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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의 진수 (사 49:1~6, 롬 10:9~17, 마 15: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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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박종화 목사

구약의 말씀: 이사야 49: 1 ~ 6
  너희 섬들아, 내가 하는 말을 들어라. 너희 먼 곳에 사는 민족들아, 귀를 기울여라. 주께서 이미 모태에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 어머니의 태 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기억하셨다. 내 입을 날카로운 칼처럼 만드셔서, 나를 주의 손 그늘에 숨기셨다. 나를 날카로운 화살로 만드셔서, 주의 화살통에 감추셨다. 주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이스라엘아, 너는 내 종이다. 네가 내 영광을 나타낼 것이다." 그러나 나의 생각에는, 내가 한 것이 모두 헛수고 같았고, 쓸모 없고 허무한 일에 내 힘을 허비한 것 같았다. 그러나 참으로 주께서 나를 올바로 심판하여 주셨으며, 내 하나님께서 나를 정당하게 보상하여 주셨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주께서는 나를 그의 종으로 삼으셨다. 야곱을 주께로 돌아오게 하시고 흩어진 이스라엘을 다시 불러모으시려고, 나를 택하셨다. 그래서 나는 주님의 귀한 종이 되었고, 주님은 내 힘이 되셨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신다.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가 내 종이 되어서,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고 이스라엘 가운데 살아 남은 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은, 네게 오히려 가벼운 일이다. 땅 끝까지 나의 구원이 미치게 하려고, 내가 너를 '뭇 민족의 빛'으로 삼았다."

서신서의 말씀: 로마서 10:9 ~ 17
  입으로 예수는 주님이라고 고백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으로 믿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사람은 마음으로 믿어서 의에 이르고, 입으로 고백해서 구원에 이릅니다. 성경은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합니다.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꼭 같이 주님이 되어 주시고,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풍성한 은혜를 내려 주십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나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들이 믿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부를 수 있겠습니까? 또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보내심을 받지 않았는데,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에 기록된 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걸음이 얼마나 아름다우냐!" 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복음에 순종한 것은 아닙니다. 이사야는 "주님, 우리에게서 들은 것을 누가 믿었습니까?"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생기고, 들음은 그리스도를 전하는 말씀에서 비롯됩니다.

복음서의 말씀: 마태복음서 15:21 ~ 28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서,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다. 마침, 가나안 여자 한 사람이 그 지방에서 나와서 외쳐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내 딸이, 귀신이 들려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그 때에 제자들이 다가와서 "저 여자가 우리 뒤에서 외치고 있으니, 그를 돌려보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의 길을 잃은 양들에게 보내심을 받았을 따름이다" 하셨다. 그러나 그 여자는 와서, 예수께 무릎을 꿇고 "주님, 나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다.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아이들이 먹을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하시니, 그 여자가 말하였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 그제서야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여자야, 참으로 네 믿음이 크다. 네 소원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때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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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공생애 활동 중 중요한 것 하나는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때로는 죽은 자를 살리신 일들입니다. 가나안에 사는 보잘것없는 여인 한사람이 자기 딸이 귀신들려 고생하고 있다며 예수께 와서 고쳐주시기를 요청하는 이야기가 오늘의 성서 본문에 나옵니다. 오늘 이야기를 몇 개의 장면으로 재구성해보겠습니다.

첫 번째 장면입니다. 이방에 사는 여인이 예수께 와서 고쳐주시기를 간청하면서 예수님을 이렇게 부릅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여.” 다윗은 이스라엘의 정통파 왕조의 상징이고, 그래서 다윗의 자손으로 태어나야만 정통성이 인정됩니다. 특별히 이 가문에 속한 사람이 말하자면 왕족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을 내세우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필요한 것이지, 이방인에게는 필요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방 여인이 다윗의 자손을 부릅니다.

여인이 부른 이 호칭에는 이런 뜻이 담겨 있습니다. 비록 이스라엘 민족에 속하지는 못했지만, 이스라엘을 존중하고 다윗의 가문을 높이며 그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의존하겠으니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뜻입니다. 이 여인은 요즘 말로 말하면 불가촉천민, 이스라엘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접촉해서는 안 될 이방사람입니다. 더욱이 여자입니다. 그때는 여자는 온전한 인격으로 대접받지 못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사회적 상식으로는 접촉할 수 없는 천민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예수께서는 묵묵부답, 무시하십니다.

두 번 째 장면이 시작됩니다. 그 여인이 하도 딱해 보였는지 제자들이 예수께 간청합니다. 저렇게 성가시게 구니, 무언가 한 말씀 하셔서 안심이라도 시켜서 돌려보내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예수께서 단호하게 대답하십니다. 내가 온 목적은 오직 이스라엘 집에서 기르는 양들을 구하러 온 것이다. 구약 성서의 말씀을 인용하여서, 이방 사람까지 구하러 오지 않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냉정한 대답입니다.

그러자 이 여인이 예수 앞에서 무릎을 꿇고 간청합니다. “제발 자비를 베풀어 주옵소서.”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 하는 짧은 예배 찬송을 자주 부릅니다.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 키리에 엘레이송.” 키리에 엘레이송이라는 말은 라틴말로, ‘키리에’는 ‘주님이시여’라는 뜻이고, ‘엘레이송’은 ‘자비를 베풀어 주옵소서’라는 뜻입니다. 이 찬송을 우리가 예배 때마다 부르는 것입니다.

세 번째 장면이 펼쳐집니다. 자비를 간구하는 여인에게 예수께서 대답하십니다. “자녀들이 식탁에 앉아 먹는 빵을 집어서 개들한테 던져주란 말이냐?” 이런 모멸이 어디 있습니까? 이 여인에게 “너는 개와 같은데, 어떻게 유대교 백성만이, 하나님의 자녀들만이 먹을 수 있는 것을 귀한 것을 네게 줄 수 있겠느냐는 뜻입니다. 보통 사람이 이런 말을 듣는다면, 참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의 대답은 뜻밖입니다. 개들도 자녀들이 먹다 흘린 부스러기는 줄 수 있지 않습니까? 내가 부스러기라도 먹으러 왔지 누가 빵을 달라고 했습니까?

이것을 연극으로 엮는다고 아마도 기가 막힌 장면이 될 것입니다. 예수라 이름하는 하나님의 아들이 어찌 이렇게나 매정하고 냉혹할 수 있습니까? 이게 무슨 하나님의 아들입니까? 그런데 마지막 순간에 완전한 역전이 벌어집니다. 귀를 의심할 만한 말씀을 하십니다. “네 믿음이 크다. 네 소원대로 될 것이다.” 그래서 딸아이에게서 귀신이 물러가고 아이는 낫게 되었습니다.

사실 1막, 2막, 3막에서 보면, 예수는 도대체가 이해할 수 없는 무자비한 인간입니다. 예수가 왜 그렇게 했을까 하는 것은 추측할 수밖에 없습니다. “네 믿음이 크다. 소원대로 될 것이다.”라는 마지막 말씀을 빼면, 예수께서는 당시 유대사람들, 그들이 랍비든, 제사장이든, 바리새파 사람들이든, 어쨌든 유대사람들이 이방사람이나 이방 여인을 만났을 때 하던 일반적인 행태를 고스란히 반복하신 겁니다. 여기까지가 유대사람들이 갖고 있던 율법의 윤리적 한계입니다.

예수께서는 율법을 그대로 실천해보았습니다. 1막, 2막, 3막까지 평범한 유대사람의 입장에 서 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결심합니다. 율법의 테두리를 넘자. 이방민족이라서 안 된다고? 인종차별입니다. 이스라엘 족속만을 구원하러 왔다고? 민족차별입니다. 자녀에게 줄 것을 개에게 줄 수 없다고? 인간 모욕입니다. 그 앞에서 여인은 부스러기라도 달라고 했습니다. 이 이방여인은 시험에 통과했습니다. 자기 딸한테서 귀신이 나가는 것, 그것 하나를 위해서라면 인종적 모독도 민족차별도 인간적 모욕도 다 참을 수 있었습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사랑하는 딸의 생명을 얻기 위해 온갖 모욕과 차별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제도적 장벽이 넘을 수 없을 정도로 높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뛰어넘기까지 결단하는 것입니다. 그 믿음대로 될 것이다.

이방족속을 끌어안는다는 것, 사실 이스라엘사람으로서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인도에 가보신 분은 아실 겁니다. 접촉해서는 결코 안 되는 인간들, 소위 ‘달릿’이라고 부르는 천민들이 있습니다. 제 눈으로는 아무리 보아도 누가 천민인지 아니며 브라만인지 수드라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까? 제 눈으로 보기에는 그렇게 아름답고 훌륭하고 지성미가 넘치는 사람들인데, 참 좋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사람들이 불가촉천민이라는 겁니다.

아마 예수님 자신도 유대인으로서 이방 여인을 접촉하기 싫었을 것입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의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별로 좋은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다 지나간 일이라서 말씀드립니다. 제가 2학년 때라고 기억됩니다만, 수유리 캠퍼스 기숙사에서 생활하는데, 그때는 다들 가난했습니다. 그래서 학생들끼리 모여서 서로 라면도 끓여먹고 하면서 서로 돕고 지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서울 시내에 있는 어느 목사님이 저희 신학생들한테 낭보를 전해왔습니다. 내용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자기 교회의 교인 중에 한 사람의 요청인데, 그 사람의 딸이 결혼에 실패한 여성인데, 나이가 당시 학생들보다 좀 많았지만, 만약에 신학생들 중에서 누가 이 여자와 결혼한다면, 2억 원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당시엔 거금이었습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에 등록금이 2만5000원이었습니다. 물론 신학교라 조금 싸긴 했습니다만, 2억 원이면 엄청나게 큰 돈이었습니다. 그 여성은 몸에서 나는 냄새 때문에 결국 결혼이 파경에 이르렀는데, 냄새를 참을 수 있는 사람은 그래도 거룩한 삶을 살려는 신학생들밖에 없을 것 같아서 신학교에 호소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 하나 구원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학업을 끝내고 밤에 모였습니다. 어떻게 할 거냐? 결론은 이렇게 났습니다. 누군가가 결단하자. 그런데 그건 분명히 십자가일 거다. 그러나 그 십자가를 지는 사람한테는 부활의 영광처럼 2억 원이라는 돈이 생기지 않느냐. 그런데 그걸 어찌 혼자 갖느냐? 나눠 갖자.

저는 당시에 선 듯 마음이 내키지 않았고, 자신도 없었는데, 제 친구 한 사람이 자원해서 가기로 결심하고 다음날 찾아 갔습니다. 그런데 꽤 오래 이야기를 나누고 올 줄 알았는데, 금방 돌아왔습니다. 왜 이렇게 빨리 돌아왔느냐고 물었더니, 막상 자리에 함께 앉아 있는데 냄새가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만큼 지독해서 도망치듯이 나왔다고 했습니다. 사실 이것 지금은 고칠 수 있는 병입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참 심각했습니다. 2억도 좋지만, 신학생이 결혼했다가 이혼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이래저래 실패했습니다.

사람들은 몸에서 감당할 수 없는 냄새가 날 때 접촉하기를 꺼려합니다. 그러나 천민은 이보다 더합니다. 몸만 아니라 영혼도 비천하다고 규정된 사람들입니다. 몸만 아니라 영혼의 냄새까지를 문제 삼습니다. 출생 신분 자체가 불결한 사람들, 이게 말하자면 이방인입니다. 여러분이 성서를 읽으실 때 유대사람이 말하는 이방인이란 바로 그런 뜻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예수께서 사마리아를 지나시다가 한 사마리아 여인하고 대화를 하셨습니다. 우물가에서. 그러나 이것을 그냥 대화라고 생각지 마십시오. 예수께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보기에 썩은 냄새가 나서 가까이 가고 싶지 않은 여인, 죄를 지어서 다 썩어빠진 여인과 대화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가나안 여인의 신분도 똑같습니다.

하여튼 사람들에게 완전히 버림받은 인간족속들입니다. 그래서 당시 유대사람들의 최대관심은 정결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정결법은 막강한 위력을 발휘했습니다. 그들은 정결하게 되기 위해서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고, 율법을 준수하고 혈통의 순수성을 지키고 역사와 제도도 고수하였습니다. 그리고 정결하지 않은 사람과 물건에 접촉하는 것을 꺼렸습니다. 부정한 사람과는 2억 원이 아니라 금덩어리를 준다 해도 접촉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오늘 성서 본문에서 예수 역시 그런 여인을 만났고 다른 유대인들과 비슷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모든 차별과 모욕을 극복하고 생명을 요청합니다. 사실 믿음이란 다른 게 아닙니다. 믿음이란 모든 장벽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넘어 생명을 얻기 원하는 것입니다. 단지 내가 하나님 믿고 예수를 믿는다고 말한다고 해서 제대로 믿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바울은 오늘 서신서 본문인 로마서에서 믿음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믿음이란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고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던 그 예수가 죽었다가 부활하여 생명의 주가 되셨다는 것,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죽은 사람, 많은 사람의 질시를 받은 사람, 낙인찍히고 저주받아서 결코 접촉해서는 안 될 사람, 불가촉민들, 이런 인간 군상을 대표하는 예수가 온 인간과 세계를 구원하는 새로운 부활의 주님으로 등극하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믿는 것, 그 예수가 주님이라고 믿는 것, 땅의 가장 밑바닥이 하늘 가장 높은 곳이라고 믿는 것, 하늘의 역사가 땅에 와서 죽고 썩어서 부활의 생명을 피웠음을 믿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믿는 게 쉽지는 않습니다. 믿는다고 입으로 고백하는 것이 잘 믿는 게 아닙니다. 이방여인에게서 보듯이 십자가의 수모를 겪고서라도 부활의 영광을 쟁취하려고 하는 눈물겨운 노력, 시련이 가득 찬 희망을 향한 나아가는 집요한 노력, 이 노력이 믿음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믿음은 아마추어리즘이 아닙니다. 프로페셔널리즘입니다. 그것은 믿는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고 해서 도달할 수 있는 차원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초월할 수 있는 전문성을 갖춘 사람만이 도달하는 경지입니다. 이제는 우리 모두가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 믿는 것도 아마추어가 아니라 전문적이어야 합니다.

요즘은 사회가 발전해서 전문화 시대가 되었습니다. 모든 게 다 전문적 차원으로 분화되고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가 공부하는 것, 연구하는 것, 살아가는 것도 결국 어느 분야든 다 전문적인 차원을 가져야 합니다. 음악에서, 미술에서, 사상에서, 사회 모든 활동에서, 그 어디 어디든지 전문가가 되지 않고는 존경을 받지 못합니다.

전문가는 보통 사람이 받는 보상보다 엄청나게 큰 보상을 받습니다. 억울해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전문가는 그냥 생기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회사 컨설팅해 줄 때도 최고의 전문가를 부르면 그만큼 고액의 사례비를 주어야 합니다. 경제 영역에서도, 사회적인 영역에서도, 의학 분야에서도 전문가가 되면 될수록 그만큼 많은 대가를 받습니다. 전문성에 따른 대가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리라고 생각합니다만,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포드 자동차의 사장인 포드가 자동차 공장을 운영하는데, 한번은 공장의 발전기가 고장나서 완전히 공장이 멈추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당시 최고의 전기기술자인 찰리 스타인멧츠란 사람을 불렀는데, 이 사람이 와서 한 십 분 만에 완전히 고장 난 발전기를 고쳐서 작동하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포드가 쓴 책에 기록되어 있는 일화입니다. 공장을 빙 돌아다니면서 엔진을 보더니 몇 군데 망치로 딱딱 두들기고 조이고 기름 좀 치고서는 금새 발전기를 작동하게 만들었습니다. 역시 기술자는 기술자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 사람이 돌아간 다음에 수리비 청구서가 날아왔습니다. 1만 달러! 깜짝 놀란 포드가, 망치 몇 번 두들기고서 만 달러가 뭐냐면서 청구서를 되돌려 보냈습니다. 그러고서 만 달러나 청구하는 이유를 밝히라고 요구했습니다. 스타인멧츠가 이런 내역서를 보내왔답니다. 망치 들고 발전기를 땅땅 두들긴 노동의 대가가 10달러, 어디를 두들겨야 할지를 잘 알아가지고 정확하게 고친 기술료 9990달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인간의 노동이란 목적이 있는 것인데, 그냥 육체를 움직인다고 다 노동은 아니지 않습니까? 밤새 두들기기보다는 알며 두들기면 단시간에 발전기가 고쳐집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믿음 있다고 밤낮 소리쳐 기도하고, 삼각산에 가서 새벽부터 밤까지 기도한다며 소리친다고 한들 그것의 대가가, 아니 그 믿음의 값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런 요란하고 입에 달린 믿음 내세우지 말고, 죄 지은 것은 죄 지었다고 선명히 고백하라는 것입니다. 허물이 있었다고 고백하고 바로 거기를 망치로 두들기라는 것입니다. 아무데나 요란하게 두들기지 말고, 입버릇처럼 믿는다, 믿는다 하지 말고, 진짜로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죄가 무엇인지 이실직고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전문적인 믿음의 분량이 9990달러이고, 그냥 시끄럽게 두들기는 믿음은 10달러의 가치밖에 안 됩니다.

제가 믿음도 전문성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믿음의 전문성은 잘 안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설 때 가능한 것입니다. 이방여인처럼 귀신을 몰아내고 정상적인 인간으로 만드는 일이 시금하면 그것을 고스란히 가지고 그분 앞에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중언부언 기도하거나, 산이 떠나라 소리치는 기도가 아니라, 진실로 하나님께 고할 것을 분명히 고하는 것, 아픈 곳을 솔직하고 바르게 호소하고, 사면 받고 싶은 죄를 정확하게 내놓은 것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믿음이 전문적인 믿음입니다.

이 전문성은 말씀을 읽어야 진리가 알아야 가능한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에 깊이 들어가야 획득할 수 있는 전문성이 입니다. 이 전문성의 값, 전문적인 믿음의 값은 대단히 큽니다.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은 십자가를 통해 죄를 용서받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지은 죄 때문에 받아야 할 죄 값을 십자가에서 대신 지불하셨습니다. 죄를 용서받는다는 말은 지은 죄가 없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내가 지은 죄의 대가를 하나님이 대신 지불한다는 뜻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인간 앞에서 지은 죄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죄 값이 없어진 것입니다. 죄의 책임이 면해진 것입니다. 우리가 받을 죄책을 하나님이 예수를 통해서 대신 갚아주시고, 우리를 완전히 변화시켜서 새로운 인간으로 만들어주십니다. 귀신들린 여자아이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면, 그 아이가 새로운 인간이 되듯이, 죄책을 면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그걸 알고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생각하면서 오늘 구약성서 본문인 이사야서를 읽어보십시오. 이사야가 말합니다. “우리 민족은 완전히 도탄에 빠져 있습니다. 바빌론 식민지배 하에서 우리 민족은 흩어지고 흩어져서 세계 전체에 점을 찍듯이 흩어졌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흩어져 사는 사람들, 디아스포라, 흩어진 백성들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이사야가 천지에 흩어져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섬들아, 망망대해에 흩어져 섬 같이 사는 우리 백성들아, 그 섬들 주변에 사는 대 소 중 민족의 모든 백성들아, 내 말을 들으라. 하나님께서 베푸실 민족의 구원, 세계의 구원이 임박했다고 알려라!” 이사야는 이스라엘의 구원만 아니라, 모든 민족의 구원을 외치고 있습니다.

만약에 이사야가 오늘날 이 땅에 태어난다고 하면 이렇게 외칠 겁니다. “섬들처럼 흩어져 사는 디아스포라의 사람들아, 모든 크고 작은 민족들아, 십자가로 나아가자. 가서 망치로 때리자. 그리고 용서받자. 용서받고서 부활의 영광을 함께 누리자.” 이렇게 구원의 소식을 전하는 사람의 발걸음이 얼마나 아름답고 가볍겠습니까? “사랑하는 믿음의 증인 된 한국 땅에 태어난 사람들아, 이 땅에 있는 한국 사람들아, 전 세계 각지로 흩어져서 디아스포라로 섬 같은 삶을 사는 한국 사람들아, 온 세계에 외치라. 십자가로 나아가서 죄 사함을 받으라고!”

사실 우리는 죄를 지으면 심판이 뒤따르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서는 행위로 죄를 지은 것만 아니라 생각조차도 죄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살인한 것만이 아니라, 살인할 생각만 가져도 죄입니다. 하나님은 거기까지 문제를 삼으십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서는 다 내놓아야 합니다. 진실한 믿음의 핵심은, 적어도 하나님 앞에서는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내놓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중언부언하지 맙시다. 의도까지 깨닫고 계신 하나님 앞에서 진실로 솔직해야 합니다. 이 이방여인처럼.

영국의 감독이었던 존 로빈슨이 쓴 유명한 책 이름이 생각납니다. 그 책의 이름은 『하나님에게 솔직히』입니다. 영어로는 “Honest to God”입니다. 여러분, 하나님한테만은 발가벗읍시다.

오늘 우리 사회가 여러 가지 과거를 청산하는 일로 뒤숭숭하고 소란스럽습니다. 목사인 저로 말하자면 말하면 십자가로 너만이 아니라, 우리 다 같이 가자고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 세계의 그 누구도 십자가로 가자는 말을 좋아할 리가 없습니다. 모두 싫어합니다. 가면 죽거든요. 얻어터져야 되거든요. 피를 흘려야 되거든요. 그러나 십자가로 나갈 수 있는 것은 거기에 생명과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사회가 거듭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과거를 청산하는 것, 옳습니다. 그러나 미래의 희망, 미래의 비전이 무엇인지를 말하지 않고 자꾸 피만 흘리자고 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십자가로 오라. 여기에 부활이 있다. 부활을 주시려고 십자가로 오라고 하십니다. 십자가로 가면 다 용서받습니다. 그리고 새 생명을 얻습니다. 이 기쁜 소식을 만백성이 똑똑히 알도록 기쁜 소식을 전파하라는 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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