니다. 그런 삶은 그저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삶밖에 되지 않습니다.

지난 추석에 친척 중의 한분이 말하길 “요새 웰빙(well being, 건강한 존재가 되는 것) 열품이 부는데, 어떤 사람은 오직 몸만 만들려고 모든 시간을 보내니 그게 사람이냐?”고 했습니다. 몸의 웰빙이 있어도 사명을 따라 사는 영혼의 웰빙이 없다면 식물인간이 산소 호흡기를 끼고 생명을 연장하는 것과 별로 다름이 없습니다. 사명을 외면하고 뛰는 조깅은 오직 죽음을 향해 뛰는 조깅이 될 뿐입니다.

아프리카에서는 가끔 양들이 마구 내달리다 벼랑에서 떨어져 죽는다고 합니다. 왜 그런 일이 생깁니까? 양떼들이 풀을 먹다가 뒤에서 양들이 밀면 앞의 양들의 걸음이 빨라지다가 나중에는 뛰게 됩니다. 그러면 뒤의 양들도 집단에서 이탈하지 않으려는 본능 때문에 왜 뛰는지도 모르고 열심히 같이 따라 뛰다가 결국 벼랑에 떨어져 죽는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숨이 찰 정도로 열심히 뛰어다닙니다. 그러나 왜 그렇게 하는지 물으면 대부분은 뚜렷한 목표도 없이 남이 하니까 같이 따라 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유치원생도 바쁘게 이 학원, 저 학원으로 뜁니다. 그러나 열심히 사는 것은 좋지만 목표가 없으면 그만큼 빨리 망합니다. 땀과 성실은 인생의 목표가 뚜렷할 때만이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목표 없이 뛰는 것은 죽음을 향해 뛰는 것입니다.

사단의 가장 큰 유혹은 목표를 잃어버리게 하는 것입니다. 사단은 예수님도 목표를 잃어버리게 유혹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버리고 기적과 영광을 추구하라고 했습니다. 사단이 가장 좋아하는 일은 성도가 자기 영광에 도취하는 일이고, 가장 싫어하는 일은 성도가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 그때 만약 예수님이 십자가를 거부하고 사단의 말대로 돌을 떡으로 만들고, 성전에서 뛰어내리셨다면 당대의 화려한 스타가 되었을지라도 영원한 구세주는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내게 주어진 사명을 잊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축복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도구로 써야 합니다. 그것이 없이 그 은혜와 축복을 자기만을 위해서 사용한다면 그 은혜와 축복은 얼마 후에 저주의 도구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내게 주어진 축복을 하나님의 뜻을 위해 쓰겠다고 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에 지금보다 더 많은 과실을 맺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21장 강해를 통해서 ‘어제의 실패’를 덮어주시는 주님의 크신 사랑을 깨닫고, ‘오늘의 삶’을 아름답게 인도하시는 주님의 손길을 느꼈습니다. 어제와 오늘, 주님으로부터 이토록 사랑 받았다면 내일은 우리가 주님을 위해 최선의 땀을 흘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소중한 나’의 영적 소명을 생각하며 주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따라 묵묵히 걸어가지 않겠습니까? ( 끝 )

< 후기(後記) - 요한복음 21장 강해를 마치고 >

지난 5개월 동안 요한복음 21장을 보면서 저 자신이 은혜를 받고 좋은 책을 쓰겠다는 감동 가운데 말씀 준비를 해서 별로 큰 어려움을 느끼지 못하고 말씀 준비를 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여러분들의 성원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초고는 대략 원고지 2500매 가량(일반 책 약 700페이지 분량)을 썼습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총 900매 가량(일반 책 약 250페이지 분량))으로 원고를 수정하고, 문장과 단어를 다듬으면서 내용을 축약했습니다.

앞으로 최종적인 탈고까지 또 다른 고뇌의 과정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책 제목을 ‘내일은 주님을 위해’라고 지으려고 했는데, 지금은 ‘주님과의 깊은 만남’이라고 제목을 바꾸고 싶습니다. 책 ‘주님과의 깊은 만남’을 통해서 방황하는 분들이 예수님과 깊은 만남을 체험하고 새로운 인생을 설계할 수 있도록 계속 기도해주시고 성원해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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