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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백발과 면류관 (잠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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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동호 목사

얼마 전에 태국을 다녀왔습니다. 태국을 다녀오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이 있었습니다. 태국은 아직도 왕이 있는 나라였는데 백성들이 왕을 존경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왕의 생일이 되면 온 나라가 왕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하여 나라를 단장한답니다. 그리고 축제 분위기에 휩싸인답니다. 마치 성탄절 분위기 같답니다.

몇 번의 군부 구태타가 있었는데 최종적으로 성공과 실패를 좌우하는 것은 왕이랍니다. 왕이 그 구태타를 인정하면 성공한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실패한 것이랍니다. 온 국민이 왕을 신뢰하고 존경하고 있기 때문에 왕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태국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랍니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학생들이나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고 데모를 하다가도 왕이 ‘그만하면 됐다. 이제 그만 해라’라고 한 마디만 하면 그날로 데모와 파업이 그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태국은 아직 국민소득이 그렇게 높은 나라는 아니지만 나라가 전반적으로 안정되어 있고 국민들의 행복지수가 우리나라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높다고 합니다. 저는 그와 같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태국이 참 대단한 나라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아주 싫어하는 것이 있습니다. 누구나 다 그렇겠습니다만 저는 폭력이 가장 싫습니다. 물리적인 폭력도 물론 싫습니다만 가장 싫어하는 폭력은 인격적인 폭력입니다. 지위와 힘을 이용하여 상대방은 강압적으로 몰아붙이고 무조건적인 복종을 강요하는 것이 저는 가장 싫습니다. 그런 일을 당할 경우 저는 언제나 반발합니다. 그것 때문에 많은 손해와 위험을 감수해야 할 경우에도 반발하곤 했습니다. 저는 공부하는 것이 싫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의 공부는 너무 강압적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공부가 늘 재미없었습니다. 자연스럽게 공부를 별로 잘 하지 못했었습니다. 그런데 대학원엘 가서 공부가 재미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대학원에서의 공부방식이 저하고 맞았습니다. 내가 알아서 공부하고, 일방적인 강의를 듣는 것이 아니라 연구를 하고, 그것을 발표하며 교수와 동료들과의 토론을 통하여 지식을 습득하는 방법이 저는 좋았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그렇게 공부를 시켰다면 나도 공부를 잘 할 수 있었을 터인데 하는 생각을 그 때 참 많이 했었습니다.

저는 제가 납득하고 받아들이지 못한 일을 높은 지위에 있다고, 어른이라고, 부모라고 무조건 명령하고 복종을 강요하는 것이 싫었습니다. 제가 어려서부터 나이 먹는 것을 가장 좋아하고 기다리며 살았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내가 어른이 되면 무조건 어른이라고 나에게 명령하고 복종을 강요하는 사람이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어느 정도 나이를 먹고 내가 어느 정도 높은 자리에 있게 된 것이 너무 좋습니다. 나에게 함부로 하는 사람이 없어서 참 좋습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저는 우리나라에서 반듯하게 자라기 어려운 성품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공부하나 빼놓고 다른 면에서 크게 문제없이 제법 성공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까닭은 제가 어른들을 잘 만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저희 부모는 저를 강압적으로 키우지 않으셨습니다. 저의 인격을 존중해 주셨습니다. 인간적인 욕심을 가지고 저를 무리하게 훈련시키고 교육시키려고 하는 마음이 저희 부모님에게는 없으셨습니다. 때문에 저는 제 또래의 다른 친구들 보다 아주 자유롭게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지금 이만큼이라도 되고 창조적으로 무엇인가를 생각해 낼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은 전적으로 부모님들이 저를 강압적으로 양육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저도 할 수 있는 대로 제 아이들을 제 마음대로 키우지 않으려고 나름대로 노력하였습니다. 아이들의 인격과 의사를 존중하고 아이의 동의를 얻어 무슨 일이든 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우리 아이들도 저와 같은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제가 부모라고 무조건 강요하고 명령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만일 제가 그렇게 아이들을 키웠다면 우리 아이들은 그 어느 아이들보다 많이 반발했을 것입니다.

제가 영락교회에서 동안교회로 임지를 옮기려고 했을 때 당시 중학교 2학년이었던 제 큰 아이가 저를 따라 동안교회로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아버지가 목사지 자기가 목사냐며 고집을 부렸습니다. 자기와는 한번도 의논한 일이 없고 자기의 의견과 형편은 물어도 보지 않고 아버지가 동안교회의 목사로 가니 너는 잔소리 말고 무조건 동안교회를 다녀야 한다는 것에 자기는 동의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당시 제 생각으로는 담임목사 아들이 아버지가 시무하는 교회에 나오지 않고 다른 교회를 다닌다는 것이 잘 용납이 되지 않았었습니다. 때문에 큰 아이의 그와 같은 고집에 자연스럽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습니다. 그냥 아버지라는 권위 아닌 권위를 내세워 아이의 의견을 무시할 수도 있었지만 저는 아이의 의견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였고 그 의견을 존중해 주기로 결심했습니다.

저는 동안교회로 임지를 옮겼지만 제 큰 아이는 여전히 영락교회 중등부를 다녔습니다. 제가 주일 날 동안교회로 가는 길에 아이를 영락교회까지 데려다 주곤 하였습니다. 일년 후 큰 아이는 영락교회 중등부를 졸업하고 스스로 동안교회로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평생에 잘한 일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사고방식 때문에 지금까지 아이들과 사이가 별로 나쁘지 않게 잘 지내고 있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목회적으로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제 나름대로의 목회를 할 수 있게 된 것은 전도사와 부목사 시절 저의 인격을 존중해 주신 목사님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당신의 목회를 저에게 강요하지 않으시고, 제 나름대로의 목회를 마음껏 할 수 있도록 장을 열어 주셨습니다. 물론 기본적으로 요구하시고 시키시는 일이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대개 당연한 일들이었고 그다지 많지 않았습니다. 목사님은 제가 알아서 일을 하고 목회를 할 수 있도록 시간과 기회를 주셨는데, 저와 같은 성향을 가진 사람에게는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그렇게 목회를 하였기 때문에 저는 저와 함께 일하는 사역자들도 그렇게 목회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만 보면 그와 같은 식의 목회를 기회로 잘 활용하는 목회자가 그다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는 늘 그것이 아쉽습니다. 우리 한국교회와 사회는 아직도 시키지 않으면, 간섭하지 않으면, 명령하지 않으면, 스스로 알아서 창조적으로 일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생각처럼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자유를 창조와 자기 계발의 기회로 삼지 못하고 오히려 시간을 낭비하고 퇴보의 기회로 삼는 경우도 많은 것 같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가 만난 최고의 축복으로서의 어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저에게 명령하셔도 되시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명령 받기를 싫어하는 저도 하나님에게 만큼은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제가 가장 싫어하는 단어 중에 하나는 ‘무조건’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제가 유일하게 예외적으로 ‘무조건’을 인정하는 대상이 있다면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저는 제가 스스로 이해하고 납득하기 전에는 행동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만은 예외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것은 하나님은 나에게 그렇게 행동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명령하시기보다 설득하시고, 내가 이해하고 납득할 때까지 기다려 주시고, 내가 동의하고 문을 열어 드릴 때까지 문 밖에서 나를 기다려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다른 미신적인 종교에서의 신은 운명과 팔자로 인간을 구속하며 함부로 인간에게 명령을 합니다. 집을 사서 이사 하나를 하려고 해도, 어느 날 가라, 어느 방향으로 가라 명령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으십니다. 어디로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네가 스스로 생각해서 자유롭게 결정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네가 어디고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고만 말씀하십니다.

저는 하나님이 너무 좋습니다. 하나님은 신이신데 피조물인 우리 인간의 인격을 존중해 주시고 창조하실 때부터 우리 인간에게 자유와 기회를 주셔서 스스로의 인생을 창조적으로 살 수 있게 해 주시는 하나님이 저는 너무 좋습니다.

저는 봉건주의가 싫습니다. 저는 민주주의가 좋습니다. 내일부터 바른 교회 아카데미가 시작됩니다. 바른 교회 아카데미를 통하여 하고 싶은 가장 중요한 일 중에 하나도 지금 세상에서 가장 봉건적인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 교회를 보다 민주적인 방향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저는 그래서 군사정권 때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하여 독재에 항거하여 싸웠던 민주투사들이 좋습니다. 저는 왜 그렇게 민주를 좋아하는 제가 나라가 민주주의가 아니고 독재였는데 그것에 항거하지 못하고 교회 안에서 교회 일만 하고 있었는지, 왜 그와 같은 일에 대하여 항거하지 못했었는지가 참 이해가 안 됩니다. 저는 철이 좀 늦게 드는 편인 것 같습니다. 아주 많이 늦게 드는 편인 것 같습니다. 민주투사들의 헌신과 희생으로 군부독재가 무너지고 나라가 많이 민주화 된 지금에야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저는 군부독재에 맞서서 민주주의 부르짖으며 싸운 분들에 대한 컴플랙스가 있습니다. 때문에 저는 그와 같은 민주투사들을 속으로 좋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저는 그래서 우리나라 정부가 386 세대 민주투사들을 중심으로 판을 짜고 국정을 운영해 나가고 있는 것에 대하여 원칙적으로 동의하고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즘 저는 조금씩 그와 같은 기대가 무너지면서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나라가 민주투사만 가지고는 안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회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민주투사들에 대한 제 불안의 내용은 민주투사들이 정작 민주를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비민주적으로 국정을 운영할 때는 생명을 걸고 그것을 저지하고 막던 사람이 막상 자기가 국정의 주체가 되었을 때에는 자기가 비판하던 사람들과 똑같이 자기와 다른 사람을 인정하지 못하고 공격하고 탄압하고 무리하게 국정을 자기 스타일과 생각대로, 색깔대로만 이끌어가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남의 눈 속에 있는 독재의 티는 보면서도 막상 자기 눈 속에 있는 독재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구태타로 정권을 잡은 군부독재자들이나 민주항쟁을 통하여 정권을 잡은 민주투사들이나 비민주적이고 봉건주의적인 방법으로 국정을 이끌어 나가는 것은 똑같은 것이 아닌가하는 깊은 회의에 빠져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국무총리가 해외순방 중 기자들과 인터뷰를 하면서 특정 언론 두 곳을 아주 강한 톤으로 비난하여(그것은 비판 이라기보다는 비난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시끄러운 나라를 더 시끄럽게 만들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총리의 그와 같은 발언과 태도가 국가 이익에 반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총리가 비난한 두 언론에 대하여 여당의 대표가 같은 발언을 하였습니다. 저는 정당의 대표가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같은 문제를 놓고도, 같은 언론을 놓고도 이 정당은 이렇게 이야기하고 저 정당은 저렇게 이야기를 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좀 복잡한 것 같고 갈등을 일으키는 것 같아 보여도, 저는 획일적인 안정보다는 민주적인 갈등이 훨씬 더 건강한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당과 정부는 다릅니다. 정당에서 정부가 나오지만 일단 정부가 되면 정당을 초월해야 합니다. 모든 정당을 품어야만 합니다. 정부가 여당에서 나왔다고 무조건 여당의 색깔만 고집한다면 나라는 깊은 혼란에 빠지게 되고 말 겁니다. 요즘 우리나라의 문제가 저는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건강한 나라가 되려면 각기 다른 입장과 색깔로 문제를 야기하는 정당이 있어야 하고 그것을 수습하고 조정하여 보다 나은 의견과 정책을 만들어내는 유능한 정부가 있어야만 합니다.

저는 정부와 정당이 하나가 되어 일사분란하게 같은 목소리를 내는 나라가 싫습니다. 저는 그래서 봉건주의와 군부독재가 싫습니다. 그러나 저는 정부가 moderator가 되지 못하고 정당 중에 하나 같이 되어 갈등을 수습하지 못하고 오히려 갈등을 더 부추키는 나라도 싫습니다. 북한 정권의 문제는 전자에 있고, 우리 현재 남한 정부의 문제는 후자에 있습니다. 둘은 전혀 다른 것 같으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둘 다 다 민주적이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총리는 투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총리는 어른이 되어야만 합니다. 봉건적인 어른이 아닌 민주적인 어른(moderator)이 되어야만 합니다. 저는 그 동안 봉건적인 어른이 싫어서 어른의 필요성을 잘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 동안 보수우익 정권의 어른들이 봉건적인 어른 노릇을 잘 못하는 것에 대하여 부정적인 입장이었기 때문에 현 정권이 그와 같은 봉건주의적인 세력을 무너트린 것에 대하여 동의하고 긍정적이었습니다. 그러나 현 정권이 잘못된 어른을 부정하고 무너트린 것은 좋으나 저들이 막상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어른이 되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불안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너트려야 할 것은 잘못된 의미의 ‘어른’이지, ‘어른’ 그 자체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잘못된 의미의 어른은 있을 때 문제가 되고, 바른 의미의 어른은 없을 때 문제가 됩니다. 우리나라의 문제는 전에는 전자에 있었고, 요즘은 후자에 있습니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아이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다른 아이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도 마찬가지) 빼놓지 않고 한 기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좋은 스승(어른)을 만나게 해 주십시오’ 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른과 스승이 없는 아이는 절대로 좋은 아이가 될 수 없습니다. 좋은 스승과 어른을 만나는 것보다 아이에게 축복된 일은 많지 않습니다.
존경할만한 어른과 스승이 없는 나라는 절대로 좋은 나라가 될 수 없습니다. 민주주의는 잘못된 어른과 그 어른의 잘못된 권위를 부정하는 것이지 무조건 어른과 권위를 부정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목욕물을 버리다가 아이까지 함께 버리는 우를 범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어른과 그 어른의 잘못된 권위를 부정하다가 무조건 좋은 의미의 어른과 바른 의미의 권위를 부정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른이 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스승이 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저는 요즘도 저의 10년 후와 20년 후를 늘 생각합니다. 저의 10년 후가 지금보다 더 좋기를 희망하고, 저의 20년 후가 저의 10년 후 보다 더 아름답기를 소원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지금이 저의 전성기인 것으로 생각합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오늘 보다 내일, 내일 보다 모래가 더 좋은 삶을 욕심내며 살고 있습니다.

제가 10년 후, 20년 후를 바라보며 욕심내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그것 하나 밖에 큰 욕심이 없습니다. 그것은 ‘어른’이 되는 것입니다. 훌륭한 어른이 되는 것입니다. 민주적인 어른이 되는 것입니다. 갈등과 다툼과 혼란을 잠재울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moderator가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의 선지자가 되는 것입니다. 교사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백발(나이든 어른)이 영화의 면류관(존경받는 어른)이 된다는 것처럼 복된 일은 없습니다. 그것은 의로운 길에서만 얻는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의로운 길’이라는 말이 말은 쉽지만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큰 교회의 목사는 혹 노력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냥 이름만 알려진 유명한 목사는 혹 노력하면 될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움 없이 노년을 그냥 편하게만 지내자면 그것도 혹 노력하면 별로 어려울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틀림없이 후회하게 될 겁니다. 틀림없이 불행하게 될 겁니다. 틀림없이 외롭게 될 겁니다. 틀림없이 옛날의 전성기만 녹음기처럼 이야기하며 젊은이들에게 짐이 될 겁니다. 저는 제가 그렇게 살게 될까봐 두렵습니다.

어른이 되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진정한 어른이 되는 부모가 되고 싶습니다. 집안의 모든 문제와 갈등을 통합하고 조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실력 있는 어른(moderator)이 되고 싶습니다. 하나님께 욕심을 내어 기도하여 교회와 교계 그리고 세상의 어른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의로운 길’이 비록 힘들고 어렵다고 하여도, 꼭 그 길만 고집하여 하나님이 약속해 주신 나의 백발로 영화의 면류관을 삼고 싶습니다.
저와 함께 그와 같은 기도 제목을 가지고 함께 신앙생활을 해 나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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