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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진짜 의로운가? (눅 18:9~14, 렘 14: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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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강석공 목사  (2004년11월7일 설교)
 
  오늘 봉독한 누가복음의 말씀은 예수님의 기도에 관한 교훈으로 잘 알려져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단순히 올바른 기도의 자세만 가르쳐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좀 더 근본적인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과연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바리새인과 세리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비유를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말씀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관심의 초점을 바리새인에게 맞추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세리에게 주목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진짜 주인공은 비록 나쁜 역할을 맡았지만 바리새인입니다. 왜냐 하면 자기를 의인이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자들에 대한 부정적인 모델로 그가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미화에 익숙한 자들을 꾸짖으신 것입니다. 또 종교적으로 자기 도취에 빠지기 쉬운 자들도 책망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장차 빠지기 쉬운 함정을 조심하도록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경고와 책망만 하신 것은 아닙니다. 경고와 책망을 넘어서 인간이 취해야 할 올바른 삶의 자세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누가 과연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까? 자신의 죄인됨을 고백하고 도우심을 구한 세리가 의로다 하심을 받았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자기를 높이면 낮아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 자기를 낮추면 오히려 높아지게 될 것이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바리새인은 가장 나쁜 역할을 맡았고 그와는 대조적으로 세리는 가장 좋은 역할을 맡았습니다.

  이 비유에 등장하는 두 사람은 결코 거짓말로 기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당시 대부분의 바리새인들은 바르게 살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때문에 이 바리새인은 하나님 앞에 나름대로 당당한 모습으로 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세리들은 돈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불의한 권력과도 타협했습니다. 때문에 용서를 구하는 죄인의 모습으로 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억지로 꾸민 이야기 같지는 않습니다. 그 당시 흔히 볼 수 있는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특히 이 바리새인에게 주목해야 하는 까닭은 예나 지금이나 뭔가 좀 더 잘 해 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빠지는 함정에 그가 빠졌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판단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그리고 인간이 과연 어떻게 살았느냐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어떤 자세로 서느냐 하는 것이 한층 더 중요합니다. 올바른 삶을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고개를 바짝 치켜든다면 그것은 별로 바람직한 태도가 아닙니다. 올바른 삶을 살지 못했기 때문에 고개를 떨구고 자비와 긍휼을 구하는 것이 오히려 바람직한 태도라는 말입니다. 물론 가장 좋은 것은 바르게 살고 또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겸손한 자세인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이 비유는 예수님이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로서는 실제로 어떤 자들이 대상이었는가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성경의 기록 목적은 누군가를 고발하는 것이 아니라 오고 오는 세대 속의 많는 사람들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들려 주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 바리새인의 모습이 모든 바리새인들의 실제 모습을 그대로 묘사한 것이라고 말하기는 좀 어렵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랬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을 것입니다.

  하여간 이 비유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바리새인과 세리 두 사람은 같은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그 삶의 방식이 전혀 달랐습니다. 간단히 살펴 볼 것 같으면 먼저, 바리새인들은 신앙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경건한 삶을 살려고 애썼습니다. 세속적인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세리들은 현실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 악착같이 살았습니다. 그들은 바리새인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을 거머쥐는 것이 더 시급했기 때문에...

  다음으로, 바리새인들은 선한 환경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들은 속된 것에 물들지 않으려고 그들만의 세계를 만들고 그 안에서 살았습니다. 율법을 정확하게 적용하기 위한 방안을 찾는 데 몰두했습니다. 삶의 규칙을 새롭게 정하고 또 그것을 지키며 살았습니다. 반면에 세리들은 악한 환경 속에서 살았습니다. 권력을 쥐고 있는 로마 제국과 헤롯 왕가에 맞서지 않고 협력함으로써 실제적인 이익을 얻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보다는 로마 제국의 앞잡이가 되더라도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은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용기와 모범적인 삶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습니다. 긍지를 잃지 않기 위해서 가난하지만 깨끗하게 사는 그들의 삶은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반면에 세리들은 죄인이라고 비난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사람들의 싸늘한 눈초리는 참으로 견디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모든 것을 애써 외면하고 살았습니다. 그들은 사람들뿐 아니라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조차 별로 개의치 않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두 사람의 삶이 아니라 그러한 삶에서 비롯된 기도의 자세, 즉 하나님 앞에 선 모습을 다루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항상 철저히 구별된 삶을 살려고 했기 때문에 기도할 때도 따로 떨어져서 기도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런 자세가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런 자세가 바로 다른 사람을 멸시하고 자신은 의롭다고 과시하는 행동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 바리새인은 토색, 불의, 간음하지 않았습니다. 한 주일에 두 번씩 금식했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솔직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그의 그런 자세 속에서 근본적인 문제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기도가 무엇입니까? 인간이 자신의 연약함과 자신의 어리석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이 기도가 아닙니까? 또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비는 것이 기도라고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바리새인의 기도는 자랑하고 으시대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자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는 통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기도할 때에는 결코 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이 바리새인은 나름대로 그의 경건한 삶이 화근이 되었습니다. 

  한 편 세리의 기도도 그의 삶에 뿌리를 두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부끄러운 삶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 자신의 양심만은 속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가 세상에서는 큰소리를 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스스로 죄인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감히 고개를 들 수 없었기 때문에 다만 가슴만 치며 은혜를 구했을 뿐이었습니다. 세리는 불의한 그의 삶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자세를 취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두 사람 중 죄 많은 세리가 좀 더 바람직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나와 서게 되었다고 평가하셨습니다. 물론 세리의 삶의 방식 그 자체를 찬성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자신을 의인이라고 믿고 감사하는 바리새인을 책망하신 것이 그의 삶의 방식을 전적으로 거부하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삶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세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셨습니다.

  오늘 이 비유에 따르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옳다고 인정을 받았습니다. 왜냐 하면 그는 자신의 죄를 솔직히 그리고 겸손히 인정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기 때문입니다. 그 옛날 눈물의 선지자로 알려져 있는 예레미야가 무엇을 기도했습니까? 범죄 사실을 인정하고 다시 한 번 자비를 베풀어 주실 것을 간절히 구하지 않았습니까?(렘 14:20 참고) 그런데 이 바리새인은 올바른 자세로 하나님 앞에 서지 않았기 때문에 옳다고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모든 사실을 통해서 그 무엇도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고개를 들게 하는 조건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이 바리새인과 같은 실수는 오늘도 그저 그렇게 살려는 사람들보다는 뭔가 좀 더 잘 해 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서 많이 나타납니다. 첫째, 불신자들보다는 신자들이 위험합니다. 둘째, 교회에 와서 예배만 드리는 신자들보다는 교회 활동에 열심히 뛰어드는 신자들이 더 위험합니다. 셋째, 평신도들보다는 집사, 권사, 장로, 특히 목사들이 훨씬 더 위험합니다. 오늘 우리도 처음에는 대체로 세리와 같은 자세를 취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에게 비교 의식이 생기고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경향을 보이게 됩니다. 그리고 우월감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평가하고 비판하기 시작합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런 모습을 뭔가 잘 해 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주로 나타나고 또 훨씬 강하게 나타난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고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 주위에는 저마다 옳다고 믿는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가정이나 학교나 일터에서 모두들 자기만 옳다고 주장하고 있지 않습니까? 정치인들 중에서 “내가 잘못했다!” “다 내 탓이다!”라고 하는 사람을 찾아볼 수 있습니까? 여, 야를 막론하고 다 자기는 옳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나라가 요 모양, 요 꼴입니까? 마지막 보루라고 생각했던 교회도 세상의 빛과 소금의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스스로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는 자들에 의해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용서받은 죄인에 의해서 지금도 구원의 역사는 진행되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솔직히 자복하고 회개하여 하나님 나라 건설에 귀하게 쓰임받는 충성스러운 제자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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