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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양심의 증거 (롬 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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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예용범 목사

세계2차대전 중,
한 유대인이 같은 동족들에게서 매를 맞고 있었습니다.
「왜? 나를 때리는가?」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가?」
「나는 가만히 있었다.」

이때 때리던 사람들 중 한 사람이 야단칩니다.
「너의 큰 잘못은 우리 조국이 위태롭고 우리 민족이 고통 중에 있는데 가만히 있었던 것이 죄가 된다.」

1) 잠잠한 이유

왜 가만히 있게 됩니까?
① 잠잘 때
요나는 사명자 였습니다.
그러나 불순종하여 다시스로 가는 배 안에서 잠잤습니다.
이때 풍랑을 만났고 배안의 여러 사람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며 재산의 손실도 가져오게 했습니다.

여기에서 「잠」은
사명을 망각한 것을 일컫습니다.
성도가 사명감이 없으니 주일 인지도 모르고 삽니다.
또 사명은 봉사인데 사명이 잠자니 봉사도 할 줄 몰라 1년 다 되어가도 열매가 없습니다.

성도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동역자들입니다.
「성령과 은사」라는 연장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잠자므로 성령은 침묵하시고 은사는 녹슬었습니다.

잠자는 자! 일어나야 합니다.
잠자는 요나를 향해서 선장이 뭐라고 했습니까?
「잠자는 자여 어찜이뇨? 이러나 네 하나님께 구하라」
불신자가 성도에게 향한 책망이요
세상이 구원에게 향하는 구원의 요청입니다.

② 게으를 때
동남아를 여행해 보면,
공통된 것 하나는  「우상숭배」 이고,
둘은 「다 가난하다」는 것입니다.

땅들은 넓고 풍부한 천연자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가난한가? 했을 때
신앙적으로는 우상숭배요
생활적으로는 「게으른」탓 때문입니다.

달란트 비유를 보면,
주인이 한 달란트 받은 종에게 향한 책망이 있습니다.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이때 「게으른 자」의 형용사인 「오크네로스」는 「무익한」의 의미도 됩니다.
다시 말하면 게으르면 무익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어땠습니까?
이 무익한 종은 결국 바깥 어두운데서 던짐을 당하여 슬피 울며 이를 감이 있었습니다.

교회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게으른 사람이 성경을 보겠습니까?
        기도를 하겠습니까?
        모이는 데 힘쓰겠습니까?

이런 사람일수록 좋은 것 먹고 힘은 남아 돌아서 불평과 원망과 남의 말을 하기 일 수입니다.

  딤전 5:13 “또 저희가 게으름을 익혀 집집에 돌아다니고 게으를 뿐 아니라 망령된 폄론을 하며 일을 만들며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하나니”

게으른 자! 떨쳐 내야 합니다.

③ 병들었을 때
병든 사람에게는 병명이 뭐든 공통된 증상이 있습니다.
◦ 일단 활동이 제한 받고,
◦ 힘을 못 쓰며 무기력하고,
◦ 고통에 시달립니다.

영적인 병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약의 사울 왕은 영적 병에 걸린 사람입니다.
탐욕, 시기, 질투, 증오의 중병에 걸렸던 것입니다.

그의 말과 행동거지와 생각을 보십시오.
온전하고 건장한 데는 한 군데도 없었습니다.
참 유치하고
참 불쌍합니다.

자신을 아버지처럼 존경하는 다윗을 죽이는데 왕의 직위와 권세를 동원했습니다.
결국 자신이 전장에 비참하게 죽고 말았습니다.

사울의 종말!
영적 병든 사람의 종말을 예고합니다.

베데스다 못가에서 38년 된 환자를 향해서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하신 주님의 은혜를 입어야 합니다.

병든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은 언제나 자신이어야 합니다.

④ 죽었을 때
죽었다는 것은 모든 활동이 멈춘 상태를 가리킵니다.
호흡정지, 뇌 활동 중지
그래서 옛 어른들은 이 죽음을 향해서 「밥숟가락 놓았다」고 풍자했던 것입니다.

죽은 자를 보셨습니까?
온기도, 감정도, 미동도 없습니다.
있는 것 이라고는 시간 갈수록 썩는 악취만 날 뿐입니다.

성도라고 하지만 죽은 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육신은 살았으나 영혼이 활동하지 않은 것 죽은 경우입니다.

◦ 하나님에 관하여 감사요 감격이 없다면
◦ 구원에 관하여 관심도 없다면
◦ 영혼에 관하여 성령에 대하여 말씀에 관하여

아무런 반응을 할 수 없다면
이것이 죽은 자입니다.

그러나 소망 있습니다.
「나사로」를 보십시오.
이름 그대로 「나 살아」났던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을 증거하는 증인이 되었습니다.

2) 교회에는

  주님의 몸된 교회에는 무한한 잠재력이 있는 곳입니다.
그럼에도 어떤 사람들이 구성되어 있느냐? 따라
◦ 시끄러운 곳이 되기도 하고
◦ 힘이 없는 곳이 되기도 하고
◦ 악취가 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기하게 교회는 신비하기도 하여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듯
◦ 변하는 역사
◦ 깨는 역사
◦ 일어나는 역사
◦ 살아나는 역사가 있는 곳이기도 하여
가나 잔치 집처럼 큰 기쁨이 있는 곳이 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떤 성도인가요?
우리의 교회는 어떨까요?

3) 큰 관심

이제는 주 안에서 건강하고 살아 있는 모습을 봅시다.

사도바울은 자기 동족이 예수님을 믿지 않고 배척한 것에 대하여 큰 근심과 고통이 되고 있습니다.

이 큰 근심과 고통이 주관적이긴 하지만,
「자기 양심이 증거한다」 고 했습니다.
영적으로 살아 있는 모습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근심과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근심과 고통의 이유가 각기 다릅니다.
다소 이타가 아닌 이기적이고
      세속적이고 물질적이거나
      물량적인 것에서 오는 근심과 고통입니다.

또한 근심과 고통의 정도도 다릅니다.
누구는 하룻밤만 자고 나면 떨쳐 버릴만하고 누구는 몇 날 몇 밤을 설쳐야 될 만큼 큰 근심과 고통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성도로써 자기 양심의 증거될 만한 큰 근심과 고통이 있어야 되는데,

사도바울 같이
복음전파를 위한
영혼구원을 위한
거룩하고 본질적인 근심과 고통이 있어야 됩니다.

이 큰 근심과 고통은
①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이고,
② 내가 사명 있다는 증거이고,
③ 내가 사랑 있다는 증거입니다.

4) 양심의 증거

만약 이 증거가 없다면 「양심의 화인」맞은 자처럼
최소한 거룩한 본질에 있어서는 외인이요 나그네요 죽은 자인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대한 고백입니다.

  고후 2:4 “내가 큰 환난과 애통한 마음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최근 저희 집에 한 손님이 와 계십니다.
딸아이의 반 친구인데,
그 애는 어머니 책망 중에 「나가라」하는 말씀에 그만 집을 나왔습니다.

「나가라」는 어머니나
「나온」딸을 이해할 수는 없어도

저 역시 딸 가진 아버지로써 그 신변이 걱정되어 집에 있게 했습니다.

만약 이러한 사실을 알고도 가만히 있었다면 양심의 증거가 마비된 아비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변을 살펴보십시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
방황하는 사람들,
지옥에 가고자 넓은 길로 가는 사람들,

거기에는 평생 고생만 하던 부모님도 계시고 형제도 있습니다.

여기에 잠잠해야 됩니까?
    침묵해야 됩니까?

여러분의 양심은 무엇이라 증거합니까?

  결 론)

우리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은 우리를 향한 바로 이 양심의 증거가 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지는 고생을 한다하더라도
사도처럼 십자가를 증거하는 근심과 고통이 있다 하더라도
기필코 「내 가족」을 구원하리라는 일념이 있어야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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