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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모든 것을 가진 자 (고후 6: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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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임대식 목사

어느 때 미국 시카고에서 미술품 경매가 있었을 때의 일이라고 합니다. 값비싼 미술품들이 다 경매된 뒤에 그림 하나가 남았습니다. 이름모를 작가의 그림이었습니다. 이 그림을 사는 사람이 없어서 헐값에 14 불에 팔렸다고 합니다.

뒤에 알고 보니 이 그림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화가인 미네르바가 그린 “애급으로 피난 가는 거룩한 가족”이란 작품이었습니다. 이것은 이태리에서 17세기에 잃어버린 것인데, 시카고 경매장에 나타날 줄은 몰랐던 것입니다. 마침내 그 그림은 5만 불에 팔렸다고 합니다.

생각해 보면 5만 불도 넘는 귀한 그림을 14 불에 산 사람이나 판 사람이나 모두 어리석은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그림의 참된 가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 가치를 모르는 사람은 그것을 소유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사실 행복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행복이란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치를 깨달음에 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 그것을 알 때 행복이 거기에 있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는 내 자신이 얼마나 고귀한 존재인가를 알 때 참 행복이 있습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과연 나는 어떤 존재입니까? 나는 바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주 만물의 주가 되시는 하나님의 아들과 딸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런 나의 가치를 내가 바로 알지 못하고, 나를 원망하고 자학하고 절망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게 살다 간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바로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일생을 보면 그는 우리보다 나은 환경에서 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집 한 칸 없는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결혼도 하지 못했습니다. 많은 날들을 굶고 주리고 헐벗고 살았습니다. 일생의 많은 시간을 감옥에서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는 현실을 원망하거나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살아갈 때 환경에 매이지 않고, 오히려 환경을 바꾸며 살았습니다. 그런 면에서 바울은 위대한 사람이요,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는 감옥을 별장으로 바꾸어 살았습니다. 고난을 영광으로 바꾸었습니다. 눈물을 찬란한 진주로 바꾸었습니다. 가난을 하늘의 부요함으로 채웠습니다.

진정 바울의 생애는 부요가 넘쳤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은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위대한 사람입니다. 사실 바울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입니다. 그도 굶으면 배고프고, 병들면 서럽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그 마음이 심히 외롭고 답답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런 위대한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마음속에 예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주 안에 있는 나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살아가는 내 자신을 발견해야 합니다. 비록 나는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이지만, 세상을 이길 엄청난 능력이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능력있게 살아간 것은, 그 심령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역사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자신은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라고 했습니다.
왜 사도 바울이 이름 없는 무명한 자였습니까? 당시 바울은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부름을 받은 12제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수 믿는 이들을 잡아 옥에 가두러 가다가 하늘로부터 나타나신 주님의 음성을 듣고 변화된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를 핍박했던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과거를 자랑할만한 사람이 못 되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비난하며 진짜 사도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창세전부터 나를 알고 사도로 세우셨으니, 예수님이 인정하는 유명한 자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알아주고 하늘나라가 자신을 인정해 주고 있다는 확신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유명한 자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마리아는 무명의 여인이었습니다. 베다니 빈민촌에 살던 평범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런 그녀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어 드렸습니다. 그의 행위가 예수님에게 인정을 받게 되자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는 이 여인의 이름이 동시에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마리아는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였습니다.

우리도 이런 확신 속에 담대히 살아야 합니다. ‘나는 비록 이 세상에서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는 무명한 자 같으나 하늘나라 생명책에 내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알아주는 유명한 자다’라고 내 자신을 스스로 인정하며 살아야 합니다.

둘째로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라고 말합니다.
사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한다고 해서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매를 맞기도 하고, 고문당하며 핍박을 받고 죽을 지경에 처한 적이 많습니다. 그는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그는 죽을 수 있는 몸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주의 이름을 온 세상에 전하기 위해 택함을 받은 그릇이었기 때문입니다. 리빙스턴은 말하기를, 사명이 있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는 ‘사명이 있기에 나는 죽을 수 없고, 할 일이 있기에 여기 살아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죽는 자 같으나 여기 살아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셋째로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않고’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도 바울을 가리켜 슬픔의 사람이요, 고난의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또 바울이 고통과 시련을 당한 것은 과거 바리새인으로서 교회를 심히 핍박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의 고난이 하나님의 진노의 표시가 아니라 사랑의 표시임을 믿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 안에서 시련과 고난을 당하면 그것까지 은혜가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통을 주시기 위함이 아니라, 은혜를 주시기 위한 시련만 허락하십니다.

넷째는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입니다.
사도 바울은 감옥 안에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했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거듭 강조합니다.

바울의 기쁨은 주 안에서 누리는 기쁨입니다. 세상이 주는 기쁨, 환경이 주는 기쁨이 아닙니다. 구원 얻은 기쁨, 구원을 이루는 기쁨입니다. 주님과 함께 동행 하는 기쁨이요, 주님과 교제하는 기쁨입니다. 약속된 미래에 대한 기쁨이요, 고난 중에서도 주와 함께 하는 기쁨입니다. 그는 하늘나라의 기쁨을 미리 맛보고 살았던 것입니다.

다섯째는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케 하고’입니다.
사람이 얼마만큼 가져야 행복하겠습니까? 어느 유명한 부자에게 물었더니 이 분이 말하기를 “지금보다 조금만 더 가지면 행복할 겁니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리고 사람은 행복하려는 것보다 행복해 보이려고 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부자가 아니라 부자라는 소리를 듣고 싶어 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다른 사람에게 보이고 싶은 것 때문에 고민이 있고, 불행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무 것도 없는 가난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는 사실 아무 재산도 유산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늘의 것으로 차고 넘쳤습니다. 그리고 그는 어떤 형편에서든지 자족하기를 배웠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2)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의 부요함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것이요, 예수 안에서 누리는 은혜와 평강입니다.

오늘 우리도 우리 가치관을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것을 주 안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 밖에 있으면 가난한 자요, 주님 안에 있으면 모든 것을 가졌다고 고백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가장 중요한 분,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 주시는 영생을 소유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런 삶의 부요함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매사에 믿음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긍정적으로 세상을 이겨 나갔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환경 가운데 살면서도 하늘을 보고, 별을 보고, 꿈을 꾸며 사는 사람들이 있고, 땅을 보면서 언제나 답답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잘 생각해 보면 인생의 문제는 다른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환경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내 자신에게 있습니다. 내가 내 자신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인정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병을 치료하는 병원에도 영안실이 있습니다. 아무리 소문난 병원이라도 사람이 죽고 장례식을 치릅니다. 병원에서 건강을 회복해 가정으로 돌아가는 사람이 있고, 죽어서 영안실로 퇴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누구나 한번은 가정이 아니라 영안실로 가야만 합니다. 만약 부정적인 면만 보면 병원에서 치료를 받지 못합니다. 우리는 건강하게 회복해서 퇴원하는 사람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라고 해서 다 완전하지는 못합니다. 교인 가운데도 온전하지 못한 분이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교인이 더 많습니다. 만약 교인의 나쁜 점을 바라보면서 교회를 비판하고 신앙을 거부한다면 결국 자신만 손해를 보게 됩니다. 어리석은 자는 부정적인 것을 보고 불가능을 말하며 원망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있는 자에게는 더 있게 하고, 없는 자에게는 그 있는 것도 빼앗아 버리리라.”

영국에서 소경으로 자라나 장관이 된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헨리 포셋트라는 아이가 동무들과 함께 놀다가 그만 장난감 총에 맞아서 병원에 갔지만, 결국 영영 실명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참으로 낙심해서 울 때에, 아이는 오히려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엄마, 울지 마세요. 내 눈은 없어졌지만 내 머리는 그대로 있잖아!” 참 대단한 아이입니다. 그 후 그는 낙심하지 않고 더 열심히 노력해서 국회의원이 되었고, 교통부 장관까지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 전해 내려오는 이런 동화가 있습니다. 어느 동네 뒷산에, 넘어지면 삼년 밖에 살지 못한다는 삼년고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청년이 이 고개를 넘다가 그만 잘못해서 넘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이 일로 인해 낙심하고 좌절해서 죽을 날을 하루하루 손꼽아 세워 보는 일로 나날을 보냅니다.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 때 지혜로운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네 걱정할 것 없네. 한 번 넘어지면 삼 년이니, 백 번 넘어지면 3백 년을 살걸세.” 이 말을 듣고는 이 청년은 너무도 기뻐서 고개 위로 뛰어가 온종일 뒹굴었습니다. 드디어 그는 용기를 얻었고 3년이 지나도 죽지 않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긍정적인 생각은 어떤 환경과 문제 속에서도 운명을 아름답게 창조해 나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삶은 모든 것을 가진 부요로운 삶이었습니다. 이 부요는 미래의 하늘나라의 소망에서 온 것입니다. 소망은 삶을 한없이 부요하게 만들어 줍니다. ‘영원한 것을 얻었기에 나는 부요하다’하며 사는 사람은 진정 행복한 사람입니다.

어느 날 무디 선생에게 기자가 찾아와서 “당신의 생애에 대해서 짤막하게 소개해 주시죠”라고 인터뷰를 요청했습니다. 무디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육신으로는 1837년 생, 영적으로는 1856년 생입니다. 육신으로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만약 신문에 내가 죽었다고 기사가 났을 때, 당신은 그 기사를 믿지 마시오. 나는 죽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로 갔으니 영원히 살고 있다고 믿으시오. 이것이 나의 생의 전부요.” 

성도 여러분, 과연 이런 믿음으로 산다면 무슨 근심이 있겠습니까? 하늘나라에 소망을 둔 사람이 세상의 사소한 것 때문에 탄식하겠습니까? 하늘나라에서 내 자신을 볼 수 있는 사람은 결코 낙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나는 아무 것도 없을지라도, 나는 모든 것을 가졌다고 자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모든 가치관은 바로 여기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행복의 출발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나는 영원히 산다’고 믿는 사람과, ‘나는 죽는다’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모든 것을 가진 자, 사도 바울 속에서 넘치고 있는 이 부요의 정신은 바로 이 신앙, 이 믿음 속에서 나온 것입니다.

요즈음 세상이 참 어렵습니다. 많은 이들이 힘들다고 합니다. 경제적으로 불황이요, 사회적으로 가치관이 혼란스럽다고 합니다. 정치적으로도 참 어둡습니다. 모두들 힘들어하는 시절을 우리가 보내고 있습니다만, 그럴수록 우리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럴수록 주 안에 있는 나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비록 어려운 현실 속에 살아가고 있지만,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하는 긍지와 자부심을 잃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자, 과연 나는 누구입니까? 말씀드린대로 나는 우주 만물의 창조자가 되시며 주관자가 되신 우리 하나님의 아들과 딸입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입니다. 모든 것을 가진 자입니다. 이 긍지와 이 믿음으로 험한 이 세상을 이겨 나가시는 성도님들 모두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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