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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면적 질서가 서 있는 신앙생활 (살전5:12 -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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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성덕 목사

<구차한 평안을 떨치고 구도의 길에 나서다> 라는 성프란시스의 전기레오라는 형제가 진눈깨비를 맞으며 힘겹게 걸어가는 모습을 본 프란시스가 그에게 말합니다..
[ 레오, 우리가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귀머거리를 듣게 한다고 해도, 성경을 통째로 외우고, 신학자들의 학설을 모두 통달했다고 해도 그 안에 진정한 기쁨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별들의 길을 모두 알고 온갖 생물의 특성을 전부 안다고 해도그것은 절대로 온전한 기쁨의 근원이 아닙니다. ]
길을 걸으면서 계속되는 프란시스의 말에 마침내 레오가 걸음을 멈추고 물었습니다.
[ 그렇다면 온전한 기쁨의 근원은 무엇입니까? ]
[ 추위와 배고품에 떨며 간신히 목적지에 도착하여 문을 두드렸을 때 집주인이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라고 말해도, 우리를 도둑이나 부랑아 취급하며 모욕할 때도,
우리가 이런 일들까지 인내와 친절과 사랑으로 모두 참는다면
그제야 우리는 온전한 기쁨 언저리에 도달한 셈입니다.
자신을 정복하는 데 온전한 기쁨이 있습니다. ]
즉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어떤 환경이나 여건에서도 빼앗기거나 흔들릴 수 없으며 그 기쁨은 마음 속에서 솟아난다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교인들이 가장 잘 암송하는 성경 구절 가운데 하나가
살전5:16-17절 [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입니다.
그리고 성도의 가정에 가장 눈에 많이 뛰는 성구가 바로 이 말씀입니다.
그러니 성도들이 가장 잘 알고 있는 말씀이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이 편지를 쓸 때에는 결코 환경이나 여건들이 기뻐하거나 감사할 조건이 못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권면은 우리의 생활 여건이 어떻든 간에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야할 신앙적 덕목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바울이 권면하고 있는 데살로니가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데살로니가교회는 어려운 상황에서 시작한 교회입니다.
사도행전 17장에 보면, 사도 바울과 그 일행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러,
거기 유대인 회당에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했습니다.
그러자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바울과 실라를 좇았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시기하여, 시장바닥의 괴악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케 하고,
바울과 실라가 야손의 집에 있다는 소리를 듣고 달려갔습니다.
저들은 바울과 실라는 찾지 못하고, 야손과 몇 사람을 데살로니가 읍장에게로 잡아갔습니다.
야손과 몇 사람은 보석금을 주고 풀려납니다.
그것이 데살로니가교회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1:6절에, [ 너희는 많은 환란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 하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어려운 환경에서 시작한 데살로니가교회입니다.
그렇지만 데살로니가 교회는 1:7절에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고
1:8절에 주의 말씀이 그들을 통하여 마게도냐와 아가야뿐만 아니라, 그들의 하나님을 향하는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저서 좋은 소문을 가진 교회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우리는 더 이상 아무 말할 것도 없노라 고 합니다.

이러한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에게 바울이 마지막으로 권면 하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한 주제로 말하라면 교회는 질서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질서의 영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성령의 역사가 나타날 때 반드시 질서를 좇아 나타납니다.
질서를 무시하는 은혜, 은사는 성령의 은혜 은사가 아닙니다.
특히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성령의 은사에 대해 말하면서 모든 것을 질서대로 하라고 합니다.

오늘 이 세상의 문제는 질서가 파괴된 데서 오는 것입니다.
2004년도는 유난히도 우리나라의 기상관측상 신기록이 많은 해입니다.
신기록이 많다는 것은 이상기후가 많이 생겼다는 말입니다.
지난 3월5일에 서울에 적설량이 18.5cm로 사상최대의 눈으로 교통대란이 일어났고
대전과 문경에도 49cm 일년 내내 올 눈이 하루 만에 내려서
고속도로에 차량이 통제된 채 운전자들이 고속도로 상에서 갇혀 지나야만 했습니다.
또 7월 14일 전남 진도에서 1시간 115mm라는 국지성폭우를 기록하였으며 그리고 8월30일 밀양의 기온은 38.5도로

우리나라 기상 관측이 1904년도에 처음 실시했다고 하는데
100년 만의 최고 더운 날씨였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이상 기후가 생기느냐? 하면
주원인이 환경오염의 결과라고 합니다.
화석연료를 사용한 이후 발생한 이산화탄소 등이 지구를 둘러싸 온난화 현상
즉 비닐하우스와 같은 역할을 하여 복사열을 받아 기온이 올라간다는 것입니다.
결과 북극의 빙상이 녹아 내리고 그 거대한 빙산이
(2002년 5월11일에 발생한 C-19 빙산은 길이 194.4km 폭이 30.6km 면적이 여의도 면적의 710배에 해당)
해류의 흐름을 방해하게 되므로 엘니뇨, 나니뇨같은 현상이 발생하게 되고 그 영향으로 이상기후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인간이 눈앞에 편리함 때문에 멀리 내다보지 못하니
자연의 질서가 파괴되어지고 결과는 인간이 보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원리는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자신의 욕심과 이기심 편리주의 때문에 신앙도 자기 중심적이 되어 버리면
결국 교회의 질서가 무너지고
교회의 질서가 무너지면 개인의 신앙생활도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럼 우리가 교회생활 속에서 지켜야 할 질서가 무엇입니까?
12-14절까지 보면
1) 목회자들을 존경하라고 합니다.
12절 [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
13절 [ 저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귀히 여기며 ]
교회는 목회자와 교우들이 가정과 같은 관계를 맺고 사는 곳입니다.
바울은 12절을 통해
교회 내에서 한 사람이 맡고 있는 일을 세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수고하고’, ‘다스리고’, ‘권하는 일’입니다.
당시에는 이 일을 장로들이 맡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장로란 오늘날로 말하면 목회자를 말합니다.
12절의 수고하고 다스리며 권하는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을
‘너희가 알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이러한 일을 하는 사람의 가치를 알고 그를 존중하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목회자의 가치를 바로 알고 그를 존경하라는 말입니다.
13절은 어떻게 존경해야하는지를 말합니다.
13절은 ‘가장 귀히 여기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직역하면 ‘지나치도록 풍부하게보다 더 넘어서’입니다.
13절은 성도들에게 이와 같이 목회자를 존경할 것을 말합니다. <4>
이어서 13절은 목회자를 사랑 안에서 귀히 여기라고 말합니다.
성도들이 목회자를 이렇게 대해야 하는 이유는,
목회자가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목회자가 하는 일 때문입니다.
13절은 “저의 역사로 말미암아”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말은 목회자가 하는 일 때문에 목회자를 존경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저는 목회자로서 이렇게 권합니다.
목사는 성도들을 [ 내가 너를 만남이 일생에 복된 만남 ] 이 되고
성도는 목사를 [ 우리 교회 목사님 제일 좋은 목사님 ] 이라 자랑이 나올 수 있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2) 서로 화목 하라
13절 하반절 [ 너희끼리 화목 하라 ]
교회는 어떤 이유에서든지 분쟁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이유가 없습니다. 화목해야 합니다.
< 불신앙적인 말 전하는 사람은 불신앙인이다 >

3) 신앙이 약한 자들을 붙들어 주라
14절 [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규묘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아라 ]
14절은 교우들 상호간의 관계에
믿음이 연약한 자에 대해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을 말합니다.
한마디로 [ 권계하라 ]고 말합니다.
권하고 깨닫게 해 주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누구를 권계해야 할까요?
14절은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규모 없는 자들’이란 신앙에 철이 들든 사람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마음이 약한 자들은 ‘안위하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위로하라는 말입니다.
즉 신앙이 쉽게 낙심되고 어려움을 잘 극복하지 못하는 자들을
위로하라고 말합니다.
이어서 ‘힘이 없는 자들’, 즉 믿음이 약한 사람들을 붙들어주라고 말합니다.
결국은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오래 참으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그 누구도 실족시켜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하시는 사실은 무엇입니까? 그것은‘하나님께서는 참으로 교회가 교회답게 살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교회의 질서를 먼저 생각하는 교우들 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런 교회생활에서 외적인 질서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5>
바로 나의 신앙생활을 좌우하는 내면적 질서입니다.
<고든 맥도날드> 목사의 [ 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성장 ] 이란 책에 보면
<성공한 못난이> 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세상에서 아무리 성공했다 할지라도
내면세계의 질서가 서 있지 못한 사람은 결국은 성공한 못난이가 된다는 것입니다.
내면세계질서가 서 있지 못한 사람을 <함몰 웅덩이>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아스팔트나 세멘트로 포장을 했는데 비가 오니
푹 꺼져버린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고 이 책에서
우리 주변에는 두 가지 부류의 사람이 있는데
좇겨 다니는 사람과 부름받은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좇겨 다니는 사람은 세상의 욕망을 붙들기 위하여 열심히 좇아가지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영적인 공간과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름받은 사람은
내면세계 질서가 바로 서 있어
확고한 목적의식을 갖고 살면서
그 특징이 마음에 평안과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내면세계의 질서가 서 있는 성도의 신앙생활의 특징이 무엇인가 하면

이것은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갈 때 많은 것을 잃어버리게 되지만,
결코 잃지 말아야 할 것이 세 가지라 할 수 있습니다.
16절-18절
[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 는 권면처럼
1)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면 어떻게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주안에 있을 때’
‘성령 안에 있을 때’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빌4:4절 [ 주 안에서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
그리고 살전1:6절 [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
도저히 기뻐할 수 없는 상황임에도
주님은 우리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0년간 절망적인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 편지’를 50만 통이나 보내어
절망의 수렁에 빠진 수많은 사람이 그의 글을 통해 희망의 빛을 보고
다시 일어나는 기적을 나타낸 분이 있습니다.
오규근씨가 그 희망 편지의 주인공이다.
그 역시 한때는 절망으로 세상을 포기하려 했지만, <6>
예수를 믿고 오 아볼로라는 이름으로 바꾸면서
삶의 큰 전환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온몸의 뼈가 부러지는 희귀병으로
혼자 일어설 수조차 없는 중증 장애인입니다.
목발은 고사하고 휠체어를 타고 다니기도 힘듭니다.
비록 그의 몸은 1m도 안 되지만,그의 영혼의 키는 누구보다도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 아볼로씨가 자신의 망가지고 절망적인 인생을 바로 세우고,
타인의 절망까지 희망으로 바꾸었던 그 원동력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그의 고백에서 행복한 삶의 비결을 찾을 수 있다.
“몸은 이렇지만 하나님 빽으로
정상인들을 도울 수 있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일생을 불평과 절망 속에 살아도 당연할 수 있는 삶이지만,
오 아볼로씨는 불평 대신 감사를 선택하였고,
그의 삶의 백그라운드를 하나님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주 안에 있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바로 하나님을 백 그라운드로 삼았다는 말 아닙니까?
하나님을 백 그라운드로 삼은 자는 항상 기쁨이 있는 줄 믿습니다.

2) 쉬지 말고 기도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왜?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할까요?
어느 셀러리 맨의 간증입니다.
몇 년전 제가 SBS방송사 면접을 본 기억이 납니다.
심사위원중 한분이 저에게
대학생활 중 가장 보람차고 기뻤던 일 한가지를 말해보라고 하였습니다. 전 망설임 없이 "예수님을 만난 일"이라 대답했고 순간 분위기가 썰렁해졌습니다. 사람들은 저거 바보가 아닌가 쳐다봤지만
제 마음은 넘치는 기쁨과 감사로 뜨거웠습니다.
그런데 지금 만약 누군가가
[ 이제껏 살아오면서 가장 기뻤던 일은 무엇인가 ] 물어본다면,
주저하며 [ 글쎄요 예수님을 만난일 같은데요 ]라고 하지 않을까 생각하니 참으로 가슴이 막막합니다.
이를 곰곰히 묵상해 보니 제가 기도하지 않기 때문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은
직장도 그만두고 산에 들어가 하루 종일 기도하는 그런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설교를 들으면서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딴 생각이 자꾸 올라와서 설교에 집중하지 못하게 만드는데 설교 듣는데 집중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버스를 타고 갈 때, 혹은 차를 운전 할 때 기도할 수 있습니다. <7>
사람을 만나서 대화할 때에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설거지를 하면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눈을 감지 않아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은 끊임없이 하나님과 대화하는 자세를 말합니다.
이것이 내면세계 질서가 서 있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3)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로가 그냥 "기뻐하라, 기도하라, 감사하라"고 하지 않고, '[ 항상 기뻐하라, 늘 기도하라,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라 ] 고 한 것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그러니 어떤 처지에 있든지 감사하라고 합니다.
[ 웃긴다 어떻게 내 돈 떼어먹고 달아난 그 사기꾼보고 감사할 수 있어? ] 성경은 그 사기꾼에게 감사하라고 이르지 않았습니다.
그 사건 보고 감사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분명 그 사건 너머의 하나님을 향해 감사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범사에 감사하라"는 곧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은 고난 중에도 감사하라는 말입니다.
인생살이처럼 복잡하고 미묘한 드라마는 없습니다.
목을 길게 빼고 지름길을 찾아간다지만 장애물을 피할 수도, 사고를 막을 수도 없습니다. 가만있어도 슬며시 찾아와 치어 박고 가는 것이 예사입니다. 오늘도 열심히 뛰었지만 사업에 골머리를 앓고,
인간관계에 위험을 느끼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필요없는 부분을 가위로 잘라내듯 아예 문제를 잘라내버리고 싶은 심정은 신앙인이든 아니든 모두 다 마찬가지입니다.
때로는 신앙인이라 자처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문제 앞에선
더욱 히스테리칼 해지는 것을 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 보면 정말 견디기 힘든 고난에 직면합니다.
그럴 경우에도 하느님께 감사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보면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겪는 갖가지 고난은
오히려 우리가 삶을 유지하는데 꼭 필요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사실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는 아픔은 그 부위에 이상이 생겼으니
빨리 치료하라는 일종의 신호입니다.
예를 들어,
피부에 와 닿는 날카로운 물건에 대해서 아무런 아픔을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의 몸은 온통 상처투성이가 될 것입니다.
통증이 없으니 주의도 하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치료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가볍고 흔한 고통도
사실은 생명을 유지하도록 보내 주신 하느님의 은혜입니다.
이것은 정신적인 고뇌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8>
그래서 톨스토이는
[ 고통의 감각이 우리 육체를 유지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조건인 것 같이 고뇌 또한 우리의 인생이 끊임없이 향상하는데 없어서는 안될 조건이다 ]
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상황이나 처지가 문제가 아니라,
그 상황이나 처지를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대로는 고통은 오히려 우리가 깨어나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대문호 셰익스피어의 시의 한 구절입니다.
[ 그대를 볼 때까지는 낮도 밤이요,
꿈에서라도 그대가 보이면 캄캄한 밤도 밝은 낮이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감사를 찾고 발견할 때까지는
아무리 부귀영화를 누리는 인생도 실상은 캄캄한 밤이요,
현실적으로 아무리 캄캄한 밤과 같은 인생이라도
감사를 발견하는 순간 해와 같이 밝은 인생,
풍성한 열매를 맺는 인생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남은 생애의 에너지를 하나로 모아
하나님께 감사로 집중시켜
레이저빔처럼 강철도 통과할 수 있는 힘을 발휘하여
환경이 바뀌어 짐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살전5:16-18절을 신앙생활의 왈츠라고 제목을 붙였습니다.
왈츠가 뭡니까? 4분의 3박자 춤이 아닙니까?
성도는 성령의 춤을 추는 사람들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내면세계의 질서가 잡혀 있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신앙생활에 왈츠가 있는 삶이라는 것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기독교 교육과 선교에 크게 이바지 한 김활란 박사의 묘소에 가 보면,
평토장한 무덤에 성경책 한 권을 돌로 만들어 놓았을 뿐,
그분의 약력이나 글귀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직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에 있는
[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
는 말씀만 볼 수 있습니다.
김 박사님은 바로 신앙생활의 왈츠가 있는 삶을 살다간 사람임을 말합니다.


그럼 신앙생활에 왈츠가 있는 삶을 유지하기 위하여 <9>
우리가 힘써야 할 일이 있습니다.
1) 19절 성령을 소멸치 말라고 합니다.
왜 성령을 소멸치 말라고 합니까?
기쁨과 기도와 감사의 근원은 성령님이기 때문입니다.
본래 ‘소멸하다’는 말은 ‘불을 끄다’라는 뜻입니다.
성경의 갈라디아교회는 성령의 불을 꺼버림으로써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게 된 예입니다
불이 꺼지면 춤이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기쁨도 기도도 감사도 그 근원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매일 저녁, 12시 넘어서 들어오는 남편이 있었습니다.
그것도 술을 거나하게 먹고 들어오는데,
그 상태로 어떻게 집은 찾았는지
다행스럽게도 집 문 앞에까지 와서 쓰러져 버립니다.
더구나 토요일이 되면 더 늦게 들어와서
다음 날 낮 2-3시까지 잠에 취해 떨어져 버립니다.
그런 남편을 보면서 한심하기도 하고 너무 너무 미워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어느 날은 남편을 안방까지 들여다 놓고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는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아내는 그동안 참아왔던 분노를 하나님께 터뜨리면서
남편을 원망하는 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 하나님, 어찌하여 이렇게 지독한 남편을 나와 결혼하게 해 주셨습니까?
이건 너무하지 않습니까?
내가 그렇게 기도해도 하나님은 왜 우리 남편을 변화시켜주지 않고
이렇게 나를 고생시키는 겁니까? 더 이상은 이렇게 못살겠습니다 ]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아마 그런 남편에 대해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남편만 보면 울화가 치밀고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어찌 나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을 향해 분노를 터트리고 있을 때
갑자기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시는 말이 있었습니다.
[ 김 집사야, 너의 남편이 멀리 큰길가에 쓰러져서 잠들지 않고
그래도 집까지 찾아와서 집 앞에 쓰러져 있는게 고맙지 아니하냐?
거기에다가 토요일 날 늦게 와서 주일날 집 지켜주니
교회오기 편해서 좋지 않냐?
다른 남편들 같이 교회 가는 것 방해하지 않는 것만 해도 감사하지 않냐? ]
김 집사는 기도를 드리다가 김집사는 성령께서 ‘감사하라’고 해서
그날도 토요일 밤 늦게 만치되어 돌아온 남편의 가슴 위에 <10>
어쩔 수 없이 손을 앉고 감사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감사기도를 하면서도 속에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어
기도하다가 웃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웃는 아내의 모습을 남편이 실눈을 뜨고 보더니,
[ 당신 갑자기 왜 그래? 이 여자가 미친 거야? 왜 갑자기 웃어 ] 라고
말하더랍니다.
하기야 이제까지 술먹고 올 때마다 분노를 터뜨리던 아내가
기도하다가 갑자기 웃었으니 남편이 오히려 놀랄만 하지 않겠습니가?
아내는 그제서야 자초지종을 남편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이 남편이 감동을 받았는지
주일 날 아침, 일찍 일어나더니 아내를 따라 나서더라는 것이다.
[ 당신이 믿는 하나님, 나도 한 번 믿어 보아야 하겠다 ] 고 말입니다

2) 20절 예언을 멸시치 말아야 합니다.
예언이란 바로 하나님 말씀을 말합니다.
왜 예언을 멸시치 말라고 하느냐 하면
역시 기쁨과 기도와 감사의 근원은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그 마음 속에 살아 있는 이상은
성도는 항상 기쁨과 감사가 넘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결론적으로
내가 감사의 삶을 살아가는데 제일 걸림돌이 무엇입니까?
21-22절 [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
좋은 것은 취하고 악한 것은 버리는 것이
기쁨과 감사의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비결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감사의 삶의 걸림돌은
1) 좋은 것을 헤아리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특히 인간관계에서 좋은 것을 헤아릴 줄 아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통과 시키는 마음>
2)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는 말과 같이
죄는 우리의 마음에 기쁨과 감사의 마음을 앗아가 버립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을 근심되게 하시기 때문에
성령의 춤이 우리의 삶에서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 세상 살면서 죄와 멀리한다면
주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는
항상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살아갈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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