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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최고의 사랑 (눅 10:2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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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영무 목사

  여러분은 혹시 1994년 10월 21일 아침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그 날은 바로 성수대교가 무너지던 날이었습니다. 성수대교 상판이 20m 아래로 무너져 내렸고 출근 중이던 32명의 고귀한 생명이 우리 곁을 떠나가야만 했습니다. 그 때 서울교대 국어교육과 3학년에 재학 중이던 "이승영" 이라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교생 실습을 위해서 강북의 한 초등학교에 출근 한지 닷새 째 되는 날 이 엄청난 사고를 당하게 되었고 비운의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사고 직후 이 딸의 유품을 정리하던 어머니 김영순씨는 딸의 일기장을 보게 되는데 그 일기장을 넘기다 보니까 "내가 일생동안 하고 싶은 일" 이란 제목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밑에 빽빽이 기록된 글을 읽어보니까 열네 가지의 소원을 이 딸이 기록해 놓았습니다. 먼저는 "장학금을 만든다" "이동도서관을 강원도 산간벽지에 만든다" "복지마을을 만든다" "한 명 이상을 입양한다" "시각장애인을 위해 뭔가를 한다" 등등 열네 가지의 자기 인생에서 꼭 이루고 싶은 소원을 일기장에 빽빽하게 기록해 놓았다는 것입니다.

  이제 어머니 김영순씨는 그 딸의 소원을 이루어 주기로 다짐합니다. 그리고 딸이 입버릇처럼 늘 하던 말이 있었습니다. "나는 죽으면 장기를 남에게 줄 것입니다" 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남에게 그 장기를 주려고 보니까 이미 죽은 지 6시간이 지나서 시신이 부패하여 장기이식을 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시신을 고려대 의대의 해부실습용으로 기증하게 됩니다. 그리고 딸의 죽음을 통해서 이제 어머니는 보상금 2억 5천만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2억 5천만원 중에 한푼도 떼지 않고 전액을 그녀가 다니는 남서울 교회에 헌금을 했습니다. 교회에서는 그것으로 장학재단을 만들어서 "승영 장학회" 라고 운영하면서 많은 사람에게 혜택을 주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 가정의 형편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습니다. 이승영씨의 아버지는 11개월 전에 군에 있었는데 과로사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순직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가족들을 다 돌보던 그런 시점에서 2억 5천만원의 돈을 한푼도 빼지 않고 교회에 헌금했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이제 그 돈을 가지고 많은 어려운 사람들에게 장학금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신학대학원생 50명에게 장학금을 주었고 그들이 졸업해서 전도사가 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분들이 이 승영씨의 고귀한 뜻을 오늘도 이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장애인 공동체를 만들어서 장애인을 섬기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암을 이겨낸 뒤에 말기 암환자들을 위해서 기타를 가지고 연주하고 찬양을 하면서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일들을 하고 있는 분도 있다고 합니다. 또 최만재 씨라는 분은 늦게 이 장학금을 받고 신학대학원을 졸업해서는 인천 부평구에 "작은 손 길 공동체"를 만들었습니다. 그곳에서 갈 곳 없는 무의탁 노인들을 다 모아서 그분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승영씨의 "복지마을을 만든다" 는 그 꿈을 이 최만재 씨를 통해서 이루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동도서관을 만든다는 소원" 은 인제의 군부대에 이동도서관을 위해서 차량을 제공했습니다. 흰색 무쏘 스포츠 카를 새 것으로 기증해서 그 차가 도서를 가득 싣고 산 골 5개 부대를 왕래하면서 젊은 군인들에게 도서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 명 이상을 입양한다" 는 소원은 올해 초 결혼하는 승영씨의 둘째 동생이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승영씨의 어머니 이 김영순씨는 딸의 죽음 이후에 많은 것을 새로 결단합니다. 그 딸의 죽음의 과정을 기록한 책을 기록해서 그 책을 팔고 인세를 가지고 장애인들을 위해서 많은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호스피스 사역을 하고 있는데,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말기 암 환자들을 위해서 10년 동안 계속 자원봉사 일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기사를 조선일보에서 읽고 참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결코 한 사람의 죽음이 헛되지 않았구나,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던 한 젊은 자매의 죽음이 오히려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주고 소망을 주고 생명을 살리는 일에 쓰임받고 있구나'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한 사람의 희생이 이렇게 많은 생명들을 살릴 수 있다면 결코 이 죽음은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적어도 예수를 믿으려면 이 정도쯤은 믿어야 되지 않나!" 하는 것을 우리는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과 율법사의 대화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본문 속에서 우리는 최고의 사랑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율법에 능통한 율법사가 어느 날  주님을 찾아 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하는 나쁜 의도를 가지고 예수님께 질문을 드립니다.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영생을 얻는 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어떻게 하면 하늘나라에, 천국에 갈 수 있겠습니까?" 하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의도를 아시고 "너는 율법에 정통하니 율법에 뭐라고 기록되어 있느냐" 고 묻습니다. 율법전문가인 율법사는 얼른 율법을 요약해서 이야기합니다. 그것이 바로 본문 27절 말씀입니다.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아멘.

  예수님은 그의 정곡을 찌르는 대답을 들으시고는 그를 칭찬하십니다. "네 대답이 옳도다! 이 일을 해하라 그러면 네가 영원히 살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났으면 괜찮습니다. 하지만 율법사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자신이 옳다는 것을 드러내 보이려고 "선생님, 그러면 제가 섬겨야 될, 제가 사랑해야 될 제 이웃이 누구입니까? 성경에는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그랬는데 도대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해주십니다. 우리가 비유라고 흔히 이야기합니다마는 이 비유라는 것은 허구의 이야기라는 것은 아닙니다. 주석가들에 의하면 사실 이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는 실제적으로 있었던 일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따지기 좋아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허구의 이야기를 했다면 그냥 있을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에 허점을 잡아서 물고 늘어졌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모두가 공통적으로 다 알고있는 이야기였기 때문에 그들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강도를 만나서 돈을 뺏기고 옷까지 다 뺏겨버리고 그리고 강도는 그 행인을 때려서 거반 죽게 만들고 그리고 버리고 갔습니다. 이제 그 길을 제사장이 지나갑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아마 당번을 마치고 여리고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다가 그 쓰러져 죽어 가는 사람을 보고는 제사장은 두려워하면서 보는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그냥 슬금슬금 도망쳐 버렸습니다. '괜히 피를 흘리는 사람을 만졌다가는 나도 부정하게 되고 그러면 성전에서 당번도 못 서는데' 하고 도망을 갔을 것입니다. 두 번째로 존경받는 레위 인이 지나갑니다. 그는 성전에서 봉사하는 사람입니다. 그도 제사장처럼 슬금슬금 도망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세 번째는 사마리아인이 지나갑니다. 여행하던 사마리아인이 지나가다가 피를 흘려 쓰려져있는 사람을 보고는 다가와서 '큰일났구나!' 하면서 자기 몸에 소지하고 있던 기름과 포도주를 꺼내서 그 사람의 몸에 부어줍니다. 기름이라는 것은 진통제 역할을 하고 포도주라는 것은 소독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옷을 찢어서 그 사람의 상처를 잘 싸매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대로 두었다가는 죽어버릴 거야' 라는 생각에 자기 나귀 위에 태우고 가까운 주막까지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주막 주인에게 이 사람을 잘 돌봐주도록 부탁하면서 두 데나리온을 주었습니다. 제가 늘 말씀드렸습니다. 1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다라고 말입니다. 5만원씩 치면 10만원이고 요즘 기술자들은 보니까 하루에 10만원에서 15만원도 받더라구요. 그렇게 치면 두 데나리온은 약 20만원 정도의 액수를 주막주인에게 주면서 이 사람을 부탁합니다. 그리고 그는 또 말하기를 "내가 돌아올 때, 부비가 더 들면 내가 추가로 경비를 지불할테니 이 사람을 잘 돌봐달라" 고 부탁합니다. 그 당시의 환산으로 보면 두 데나리온이면 여관에서의 한 달 비용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적은 액수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그 액수를 죽어 가는 사람을 위해서 제공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주시면서 이 율법사에게 다시 질문합니다. "자, 그러면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너의 이웃이 되겠느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율법사는 "사마리아인" 이라고 대답하기는 싫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은 썩 관계가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멸시하고 사람대접도 하지 아니하고 그들을 억눌렀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인입니다" 라고는 말하고싶지 않아서 그냥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라고 말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말씀은 여기서 끝나게 됩니다.


  오늘 예수님은 진정한 사랑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진정한 사랑은 고통에 빠진 사람,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자신을 희생하며 도움을 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은 우리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위에 물질적으로 궁핍하여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이 왜 없습니까? 병들어 누군가의 보살핌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오늘도 비틀거리고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있지 않습니까? 이 사람들에게 구체적인 도움을 주는 것, 그것이 바로 이웃이 할 수 있는 일이고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주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웃이란 단지 이웃집 사람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어려움 당할 때 도움을 주고 나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그 대상이 바로 우리의 이웃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옆에 있는 분들에게 한 번 물어봅시다. "당신은 우리의 이웃입니까?"
옆에 앉아 있다고 이웃이 아닙니다. 내가 어려움을 당할 때 자신을 희생하며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이웃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말로만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너희는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진실함으로 사랑하라" 말씀하십니다. 요한일서 3장 18절 이하에 보니까,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진실함으로 사랑을 증거하는 이, 사랑을 행하는 이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고 진리 안에 있음을 확증해 주는 그런 말씀입니다. "내가 진리 안에 있는가?" 하는 것은 바로 내가 진실함으로 형제를 사랑하는가 하는 것을 물어보면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 예수님을 시험했던 율법사는 사실은 많은 문제를 내포하고있는 사람입니다. 율법사는 성경에 보니까 서기관이라고도 하고 공동번역에서는 율법교사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오늘 날 판사와 검사, 변호사처럼 법에 있어 전문가들입니다. 법에 대해서 늘 연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법에 대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지만 행함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남을 가르치지만 자신은 가르칠 줄 모르는 위선자였다고 주님은 질책하십니다. 그래서 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를 보면 그렇게 부드럽지 않습니다. "화 있을진저, 독사의 자식들아!" 이런 말들로 예수님은 거침없이 내뱉고 계십니다. 또, 누가복음 11장 46절에 보니까, "너희 율법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까딱하지 않는 자들이 바로 너희들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율법사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율법의 멍에를 메어 놓고 자기들은 아무 것도 지려고 하지 않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3장에 보니까,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13절) 라고 말씀합니다. 천국 문을 막고 있어서 자기도 못 들어가고 남도 못 들어가도록 방해하는 무리들이 바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요 율법사들이라고 주님은 책망하십니다.

  여러분, 지식은 많고 경험은 많지만 행함이 없는 율법사의 모습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 아닐까요? 사랑하자고 말은 하지만 진실로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우리들의 모습이 율법사의 모습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남은 잘 가르치려고 하면서도 자신은 아무 것도 하려 하지 않는 사람들, 남에게 보이기 위한 과시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이웃에 대한 진실한 사랑도 없고 영혼에 대한 뜨거운 열정도 없는 사람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들 자신에게 오늘 주님이 말씀하신 이 사마리아인의 사랑이 있는가를 물어보아야 합니다. 본문 27절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되 어떻게 사랑했습니까?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했느냐? 네가 이웃을 사라하되 네 몸처럼, 네 자신처럼 네 이웃을 사랑하고 있는가?" 라고 묻고 계십니다. 사랑은 결코 말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그 사랑을 위해서 내 시간을 드리고, 내 재물을 드리고 내 마음을 드리고 내 정성을 드려야만 사랑은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억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작년 7월 신문에서 읽었던 아름다운 철도원이라고 불리는 김행균 씨가 바로 그분입니다. 그는 영등포역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어린 아이가 선로에 떨어진 것을 보고는 달려가서 그 아이를 구출하고 자신은 지나가는 기차에 두 다리가 절단되어서 오랫동안 병상 생활을 하다가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재활에 성공했고 의족을 차고도 이제는 장애없이 직장생활을 하고 지금은 마라톤 대회에도 출전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참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위해서 자신의 두 다리를 희생당한 그런 분이 우리 사회에 있다는 것입니다.

  몇 일 전에 인터넷을 보다가 사진이 하나 올라왔는데 아주 감동적인 사진이 있었습니다. 어떤 다리가 없는 불구자가 고무 같은 것으로 자기 무릎을 대고 뭘 끌고 다니는데 아마도 행상 같은 분이었나 봅니다. 이 배고파하는 불구자를 보고 대학교를 졸업하고 취직하려고 준비하면서 빵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한 여학생이 그것을 보고 그냥 있을 수 없어서 자기가 파는 빵을 하나 들고 나와서 그 불구자 앞에 쪼그리고 앉아 빵을 입에다 먹여주었던 것입니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 빵을 먹여주는 것입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지나가던 사람들이 카메라 폰으로 찍어서 인터넷에 올려놓았습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 마음 속에 잔잔한 감동이 일지 않습니까? 생면부지의 불구자에게 자기가 파는 빵 가게의 빵을 하나씩 쪼그리고 앉아 떼어 주는 이 아름다운 여자 청년의 모습, 이 사회는 다 나쁜 사람들이 있는 것 같지만 이렇게 훈훈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더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진정한 최고의 사랑을 보여주신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누구십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그분은 인간의 필요를 채워주셨습니다. 굶주린 무리들에게 광야에서 빵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병자들에게 치유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상처받은 이들에게 고통 당하는 자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은 거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서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내어 던지십니다. 그 고통스러운 십자가에 자신을 내어 던지시고 그 몸이 갈가리 찢어지면서 우리의 영혼에 그 놀라운 선물을 주십니다. 그분의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십자가상에서 다 흘려버리시면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길,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최고의 사랑이요 진정한 사랑입니다. 우리가 누구를 구제하고 자선을 행하고 사랑을 베푸는 것, 그것은 훌륭한 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당연히 그렇게 해야될 것입니다. 그러나, 육체적인 필요를 도와주는 것은 절반의 사랑에 불과합니다. 참으로 그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온전한 사랑, 최고의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왜 복음전파만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복음만이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보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장 16절에 보니까,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고 그랬습니다. 계속하여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의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할 수 있는 것, 영원한 생명을 보장할 수 있는 것, 그것은 바로 복음의 능력밖에 없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몇 일 전에 일간지를 보았는데 아주 감동적인 내용이 나와 있었습니다. 또 "복있는 사람들" 이라는 책을 통해서 이미 시중에 소개되기도 했습니다.
  한 청년이 어릴 때부터 음악을 좋아했고 성악에 소질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악을 전공하고 실력을 인정받아서 유명한 보스턴 오페라단에 회원으로 단원으로 가입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군복무를 위해서 군에 입대를 했는데 그만 좀 못된 고참을 만났는지 이 고참에게 구타를 당했는데 구타를 하다보니까 목 부분을 잘못 쳐서 그만 그가 아깝게도 목소리를 상실해 버렸습니다. 성악가에게 목소리는 생명 아닙니까? 음성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는 살아있지만 죽은 사람과 똑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는 하늘을 향해 삿대질을 하면서 원망하고 싶은 마음이었다고 합니다. 절망하고 방황하다가 그는 교회로 인도를 받습니다. 그는 교회에서 설교를 듣고 또 큐티를 하면서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로마서를 큐티하다가 하나님의 권세에 굴복하지 않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엉엉 울면서 회개합니다. 그 이후에 군법재판에 나가게 되었는데 그는 그 재판에 나가서 자기를 구타해서 목소리를 잃게 만든 그 고참을 용서한다고 선언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다 용서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그가 출석하는 교회에서 간증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젊은이의 감동적인 간증 앞에 모든 교인들이 감동을 받았습니다. 교인들 중의 일부가 이 청년에게 찬양을 한 번 해보라고, 그 소리를 듣고 싶다고 요청을 했습니다. 이 청년은 주저하다가 찬양을 했는데 처음에는 목소리가 갈라지고 모기소리같이 앵앵하곤 하다가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 순간 그 우렁찬 황금의 목소리가 회복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절망에 빠졌던 그 젊은이에게 회복의 은혜가 임한 것입니다. 목소리도 다시 되찾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그 상황이 어떠했는지 여러분, 짐작되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복음을 증거하지만 그 복음을 받는 이들 속에서는 그 복음이 그에게 영생을 줄뿐만이 아니라 그의 가정이 변화되고 그의 삶이 달라지고 그의 이웃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능력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복음의 이 능력을 알고 있지만 단지 그저 이렇게 나와서 예배드리고 돌아가는 나만의 신앙생활로 여러분은 만족하고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가까운 이웃이나 가족은 방치한 채 살고 있지는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떤 주부들은 주일날 혼자 교회에 나옵니다. 교회에 간다고 남편이 방해하지 않는 것이 고마울 정도입니다. 일찍 일어나서 교회에 오다보니까 남편은 자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메모를 써놓는다는 것입니다. "여보, 교회에 갔다 올게요. 조금 더 자다가 일어나세요. 얼마나 피곤하세요. 밥은 밥통에 있구요. 국은 데워서 드세요. 예배드리고 올게요" 하고 써놓고 교회에 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리나케 예배드리고 집에 가보면 남편이 일어났죠. 그러면, "여보, 식사 잘했어요? 오후엔 우리 애들 데리고 야외에 놀러갑시다" 이러고 주일 하루가 지나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옳은 것입니까? 사랑하는 남편은 언제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지 알 수 없는데 오늘 대한민국에서는 교통사고로, 각종사고로 수십 명, 50명에서 100명씩 매일 세상을 떠나고 있습니다. 바로 그 인생의 종말이 그 불의의 사고가 내 남편에게 올지 내 가족에게 올지 내 이웃에게 올지 누가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우리는 가장 미루어서 는 안될 일, 방치해서는 안될 일은 바로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가장 긴급한 일입니다. 예수를 알지 못하고 살다가 그가 갑자기 부름을 받는다면 그가 갈 곳이 지옥 외에 어디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저는 서두에서 "이승영 씨" 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조선일보를 보니까, 그 사진 안에 남서울 교회에서 추모예배를 드리는데 흐릿하게 보였지만 그 뒤에 그 14가지 소원을 적어 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보이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그것을 적어 보았습니다. 첫 번째 소원은 "백 명 이상에게 전도한다" 는 것입니다. 그녀는 일생동안 백 명 이상에게 전도할 것이라는 거룩한 소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 소원은 "목사관을 짓겠다" 는 것입니다. 목사가 읽으니까 싫지 않더라구요. 목사님 사택이 허술한데 내가 목사님 사택을 좋은 것을 지어서 목사관을 봉헌하겠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교회를 짓겠다" 는 것입니다. 아마도 개척교회를 세우겠다는 이야기이겠지요. 네 번째는 "장학금 제도를 만들겠다", 다섯 번째는 "신앙소설을 쓰겠다" 는 것입니다. 잘못된 소설 때문에 많은 비뚤어진 청소년들이 그릇된 길로 가기 쉬운데 자신의 간증을 담은 신앙소설을 써서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겠다는 그런 의미이겠지요. 이렇게 해서 14가지 소원이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예배시간마다 전도에 관한 설교를 들을 때마다 그냥 귀를 막고 언제까지 그렇게 피하면서 살아가시겠습니까? 내 주위에 죽어가는 영혼들을 보고도 내가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나는 그냥 이 봉사만 하면 되지 뭐, 나는 주방 봉사만 하면 되고, 나는 안내만 하면 되지 내가 뭐 전도 안 하면 어때!' 하고 생각하십니까? 제사장과 레위인처럼 우리의 불신자 이웃들을 보고 슬금슬금 피해가고 도망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여러분, 다가가서 그의 영혼의 상처에 말씀의 기름을 붇고 그리고 기도의 포도주를 부어서 그의 상처를 치료하고 주막집과 같은 교회로 그 영혼을 인도해야되지 않겠습니까?


  몇 일 전에 우리 기독교 역사에 인상깊은 이야기가 나와서 제가 유의 깊게 보았습니다. 1885년 "언더우드" 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최초로 공식적인 감리교 선교사가 한국에 왔습니다. 인천의 제물포항에 들어왔지요. 그때부터 한국의 기독교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 언더우드가 한국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한 일이 YMCA를 세웠구요, 지금의 연세대학교 전신인 연희 전문학교와 그 병원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새문안교회를 설립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후손들이 4대에 걸쳐서 한국에서 한국사람처럼 살았습니다. 1대가 언더우드 박사, 그 이름이 한국식으로는 "원두" 박사입니다. 그리고 2대가 "원한경" 박사, 3대가 "원일한" 박사, 그리고 4대가 "원한강" 박사인데 그는 연세대학교의 교수로 지내고 있다가 몇 일 전 한국을 떠나갔습니다. 왜냐하면, 한국에서 할 일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고 부모로부터 모든 유산들, 그리고 한국의 토산품들, 뭐 신라토기나 귀한 서적들을 다 연세대학교 박물관에 기증했습니다. 그러면서 "몸도 주고 재산도 다 놓고 갑니다" 라고 마지막 말을 남겼다는 것입니다.

  4대에 걸쳐 120년 동안 그 가정은 한국을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봉사하고 선교해 왔습니다. 1대인 언더우드 박사가 한국에 들어올 때 4가지의 소망이 있었다고 합니다. 첫째는 이 나라에 기독교가 뿌리를 내리는 것, 두 번째는 병이 많은 이 나라에 서양식 의료기관을 세우는 것, 세 번째는 현대식 교육기관을 한국에 세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는 잘 못사는 이 나라가 잘 살게 되는 것, 이 네 가지가 소원이었다고 합니다. 이제 내가 소원을 다 이루었기 때문에 이제 그들은 미련없이 한국을 떠나게 되었다고 그렇게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야기하더라고요.

  여러분, 120년 전에 한국 땅에 들어온 선교사 언더우드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돈이 없어서 여기에 왔겠습니까? 배우지 못해서 이 한국 땅에 왔겠습니까? 가족이 없어서 여기에 왔겠습니까? 오직 복음을 위해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 낯선 한국 땅에 와서 4대가 거쳐가면서 여기서 태어나고 여기서 죽으면서 그들은 복음의 씨를 뿌려왔던 것입니다. 여러분, 외국인이 우리나라까지 오면서까지 이렇게 희생하고 헌신하는데 우리는 가장 가까운 내 가족에게, 이웃에게도 복음을 전하는 일을 주저한다면 얼마나 어리석고 안타까운 일일까요. 외국에까지 가지는 못할지라도 내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할 수 있다면 이것이 주님이 가장 기뻐하는 일이 아닐까요?

  오늘,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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