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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을 새롭게 (대하 29: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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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박봉수 목사
 
  매너리즘(mannerism)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타성에 젖어서 습관적으로 어떤 일을 되풀이 하는 것을 말합니다.

  원래 이 말은 미술사조의 한 흐름을 지칭하는 말이었습니다. 16세기 르네상스 고전주의가 한참 꽃을 피우고 있을 때 걸작들 많이 나왔습니다. 화가들은 이 걸작들의 화법과 양식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그 화법과 양식에 안주하기 시작했고, 틀에 박힌 형태의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 때의 미술사조를 매너리즘이라고 부릅니다.

  이 매너리즘 시대에 걸작 수준의 수준 높은 작품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방법상의 새로운 시도나 독창성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작품 하나하나에 작가의 혼이 담겨져 있지 않았습니다. 물론 좋은 평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매너리즘 하면 이제 극복하지 않으면 안될 미술사조의 대표적인 이름이 되어 버렸습니다.

  신앙생활에도 이런 매너리즘이 있습니다. ‘여기가 좋사오니’ 하면서 주어진 상황에 안주하고자 합니다. 늘 하던 대로 습관에 젖어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다람쥐 체 바퀴 돌듯이 타성에 빠져 교회를 다닙니다.

  주님께서 마 12:30을 보면 신명기 말씀을 인용하셔서 이렇게 가르쳐주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우리의 신앙생활에 우리의 온 마음을 다 담으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숨까지 담으라는 것입니다. 뜻과 모든 노력을 다 담으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매너리즘은 모방 작품에 작가의 혼이 실리지 않은 것처럼 매일의 신앙생활에 마음이 실리지 않습니다. 목숨과 뜻과 힘이 실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매너리즘의 모방 작품이 사람들에게 외면당하듯이 신앙생활의 매너리즘은 하나님께 외면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생활 속에 마음이 부족함 없이 다 담겨있습니까? 신앙생활에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계십니까? 그렇지 못하다면 어느덧 우리 신앙생활은 매너리즘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그저 타성에 젖어서 습관적으로 교회 다니고 나름대로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종교개혁 기념주일입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저 거대한 로마 천주교의 화석처럼 굳어진 매너리즘을 타파하기 위해 분연히 일어선 날을 기념하며 예배드리는 날입니다. 오늘 우리 심령 속에 어느덧 자리 잡고 있는 저마다의 매너리즘을 극복하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와 한국교회의 매너리즘을 타파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남 왕국 유다의 히스기야 왕의 종교개혁 이야기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가 신앙의 매너리즘을 극복할 방법을 교훈해 줍니다. 그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1. 세밀하게 돌아봐야 합니다.

  3절을 보면 “원년 정월에 여호와의 전 문들을 열고 수리하고...”라고 했습니다. 왕이 되자마자 제일 먼저 한 일이 예루살렘 성전 문을 열고 수리를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왕이 되면 전임자의 한 일을 돌아보고 잘한 점과 잘 못한 점을 평가해 보고, 상황 파악과 현실진단을 먼저 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리고 자기는 어떻게 할 것인가를 기획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기다렸다는 듯이 왕이 되자마자 일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이미 진단이 다 끝이 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도 다 계획이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특히 8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유다와 예루살렘을 진노하시고 내어 버리사 두려움과 놀람과 비웃음거리가 되게 하신 것을 너희가 목도하는 바라” 하나님께서 지금 유다에 대해서 진노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려워하고 놀라고 남들에게 비웃음거리가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히스기야는 아버지 아하스가 통치하는 것을 오랜 세월 지켜보았습니다. 그가 어린 시절 9살 때 아버지가 왕이 되어 16년을 통치했습니다. 28장 2-4절을 보면 바알들의 우상을 부어 만들고, 이방인들 저 암몬의 몰록 제사를 본받아서 자녀를 제물로 불살라 제사를 드리고, 가나안 사람들이 하듯이 산 위의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히스기야는 이 모든 것을 어려서부터 지켜보았습니다.

  5절을 보면 아람이 쳐들어와서 정말 큰 곤욕을 치렀습니다. 그리고 북왕국 이스라엘이 쳐들어와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나라꼴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히스기야는 그 원인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아하스에게 말할 수 없었습니다. 듣지 않기 때문이고, 그 심령의 눈이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문제가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자기들은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심각한 영적 매너리즘에 빠진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정확하게 이 문제를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교회도 다녀가셨던 충신교회의 박종순 목사님께서는 위암 투병중이십니다. 암으로 위를 제거해 내셔서 치료 중이신데 거의 5년이 다 되도록 재발 증후가 없으셔서 다행히 완치되신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분이 암을 발견하게 된 것은 정말 우연한 기회입니다. 정기 건강진단을 받는 중에 위 내시경 검사를 하다가 암증후가 발견됐습니다. 다행히 초기여서 바로 수술을 하셨습니다. 치료다 잘 됐습니다.

  이분 말씀이 암을 조기에 발견하게 된 것은 정말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것입니다. 아무런 자각증상이 없어서 그냥 병을 키울 뻔 했다는 것입니다. 장로님들이 강권해서 떠밀리다시피 건강진단을 받는 도중에 초기 암 증세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암 환자의 대부분은 초기에 발견하지 못해서 병을 키웠고, 발견하고 보면 이미 치료시기를 놓친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의 영적 상태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가 있는데 발견하지 못합니다. 나중에 큰 시련을 만난 뒤에 정신 차리고 나면 이미 그 문제가 너무도 심각한 상태에 와버렸습니다.

  본문 2절을 보면 “여호와 보시기에...”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영적 상태를 진단할 때 잊어서는 안 될 표현입니다.

  영적 매너리즘에 빠진 사람들 대부분은 자기가 심각한 영적 매너리즘에 빠져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때로는 자기가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부분적으로 알아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자기 나름대로 합리화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 보기에...”로 자신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나 보기에”의 신앙 상태에 빠지면 내 눈의 들보를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호와 보시기에...”의 신앙상태에 있게 되면 내 눈의 티까지도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려분! 우리가 영적 매너리즘에서 벗어나려면 하나님의 관점에서 세밀하게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아파하고 그것 때문에 괴로워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2. 과감하게 버려야 합니다.

  4-5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을 동편 광장에 모으고 저희에게 이르되 레위 사람들아 내 말을 들으라 이제 너희는 성결케 하고 또 너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을 성결케 하여 그 더러운 것을 성소에서 없이하라” 히스기야는 왕이 되자마자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는 것입니다.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에게 엄명을 내려서 성전에 있어서는 안 될 것들을 다 제거해 버리게 했다는 것입니다.

  히스기야의 아버지 아하스 왕 때 앗수르가 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아람과 이스라엘이 동맹을 맺어 대항하려 하다가 유다에도 함께 동맹에 참여토록 요구했습니다. 아하스가 말을 듣지 않자 아람과 북왕국 이스라엘이 유다를 침공해 들어왔습니다. 국력이 크게 약해졌습니다. 할 수 없이 앗수르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 때 국력이 약해진 틈을 타서 주변의 에돔도 그리고 블레셋도 공격해 왔습니다. 앗수르가 왔지만 도와주기는커녕 공격해 왔습니다.

  이런 절박한 상황 가운데 아하스는 예루살렘 성전 문을 닫고 오히려 아람 저 다메섹의 이방신들 앞에 제사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 안에는 이방신을 섬기는 우상과 제사 기물들이 들어와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노를 격발했다고 기록하게 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히스기야는 우선 이것들부터 쓸어내 버려야 했습니다. 왕이 되자마자 성전에 널려있던 저 우상들,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저 더럽고 추한 것들을 과감하게 그리고 철저하게 척결하는 일부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노를 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최근에 어떤 분이 자기 간증삼아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교회는 열심히 다니면서도 직장에서 술자리에 빠질 수가 없어서 쫓아다니며 술을 마셔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제자훈련을 받으면서 QT를 하는데 말씀이 자꾸 이 문제를 지적하더라는 것입니다. 너무 괴로워 견딜 수가 없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작정 기도를 드렸답니다. 그리고 과감하게 직장 동료들에게 선언했답니다. ‘나는 신앙생활 때문에 더 이상 술자리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 직장에서 처음에는 불편한 일이 많았지만 그런대로 또 견딜만 하더랍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그렇게 평안할 수 없더랍니다. QT를 할 때마다 무겁던 마음이 사라지더랍니다. 그리고 놀라운 하늘의 위로를 맛보게 됐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는 것들을 과감하게 버릴 때 심령의 평안이 찾아옵니다. 하나님께서 위로해 주시고 영적인 큰 기쁨을 주십니다.

  고후 6:16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공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성전은 저 예루살렘에 있지만, 영적인 관점에서 볼 때 우리 심령이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심령이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저 예루살렘 성전에 우상이 들어앉아있는 것을 보시고 진노하셨던 것처럼 우리 심령 속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는 것들이 들어앉아있다면 역시 진노하십니다.

  그래서 히스기야가 성전 안의 자리 잡고 있던 우상의 잔재들을 과감하게 척결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의 심령 속에 아직 남아있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는 것들을 과감하게 버려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영적인 매너리즘은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3. 철저하게 지켜야 합니다.

  11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아들들아 이제는 게으르지 말라 여호와께서 이미 너희를 택하사 그 앞에 서서 수종들어 섬기며 분향하게 하셨느니라” 히스기야가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에게 이제부터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일을 철저하게 지키라고 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히스기야는 솔선수범했습니다. 20절을 보면 “히스기야 왕이 일찍이 일어나 성읍의 귀인들을 모아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서...” 여기서 “일찍이 일어나”라는 표현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린 시절 소풍 가는 날을 며칠 째 손꼽아 기다리다가 그 날이 되면 새벽 같이 일어나 준비하던 기억이 납니다. 히스기야는 성전에 올라 제사드리는 것을 그토록 사모했기에 아침 일찍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는 평생 이런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마음을 지키며 살았습니다.

  재즈 음악의 살아있는 전설로 손꼽히는 사람 가운데 소니 롤린스라는 분이 있습니다. 특히 재즈 색소폰의 거장입니다. 이분은 재즈계에서는 기인으로 통합니다.

  한참 연주 활동을 하다가 정상에 오르게 되면 갑자기 사라져버립니다. 공개적인 연주 활동을 접고 종적을 감춥니다. 때론 청소부로 돌변하고, 건물 경비하는 일을 하기도 합니다.

  그가 종적을 감추는 가장 큰 이유는 자신만의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무대의 그 많은 박수, 점점 밀려오는 돈의 유혹, 감당할 수 없는 인기... 이런 것들이 음악을 향한 그의 열정을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음악에 대한 간절한 목마름을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그저 그는 재즈가 좋고 음악 연주가 좋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의 음악은 평생 애호가들에게 변함없이 사랑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히스기야는 늘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을 지켜왔습니다. 왕이라는 자리도, 왕이라는 체면도, 왕이 가졌던 그 많은 재물과 권세도 그의 이런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을 방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영적 매너리즘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나라의 영적 개혁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미국 하버드 대학의 하워드 가드너교수는 “Leading Minds"라는 책을 썼습니다. 세상을 지도해가는 사람들이 품는 정신 또는 생각이라는 뜻입니다. 이 책에서 세상을 변화시킨 지도자들이 갖는 공통된 마음은 한 마디로 목마름이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그 목마름을 향해서 끝없이 달려왔다는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바로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 그 목마름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 목마름을 향해 최선을 다해서 달리고 또 달렸습니다. 그래서 영적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딤후 4:7을 보면 바울이 자기의 믿음의 한 평생을 돌아보면서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철저하게 믿음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지킨다는 말을 주목해야 합니다. 지키고자 몸부림치지 않으면 지킬 수 없다는 뜻입니다. 잘 지키지 않으면 빼앗기거나 사라진다는 뜻입니다.

  지금 LLTC 반 훈련이 진행 중입니다. 숙제가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설교 요약, 성경 읽기, Q.T., 기도, 독서 과제, 등... 이런 숙제를 통해서 우리의 믿음을 지키는 훈련을 쌓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시간의 십일조 지키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루 두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려고 힘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목마름을 지키는 훈련을 쌓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을 잘 지켜 가시기 바랍니다. 쉽게 빼앗길 수 있습니다. 나도 모르게 어느새 사라져 버릴 수가 있습니다. 믿음을 잘 지키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영적 매너리즘을 이길 수 있습니다.

  앞에도 말씀 드린대로 오늘은 종교개혁 기념주일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이 로마 천주교의 영적 매너리즘을 극복하려고 일으킨 개혁 운동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로마 천주교를 개혁하려고 나선 믿음의 사람들 그들을 개신교도라고 합니다. 이 개신교라는 말을 영어로는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고 합니다. 이 프로테스탄트라는 말은 저항하는 사람들 대항해서 싸우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한 마디로 개신교도들은 영적 매너리즘과 싸우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떠난 우리 모습과 싸워야 합니다. 예배를 예배답게 드리지 않는 우리 모습과 싸워야 합니다. 기도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우리 모습과 싸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우리의 모습과 싸워야 합니다. 그래서 늘 새로운 믿음을 간직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 자신을 세밀하게 살펴야 합니다. 버릴 것

은 과감하게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지킬 것을 철저히 지켜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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