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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혼의 치유 (사 58: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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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용호 목사

  우리가 경계하고 있는 이단인 통일교에는 두 가지 큰 행사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합동결혼식이고, 또 하나는 영혼결혼식입니다. 그 사람들은 결혼을 위한 결혼식을 하는 것이 아니라 포교활동으로 다른 목적을 가지고 합동결혼식과 영혼결혼식에 큰 강조점을 두고 있습니다. 합동결혼식도 성경적으로 맞지 않지만 영혼결혼식이라는 것도 성립되지 않습니다. 무속신앙에서도 영혼결혼식을 합니다. 그러나 영혼은 살아 있는 사람이 주관하거나 혼인을 시킬 수 있는 그런 본질이 결코 아닙니다. 영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요, 영혼의 문제는 하나님이 통치하십니다. 그러므로 영혼의 문제는 우리 주 하나님의 말씀으로 치유가 될 뿐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 예배를 통해서만 영혼은 활동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예배시간을 통해서 ‘영혼의 치유’라는 주제로 하나님 말씀을 들으실 때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강력한 영혼의 치유가 일어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영혼의 치유는 인간에게 절실합니다. 사람의 육체가 병들면 병원으로 가서 검사를 하고 치료를 받습니다. 그와 같이 영혼도 병든 영혼이 있고, 건강한 영혼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이 두 가지를 자주 말합니다. 그러므로 영혼이 병들면 육체가 함께 병듭니다. 영혼의 건강과 육신의 건강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 영혼이 치유되는 은총을 함께 입으시기 바랍니다.

  예배가 치유한다

  본문은 영혼의 치유에 대하여 크게 두 가지 주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예배생활을 말합니다. 19절에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여호와께 부르짖는 것, 여호와를 부르는 것은 예배의 중요한 요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부른다는 것은 몇 가지 형식으로 나타납니다. 첫째는 기도하는 일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부르는 일입니다. 그리고 찬양입니다. 우리의 찬양은 하나님을 부르는 일입니다. 그리고 신앙고백입니다. 우리의 신앙고백은 하나님을 부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기도와 찬양과 신앙고백의 형식은 하나님을 부르는 중요한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부를 때 오늘 본문은 “내가 응답하겠고 내가 이르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신이기 때문에 우리가 부르면 응답하십니다. 오늘도 우리의 고백을 통해, 우리의 찬양과 기도를 통해, 우리의 예배를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그 음성을 듣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 심령에 말씀하시는 바를 들으시기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본문은 예배의 중요요소를 말합니다. 10절에 보면 “주린 자에게 내 심정을 토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마음을 만족케 하며”라고 했습니다. 주린 자, 괴로워하는 자, 고통받는 이웃들을 돌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드릴 때 찬양과 기도와 말씀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나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은 그것으로 인하여 받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돌아보는 우리의 삶을 통해서 함께 예배를 받으십시다.

  이사야 1장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형식적 예배를 극렬하게 책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배를 드리러 나올 때 하나님은 제물을 거부했습니다. 내게 제물을 드리지 말라, 내게 나아오지 말라, 내 성전 마당만 밟을 뿐이라고 예배를 거부하신 하나님,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예배를 거부합니까? 네 손에 피가 있기 때문입니다. 피는 양면이 있습니다. 양의 피는 제단에 뿌려 거룩한 피가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 백성의 손에 있는 피는 악을 말합니다. 죄를 말합니다. 네 손에 피가 묻었다는 말은 이웃을 헤친 악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손 검사를 먼저 하시고 예배를 받으십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보시고 오늘의 예배를 받으십니다. 오늘 여기 나와서 근사하게 기도하고, 유창하게 찬송하고, 설교를 유창하게 하는 것이 예배의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웃을 돌 본 우리 손의 의로운 덕을 요구합니다. 우리의 손에 피가 있을 때 우리 예배가 받아지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손 검사를 하시고 예배당에 오셨나요? 오늘 하나님은 우리 예배를 받으시되 손에 피 묻은 것을 함께 검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들이 이웃을 향해서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어떠한 형태든지 남에게 상처를 입히거나 손상을 준 일이 있다면 그것이 피 묻은 손의 행위입니다. 그런 일은 우리가 제자리로 돌려야 합니다. 하루빨리 타인에게 손해를 끼치거나 상처를 준 행위는 제자리로 돌려야 합니다. 그 행위가 고쳐지지 않는 한 우리 손에는 피가 지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 예배적 삶이라는 것을 늘 생각해야 합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너희 몸을 드리라는 것입니다. 몸으로 살아드리는 삶을 산 제사라고 규정한 것입니다.

  주일 공예배가 중요하다

  또 한 가지는 주일성수의 삶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영혼이 치유받는 중요한 일입니다. 13절에 보면 “만일 안식일에 내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치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안식일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구약의 안식일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우리에게 예배일로 주일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백성에게 거룩한 날을 주셨습니다. 안식일은 모든 일을 금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안식일은 제사를 드리는 날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신교의 주일에 대한 의미와 본질은 안식일과 같지만 형식은 전혀 다릅니다. 구약의 안식일처럼 오늘의 주일날을 지킨다면 우리의 예배생활은 현재의 제도가 하나도 성립될 수 없습니다.

  구약의 안식일은 온 종일 제사하는 날입니다. 제물을 준비하고 하나님께 나아와 제사하는 이스라엘의 안식일 예배는 온 종일 드립니다. 오늘날도 정통 유대인들의 안식일 규례는 매우 엄격합니다. 제가 직접 가 본 ‘벧엘의 집’이라는 회당에서는 아침 9시부터 12시까지 안식일 예배를 드립니다. 그리고 식사시간에 한 사람도 집에 가지 않습니다. 오전에 예배드린 사람 그대로 식당으로 가서 식사를 합니다. 그 식사가 또 하나의 중요한 교회의 프로그램입니다. 식사를 마치고 나면 남녀를 구분해서 율법공부를 합니다. 율법 공부하는 시간도 아주 긴 시간입니다. 그래서 안식일 모든 프로그램이 다 마쳐질 때는 오후 5시쯤 됩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안식일은 다른 일을 전혀 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엄격히 금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왜 주일을 지켜야 하는가?’ 이 문제에 대하여 신학적인 논란이 있습니다. 5일제 근무라는 사회변화와 함께 예배가 꼭 주일이어야 하는가? 금요예배도, 토요예배도 성립될 수 있는 것 아닌가? 이런 논쟁이 있지만 결코 주일을 양보할 수 없고 타협할 수 없습니다. 정통 개혁주의 학자들은 반드시 공예배는 주일이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예배의 날로 주일을 정했습니다. 주님이 부활하신 그날은 주께서 새로운 예배의 날을 제정하신 날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정한 예배의 날은 주일이라는 것입니다.

  주일의 개념은 한 주간의 첫 날입니다. 부활은 주님의 생명의 시작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의 믿는 자가 부활함을 보여준 영생의 시작이 바로 부활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정한 예배일, 그리고 생명의 시작이 되는 주일은 그날에 굉장한 강조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미래를 향한 날입니다. 안식일은 엿새 동안 힘써 살고 마무리하는 날이고, 주일은 한 주간의 시작을 하는 첫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일이 은혜롭고, 주일을 통하여 영혼의 치유가 있어야만 한 주간의 신앙생활이 은혜로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이 치유받는 일은 주일이라는 날에 중요한 초점이 있고, 예배라는 사역에 매우 중요한 초점이 있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예배는 세 가지가 주제입니다. 그들은 모여서 구원받은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우리 주 하나님께 받은 은혜에 대해서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승리를 기뻐했습니다. 이것이 초대교회의 예배의 중심입니다. 예배는 그 초점이 현재시간에 있습니다. 예배드리는 이 시간에 영혼의 치유가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예배를 드리고 나서 영혼의 치유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를 드리고 나서 은혜를 다시 받는 것이 아니라 예배드리는 이 시간에 성령의 임하심과 우리의 영혼이 치유받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현재시간이 중요합니다.
  예배학적으로 세 가지를 강조합니다. 예배드리는 현재가 중요합니다. 오늘 예배드리는 이 시간을 놓쳐버리면 다시 재생이 되지 않습니다. 인터넷에서 방송을 다시 보듯이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 예배는 지나가 버리면 놓칩니다. 예배드리는 현재에 말씀의 역사가 있기 때문에 이 말씀의 역사는 현재시간에 경험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배는 대행이 되지 않습니다. 내가 나의 예배를 주께 드리는 것입니다. 남에게 시켜서 대행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예배는 함께 모이는 공적인 장소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예배당이 필요합니다. 아무데서나 예배를 나 홀로 혹은 몇 사람이 드리는 그것도 예배는 예배이지만 교회의 예배는 공적으로 함께 모이는 공동예배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이 세 가지 요소, 현재 드리는 예배, 함께 모이는 예배, 내가 드리는 예배가 예배를 형성하는 요건입니다. 그러므로 현재를 놓쳐버리는 신앙생활은 불가한 것이고 성경은 그런 논리를 금합니다.

  피터 드러커는 기업 진단가입니다. 이 사람이 기업에 대해서 두 가지 말을 했습니다. 첫 번째, 미래를 위해 개혁할 때는 언제나 현재에 초점을 두고 하라. 미래를 위해서 투자하지 말고 현재를 위해서 투자하라. 두 번째는 많은 것을 한꺼번에 이루려 하지 말고 꼭 지금 해야 할 일에 투자하라. 초점을 맞추어서 투자하라는 것입니다. 이 분의 논리는 성경에서 나온 이론입니다. 요즘 보면 무리하게 대출 받아서 투자했다가 경기가 풀리지 않아서 죽을 맛을 겪는 사람이 한 두 사람이 아니라고 합니다. 우리는 내일을 위해서 무모할 정도로 행동을 합니다. 그러나 드러커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오늘이 행복하고, 오늘이 즐겁도록 일하라는 것입니다. 돈을 쓰더라도 오늘이 행복한 투자를 해야 합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에서 굉장히 중요한 것은 오늘이 은혜로워야 합니다. 지금 감사생활을 해야 합니다. 지금 감사와 즐거움으로 충만한 오늘이 형성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많은 것을 한꺼번에 하지 말고 꼭 해야 할 일에 초점을 맞추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정부가, 정치 지도자들이, 한국의 기업인들이 들어야 할 말입니다. 우리는 너무 한꺼번에 무엇을 하려고 하다가 혼선에 빠집니다. 꼭 지금 해야 할 일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여러분들도 지금 내가 하나님 앞에 꼭 해야 할 일을 놓치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 내가 꼭 해야 할 일에 초점을 맞추어서 일을 해야 합니다.

  미국의 최대 백화점인 메이씨 백화점이 한 때 호황을 누렸습니다. 중산층 중하와 서민들에게 초점을 맞추는 백화점입니다. 그런데 부르밍 데일이라는 백화점은 중산층 이상을 겨냥하는 백화점입니다. 매상고는 메이씨가 훨씬 높아갑니다. 경쟁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부르밍 데일은 매상고는 훨씬 떨어지는데 이 백화점을 진단한 기업 진단가가 볼 때 메이씨는 위기라고 했습니다. 매상고가 올라가는데도 그 백화점을 보고 위기라고 합니다. 부르밍 데일을 보고는 정상이고 앞으로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진단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서 그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메이씨 백화점은 기존 상품들이 매상고가 올라가는데 유행용품은 잘 팔리지 않는 백화점입니다. 그런데 부르밍 데일은 새 상품이 잘 팔리는 경기가 살아나고 있었습니다.

  신상품이 좌우한다

  제가 운전을 배운 70년대만 해도 승용차의 70, 80%가 현대의 포니 차였습니다. 제가 운전 면허증을 땄는데 차가 없었습니다. 큰 교회 목사님은 포니를 타고 다니는데 굉장히 부러웠습니다. 그 때는 포니 차만 있어도 자가용이 있다 해서 긍지가 굉장했습니다. 그리고 스텔라가 있었습니다. 스텔라 타고 오면 요즘 그랜져 타고 오는 것 이상으로 품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만일 현대 자동차가 오늘까지도 포니 차를 만들고 스텔라 차를 만들었다면 한국의 자동차 문화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오늘처럼 자동차 기업이 저렇게 흥왕할 수 있을까요? 어림도 없습니다. 계속 신차가 출시됩니다. 요즘은 자동차 회사에서 해마다 신차가 출시됩니다. 그런데 이 신차가 나오면 그대로 또 팔려 나갑니다. 계속 신차가 먹혀 들어가고 팔려 나가기 때문에 오늘의 한국 자동차 산업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도 신상품을 개발해야 합니다. 나는 신앙생활도 이 원리가 그대로 적중한다고 봅니다. 백화점은 신상품이 잘 팔리는 백화점이라야 지속성이 있고, 미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신앙생활에 신상품을 개발하시기 바랍니다. 신앙생활의 신상품이 무엇입니까? 기도를 하지 않는 사람이 기도를 시작하는 것이 신상품 개발입니다. 주일날도 꼭 예배 시간에 맞추어 나오지 말고 평소에 내가 기도생활을 잘 하지 못했는데 주일날이라도 30분전에 나가서 준비기도를 하자, 10분전이라도 마음을 돌아보는 준비기도를 하고 예배를 드리자 하고 안 하던 습관을 하나 하는 것도 신상품입니다. 습관적으로 지각하는 분들이 지각하지 않는 것도 신상품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안 하던 것을 해 보십시오. 선교비를 내지 않는 분들은 한 번 선교비를 내 보십시오. 불우이웃에게 구제금을 내지 않는 분들은 구제금을 매월 내보십시오. 여러분의 삶의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우리가 안 하던 것을 새로 하는 이것이 바로 신앙원리요 기업원리입니다. 기업은 새 상품이 개발되지 않으면 죽어버립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구태의연하게 20년, 30년, 40년 돌아보면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새로 하는 것이 없습니다. 항상 하는 형식은 안 됩니다. 우리 영혼이 새로워지려면 안하던 일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안 하던 봉사를 해 보십시오. 주 앞에 안 하던 선한 일을 해 보십시오. 우리의 신앙생활은 달라집니다. 영혼이 새로워집니다.
  주일성수의 핵심은 세 가지입니다. 주일은 예배하는 날입니다. 주일날 예배 외적인 것을 주축으로 하면 안됩니다. 예배가 우선권입니다. 예배를 위해서 다른 것을 희생하는 날입니다. 다른 것 때문에 예배를 희생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죽습니다. 주일날은 살아계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주일은 예배를 위해 준비하고, 예배를 은혜롭게 드리기 위해서 여러분들이 마음을 모으고, 예배에 여러분의 정성을 쏟아서 예배하시기 바랍니다.

  중국의 삼자교회는 국가가 경영하는 교회입니다. 목사임명도 당에서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배당을 크게 짓지 않습니다. 하얼빈 같은 도시는 인구가 400만명입니다. 제가 그 도시를 방문했을 때 삼자교회가 11개 밖에 없었습니다. 400만명 도시에 예배당이 11개 밖에 없습니다. 교인들은 엄청나게 많습니다. 그래서 한 교회 교인수가 최하 3천명이고 보통 5~6천명입니다. 그래도 예배당을 크게 짓지 않습니다. 5부, 6부 예배를 그대로 드립니다. 그런데 중국교회에서 아주 신기하게 보이는 것은 주일날 결혼식을 아주 많이 합니다. 하도 신기해서 결혼식에도 참석해 보았는데 간단하게 합니다. 결혼식 하는 시간은 30분 걸리는데 결혼식을 하고 하객들은 예배드리러 갑니다. 오후예배이므로 예배 중간시간이 약 1시간 정도 됩니다. 그래서 결혼식에 왔던 사람들이 교인들인데 결혼식 마치고는 예배에 다 참석합니다. 또 일부는 앞 예배를 드리고 결혼식에 참석합니다. 그리고 결혼식에 잔치가 없습니다. 예식만 하고 끝나기 때문에 예배에 전혀 방해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처럼 잔치를 한다면 주일날 예배를 드리지 못합니다. 그런데 중국의 결혼식은 주일에 하지만 예배에 전혀 방해를 주지 않고 하객들도 반드시 주일예배 참석을 합니다. 그와 같은 측면에서 중국교회가 하는 일을 우리가 비판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결혼식을 주일에 하는가? 예배에 전혀 지장을 주지 않고 하는데 중국교회를 우리가 비판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주일은 예배를 먼저 드리고 그 다음에 친교이고 선행입니다. 여러분이 좋은 일 한다고 예배를 드리지 않고 좋은 일 하는 프로그램에만 매이면 안 됩니다. 예배의 의무를 먼저하고 선한 일을 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참된 안식의 날입니다. 여러분이 기독교 용어를 잘 이해하십시오. ‘안식’과 ‘휴식’은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은 휴식하는 것이지 안식이 아닙니다. 안식은 영적인 개념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회복되는 개념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안식일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참된 안식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주일은 우리의 영혼을 회복시켜주는 참된 안식이 있는 날입니다.

  세 번째는 새 창조의 날입니다. 주일마다 우리는 예배당을 새롭게 보아야 합니다. 예배당, 당회원, 목사, 성도 무엇이 새롭습니까? 그러나 영적으로 주일마다 우리가 만나는 하나님은 새로운 하나님으로 만나야 합니다. 우리가 듣는 이 말씀이 지난 주일에도 들었지만 말씀이 오늘 내게 들려질 때는 새 말씀으로 들으시기 바랍니다. 새로운 말씀으로 듣고 새로운 영의 세계를 발견하는 이것이 주일입니다. 새 창조의 날입니다. 여러분은 매 주마다 같은 교인을 만나지만 새로운 성도로 만나기를 바랍니다. 새 창조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치유의 약속

  예배와 주일성수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런 약속을 합니다. 10절에 보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발하며 네 어두움이 낮과 같이 될 것이니” 영혼의 회복을 말합니다. 성도는 영혼이 치유함을 받아야 빛이 나타납니다. 우리의 영혼이 병들어 있으면 성도의 빛을 잃어버립니다. 두 번째 약속은 11절에 “나 여호와가 너를 인도하여 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케 하며 네 뼈를 견고케 하리니 너는 물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물 같을 것이라”주일과 예배가 살아있는 성도에게 영혼을 만족케 하며 네 뼈를 견고케 하십니다. 요즘 관절염, 골다공증이 얼마나 무서운 병입니까? 뼈가 건강해야 합니다. 우리의 영혼도 뼈가 건강해야 합니다. 영혼이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영혼을 만족케 하는 축복이 있겠다고 약속을 하십니다. 세 번째 약속은 14절에 “네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우리 주 하나님이 주시는 즐거움이 영혼의 회복가운데서 나타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최근에 ‘미국의 대통령은 왜 신앙인인가?’ 라는 관찰이 있습니다. 현재 부시는 독실한 크리스찬입니다. 지난 번 클린턴도 독실한 신앙인입니다. 그가 망나니짓을 했지만 4천명의 목사님들 앞에서 자신의 스캔들에 대해서 공개적인 회개를 했습니다. 미국의 대통령은 대부분이 독실한 크리스찬입니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미국은 과학적 통계사회입니다. 미국만큼 통계가 많은 나라가 없고, 미국만큼 통계에 의해 여론이 움직이는 나라가 없습니다. 그만큼 미국은 통계를 중요시 하고 여론을 중요시합니다. 전통적인 여론 가운데 모든 면에서 크리스찬들이 우월하다는 것입니다. 자살률, 이혼율, 마약, 폭력배 등 미국사회에서 가장 골치 아픈 흉악한 범죄와 미국사회를 망가뜨리는 이런 나쁜 면에는 크리스찬들이 해당되는 비율이 아주 낮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살이 많아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자살률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과학자, 정치가, 학자, 교수, 기업인, 훌륭한 자성가들은 성도들의 비율이 월등히 높다는 것입니다. 미국사회의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보면 큰 일을 하고 좋은 일 하는 사람들은 월등히 비율이 높고, 아주 나쁜 일에는 월등히 비율이 낮다는 것입니다. 이 통계는 과학적으로 그대로 나온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표본모델도 나옵니다. 조나단 에드워드 같은 자손들을 조사한 표본도 미국에서는 잘 알려진 통계입니다. 이와 같이 미국사회의 통치자는 크리스찬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미국사회를 지탱하는 청교도 정신이 그렇게 깔려 있다는 것입니다. 영혼이 건강한 그리스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혼이 병들면 이 땅위에서 못할 짓이 없는 범죄자가 됩니다. 영혼이 건강한 사람은 죄를 이깁니다. 영혼이 건강한 사람은 선한 일에 헌신할 수밖에 없습니다. 영혼이 건강한 나라, 영혼이 건강한 교회가 중요합니다. 환자가 병원에 가면 의사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합니다. 치료 받다가 목이 말라서 물 한 모금 먹고 검사 받겠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중요한 검사를 받고 있는 환자는 물을 마시면 안 됩니다. 진찰 받다가 “선생님, 제가 오늘 오후에 친구 결혼식에 가야 하는데 갔다 와서 치료받겠습니다” 라는 말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병원에 갔으면 집안 일 다 잊고, 사업하던 것 다 잊고, 전적으로 의사에게 몸을 맡기고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예배를 드리러 왔습니다. 주일은 영혼을 치유하는 날입니다. 예배는 영혼이 회복하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주일날 예배를 드리면서도 왜 우리 생각과 감정은 육신의 것에 매여 있습니까? 육신의 것을 다 놓으십시오. 잊어버리십시오. 예배를 드리는 이 시간은 여호와만 부르는 시간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내게 응답하는 시간입니다. 그 분을 만나야 하고 그 분 안에 치유가 있어야 합니다.

  맺는 말

  우리의 영혼이 치유함을 받는 이 시간에 왜 육신의 문제를 자꾸 붙잡고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이것은 의사 앞에 가서 사적인 사정에 따라 치료 받겠다는 것과 똑같은 이치입니다. 여러분이 적어도 주일을 기억하고 예배를 드리러 나왔다면 육신의 것을 다 잊으시기 바랍니다. 이 시간에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일어나도록, 우리의 영혼이 회복을 받도록 육의 것을 끊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배드리는 우리의 심성을 보면 육의 것에 여전히 잡혀 있습니다. 포로가 되어 있습니다. 육의 것이 지금도 우리를 끌고 가고 있습니다. 영혼의 치유는 무엇보다 우선적인 하나님 백성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은혜는 육신의 문제해결이 아니라 영혼의 치유입니다. 여기서 성도들의 아름다운 삶, 기쁨의 삶, 감사의 삶, 승리의 삶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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