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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공하라(7) (살전 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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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고신일 목사

18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 
 
<목회기도>
 
자비하신 하나님 아버지
입을 열어 기도하며 찬양하는 자리에 있게 하심 감사합니다.
한 해를 거두어들이는 계절에…
지금까지 지내온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 드립니다.
하나님, 우리를 사랑해 주시고 금년에도 살게 하셔서
추억과 역사를 만들어 가게 하심 감사합니다.
저희들은 바쁘다는 핑계로 예배를 소홀히 하고
주일 지키기에 최선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주머니 사정이 예전만 못하다는 이유로 머릿 계산을 먼저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손을 가볍게 했습니다.
하나님, 우리 주변에는 이 무르익은 감사의 계절에 눈물로 밥을 짓고
한숨으로 국을 끓이는 애처로운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직장이 흔들리고 사업이 어려워 탄식하는 가장들도 많습니다.
하나님, 오늘의 위기를 극복할 믿음과 용기를 주시옵소서.
절망감에 빠진 이들에게 내일의 희망을 노래하는 감사를 주시옵소서.
이 복된 시간 귀한 가족을 멀리 보낸 이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군대에, 객지에, 외국에… 있는 사랑하는 성도들
하나님 붙들어 주시고 오는 소식마다, 전하는 소식마다
복된 소식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병상에 누운 환자들을 긍휼히 여겨 주셔서
회복함의 기쁨이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부족한 종 말씀을 전합니다. 붙들어 주시옵소서.
힘 주시옵소서. 강하게 하여 주옵소서.
소망의 기쁨이 넘치며 감사가 넘치는 성도의 삶이 되도록
도우시고 역사하여 주실 줄로 믿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할렐루야!
감사합니다. 옆의 분과 "복된 자리에서 만나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하시기 바랍니다.
은혜로운 예배의 자리에서 만나니 감사합니다.
 
♬ 감사해요 깨닫지 못했었는데 ♬
  감사해요 깨닫지 못했었는데 /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라는 걸
  태초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의 사랑은 / 항상 날 향하고 있었다는 걸
  고마워요 그 사랑을 가르쳐 준 당신께 / 주께서 허락하신 당신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더욱 섬기며 / 이제 나도 세상에 전하리라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 그리고 그 사랑 전하기 위해
  주께서 택하시고 이 땅에 심으셨네 / 또하나의 열매를 바라시며
 
범사의 감사
 
요즘 살기가 어떠신지요?
요즈음은 독기가 담긴 소리를 자주 듣습니다.
대통령으로부터 시작하여, 국무총리, 국회의원…
선생님들, 학생들 / 시골농부들, 시장의 상인들…  모두 모두 불만이 가득합니다.
불평과 체념, 한숨과 탄식의 도를 넘어 물고 뜯고, 부수고, 저주하고…
반대 생각을 가진 사람이나 집단은 죽여 버리려 하고 주저앉히려 합니다.
인격도 없고, 존중도 없고, 예의도 없고, 장래에 대한 소망도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어떻게 말합니까?
이렇게 살벌하고 어두워만 가는 세상에 사는 우리들에게
"범사에 감사하라"(~; give thanks in all circumstances,~)고 합니다.
그리고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8) 고 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감사하란 말입니까?
'고통을 안고 신음하며 한숨쉬고 탄식하며 몸부림치고 사는데…
무엇이 감사의 조건이 됩니까?' 하고 묻는 이들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오는
"범사의 감사"는 상대적인 감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조건적인 감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범사의 감사"는 절대적인 감사요, 무조건적인 감사를 의미합니다.
 
실제로 오늘 많은 사람들이 상대적 불만과 불평 때문에
마음의 기쁨과 삶의 감사를 잃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메꿀 수 없는 욕심의 구덩이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고통을 겪으면서 살아갑니다.
백만 원이 있으면 이백 만원을 가지지 못해 불평합니다.
집이 생기면 차가 없다고 불평입니다.
자동차가 있지만 더 좋은 차가 없어서 불평합니다.
가만히 보면, 톨스토이가 이야기한 것처럼…
'욕심쟁이가 땅을 차지하기 위해 죽기 살기로 뛰는 것 같은… "
죽음의 달리기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톨스토이의 글에 보면
[ 한 성주가 땅을 가지기를 원하는 한 농부를 만났습니다.
  그는 농부에게 가지고 싶은 만큼의 땅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해뜰 때부터 해가 지기까지 그가 발로 밟고 돌아오는 땅은
  모두 그의 땅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단 해가 지는 순간까지 성주가 서 있는 출발점까지 돌아와야 했습니다.
  농부는 신이 나서 새벽같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광활한 평야에서 모습이 사라지기까지 뛰었습니다.
  저녁때가 되었습니다. 저 멀리서 농부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한 치라도 더 차지하겠다고 더 넓게, 더 넓게 뛰느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해가 꼴깍 넘어가기 전에 그는 성주의 말발굽 밑에 도착하고 손을 짚었습니다.
  그러나 일으켜 보았을 때 그는 지치고 지쳐서 쓰러져 죽어 있었습니다.
  그가 차지할 땅은 반 평으로 넉넉했습니다.]
 
이런 죽음의 달리기를 하는 사람들은
지금도 여전히 우리 가운데, 우리 주변에 많습니다.
 
사실 현대인의 불평은 상대적인 것들입니다.
좀더 좋은 것, 좀더 많은 것, 좀더 좋은 환경, 좀더 가지고,
좀더 잘 살고 싶은 욕심이 현대인을 파멸로 몰아가고 있고
지옥의 아궁이로 몰아넣고 맙니다.
 
성경이 명령하는 감사는 상대적인 것을 뛰어 넘습니다.
모든 상황에서 기대했던 반대의 경우도 감사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금년엔 저도 놀라고 마음 상한 일이 많았습니다.
자식 때문에 놀란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군대 간 큰아들 부대에서 일어난 사건 때문에 마음 졸이며 잠 못 잔 날이 많았습니다.
이번 철원지역에서 철책선이 뚫렸다고 신문마다 크게 보도되고
근무상태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말들이 많았는데… 함부로 말해서는 안됩니다.
철책이 뚫린 그날 그 시간에 그곳에서 보초를 섰다는 이유로
군인들은 처벌을 받아야 합니다.
수많은 지휘관들이 옷을 벗어야 하고 일부 병사들은 감옥에 가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식이 그 사건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러므로 그런 일에 대해 함부로 말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저는 군대간 큰아들 뿐 아니라 미국 여동생 집에 있는 작은 아들 때문에
가슴 쓸어 내린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닙니다.
- 손가락 3개가 잘려질 위기를 겪고 수술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 그런데 지난 금요일 아침에 여동생한테서 전화가 왔습니다.
  제 둘째 아들이 운전하고 학교 가다가
  뿔이 큰사슴이 갑자기 뛰어 나오는 바람에 사슴을 받았다고 합니다.
  거기까지 들었을 때 제 마음이 어땠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그래서 애는 어떤데?".
  다행히 아이는 말짱하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사슴이 갑자기 뛰어 나와 차와 부딪혔으니
  사슴은 나뒹굴었고 차는 조금 망가졌다고 합니다.
  제가 이 얘기를 이덕수목사님께 했더니 "녹용은 어떻게 했대요?"하더군요.
- 교회적으로도 많은 빚 때문에… , 해결해야 할 것 때문에…
  그리고 이런 저런 사람들로 인해… 맘 고생한 시간이 많았습니다.
  가끔은 웃고 사는 제 자신이 이상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그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감사입니다.
범사의 감사 그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난 수/목요일 서울 광림교회에서 있었던 총회에 참석했습니다.
점심식사 후에 찻집에서 눈을 감고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앉아 있는데…
누가 저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져서 눈을 떠 보니
어떤 목사님이 저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계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제가 "목사님, 제 얼굴에 뭐가 묻었나요?" 라고 물었더니…
그 목사님은 "저는 요, 세상에서 고신일목사님이 제일 부러워요"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뭐가 그렇게 부러우세요?
전 지금 이런 저런 해결해야 할 무거운 문제들로 머리가 복잡합니다."
그 목사님이 손가락을 꼽으시며 이런 저런 닭살 돋을 만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 좋은 아버지 아들로 태어난 것도 부럽구
- 생긴 것도 부럽구
- 목소리도 부럽구
- 깔끔하게 하고 다닐 만큼 부지런한 것도 부럽구 …
- 지금 무엇을 해결해야 하고, 얼마를 갚아야 되는 지 모르지만
  그런 무거운 일로 머리가 복잡할 수 있는 것도 부럽다고 하시더군요.
그러시면서 "나도 고신일목사님이 고민하고 있는 것 같은 고민을
좀 해 봤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 목사님의 말씀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제가 고민하고, 근심하고 있는 것,
  제가 무거운 짐이라고 생각하는 것까지도 부러워하는 사람이 있으니…
  나는 당연히 감사하고 살아야겠구나>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할 수 있는 여유
 
불평은 사탄의 무기입니다. 그것은 사랑의 공동체를 파괴시킵니다.
신앙생활 하는 사람의 불평과 불만은  지옥에서 올라오는 연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가는 곳마다 더러운 매연을 피웁니다.
불평과 불만의 입이 열리는 곳마다 지옥의 독기를 뿜어냅니다.
신앙생활 하는 사람의 불평과 불만
그것은 이기적인 욕망에 사로잡힌 옹졸한 마음의 표현입니다.
 
감사는 여유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질적인 여유가 아니라 정신적인 삶의 여유와 영적인 삶의 여유를 의미합니다.
 
오늘날의 감사절을 말할 때 퓨리탄(the Puritan)들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항해술이 취약했던 1620년 오직 신앙의 자유만을 찾아서
극심한 기아와 병고에 시달리면서 메이플라워호(May Flower)라는 배를 타고
신대륙 아메리카로 건너간 102명의 청교도(the Puritan)들이
그로부터 갖은 풍토병과 수많은 어려움에 시달리면서 추수를 하여
한해 농사를 감사하여 드린 감사 기념 예배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실로 눈물과 감사가 뒤범벅된 벅찬 감동의 예배를 드렸던 그들이
바로 현대 미국을 탄생시킨 선조(the Pilgrim Fathers)들이었습니다.
 
이들이 드렸던 첫 추수감사절의 벅찬 환희는
단순히 한 나라의 건국 일화나 한 해의 추수의 감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자유의 존엄성을, 그리고 개척자 정신의 고귀함을 보여 주는
산 실례로서 모든 인류의 가슴속에 진한 감동을 전해 줍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그들이 그 어려움 속에서… 쉽게 감사예배를 드렸겠습니까?
고통과 눈물의 찬송을 불렀을 것이며
한숨 섞인 목소리로 기도를 드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살았음에 감사했고, 희망이 있음에 감사했습니다.
 
 
감사는 성숙한 인간의 자기 표현
 
감사는, 성숙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미성숙한 사람은 감사할 줄 모릅니다.
얼마나 감사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곧 얼마나 성숙한 인간이냐 하는 자기 표현이 됩니다.
인간이 감사를 알고 깨닫고 표현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성숙한 존재가 되었다는 증거가 됩니다.
 
 
믿음으로 감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가 우리를 멸망의 운명에서 건져 내셨습니까?
누가 우리에게 영생의 길을 주셨습니까?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까?
누가 우리의 죄를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옮겨 주셨습니까?
우리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까?
우리에게 구세주를 허락하시고 믿음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생각하면
범사에 감사하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과 세상 사람은 모든 조건에서 똑같은 상황을 만납니다.
현실의 세상에서 자연계에서 그리스도인이라고 가지는 예외적인 특권은 없습니다.
비가 오면 예수 믿는 사람이나 예수 안 믿는 사람이나 똑같이 맞습니다.
날이 추우면 예수 믿는 사람이나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똑같이 옷을 껴 입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당하는 어려움,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도 당합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이 당하는 어려움, 예수 믿는 사람들도 당합니다.
차이가 있다면 모든 것을 감사로 받아들일 수 있는 믿음뿐입니다.
잘 되면 순탄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안되면 역경을 통해서도 감사할 뿐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감사할 뿐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롬8:28) 주실 줄
확실히 믿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이루리라"는 말씀을 생각하며
감사하는 것입니다.(합2:3)
 
우리 주변은 불의와 악이 가득합니다.
세상엔 우리의 삶을 괴롭게 하고 슬프게 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하나님의 정의와 선하심이
결국 최후에 승리하게 될 것을 믿고 감사합니다.
하나님은 비록 세상이 어둡더라도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 질서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비록 어둠 속에서라도, 캄캄하여 앞이 보이지 않을지라도
새벽이 올 줄 믿기 때문에 감사해야 합니다.
 
 
추수감사절에
 
다음 주일은 「추수감사절」입니다.
추수감사절이 되면, "해마다 반복되는 절기이고…
특별한 감사의 조건도 없으니…”라고 생각하며
때우고 지나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하면 '금년에도 소득'이 많습니다.
물론 올해도, 참으로 험한 삶을 힘들게 살아왔습니다.
시대가 악하여 일터와 가정에서 환난과 고난을 당했습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여 헤맬 때도 있었고,
영육간에 주리고 목마름으로 괴로운 순간들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께서 결국 복된 길로 인도하실 줄로 믿습니다.
살았다는 것 자체가 복 받은 것이고,
아직도 기회를 부여받았음에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활속에서 만나는 사람, 생활속에서 함께 어울리는 사람
그 사람이 있음에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족들도 살았음에, 건강함에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투덜대지 말고, 비교하지 말고 감사하며 사세요.
  "52번째 맞은 신부가 첫째 부인”  <조선일보 2004년 10월 7일자>
 
말레이시아 모하마드라는 사람은
살아오면서 무려 51명의 여성들과 결혼했던 말레이시아의 72세 노인이,
47년 전 생애 처음 결혼했다가 헤어진
첫 부인(하지자 우딘 74세)과 다시 만나 52번째 결혼식을 올렸다고
말레이시아 뉴스트레이츠 타임스가 7일 보도했다.
"이번엔 죽을 때까지 살 것"이라고 했다.
 
주인공인 카마루딘 모하마드(72)씨의 결혼 횟수는
말레이시아 역사상 최다 기록이다.
그는 직업도 경찰관·교사·회사원 등을 전전,
결혼 횟수 버금가는 많은 직장을 경험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재결합하는 전처(前妻) 하지자 우딘(74)씨와는
1957년 첫 결혼에서 딸을 낳았다.
51명의 부인 중에는 영국(1명)과 태국 여성(2명)도 포함돼 있는데,
51명과의 결혼 지속기간이 평균 1년을 밑돌아
자녀는 7명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모하마드씨는
“나는 플레이보이가 아니며 단지 아름다운 여성들을 사랑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재결합하는 우딘씨는 모하마드씨와 이혼한 뒤
두 명의 다른 남자와 결혼했다가 헤어졌다.
우딘씨는 “이번에는 모하마드가 죽을 때까지 같이 살기로 약속했다”며
“이제 그는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는 습관을 끊을 것”이라고 말했다. 

 
여러분, 그냥 사세요. 비교하고 투털대지 말고~.
 
인생의 여러 문제들을 신앙으로 극복해서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생활을 <감사하는 신앙생활>이라고 합니다.
불신앙과 신앙을 구별하는 방법은
<감사하는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 만 보면 됩니다.
- 감사의 마음을 의식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 감사를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 '기도'입니다.
- 감사를 노래로 표현하는 것이 '찬양'입니다.
  그래서 해마다 감사절이면 <찬양잔치>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최선을 다해서 찬양잔치에 참여 하시기 바랍니다.
- 감사를 물질로 표현하는 것이 '추수감사헌금'입니다.
  최선을 다한 감사 예물을 하시기 바랍니다.
 
 
해마다 이맘때면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1997년에 중·고·청 수련회 강사로 오셔서 설교하셨던 '양원석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때 참 은혜로운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2005년도 중고청년 수련회때 강사로 초청했습니다.
양목사님이 말씀을 전하실 때 받아 적어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양원석 목사님이 전도사 때 시무하던 교회에 '김수영 권사님'이란 분이 계셨다고 합니다.
예전엔 헌금 시간에 헌금을 내면 '○○○가 헌금 드렸습니다.' 하고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액수가 적혀 있으면 액수까지 발표 하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특히 추수감사절 때 '약속, 얼마를' 언제까지 드리겠습니다'라고 작정을 하면
그것도 그대로 발표를 하기도 합니다.
(요즘도 그렇게 하는 교회들이 많이 있습니다.
  제 고향 강화 <망월교회>도 주보에 헌금액수까지 밝힙니다.
  서울 <상동교회>도 전에는 추수감사주일이 지나면
  누가 얼마를 드렸는지 추수감사헌금 내역이 주보에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아마 양원석목사님이 전도사님이었을 때 그 교회에서도 그렇게 했던 모양입니다.
그 김수영 권사님은 추수감사절에 현금이 없어 약속을 했는데
그분은 봉투에 300,000만원을 기록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시골에서 오래 전에 삼십만원은 큰돈입니다.
그 농사짓는 분이 생활도 넉넉하지 않은데 삼십만원을 작정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강단에서 삼십만원을 삼백만원이라고 잘못 읽었다고 합니다.
그것을 읽는 목사님도 가슴이 벌렁벌렁 했다고 합니다.
시골에서 한번에 한 사람이 삼백만원을 헌금한다고 하니까 흥분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배를 마치고 사무실에 가서 다시 봉투를 보니 삼십만원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분은 아무 말씀도 없으시더니
후에 빚을 내서 300만원을 헌금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권사님을 불러서
"권사님 죄송합니다. 제가 삼십만원을 삼백 만원으로 읽었는데
정말 삼백 만원을 내셨네요. 죄송합니다." 했더니
그분이 "저는 삼십만원 짜리의 감사를 할 수 있는 권사인 줄 알았는데…
        전도사님이 300만원이라고 읽어 주신 것을 듣고
        '그래, 나는 삼백 만원짜리 감사할 수 있는 권사구나'라고 생각해서
        빚을 내서 헌금을 드렸습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큰 믿음을 가진 그 권사님은 후에 장로가 되시고
신앙생활 잘 하시다 하나님 나라에 가셨답니다.
 
여러분은 얼만큼의 감사를 할 수 있는 믿음을 가지셨는지요?
감사할 수 있는 조건, 감사할 수 있는 믿음, 감사할 수  있는 형편이 된 것에 대해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제가 1981년에 신학교를 졸업하고 교회를 개척하여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개척 교회이니 교인 수가 적었습니다. 1년 쯤 지나서 교인이 조금 늘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재정을 보시는 집사님이 제게 오셔서
"전도사님, 교인들 생활이 어려운 가난한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지만
그래도 전도사님도 생활을 하셔야 하니 생활비를 드리겠습니다"하셨습니다.
그때 당시 형광등을 생산하는 회사에 다니는 청년들의 한달 월급이 7~8만원이었는데
제 생활비로 10만원을 주겠다고 하셔서 저는 감사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다음달이 되었는데도 생활비를 가져오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당연하지요. 형편이 어려우니…, 교인도 몇 명 안되고
헌금으로 들어오는 것도 많지 않으니 그럴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그 집사님 하시는 말씀이
"전도사님 생활비를 드렸습니다. 서류상으로 드렸습니다.
이 다음에 교회 형편이 나아지면 돈으로 드리겠습니다"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 추수감사절이 다가와서 추수감사헌금을 해야 하는데 돈은 없고…
그래서 저는 그때부터 제가 목회하면서 평생 동안 추수감사헌금을 작정했습니다.
<교회에서 얼마를 주든지 상관없이 생활비 1개월 분 전부를
추수감사헌금으로 드려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저도 현금이 없어 서류상으로 1개월분 생활비를 추수감사헌금으로 드렸습니다.
그후부터 지금까지도 매년 추수감사헌금은 1개월분의 생활비를 전부 드렸습니다.
그렇게 제가 작정한 것을 지금까지 지켜오면서 때로는 어려울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그때 작정한 대로 지켜 올 수 있었음에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지켜 갈 수 있을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하나님께 어떤 약속을 하고,
그 약속을 갚아가는 기쁨과 감사가 얼마나 대단합니까!
기쁨과 감동이 넘치는 일임에 늘 감사드립니다.
 
 
생활로 드러내는 감사
 
감사를 생활로 드러내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자신에 대해서는 물론, 가족과 이웃에 대해…
심지어 하나님께도 감사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오히려 원망하고 불평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감사할 줄 모르는 백성들에게 <감사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성경에  "항상 감사"하고(살후1:3),
        "모든 일에 감사"하고(살전5:18),
        "모든 사람을 위해 감사하라"고 가르칩니다(딤전2:1).
감사는 놀랄 만한 일을 당한 뒤에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 삶 속에서 얼마나 감사할 조건이 많은 지 찾아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이제 감사를 발견하는 삶이 되십시오.
이제 감사를 말하는 삶이 되십시오.
이제 감사를 표현하는 삶이 되십시오. 믿음도 표현해야 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했습니다(롬10:10).
입으로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라고 표현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말하지 않는 감사는 의미가 없습니다. 물질로도 감사를 표현해야 합니다.
 
여러분, 범사에 감사를 발견하고 감사를 표현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감사생활에 성공하면 신앙생활에 성공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감사생활에 실패하기 때문에 신앙생활에 실패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가족에게…, 이웃에게…, 전능하신 하나님께…
신실함으로 감사를 표현하고 감사에 성공하는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은혜와 사랑을 감사합니다.
이제 감사를 발견하는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를 말하는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를 표현하는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감사의 성공하는 삶이 되도록 연약한 우리를 붙들어 주시옵소서.
감사에 성공하는 자가 신앙에 성공하는 자임을 깨달아
감사의 성공자들이 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거룩하신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04년  10월 31일 주일 낮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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