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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의 영광과 기쁨 (살전 2: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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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박봉수 목사
 
팔불출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팔삭 동이처럼 뭔가 모자라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특히 상황과 분수를 모르고 이런 저런 자랑을 늘어놓아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 자랑이 대체로 다음 7가지입니다.

첫째가 자기 자랑이고, 둘째가 아내 자랑이고, 셋째가 자식 자랑이고, 넷째가 조상 자랑이고, 다섯째가 형제 자랑이고, 여섯째가 선배 자랑이고, 일곱째가 고향 자랑입니다.

이 팔불출들은 문제는 문제입니다. 자랑해야 할 때와 대상을 분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습니다. 때로는 듣는 사람들 속을 뒤집어 놓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팔불출은 자랑거리가 있다는 점에서 어찌 보면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때와 대상을 분별하지 못할 정도로 자랑하고 싶은 마음을 주체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아마 팔불출이라고 욕하는 사람들도 그런 욕을 들어도 좋으니 내게도 그런 자랑거리가 있으면 좋겠다고 부러워할 수도 있습니다. 남다른 자랑거리를 보고 시기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자랑할 것이 있다는 것은 정말 큰 복입니다. 자랑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려서 참기가 힘들다는 것은 정말 큰 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시면 우리에게 자랑거리가 넘쳐납니다. 팔불출이라고 욕을 먹더라도 자랑하고 싶어서 어쩔 줄을 모르게 됩니다. 여러분에게 자랑거리가 넘쳐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사도 바울의 자랑거리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우선 1:2부터 살펴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함은...” 바울의 자랑거리는 바로 데살로니가 교회요 데살로니가 교인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울이 하나님 앞에서 감사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앞에서 자랑했다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정말 어려운 중에 세워졌고, 정말 놀랍게 부흥했고, 정말 성도들의 믿음이 아름답게 자랐다는 것입니다.

어떤 장로님 권사님 부부의 자식 자랑을 들은 일이 있습니다. 머리가 워낙 좋아서 어려서부터 늘 전교 1등을 했답니다. 우리나라 첫손에 꼽히는 대학도 수석으로 졸업했답니다. 미국에 유학을 했는데 단기간 박사학위를 받았고 그 대학에 교수로 임용이 됐답니다. 팔불출이 따로 없었습니다. 입만 열면 자식 자랑이었습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교회는 잘 다니고 있겠죠? 하나님을 위해 봉사는 잘하고 있겠죠?” “아니 그게 공부가 너무 바빠서... 그래도 아이가 믿음이 있습니다. 하루에 한번씩은 꼭 기도하고요...”

안타깝게도 이분은 사람들 앞에서는 입에 거품을 물 정도로 자랑을 늘어놓았지만 정작 하나님 앞에서는 죄송한 부분이 있어 보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 자랑거리 때문에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감사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1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주 앞에 서서 자랑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데살로니가 교회와 교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장차 주님 앞에 서게 될 때가 올 것입니다. 죽기 전에 주님께서 재림하시면 그 때 주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재림 전에 우리가 죽게 되면 저 하나님 나라에서 주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 때 주님께서 뭐하다 왔느냐고 물으시면 우리가 대답할 것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주님 앞에 뭐 내 놓을 것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것을 잘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1. 무엇이 영광과 기쁨입니까?

본문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와 교인들이 자신의 자랑일 뿐 아니라 나아가 영광과 기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와 교인들 때문에 큰 영광을 누리게 되었고, 또한 더할 수 없는 큰 기쁨을 맛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렇게 많은 교회를 세우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믿음 안에 양육했지만 영광이요 기쁨이라고 자랑한 경우는 적어도 성경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이 듭니다. 그렇다면 왜 데살로니가 교회와 교인들에게는 이런 찬사를 보내고 있는 것일까요?

바울은 2차 전도여행시 성령의 인도로 마게도니야의 빌립보에 와서 전도를 하게 됐습니다. 귀한 전도의 열매가 맺어졌고 교회의 초석을 놓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큰 박해가 일어나 죽도록 맞고 옥에 갇히기 까지 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으로 옥에서는 풀려나오게 됐지만 더 이상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할 수는 없게 됐습니다.

바울은 그렇게 큰 고난을 겪었으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마게도니아 수도였던 데살로니가로 와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3주 동안 유대교 회당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의 반대로 야손의 집에서 예배드리며 복음을 전할 때 많은 이방인들이 주께로 돌아왔습니다.

시기하는 유대인들이 야손을 고소하여 잡히게되는 큰 소요가 일어났습니다. 더 이상 바울이 그 성에 머물러 있을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믿음의 형제들이 바울을 베뢰아로 보냈습니다.

바울은 정말 짧은 기간 동안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하고 그곳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지금 고린도에 머물면서 데살로니가 교회의 소식을 들어보니 너무도 놀랍고 감사한 것들로 가득했습니다.

이 소식 안에서 바울의 영광과 기쁨이 무엇인지를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로, 복음의 열매입니다.

1:5을 보면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했는데 그것이 단순히 말로만 전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듣는 사람들에게 큰 능력이 나타났고, 성령의 역사도 왕성하게 일어났으며, 그래서 복음이 이방인들도 크게 변화시킨다는 큰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됐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바울이 다른 곳에서 복음을 전할 때와는 크게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대개 회당에서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면 대부분 그들이 예수 믿고 교회의 초석을 이루었고, 거기에 이방인 일부가 참여하는 형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데살로니가는 달랐습니다. 전혀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도 모르던 이방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는 놀랍게 변화가 되었습니다. 저들을 중심으로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믿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힘든 사람들이 복음의 능력으로 큰 변화가 나타난 것입니다.

이방인들을 중심으로 놀라운 복음의 능력이, 성령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나타난 교회가 바로 데살로니가 교회입니다. 바울에게는 정말 놀라운 체험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복음이 단지 말이 아니고 능력이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체험한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자랑하고, 그래서 영광과 기쁨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저는 지난 주간에 뜻밖의 입관예배를 인도했었습니다. 서울대 철학과 심재룡 교수의 입관예배입니다. 일전에 우리 교회에도 오셔서 예배를 드린 일이 있으신 분인데, 전도하고 믿음으로 양육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백혈병으로 고생하고 계셔서 항암치료와 투병생활로 건강이 여의치 않아 계속 교회에 나오시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병상세례 문제를 마음에 두고 있던 차에 급히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습니다. 이미 예수를 영접하고 신앙고백도 하셨고, 부인과 함께 병이 나으면 교회생활 잘 하시기로 마음먹고 계신 분이었습니다.

부인의 간절한 청이 있어서 입관예배를 드리기 위해 갔습니다. 가 보니 화환이 셀 수 없이 많이 걸려있었는데 많은 부분이 불교계 인사들이 보낸 것이었습니다. 이분이 우리나라 불교 사상계의 거물이었기 때문입니다. 불교철학을 전공하셨고, 서울대학교에서 불교철학을 강의하시며, 우리나라 불교 사상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예배를 집례하면서 정말 묘한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상식적으로 지금 이 자리에는 마땅히 조계종 총무원장이 오던지 불교계의 고승이 오셔서 불교식으로 집례를 해야 옳을 것입니다. 그런데 불교계 거물들이 보낸 화화 앞에서 목사가 예배로 집례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정말 진지하게 다시 물어야만 했습니다. “불교는 과연 어떤 종교인가? 평생 불교철학을 연구한 대가가 죽음을 앞두고 불교에 등을 돌리고 예수를 믿게 됐다면 과연 불교에 구원은 있는 것인가?” 반면 복음의 능력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과연 복음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구나...

그렇습니다. 복음은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복음은 사람을 구원합니다. 이 복음의 능력이 나타난 자리에 복음의 열매가 나타납니다. 그 열매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의 영광과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믿음의 성숙입니다.

1:6-7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는지라”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마게도냐의 여러 교회들 대표적으로 빌립보 교회와 베뢰아 교회의 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아가야 지방의 아덴 교회와 고린도 교회의 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 즉 유럽 지역의 교회들의 본보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데살로니가 교회는 이렇게 본을 보일만큼 훌륭한 교회로 성장하기에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우선 바울이 1달이 못되는 짧은 기간만 머물렀었기 때문에 말씀을 충분히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어느 곳보다 박해가 심했습니다. 그래서 믿음을 지키기도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가운데서도 다른 그 어떤 곳보다 믿음이 잘 자라서 오히려 다른 지역의 여러 교회의 본이 될 정도니 얼마나 바울이 기뻤겠습니까? 그래서 자랑이요 영광이요 기쁨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맹자는 진심편(盡心扁)에서 군자유삼락(君子有三樂)이라 즉 군자에게 세 가지 즐거움이 있다고 말한 바가 있습니다. 첫째가 부모구존 형제무고(父母俱存 兄弟無故) 즉 부모가 다 살아계시고 형제가 무고한 것입니다. 둘째는 앙불괴어천 부부작어인(仰不傀於天 俯不作於人) 즉 우러러 하늘에 부끄러움이 없고 구부려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득천하영재 이교육지(得天下英才 而敎育之) 즉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교육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보듯이 누군가를 제자 삼아서 가르치고 그가 성숙해 가는 것을 보는 것 그 자체가 사람들에게 더 할 수 없는 큰 기쁨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를 영적인 제자로 삼아 믿음이 자라도록 도와서 그의 믿음이 커 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 그 자체가 더할 수 없는 기쁨이요, 자랑이요, 또한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 구원의 열매를 거두게 된 것 그것을 영광과 기쁨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믿음이 날로 자라서 본이 될 정도로 자라게 된 것 그것을 영광과 기쁨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영광과 기쁨을 맛볼 수 있었습니까?

바울이 이런 영광과 기쁨을 어떻게 맛보게 되었을까요? 말로 다할 수 없는 수고 때문입니다. 그리고 말로 다할 수 없는 사랑 때문입니다.

9절을 보면 바울은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 심각한 박해를 받았습니다. 언제 붙잡혀 죽을지 모르는 살벌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정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물질적으로 너무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밤낮으로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천막 짓는 일을 하면서 틈이 나는 대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의 이런 수고가 복음의 열매를 거두게 한 것입니다. 그 열매가 바울을 영광과 기쁨을 맛보게 한 것입니다.

17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바울은 정말 잠시 스쳐 지나온 데살로니가였지만 여기서 만났던 믿음의 형제들 그들을 마음속에 깊이 담아두고 있었습니다. 아쉬운 마음에 다시 가서 말씀을 가르치고 믿음의 반석 위에 세워주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비록 갈 수는 없었지만 그래서 2절에 항상 하나님께 기도할 때 데살로니가 교회를 위해 기도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이런 사랑이 믿음의 양육이 일어나게 한 것입니다. 그 열매가 바울의 영광과 기쁨을 맛보게 한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고 심재룡 박사의 구원 과정에는 우리 은천중국선교회의 부회장이신 대성그룹의 김영대 회장의 숨은 수고가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서울대학교 동창으로 오랜 세월 친분이 있었습니다. 두 사람 다 젊은 시절 복음에서는 멀었던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다 수년 전 김영대 회장께서 우리 원로목사셨던 고 주관준 목사님을 만나면서 잃었던 믿음을 되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중국선교에 동참하게 되면서 믿음이 크게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복음의 능력에 눈이 뜨면서 이 분의 마음속에는 친구를 전도해야 하겠다는 불같은 마음이 일었습니다. 저와 만나 함께 중국을 다니면서 늘 이 친구 이야기를 했습니다. 기도해 달라, 한 번 만나 심방을 해 달라... 그러다 친구가 백혈병 선고를 받게 되자 김 회장님의 마음의 급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자주 만나고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로 인도하기 위해 무척이나 수고를 했습니다. 그래서 한 번 예배에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병세가 악화되어 교회에 나올 형편이 못되었습니다. 계속 병문안을 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어느 날 제가 어린 아이처럼 전화를 했습니다. 친구가 예수를 영접했다는 것입니다. 기도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입니다.

장례식도 마치 부모님이 세상 떠난 것처럼 계속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유가족들이 큰 위로를 받을 뿐 아니라 예수 믿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게 합니다. 그리고 유가족들이 장례 절차가 비록 적극적으로 기독교식으로는 할 수 없더라도 불교식으로 해서는 안되겠다고 마음먹게 하고 있었습니다.

정말 김영대 회장의 큰 수고와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렇게 위로했습니다. 이 모든 열매는 회장님의 수고와 사랑의 열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수고와 사랑이 복음의 열매를 맺게 합니다. 믿음이 자라도록 합니다. 우리에게 이런 수고와 사랑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에게 어떤 자랑거리가 있습니까? 그 자랑거리가 하나님 앞에서 여전히 유효합니까? 장차 하나님 앞에 설 때 하나님께 무엇을 내어 놓을 수 있습니까? 전도의 열매를 맺으시기 바랍니다. 양육의 열매를 맺으시기 바랍니다. 두고두고 여러분의 영광이요 기쁨이여 자랑의 면류관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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