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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에게 명하시는 대로 (출 7: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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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석기현 목사

옛날 초등학교 운동회 같은 데서 줄다리기 경기를 흔히 했었는데, 그것과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개인 줄다리기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두 사람이 서로 마주 보고 서서 줄넘기 줄의 양쪽 끝을 각각 자기 허리에 둘러 감아 손에 잡고, 그 줄을 서로 당겨서 상대방을 넘어뜨리면 이기는 경기입니다. 이것이 단체 경기로 하는 줄다리기와 다른 것은, 이 개인 줄다리기는 무조건 잡아당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잡아당기는 척 하다가도 적절한 시간에 갑자기 줄을 느슨하게 어느 정도 놓아 주었다가 또 당기기도 하면서 상대방의 균형을 깨뜨리는 데에 그 요령이 있는 경기입니다.

인생에 있어서도 그 같은 줄다리기에 비유될만한 일들이 자주 벌어집니다. 장사꾼들이 거래를 할 때라든지 사원이 사장에게 봉급 인상을 요구할 때라든지 국가와 국가 사이에 어떤 협정을 맺을 때와 같은 경우에, 대개가 초장의 한판으로 그냥 결정되지 않고 한동안 쌍방이 서로 당기고 끌려가고 하는 눈치작전이나 흥정의 줄다리기가 반드시 있기 마련입니다. 그 같은 줄다리기가 계속 되는 동안 쌍방은 그야말로 자기가 가진 모든 힘과 지혜를 다 동원하여 그 상황을 한 치라도 자기 쪽에 유리하도록 이끌기 위하여 죽어라고 잡아당기다가도, 또 때로는 일부러 약간 양보하여 그 줄을 느슨하게 함으로써 결국은 자기 쪽의 의도대로 상대편을 유도하는 고도의 전술을 쓰기도 하는 것입니다.

팽팽한 긴장과 허를 찌르는 느슨함이 교묘하게 교차되는 그런 줄다리기는 비단 세상사에서 뿐만 아니라 영적인 전투 상황에서도 흔히 벌어질 수 있는 일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이라는 줄을 사이에 놓고 모세와 바로가 벌인 줄다리기였습니다. 피차 양보할 수 없는 이 한판의 줄다리기가 벌어지는 동안 그 팽팽한 줄을 일부러 조금씩 느슨하게 함으로써 상대방을 넘어뜨리려는 수법을 쓴 사람이 바로 애굽의 바로였습니다. 본문 7장으로부터 9장에 보면 바로는 자기가 잡고 있던 쪽의 줄 끝을 세 번이나 조금씩 늦춤으로써 모세의 균형을 빼앗아 넘어지게 하려고 시도했음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의 그 같은 수법은 오늘날에도 사단이 성도를 그 신앙생활에서 실족하게 만들기 위하여 흔히 쓰고 있는 상투적인 수법이 되고 있습니다. 과연 그것들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결코 느슨하게 해서는 안 될 것들이 무엇입니까?

1. 신자는 ‘교회를 중심으로 하나님 섬기는 신앙생활’을 결코 느슨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두고 모세와 줄다리기를 하고 있던 바로는 바로 이 점에 대하여 그 줄을 조금 느슨하게 함으로써 모세를 실족시키려고 시도했습니다. 출애굽기 8장 25절부터 29절에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가서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라 / 모세가 가로되 그리함은 불가하니이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는 것은 애굽 사람의 미워하는 바이온즉 우리가 만일 애굽 사람의 목전에서 희생을 드리면 그들이 그것을 미워하여 우리를 돌로 치지 아니하리이까 / 우리가 사흘길쯤 광야로 들어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되 우리에게 명하시는 대로 하려 하나이다 / 바로가 가로되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광야에서 희생을 드릴 것이나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 그런즉 너희는 나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바로 앞에 서서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을 요구했을 때, 바로의 즉각적인 반응은 코웃음이었으며 오히려 백성들의 역사를 더 힘들게 만들어 버린 것이었습니다. 낙심에 빠져 있던 모세와 아론을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번 다그치시면서 「내가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고 나의 표징과 나의 이적을 애굽 땅에 많이 행하리라마는 바로가 너희를 듣지 아니할 터인즉 내가 내 손을 애굽에 더하여 여러 큰 재앙을 내리고 내 군대,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지라」(출 7:3~4)고 말씀해 주심으로써,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고 나서는 모세와 강퍅한 마음으로 굳어진 바로 사이에 한동안의 끈질긴 줄다리기가 있을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하여튼 처음 몇 라운드가 지날 동안 바로는 그야말로 완강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아론의 지팡이를 뱀으로 만들고, 나일강을 피로 변하게 하고, 애굽 온 땅을 개구리로 뒤덮이게 하는 재앙을 내릴 때까지는 바로와 그의 신하들까지 요지부동이었습니다. 그 부분적인 이유는, 그 이적과 두 가지 재앙들은 애굽의 술객들도 흉내를 내어 따라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세 번째 재앙, 즉 티끌로 이를 만들어 온 애굽 땅 사람과 생축에게 오르게 하는 재앙이 덮치자 애굽의 술객들이 먼저 손을 들게 되고 「이는 하나님의 권능이니이다」(출 8:19) 하고 바로 앞에서 자기들의 무력함을 실토하게 되었습니다. 사단 역시 이적을 행하여 사람을 미혹할 수 있지만 거기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임을 잘 보여 준 장면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네 번째 재앙, 즉 파리 떼로 애굽 땅을 하나님께서 치셨을 때, 바로는 처음으로 약간의 반응을 나타내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방금 본문에서 읽은 대로 「너희는 가서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라」는 회유책이었습니다.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다가 바로 편에서 약간 느슨하게 줄을 늦춘 것입니다. “너희들이 정 하나님 앞에서 절기를 지키고 희생 제물을 바치겠다면 허락해 주겠다. 하지만, 광야로 나가지는 말고 지금 살고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제사를 드려도 별 상관없는 것 아니겠느냐?” 하고 슬쩍 모세를 떠보았던 것입니다.

모세는 그 작전에 넘어가지 않고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그 이유를 두고 26절에서 모세는 「만일 우리가 애굽 땅에서 하나님께 희생 제물을 바치면 애굽 사람들이 우리를 싫어하여 죽일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모세의 이 말은, 당시 애굽 사람들이 황소, 암소, 양 등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제물드릴 때 사용하는 짐승들을 신성한 동물로 여기고 숭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 땅에서 그 같은 동물을 마구 잡아 제사를 드리거나 하면, 애굽 사람들이 난리를 칠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비록 모세가 그런 이유를 들어 거절하기는 했지만, 설사 그 같은 이유가 없었다 하더라도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라」는 바로의 타협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음은 명백한 사실이었습니다.

「이 땅에서」라든지 「너무 멀리 가지는 말고」라는 말들은 오늘도 사단이 성도의 신앙생활을 흔들기 위하여 잘 쓰는 대표적 수단입니다. “그렇게 별나게 교회 중심으로만 해야 신앙생활인가? 교회 나가지 않아도 그저 예수님 말씀 따라서 내 생활 주변에서 얼마든지 신앙생활 할 수 있는 것 아닌가?”라는 말들을 우리는 종종 듣게 됩니다. “교회에 다니더라도 너무 깊이 관여하지는 말고 그저 내 생활에 큰 손해 없도록 적당히 거리를 두고 하는 게 상책이지.”라는 자세로 교회 생활하는 사람들도 꽤 많이 있습니다. “이제는 대중전달 수단이 잘 발달되어 자기 집 안방에서도 유명한 교회 예배 보고 유명한 목사님 설교 들을 수 있으니, 그저 주일마다 집에서 텔레비젼을 통해 예배드리고 헌금도 그냥 온라인으로 보내면서 신앙생활할 수 있는 시대가 이미 도래했다.”라는 따위의 어처구니없는 말을 제 딴에는 무슨 기발한 아이디어를 착상해낸 것처럼 말하는 사람조차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바로가 했던 말이고, 그것이야말로 사단이 제안하고 있는 유혹인 것을 바로 깨달아야만 합니다.

우리는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집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는 시편의 고백을 몸으로 느낄 줄 알아야만 합니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체험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신 교회를 통하여 맛볼 수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주의 몸 되신 교회를 찾아오는 것을 귀찮아하고 그저 앉아 있는 집안에서 신앙생활하려는 생각이야말로 오늘날의 바로가 제안하는 교묘한 유혹임을 깨닫고, 더욱 교회중심의 신앙생활을 끝까지 늦추지 아니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신자는 ‘온 가족이 함께 하나님 섬기는 신앙생활’을 결코 느슨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섬기는 자세에서 어찌하든지 약간의 틈을 내려 하는 사단의 교묘한 술책은 바로의 입술을 통하여 계속 나타나고 있습니다. 본문 10장 7절로 11절에 「바로의 신하들이 그에게 고하되 어느 때까지 이 사람이 우리의 함정이 되리이까 그 사람들을 보내어 그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게 하소서 왕은 아직도 애굽이 망한 줄을 알지 못하시나이까 하고 / 모세와 아론을 바로에게로 다시 데려오니 바로가 그들에게 이르되 가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려 갈 자는 누구 누구뇨 / 모세가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인즉 우리가 남녀노소와 우양을 데리고 가겠나이다 / 바로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와 너희 어린 것들을 보내면 여호와를 너희와 함께하게 함과 일반이니라 삼갈지어다 너희 경영이 악하니라 / 그는 불가하니 너희 남정만 가서 여호와를 섬기라 이것이 너희의 구하는 바니라 이에 그들이 바로 앞에서 쫓겨나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 장면에 이를 때 즈음에는 이미 수차례의 재앙이 뒤따라 첨가된 이후였습니다. 9장 이하에 기록된 대로 다섯 번째로 악질 재앙, 여섯 번째로 독종 재앙이 각각 애굽의 사람과 생축에게 덮쳤습니다. 뒤이어서 일곱 번째 재앙인 우박이 휩쓸고 지나간 후, 이제 여덟 번째 재앙으로 메뚜기 떼가 곧 덮치게 것이라는 예고가 모세의 입을 통해 바로에게 전달되었을 때였습니다. 이미 거의 초토화된 나라꼴을 보고 바로의 신하들이 먼저 들고일어났습니다. 신하들의 아우성 같은 항의에 바로도 어쩌지를 못하고 모세와 아론을 불렀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때도 바로는 완전항복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남녀노소와 우양」까지 몽땅 데리고 나가야겠다는 모세의 확고한 요청에 대하여, 「너희 남정만 가서 여호와를 섬기라」고 또 한 번 슬쩍 흔들면서 모세와 줄다리기를 했던 것입니다. “꼭 전 가족이 다 가야만 하느냐? 그냥 가족 대표로 남자들만 가서 제사를 드리면 그 의미는 하나님께 다 나타나는 것 아니겠느냐?”하는, 실로 절묘한 타협안이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나머지 여자와 아이들을 인질로 잡아둠으로써 이스라엘 민족이 자기 통치하에서 탈출하는 것을 방지하고자 함이었습니다.
그 바로의 말에 대하여 모세가 무어라고 응답했는지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어쨌든 그 타협안을 거절한 것만큼은 의심할 여지없이 분명한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10장 11절 하반절에 기록된 것처럼 모세와 아론은 곧 바로 앞에서 쫓겨났기 때문입니다.

「너희 남정만 가서 여호와를 섬기라」 - 이것 역시 오늘날에도 우리가 많이 듣고 있는 소리입니다. “주일날 가족 대표로 한두 명만 예배드리러 가면 충분하지, 입시공부 바쁜 자식까지 꼭 주일 지키게 해야 할까?”라는 느슨한 마음이 부모에게 자주 찾아듭니다. 어떤 사람은 그 반대로, “내 자식은 교육상 그래도 교회 보내지만 우리야 먹고 살아야 하니 바빠서 안 되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 가족 전체의 주일성수를 쪼개어 놓기도 합니다. “예수 열심히 믿는 사람은 한 집안에서 하나만 있으면 충분하고 나머지는 그냥 그 덕 좀 보면 되겠지.”라는 식의 풀린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조차 꽤 있는 것입니다. 정말 정신 똑바로 차리고 각자가 스스로 판단해야 합니다. “너희 부모만 가서 여호와를 섬기라.”, “너희 자식만 가서 여호와를 섬기라.”, “한 집안에서 한 명만 열심히 신앙 생활해라.” - 이런 말들이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말씀 같습니까, 아니면 바로가 하는 말 같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가령 내가 그 땅에 온역을 내려 죽임으로 내 분을 그 위에 쏟아 사람과 짐승을 거기서 끊는다 하자 비록 노아, 다니엘, 욥이 거기 있을지라도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그들은 자녀도 건지지 못하고 자기의 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겔 14:19~20)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심판대는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가 심판하시는 자리이며 거기서는 아비의 죄를 자식이, 자식의 죄를 아비가 대신해 주지 못하는 자리인 것을 결코 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부모만 배불리 먹으면 다른 온 식구들도 절로 건강하게 자라게 됩니까? 자식만 옷을 해 입히면 그 부모도 남들 앞에서 저절로 단정하게 보입니까? 가족 대표로 한 명만 따뜻한 잠자리에 자면 나머지는 어디서 자도 아무 관계없는 것이겠습니까? 의식주도 온 가족이 빠짐없이 골고루 풍성하게 누려야 하는 것이라면 하물며 우리의 신앙생활이겠습니까? 나는 빠져도 되는 예배, 내 자식은 하지 않아도 되는 성경공부, 내 부모님은 굳이 모셔 드리지 않아도 되는 기도회 - 이 모든 것들 또한 바로가 일부러 늦추고 있는 줄인 것을 깨달고, 어찌하든지 온 가족이 각자 그리고 함께 신앙생활하는 자세를 견지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신자는 ‘온전한 예물로 하나님 섬기는 신앙생활’을 결코 느슨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세와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던 바로는 이제 또 한 번 슬쩍 줄을 늦춤으로써 모세를 넘어뜨리고자 마지막으로 시도를 해 왔습니다. 본문 10장 24절에서 28절에 「바로가 모세를 불러서 이르되 너희는 가서 여호와를 섬기되 너희 양과 소는 머물러 두고 너희 어린 것은 너희와 함께 갈지니라 / 모세가 가로되 왕이라도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드릴 희생과 번제물을 우리에게 주어야 하겠고 / 우리의 생축도 우리와 함께 가고 한 마리도 남길 수 없으니 이는 우리가 그 중에서 취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섬길 것임이며 또 우리가 거기 이르기까지는 어떤 것으로 여호와를 섬길는지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나 /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으므로 그들을 보내기를 즐겨 아니하고 / 모세에게 이르되 너는 나를 떠나가고 스스로 삼가 다시 내 얼굴을 보지 말라 내 얼굴을 보는 날에는 죽으리라」고 기록했습니다.

이때는 이미 애굽 땅 전체가 아예 절단이 났을 때였습니다. 예고된 여덟 번째 재앙인 메뚜기 떼가 덮쳐서 그나마 이전의 재앙들을 면하고 조금 남아 있던 것들까지 깡그리 먹어 치워버렸습니다. 뒤이어 아홉 번째 재앙으로서 삼일 동안 온 애굽 땅이 흑암에 뒤덮임으로써 애굽 사람들은 이제 극단적인 정신적 공포까지 겹쳐져서 떨게 되었습니다. 이미 지금까지의 재앙들을 겪는 동안 여러 번 자신의 말을 번복했던 바로도 이제는 별수 없이 완전항복할 만하게 보였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바로는 끝까지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고 모세를 간교하게 물고 늘어지는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너희는 가서 여호와를 섬기되 너희 양과 소는 머물러 두고 너희 어린 것은 너희와 함께 갈지니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정 모든 백성이 다 가야 하겠다면 그것도 허락해 주겠다. 하지만 가축들만은 남겨 두고 가거라. 모든 백성이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면 되는 것이지 꼭 희생 제물이고 뭐고 하는 것을 준비해야만 하느냐?”하고 또 한 번 줄을 느슨하게 풀면서 그야말로 끈질기게 모세를 잡고 늘어졌던 것입니다.

하지만 모세는 이 마지막 타협안, 정말 유혹적으로 들리는 타협안, 그 정도라면 받아주어도 될만하게 보이는 그 타협안에도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어떤 것으로 희생 제물을 바치라고 명하셔도 다 드릴 수 있도록 모든 가축을 몽땅 다 데리고 나가야 한다.”라고, 단 한치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몽땅, 어린 아이까지도 다 보내 주겠다는 데도 모세는 짐승들까지 다 데리고 가게 하지 않으면 나갈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맞섰던 것입니다. 제 삼자가 보기에는 그 정도의 양보할 의사도 없으면 아예 흥정 자체가 성립될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에서도 모세는 자신의 주장을 끝까지 밀고 나갔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 섬기는 문제를 두고 사단과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성도는 바로 이 같은 모세의 자세를 본받아야만 합니다. 바로 하나님께 예물을 바침에 있어서도 조금도 자신을 늦추지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어떤 교인에게는, 매 주일 꼬박꼬박 예배 출석하는 것만 해도 제 딴에는 대단한 일입니다. 거기다가 자신 뿐 아니라 남편이나 아내도 교회로 데려오고 부모나 자식까지 다 함께 예배 참석하고 있으면, 이미 대단한 신자나 된 것처럼 스스로 자부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 다음 순간에 느슨한 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만해도 남들에 비하면 꽤 열심히 하는 편이니까 헌금은 대충 넘어가도 되겠지.’라는 생각이 그만 그 사람의 신앙생활에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나는 십일조는 하니까 감사헌금은 꼭 안 드려도 되겠지.’라는 생각도 물론 오십보백보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 정도는 하나님께서도 봐 주실 것처럼 생각되십니까? 하나님께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에게 어떻게 하셨는지를 상기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가진 땅 팔아서 이렇게 많은 헌금을 교회에 갖다 바치는데 그 중에 얼마 정도는 조금 빼돌려도 괜찮겠지.’라는 그 약간 느슨하게 풀어진 마음이 곧 하나님께 거짓말하는 중죄로 이어졌고, 그들은 자기네 딴에는 꽤 연보한다고 해 놓고도 바로 그 날에 부부 동반으로 죽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에 있어서 자기 양심을 속이는 일은 곧 “양과 소는 머물러 두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가라”는 또 하나의 오늘날의 바로의 유혹인 것을 깨닫고, 십일조와 감사헌금과 서원헌금 생활에서도 조금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온전하고도 신실하게 이행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바로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가지 말아라.”고 모세와 줄다리기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섬기되, 이 땅에서, 남정들만, 양과 소는 가져가지 말고, 하나님을 마음대로 섬겨라.”고 줄다리기를 걸어왔습니다. “하나님은 섬기되 그저 적당히만 섬겨라.”고 슬쩍 줄을 느슨하게 해왔던 것입니다.
그에 대한 모세의 대답은 너무나도 멋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함은 불가하니이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되 우리에게 명하시는 대로 하려 하나이다」(출 8:26~27)라고 응수했던 것입니다. 참 깨끗하지 않습니까? 자기가 기본적으로 신앙생활하고 있다고 해서 스스로를 대단하게 여기고, 그러니 하나님 섬기는 방법은 대충 자기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착각해서는 결코 아니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이란 오로지 하나님께서 명하신 방법 그대로,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 섬길 따름인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어떤 면에서든지 약간만 늦추면 그로 인하여 곧 휘청하고 넘어지게 되고, 약간이라도 풀어 놓으면 그것이 곧 신앙의 파선으로 치닫게 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바로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고, 늘 교회에 모이기를 힘쓰고 온 가족이 함께 신앙생활에 하나가 되고 자신의 물질까지 정성껏 바쳐서, 오로지 하나님 명하시는 대로 하나님을 섬기는 가운데 믿음의 경주에서 항상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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