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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근심을 터는 존귀함 (빌 2:2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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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황금성 목사

지난 주일에 책을 한권 선물 받았습니다. 유정옥 사모님이 인천 인일여고 홈페이지에 올린 글을 책으로 엮은 것입니다. 사모로 목회 뒷바라지를 하면서 겪은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습니다. 모두 잔잔한 감동을 주는 내용들입니다.

그 글 중에 큰 아들을 군대 보내고 면회하면서 겪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군대에 가서 고생하는 아들을 첫 면회하는 어머니입니다. 아들은 씩씩하게 웃었지만 고생하는 기색이었습니다. 캐보니 한 달 먼저 온 고참병이 못살게 굴고 있었습니다. 아침 식사하기 전에 완전 군장을 하고 연병장을 뛰고 와서 보고한 후에 밥을 먹게 한답니다. 천식 때문에 아침 일찍 뛰는 것이 너무 고통스럽고, 다 뛰고 가면 식사 시간이 끝나서 밥을 못 먹을 때가 많았답니다. 이 말을 들으니 피가 거꾸로 흐르는 듯하고 심장이 멎을 것 같더랍니다. 겨우 참고 심호흡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그 상관이 졸병일 때에 비해 네가 편해 보여서 그런 것 같다. 그러니까 연병장을 더 잘 뛰어라. 억지로 뛰지말고 즐겁게 노래하면서 뛰어라. 그리고 보고할 때 상관에게 고맙다고 해라. 어쨌든 많은 사람 중에 너에게 관심을 가져 주는 것은 고마운 일이 아니냐? 하나님은 모든 것을 선으로 바꾸실게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려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새벽 기도를 마치고 동네 초등학교 운동장을 뛰었습니다. 아들이 뛰는 시간에 그를 위해 기도하면서 뛰었습니다. 그렇게 한 달이 다 될 즈음에 아들에게서 편지가 왔습니다.

“어머니 저는 오늘에야 하나님의 축복은 시련 뒤에 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동안 연병장을 뛰면서 때로는 화가 나고, 자존심도 상했습니다. 그날로 단번에 끝장을 낼 생각도 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말씀대로 마음을 고쳐먹고 즐겁게 뛰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뛰면서 저는 엉엉 울고 말았습니다. 이제까지 천식 때문에 숨이 막혀 지쳐 쓰러질 지경이었는데, 오늘은 아무렇지도 않게 거뜬했습니다. 하나님이 그 고참을 통해서 저의 지병인 천식을 고쳐 주신 것입니다. 그 고참에게 너무 고마워서 경례를 했더니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 내일부터 뛰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머니 내일부터는 제 스스로 뛰겠습니다.”

시련 뒤에는 축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그 시련의 가면을 벗겨내면 놀라운 축복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그런 원리가 담겨있습니다. 바울은 에바브로디도 때문에 고생을 했습니다. 그러나 고비를 넘기고 오히려 기쁨과 은혜를 나누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에바브라디도입니다. 빌립보서는 이 에바브로디도 때문에 쓰여졌습니다. 빌립보서는 이 에바브라디도의 소식을 전해주기 위해 펜을 들은 것입니다.

에바브라디도는 빌립보교회 교인입니다. 그는 빌립보교회의 특사로 바울을 찾아왔습니다. 빌립보교회는 감옥에서 고생하는 바울을 위해 물품을 보냈습니다. 에바브라디도는 긴 여행 끝에 로마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교인들의 선물을 전해주었습니다. 그는 계속 머물면서 바울의 옥바라지를 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못되어 그만 중한 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그의 병은 깊어서 죽게 되었습니다. 27 절에 “저가 병들어 죽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간호하게 되었습니다. 옥바라지를 하겠다고 온 사람을 오히려 돌보게 되었습니다. 거꾸로 바울의 짐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빌립보교회는 큰 걱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일은 바울이 벌인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자기 때문에 교회가 걱정하고 있다니 이 또한 바울의 근심이 됩니다. 오늘 본문 27 절에 근심 위의 근심이라고 말할 정도의 부담이 되었습니다.

에바브로디도 본인은 걱정은 어떻습니까? 26 절을 보니 에바브로디도의 근심에 대해서 나옵니다. 빌립보교회가 자기 병든 소식을 알려졌다는 소리를 듣고 심히 근심합니다. 환자가 큰 근심을 하고 있으니 치료에 도움이 되질 않습니다.

만약 병이 깊어 죽기라도 하면 어쩝니까? 그러면 걷잡을 수 없는 걱정거리가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일을 근심 위에 근심이라고 한 것입니다.

교회가 근심하고 있습니다. 에바브로디도가 큰 근심을 합니다. 바울은 근심 위에 근심을 하고 있습니다.

오직 이 근심을 덜 방법은 오직 한 가지 에바브로디도의 병이 빨리 낫는 것입니다. 그러나 병이 깊어 치료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오직 기도뿐이었습니다. 바울은 에바브로디도의 병이 낫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으로 기적적으로 병에서 회복하였습니다.

빌립보서는 에바브로디도가 회복되었다는 소식을 급히 알리기 위해 쓴 편지입니다. 이 경험은 바울에게도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근심이 변하여 기쁨이 된 것입니다.

시련이 지나가고 이제 근심이 해결되었습니다.

어찌 보면 에바브라디도가 한 일은 별로 없어 보입니다. 바울을 도우려고 왔지만 오히려 바울의 병간호만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병이 낫자 바로 빌립보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정말 면목이 서지 않는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에바브라디도를 칭찬하는 일에 조금도 망설이지 아니합니다. 에바브라디도야 말로 가장 존귀히 여김을 받을 자라고 높이고 있습니다.

그럼 과연 에바브라디도가 어떤 헌신과 봉사를 했기에 그런 칭찬을 했을까요 ?

첫째로 에바브라디도는 주님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드렸습니다.

그는 헌신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적인 생활을 포기했습니다. 빌립보에서 로마까지 긴 여행은 순전히 빌립보교회의 파송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교회가 여러 달 동안 감당해야할 어려운 일을 맡을 사람을 구했을 때 자청해서 선뜻 나선 사람입니다. 그는 시간을 바쳤고, 노동력을 바쳤습니다.

아니 그가 정말 바친 것은 자기 목숨이었습니다. 30 절을 보면 “저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하였다고 했습니다.

자기를 돌보지 아니하고 다른 사람을 먼저 챙기는 에바브라디도의 헌신의 자세는 주님의 십자가의 희생을 연상하게 됩니다. 자기는 지금 병들어 죽게 되었는데도 그 와중에서 바울에게 자기 임무를 다하려고 했습니다. 아픈 몸을 일으키려고 했습니다. 병중에도 무엇인가 자기 임무를 감당하려고 몸을 일으키려고 했습니다.

그는 아픈 몸을 핑계로 바울의 간호를 누워서 받을 처지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죽기에 이르러도 섬기는 일을 채우려고 했습니다.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애쓴 에바브라디도의 헌신은 그지없는 십자가 바로 그것입니다.

둘째로 에바브라디도는 교회를 사랑했습니다.

26 절 말씀을 보니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했습니다.

에바브라디도는 개인의 자격으로 바울을 도우러 온 것이 아닙니다. 그에게는 언제나 빌립보 교회가 있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그를 보냈고, 그는 지금 빌립보 교회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의 봉사와 헌신은 빌립보 교회를 대표하는 것이었습니다.

에바브라디도는 그런 교회를 대표하는 자로 긍지를 가졌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를 누구보다도 아끼고 사랑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맡은 일을 좋아했습니다. 존경해 오던 바울 사도를 가까이 모시고 그를 섬기는 일은 정말 귀한 일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을 맡겨 준 교회에 감사하고 있었습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 동안 그는 교회를 그리워하며 교인들을 간절히 사모하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봉사는 내 개인적인 봉사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교회 대표로서 긍지와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기쁨으로 주님의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내 실수와 게으름은 나 혼자 욕먹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교회에 욕 된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 교회를 사랑하십니까? 일주일 동안 교회가 궁금합니까? 헤어져 있던 교우들이 보고 싶습니까? 교회를 세우기 위해 내 모든 정성을 쏟고 싶습니까?

그런데 자기 입맛에 맞지 않으면 돌아서는 교인도 있습니다. 교회를 사랑하지 않고 교회를 다니면 불평이 생깁니다.

지난번에 중국으로 이민 간 김보은 성도가 다녀갔습니다. 교회 이야기를 하면서 눈물이 그렁그렁합니다. 멋진교회가 그렇게 그리웠나봅니다. 멋진교회 노래를 작곡하고 싶다고, 글을 달라고 신신당부를 하고 갔습니다.

암치료를 받고 뉴욕으로 돌아간 전성희 집사님은 지금도 매일 멋진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계신답니다. 가끔 인터넷에 편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멀리 떨어져 있어 더욱 교회를 그리워하게 된답니다. 명부에 멋진교회 교인으로 남고 싶다며 이름 지우지 말라고 합니다.

여러분 만약 멋진교회가 어려움에 처하면 교회를 지키기 위해 헌신할 수 있습니까? 아니면 골치 아프니까 편하게 교회 다니기 위해 돌아서겠습니까?

셋째로 에바브라디도는 남의 부족함을 채우는 자세로 일했습니다.

다시 30 절 말씀에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 했습니다.

빌립보교회는 워낙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마음뿐입니다. 에바브라디도는 빌립보교인들의 마음을 압니다. 그래서 그 부족함을 자기 한 몸으로 채우려고 했습니다.

봉사는 남의 부족함을 채우는 것입니다. 손가락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손과 발로 하는 것입니다. 하는 일에 구멍이 뚫리고 빈자리가 생기면 내가 메워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지적을 잘합니다. 남의 부족한 모습과 연약한 모습이 눈에 잘 보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지적하고 비판하기 쉽니다. 그러나 불평과 지적에 앞서서 아무 말 없이 그 빈자리와 그 부족함을 채워야 합니다.

혼자서 다 잘해버리면 다른 사람이 할 일이 없어집니다. 교회 일은 혼자 잘해도 좋지 않습니다.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가며 나눠서 감당할 때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봉사가 됩니다.

바울은 이런 에바브로디도를 25 절에서 세 가지 모습으로 불렀습니다.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군사 된 자요, 빌립보교회의 사자입니다.

바울은 에바브로디도에게 반했습니다. 정말 칭찬이 아깝지 않은 훌륭한 그리스도인입니다. 비록 병들어 근심거리가 되긴 했어도, 그것 때문에 오히려 사람 됨됨이를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값어치는 어려울 때 나타납니다.

홍콩에 베트남 난민촌이 세워졌을 때의 일입니다. 국제 예수 전도단의 몇 단원들이 난민촌에 들어가 전도를 하기 위해 허가를 요청했으나 거절당했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아니하고 끊임없이 요청하자 마침내 난민촌에 들어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난민촌의 감독관은 ‘전도’에 관한 것이라면 어떠한 것이든지 하지 못하도록 금지시켰습니다. 그 대신 막혀서 넘쳐흐르는 분뇨시설을 복구하는 일거리를 맡겼습니다. 며칠 동안 그들은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더러운 구정물 속에서 일했습니다. 분뇨시설이 완전히 제 모습을 찾게 될 때까지 깨지고 막힌 화장실 하수도관을 벗겨내고 뜯어 고치고 깨끗이 청소하였습니다. 일을 다 마치고 다음 할 일을 받으러 감독관을 찾아갔습니다. 감독관은 처음 이 일을 맡길 때부터 일을 해 내리라고는 기대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자발적으로 일하는 이들의 태도에 감명을 받고는 베트남 난민들을 위하여 전도활동을 할 수 있도록 허락했습니다.

그 다음 그 전도 팀은 더욱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다 망가진 분뇨시설을 복구하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본 베트남 난민들이 자기들이 본 것에 의해 마음이 움직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전도 팀이 나누어 주는 복음의 메시지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고, 곧 진지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여러분 에바브로디도처럼 헌신하는 사람,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 남의 부족함을 채우는 일꾼이 복음의 능력을 나타냅니다.

바울은 29 절에서 에바브로디도를 모든 기쁨으로 영접하고, 존귀히 여기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모두 존귀한 주의 백성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찬식 - 오늘 성찬은 고민을 터는 능력의 성찬입니다. 이 성찬을 통해 모든 시련을 털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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