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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 (롬 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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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강석공 목사

“누가 우리를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니라.”(롬 8:34)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 다른 호칭들이 있었습니다. 구세주라는 것이 제일 많습니다. 제사장, 선지자라고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배반한 죄인의 후손입니다. 구약 시대는 죄를 회개하는 방법이 달랐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소, 양(염소), 비둘기를 가지고 제사장에게 갑니다. 그는 짐승을 잡아 불에 태웁니다. 그 짐승이 사람의 죄 값을 대신해서 죽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 역할을 하는 성직자입니다. 제사장은 반드시 레위지파 사람만 자격이 주어집니다. 이것은 임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혈통으로 말미암습니다. 다만 대제사장의 경우에 신약시대 때 이스라엘이 로마의 식민지 때 황제나 총독이 제사장 중에서 임명했습니다. 그런데 제사장은 하는 일이 거룩한 것임과 동시에 생활도 엄격했습니다. 구약에는 613가지의 계명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149번째에서 284번째 까지가 제사장에 대한 규정이었습니다. 제사장은 반드시 남자였습니다. 제사장은 머리를 풀어서는 안 됩니다. (30일 이상 머리를 계속 기르는 것을 금지.) 제사장은 슬퍼도 옷을 찢어 애도를 해서는 안 됩니다.(레위기 10:6) 제사장은 성전에서 일하는 동안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됩니다.(레10:7) 제사장은 성전에 들어가기 전에 포도주나 독주를 마셔서는 안 됩니다.(레10:9) 제사장은 시체를 절대 만지면 안 됩니다. 그러나 그 가족의 주검은 만질 수 있습니다.(레위기 21:1-4) 제사장은 창녀와 결혼해서는 안 됩니다. (레 21:14-15) 제사장은 부정한 여자와 결혼 할 수 없습니다.(레21:7) 이혼한 여자와 결혼 할 수 없습니다.(레21:7) 제사장을 거룩하게 여겨야 합니다.(레21:8) 그런데 대제사장은 1년에 한 번씩 지성소에 가서 제사를 드립니다. 대제사장은 성막에서 1년에 세 차례 거행되는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의 제사를 책임지고 있습니다. 속죄 절에는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를 용서 받기 위해 대속 물로 염소의 피를 가지고 갑니다. 이러한 거룩한 일을 하는 대제사장은 옷부터 다릅니다. 제일 화려한 옷이었습니다. 이 옷을“에봇”이라 합니다. 이것은 일종의 앞치마였습니다. 에봇의 윗부분은 12가지 보석이 박힌 흉패가 있었습니다. 어깨부분의 각 견대에는 2개의 보석이 있었습니다. 대제사장은 푸른 의복을 예복으로 입었습니다. 흰 세마포로 짠 속옷도 함께 입었습니다. 그의 머리 위에는 흰 세마포로 만든 관이 있었습니다. 관 밑 부분은 금으로 만든 패가 있었습니다. 그 패에는 “여호와께 성결”이라 새겨져 있습니다. 그것을 청색 관으로 매었습니다. 이 모든 의복과 품목은 매우 신성한 암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의 예표입니다.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시는 대제사장이신 그가 우리의 죄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십니다. 에봇은 대제사장만 입는 옷입니다. 청색, 자색, 홍색, 그리고 흰 세마포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대제사장이십니다. 그는 친히 우리의 죄를 위해 희생제물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늘 우리 편이셨습니다. 옛날 대제사장은 영적 최고지도자였습니다. 그는 백성의 죄를 위한 중보자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중보자이십니다. 얼마 전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에서 한참 산으로 들어가면 교회 하나를 짓고 있답니다. 높이 85M, 추녀 끝에서 추녀 끝까지 195M 교회 면적이 1만 3733평인 2층 예배당. 이는 천주교회인데 100년을 계획하고 짓고 있답니다. 35만평의 빈 터에서 25년째 공사를 하고 있답니다. 지금까지 한 공사는 사방 출입문 자리를 표시한 철골 4개, 성당의 중앙 제대로 쓰일 87톤짜리 돌, 사방 1M크기의 화강석 돌들 뿐 이랍니다. 25년 동안 고작 이것뿐이냐 하겠지요. 그런데도 신부님은 “지금 너무 서둘러 짓고 있지 않나 고민 중.”이라 했답니다. 세계 10대 성당이 될 것이랍니다. 그는 성전 짓는 정신은 “게으르지 않지만 서둘지도 않는다.”고 한답니다. 물론 체코 프라하 대성당은 935년에 터를 닦아 1344년에 착공, 1929년에 낙성식을 했으니 1,000년 넘게 지었습니다. 저가 금년 휴가 때 가 보았습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 성자정대성당은 1882년에 시작해서 아직까지 짓고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거창하게 왜 짓습니까?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서였다는 것 잘 압니다. 성전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성전에 들어 올 수 있습니다. 우리는 참 더러운 사람입니다. 우리는 지저분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가 십자가에서도 용서를 기도하셨습니다.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라마 아시지요. 그도 자신의 철학적 뿌리를 용서에 두었습니다. 용서는 우리로 하여금 세사의 모든 존재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힘입니다. 우리를 힘들게 한 사람도 용서합시다. 골 깊은 상처를 준 사람도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가 원수라고 하는 사람도 용서합시다. 늘 나를 헐뜯고 욕하는 사람도 용서합시다. 믿음은 용서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자기 원수를 한번도 저주하지 않으셨습니다. 배신자에게 서운하다는 말씀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용서는 그들과 하나 되게 하는 지름길입니다. 돈을 훔쳐간 사람에게도 친절을 베풀어야하지요. 그들을 도와주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좀 용서합시다. 다른 사람은 용서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과오에 대해 너무 잔인합니다. 새니얼 호손 “주홍 글씨”에서 주홍글씨를 가슴에 달았던 헤스터 프린이 간통을 기억에서 지우고 싶어 하던 아서 딤즈데윈 목사보다 결국에는 더 떳떳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부과된 가장 어렵고 궁극적이며 최후의 겪는 시련입니다. 우리는 늘 자신과 싸웁니다. 이런 사람은 용서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은 절대 사랑할 수 없다고 고개를 휘졌습니다. 용서 이외에 모든 일은 실로 그 준비에 불과합니다. 사실 혁명의 소용돌이도 사랑을 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용서  해야 할 사건이 많습니다. 유명한 테레사 수녀는 거리의 노숙자가 병들어 있었을때, 그를 예수님의 몸으로 생각하고 씻기고 닦아 주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서로를 행복하게 하기 위하여 시간을 써야 합니다. 어제는 이미 지나갔습니다. 내일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는 지금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 일을 미루시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를 기쁜 마음으로 지신 것입니다. 그는 원수를 걱정하신 것입니다. 그는 이 죄를 그와 그 자신에게 돌리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죄 때문에 고민해 보셨지요. 너무 자신의 약함 때문에 마음 아파한 적 있으시지요. 그런데 먹보다 더 검은 죄를 눈보다 더 희게 하십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소나, 양이나, 비둘기를 잡지 않아도 됩니다. 내가 헛살았다는 생각 해 보셨습니까? 행복이 무엇입니까? 해박한 지식도 아닙니다. 복잡한 국제정세도 아닙니다. 바로 다른 사람 속에 비친 내 삶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압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 때문에 오셨습니다. 그는 우리를 위해 사셨습니다. 또 죽으셨습니다. 부활하셨습니다. 승천하셨습니다. 또 심판주로 다시 오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는 죽음을 당하신 하나님의 어린양입니다. 예수님께서 요단강에 오셨습니다.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려고 오셨습니다. 때에 요한은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했습니다. 요즈음 높으신 분들이 나라가 안 되는 것이 신문 탓이라 합니다. 또 신문은 나라가 이 꼴이 된 것은 높으신 분들의 탓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나라 경제가 잘 되어 걱정 없이 살 수 있었으면 합니다. 우리의 탓입니다. 기름 값은 자꾸 오릅니다. 중동의 기운이 늘 불안합니다. 또 우리나라가 불안합니다.


대제사장은 대단한 사람입니다. 제사장은 가족의 시체는 만질 수 있습니다.(레21:1-4) 그러나 대제사장은 어떤 주검에도 가까이 할 수 없습니다. 가족의 주검에도 가까이 가서는 절대 안 됩니다.(레21:11) 또 반드시 처녀와만 결혼해야 합니다.(레21:13) 과부와 결혼은 절대 안 됩니다.(레21:14) 또 이혼한 여자와도 결혼 할 수 없습니다.(레21:14) 대제사장은 몸에 흠이 있어도 안 됩니다. 불구자도 안 됩니다. 이런 대제사장은 오직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그의 직무는 한 갓 모형입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참 예배가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만이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참 중보자이십니다. 우리는 기도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그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습니다. 그 몸을 희생 제물로 드려졌습니다. 그의 죽으심은 대제사장으로서의 행위입니다. 그는 스스로 대제사장, 제사장, 희생제물과 제단이 되셨습니다. 자신을 하나님께 흠 없이 드린 것입니다. 그도 한때 고민하였습니다. 그러나 고뇌와 욕을 참으셨습니다. 자신을 하나님께 향내 나는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참된 구속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대리적입니다. 구속적입니다. 그는 성경말씀 대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자신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죄를 멸하셨습니다. 이 속죄의 성엄은 충분하고도 자유로운 죄의 용서를 위한 의의 기초를 이루셨습니다. 천주교에서는 신부님들이 인간을 그 죄에서 놓아 줄 권세를 부여 받았다고 합니다. 이 주장이야 말로 중세 교회에 고유한 이론이었습니다. 트랜트 공의회는 “세례 받은 후에 타락한 신도들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기 위하야 죄를 매거나 풀거나 할 권세가 사도들과 그들의 법적 계승자들에게 전달되었다.”라고 선언했습니다. 덧 붙여 “그러므로 이 거룩한 공의회는 그 성례의 제정에 반하여 이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권능을 의미한 것으로 거짓되어 왜곡하여 말하는 자들의 가상적인 해석을 정죄한다.”라고 했습니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이론입니다. 목사, 신부 다 성직자입니다. 하나님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예수님 죄를 사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사람인 신부님이 사람의 죄를 사할 수 있습니까? 모든 사람은 다 죄인입니다. 그도 하나님으로부터 용서 받아야 합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 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요20:23)라고 말씀하신데 대하여 천주교에서는 이를 고해선사의 권세를 부여 받았다고 간주합니다. 고해성사로 말미암아 신부님이 죄를 사면하는 직분을 행사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천주교 교인은 적어도 1년에 한번은 그들의 죄를 신부님께 반드시 고백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신부님은 자기 앞에 나오는 사람들에 관한 모든 사정에 대해서 조사 하여 그가 알고자 하는 사실에 대하여 필요 하다고 생각되는 어떤 질문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잘 못 되었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참 중보자이십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대제사장이십니다. 예수님 당시에 예루살렘교회에 제사장이 18,000명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12조로 나눕니다. 그들이 아침, 저녁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들은 그 일 이외에 어떤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십일조를 바칩니다. 그것을 먹고 살았습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8:34)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세주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가 사람이 되셨습니다. 단 죄는 없으십니다.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예언의 말씀대로 부활하셨습니다. 그가 대속제물인 것입니다. 완전한 구원을 이루신 것입니다. 누가 예수님 외에 대속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는 우리의 대제사장이십니다.

맺는 말

저는 오늘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인간의 불행은 정치, 문화, 교육, 사회문제가 아닙니다. 사람이 문제입니다. 사람의 죄 때문입니다. 죄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것입니다. 이 죄가 우리를 죽게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1만 달란트 이상의 빛 진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죄 빚을 갚으셨습니다. 그가 구세주이십니다. 예수님은 용서이십니다. 사랑이십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용서해야 합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 고통의 순간에도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곳곳에서 자기가 예수님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만 구원 받습니다. 그런데 행함으로 구원 받는다고 잘 못 가르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것을 우리는 이단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자격이 없습니다. 무조건 선택해 주셨습니다. 이것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늘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는 늘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늘 감사하며 이 말씀으로 주 안에서 승리하시가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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