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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의 근거 (마 7: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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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양인 목사

건물은 그 기초가 견고해야 합니다. 반석 위에 세운 건물은 오랜 세월이 흘러도, 비바람이 불어도 끄떡없습니다. 그러나 기초가 부실한 건물은 오래지 않아 벽에 금이 가거나 기울거나 무너지게 됩니다. 아무리 보기에 아름답게 지었더라도 기초가 잘못된 건물은 온전히 서지 못합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집니다. 신앙의 기초가 견고한 사람은 시험과 환난의 바람이 불어와도 끄떡없이 견디지만, 신앙의 기초가 부실한 사람은 작은 시험에도 쉽게 쓰러지고 맙니다.

기독교는 믿음의 종교입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믿음이 없이는 설명도 되지 않고 이해할 수도 없는 것이 기독교의 진리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는 것을 우리가 곁에서 보았습니까? 불신자들은 이 사실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이 세상이 우연히 만들어졌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믿음이 있기에 창조설을 의심 없이 받아들입니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도 마찬가집니다. 세상 사람들은 동정녀 탄생은 과학적으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동정녀 탄생을 무슨 지어낸 이야기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믿음이 있기에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아무 부담 없이 이해하고 받아들입니다.

죽어서 지옥과 천국을 보고 왔다고 간증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습니다. 그런 간증을 들으려고 많은 사람들이 모인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앙의 토대를 성경에 두지 않고, 사람의 신비 체험 위에 두는 것이므로 잘못된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지 못했는데 간증을 듣고 확신하게 되었으니 좋은 일이 아니냐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지옥과 천국이 있다는 사실은 사람의 간증에 의존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이 시간 저는 우리 신앙의 기초가 무엇인지를 말씀해 드림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 째로, 우리의 신앙은 기록된 성경 말씀 위에 세워야 합니다.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입니다. 반면에 세상 종교들은 인간의 사색과 경험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종교마다 신을 이해하는 방법이 다르고 신을 섬기는 방법이 다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진리는 사람의 사색이나 경험에 기초하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계시에 의존합니다. 성경은 사람의 깨달음을 기록한 책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를 기록한 것입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하나님을 발견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이 누구인지를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베드로후서 1장 21절에는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고 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음을 압니다. 창세기 1장 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창세기 1장과 2장을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어떠한 순서로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셨으며, 또 창조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또 창세기 3장을 통해서 우리는 인간의 타락과 그 결과로 생겨난 비극적인 운명에 대하여 알 수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성경은 우리에게 구원의 도리에 관해서도 계시해 줍니다. 세상 종교들은 인간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수양을 하고, 자선을 행하고, 고행을 통해서 도를 깨쳐야 된다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종교들은 인간이 자기의 노력에 의해서 구원 받는다고 하므로 자력(自力) 종교라고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구원은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받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을 믿음으로 받는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일컬어 타력(他力) 종교라고 합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인간의 타락한 실상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고 말합니다. 사람 속에 감추어져 있는 부처를 발견하는 것이 구원이라고 가르치거나, 예의범절을 가르침으로써 선한 본성을 계발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식으로 말씀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은 인간의 전적 타락을 가르칩니다. 죄인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제 힘으로 구원의 길을 찾을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만 구원의 길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께서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은총인지 말로 다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사를 보면, 로마 천주교가 성경을 왜곡하고 교황의 말을 더 존중하고 떠받듦으로 신앙이 크게 타락했을 때, 마틴 루터는 “오직 성경으로!”라는 표제를 내걸고 종교 개혁을 일으켰습니다. 루터는 신앙의 기준으로 오직 성경만을 인정했습니다. 개신교는 이와 같은 종교 개혁의 원리를 인정하는 교회를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에 와서 기독교는 새로운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성경을 신앙의 절대 기준으로 인정하지 않는 자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들은 기독교 신앙을 무속화(巫俗化)하고 혼잡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예언한답시고 성경 말씀을 인용하여 사람의 장래를 점칩니다. 이런 사람들은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인용할지라도 성경의 진리를 믿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믿는 자가 아니라 성경을 이용해서 자기들의 욕심을 채우는 자들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같은 자들에 대하여 말씀하기를 “…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벧후 3:16)고 했습니다. 그러나 성도님들께서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만을 믿음의 절대 기준으로 삼으시고 신앙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이 이끄는 대로, 말씀이 전진하면 전진하고 말씀이 멈추면 멈추어 서는 자세로 살아가십시오. 그리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 등불이 되어 성도님들의 인생길을 의와 평강의 길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두 번 째로, 우리의 신앙의 터전은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성경의 주제는 죄인들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입니다. 성경에는 역사도 있고, 시도 있고, 도덕적인 교훈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경은 단순한 역사책이 아니요, 시가집도, 도덕책도 아닙니다. 창세기로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성경 66권은 하나같이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과 역사를 계시한 것입니다. 이를 달리 말하면, 성경의 주제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이 됩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고 하셨습니다. 이뿐 아니라,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요 5:46)고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만 성경을 올바로 읽는 것이 됩니다.

성경은 신앙생활을 집 짓는 일에 비유합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고전 3:10-15)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구원의 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으십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구원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하신 말씀과 같이,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충분하며 그 외에 인간적인 공로가 필요치 않습니다.

그러나 장차 주님 앞에 설 때 받게 될 상급은 성도들 각자의 행위에 따라서 다를 것입니다. 어떤 성도는 금이나 은이나 보석에 비유되는 헌신적인 행위로써 믿음의 집을 지은 결과 주님으로부터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 25:21)하시는 칭찬을 받게 것이요, 또 어떤 성도는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비유되는 게으르고 나태한 신앙생활을 한 나머지 주님 앞에 설 때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은 칭찬과 상급을 받게 되고 또 어떤 사람은 겨우 구원만 받는 신세가 될 것입니다. 어찌되었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터 위에 집을 세우면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다른 터란 곧 인간적인 방법을 말합니다.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인간의 행위를 통해서 구원받겠다는 점에서 인간적인 방법입니다. 율법은 죄를 지적해 주는 역할을 할 뿐 죄를 없이 하지는 못합니다.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율법을 지켜서 구원 받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터 위에 집을 짓는 것으로서 결국 구원에 이르지 못하고 맙니다.

율법주의를 비롯해서 세상의 모든 종교 사상은 구원의 터가 될 수 없습니다. 그 위에 신앙의 집을 세우는 자는 마치 모래 위에 집을 세우는 자와 같아서 장차 하나님의 심판이 창수 같이 임할 때 멸망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 16:25) 하신 대로, 사람들의 보기에 그럴듯해 보인다고 구원의 길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하신 예수 그리스도 만이 생명의 길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제자들은 대답하기를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고 했습니다. 이번에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고 했습니다.

이 대답을 들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매우 흡족해 하셨습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천주교에서는 베드로를 교회의 터전이라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성경을 오해한 것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베드로를 교회의 터전이라고 언급한 곳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베드로의 고백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가 범한 실수를 기록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붙잡혀 고난을 받고 죽으실 것이라고 하시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잡고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간하였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몸을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기를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고 책망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교회의 터전도 되고 사단도 된다는 말이 되니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그뿐 아니라, 사도 베드로는 그가 기록한 베드로전서 2장 4절로 5절에서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너희도 산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고 말씀함으로 예수님을 교회의 터전인 산돌이라고 증거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하신 말씀은, 예수님께서 교회의 터전이 되시며 그 위에 주님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신 약속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께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유일하신 구주가 되심을 굳게 믿고 흔들림이 없으시기 바랍니다.


세 번 째로,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구원의 도리를 알게 되었습니다. 구원의 도리를 요약하면,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행실이 의로운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기로 하셨다면 인류 가운데 구원받을 자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온전히 지켜 행할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십계명의 여섯 번째 계명은 “살인하지 말라”는 것인데, 사람들은 직접 사람을 죽인 것만을 살인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이 계명을 잘 지켰다고 자부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1-22)고 하셨습니다. 요한일서 3장 15절에도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기준에 의할 때 감히 자신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율법을 지키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더욱 우리 자신의 부족과 무능을 깨닫게 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은 이를 행함으로 구원을 받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율법을 통해서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게 하시려는 데 있습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은혜를 주십니다. 그런 점에서,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역할을 좋은 길잡이가 되는 것입니다(갈 3:24).

우리 사회에는 대체로 윤리적으로 살아간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고 배척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그들이 자기가 의롭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나는 윤리적으로 흠이 없이 살아왔으니 이 정도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자만심 때문에 그들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인간의 의로움이란 가장 선한 자와 가장 악한 자가 오십보백보의 차이밖에 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이사야 64장 6절에는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 바울은 누구보다도 의롭게 살려고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유대인으로서 팔 일 만에 할례 받은 것을 의로움의 근거로 내세웠습니다. 또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 진리를 알고 나니 지난날 그가 자랑하던 것들이 한갓 더럽고 냄새나는 배설물에 불과함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백하기를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고 했습니다. 또 그는 로마서 3장 23절로 24절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받는 것이지 인간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구원을 일컬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생활을 할 때였습니다. 한번은 백성이 하나님을 원망하므로 하나님께서 불 뱀을 보내 백성을 물게 하셨습니다. 물린 자마다 불 뱀의 무서운 독이 온 몸에 퍼져 죽어갑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모세에게 와서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하므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라고 간청했습니다. 이에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니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불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모세가 놋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 뱀을 쳐다본즉 살아났습니다. 불 뱀에 물린 자가 살아난 것은 놋 뱀을 쳐다 본 것이 공로가 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놋 뱀을 쳐다본 자마다 살아난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4-15)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놋 뱀이 장대에 달렸듯이 십자가에 높이 달리셨습니다. 우리가 치러야 할 죄 값을 예수님께서 다 지불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누구든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이므로 우리는 그저 믿음으로 받아 누리기만 하면 됩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 믿고 구원 받으라”고 하면 “지금은 죄가 너무 많아서 믿지 못하지만 나중에 좀 의로운 자가 되면 그 때 가서 믿겠노라”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모르는 자요 교만한 자입니다.

내가 좀 의롭게 되고 나서 하나님의 구원을 받겠다는 생각은 은혜를 은혜 되지 못하게 만듭니다. 은혜란 그만한 혜택을 받을만한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거저 값없이, 호의로, 선물로 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라고 자신이 죄인임을 자복하고 하나님께로 나오는 자만이 이 구원의 은혜를 받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선물로 우리에게 주신 까닭은 죄인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은혜가 아니면 구원받을 자가 전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구원 받는 데 믿음 이외에 인간적인 공로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중세에 천주교는 돈을 받고 면죄부를 팔았습니다. “면죄부를 사는 자는 그 지불하는 돈에 상당하는 죄를 용서 받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 때 마틴 루터가 나서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하신 로마서 1장 17절 말씀에 근거하여 종교 개혁의 횃불을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받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고 감사함으로 주님을 섬겨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시간 우리는 자신이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지혜로운 사람인지, 아니면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사람인지 살펴봅시다. 과연,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근거를 둔 믿음을 갖고 있으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터전 위에 믿음의 집을 짓고 있으십니까?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선물로 받는 것임을 믿으십니까? 이 세 가지 물음에 여러분 모두 진심으로 “예”라고 대답하심으로 주님의 인정을 받는 신앙인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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