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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요셉을 본받아 양육합시다 (창 45: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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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강성찬 목사

요셉은 야곱의 11번째 아들로 야곱이 가장 사랑하며 아끼던 라헬의 장남입니다. 야곱은 라헬을 끔찍이 사랑한 만큼 그의 아들인 요셉에게도 특별한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어려서부터 채색 옷을 입는 등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하였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한 번은 들에서 곡식 단을 묶는데 형들의 단이 요셉의 단에게 절을 하는 꿈을 꾸었고,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요셉에게 절을 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이런 꿈 얘기를 들은 형들은 어떻게 우리가 너에게 절을 하게 될까보냐 하며 동생을 시기하며 더욱 미워하게 되었고 언젠가 기회가 되면 죽이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결국은 우물에 넣었다가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팔려 애굽 사람 보디발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요셉은 형들로 인한 마음의 깊은 상처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일을 하여 보디발 집에서 제일 높은 지위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보디발 아내의 유혹을 거절한 대가로 누명을 쓰고 옥에 갇혔습니다. 그런데 옥에서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의 꿈을 해몽한 것이 인연이 되어 요셉은 애굽의 왕 바로의 꿈을 해석해 주게 되었고, 결국은 애굽의 총리 대신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 후 요셉은 가나안에 기근이 들어 애굽으로 곡식을 사러 온 가족들과 상봉을 하게 됩니다.

양식을 사러 온 형제들과 요셉은 약 이십 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되지만, 형들은 알아보지 못하고 요셉만 이들을 알아보고 형제들을 시험하게 됩니다. 그 후 가나안으로 돌아온 형들은 애굽에서의 일들에 대해 야곱에게 보고한 후 자신들의 양곡 자루에 돈 뭉치가 있음을 보고 두려워합니다. 기근이 더욱 심해지고 애굽에서 가져 온 양식이 다 떨어진 형제들은 야곱에게 간곡히 사정하고 유다가 자기의 목숨으로 책임지겠다고 함으로 간신히 베냐민을 데리고 양식을 구하기 위하여 다시 애굽으로 갑니다. 형제들을 다시 만난 요셉은 반가워하며 그들을 환대하고 야곱의 안부를 묻다가 동생 베냐민을 보고 감격에 겨워 혼자 통곡하고 맙니다. 이는 베냐민이 모친 라헬에게서 난 유일한 혈육이며 막내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마음을 진정시키고 형제들 앞에 나타난 요셉이 그들을 나이 순서대로 앉히자 형제들은 서로 이상히 여기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들은 요셉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형제들과의 모든 은원 관계를 풀기 위한 요셉의 마지막 시험이 합니다. 요셉은 이 마지막 시험을 통해 형제들 간의 우애를 확인하고자 합니다. 요셉은 돌아가는 형제들의 자루에 돈을 넣어, 특히 베냐민의 자루에 은잔을 넣어 보낸 후, 도둑으로 몰린 베냐민을 억류시키려 합니다. 이때 유다가 나서 베냐민과 베냐민을 잃은 후 얻게 될 아버지의 슬픔을 대신하여 자신이 종이 되겠노라고 나섭니다. 유다의 간곡한 호소와 자기를 희생시키려는 그의 탄원은 더 이상 요셉의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요셉은 유다를 통해 그의 형제들이 회개하고 있음을 확인하였고 뿐만 아니라 아버지 야곱과 동생 베냐민에 대한 사랑이 순수하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이제 그는 드디어 형제들에게 자신이 바로 요셉임을 밝혔습니다. 자신들의 과거에 대해 분명히 반성하는 증거를 찾았고 또 인간적인 우애가 더 이상 그를 자제시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자신의 정체를 형제들에게 밝혔을 때 형들은 놀라 말조차 못했습니다. 그들은 돈 몇 푼에 미디안 인에게 팔려 갔던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더욱 놀란 것은 그들이 죄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범죄 심리학에 의하면 범죄인들의 공통적인 현상은 극도의 불안감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지은 죄에 대한 벌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요셉은 침착하게 형제들이 겁에 질린 것을 감안하여 책망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들을 안정시키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요셉은 형제들에게 자신의 우애를 나타내고 싶어 자기에게 가까이 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요셉은 자신이 형들에 의해 애굽으로 팔린 것은 먼 미래까지 내다보며 역사하신 하나님의 섭리임을 밝히면서 그들의 허물을 감추고자 했습니다. 또한 요셉은 그의 형제들을 재촉하여 속히 아버지가 계신 고향으로 가서 그의 가족들을 데리고 오도록 부탁했습니다. 그는 기근으로 고생하고 있을 아버지를 걱정하며 지체 말고 속히 모셔 오라고 합니다. 아버지의 아들들과 아버지의 손자들과 아버지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가 고센 땅에 있어서 나와 가깝게 하소서 흉년이 아직 다섯 해가 있으니 내가 거기서 아버지를 봉양하리이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가속과 아버지의 모든 소속이 결핍할까 하나이다 하더라 하소서 하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신실했던 요셉은 인간의 도리도 다하여 양육의 사명을 감당하고자 합니다.

교육하고 선교하며 봉사하는 교회가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 하되 요셉을 본받아 양육하는 달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의 은혜를 깨닫고 위로하며

  요셉은 자신이 형들에 의해 애굽으로 팔린 것은 먼 미래까지 내다보며 역사하신 하나님의 섭리임을 밝히면서 (창 45:5,7-8)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 고 합니다.

  요셉은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도움의 손길로 임합니다.

인도의 사도 바울이라 할 수 있는 썬다싱은 티벳 고원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라자 마을에서 복음을 전할 때 그 날 놀라운 체험을 하였습니다. 불교의 우두머리 대 라마승이 썬다싱이 복음을 전했다는 이유로 체포하여 사형선고를 내렸습니다. 썬다싱은 물이 없는 깊은 우물에 던져 졌습니다. 그는 수많은 해골과 썩은 악취가 나는 우물 속에서 삼일 밤낮을 고통가운데 기도하였다. 그가 만지는 곳마다 썩어 가는 살뿐이었습니다. 삼일 째 되는 날 밤 그가 기도하고 있을 때 갑자기 우물 뚜껑의 열쇠를 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놀랍게도 뚜껑이 젖혀지더니 잠시 후 끈이 내려와 얼굴에 닿았습니다. 그가 끈을 잡았을 때 서서히 들려 올라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썬다싱을 구해준 사람은 뚜껑을 닫고 열쇠를 채운 뒤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찬양하였으며 그 다음날부터 다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에 대 라마승이 다시 그를 체포하였고 누가 그 열쇠를 훔쳐 그를 석방시켰는지를 알아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열쇠는 대 라마승의 허리에 매여 있었기에 도무지 이해 할 수 없는 일이므로 그는 수도사들에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 이 사람을 추방하라. 다시는 이곳 라자 마을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하라"

이 어찌 친히 택하신 자들을 보호하시려고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범죄 하면 파멸에 이르기도 합니다.

알베르트 카뮈의 작품인 오해라는 책에 유럽의 한 외딴 들판에 여관을 짓고 생활하는 모녀가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이곳에서 어렸을 때 집을 떠난 아들을 기다렸습니다. 가난과 고독에 시달린 모녀는 어느 날부터 이상한 범죄를 저지르기 시작했습니다. 부유하게 보이는 남자 손님에게 독약을 먹여 살해한 후 금품을 빼앗고 시체를 강물에 던져버렸습니다. 어느 날,말쑥한 차림의 한 청년이 여관을 찾았고 모녀는 청년에게 독약을 먹인 후 강물에 던졌습니다. 여인은 지갑에서 돈을 꺼내다가 피살자의 신분증을 보고 절규했습니다. 그는 바로 자신이 지금까지 기다려온 아들이었습니다. 여인은 아들을 던져버린 강물에 뛰어들고 오빠를 죽인 여동생은 “범죄는 결국 무서운 고독일 뿐”이라고 외치며 자살했습니다. 청년은 고향을 떠난 후 크게 성공해 어머니와 여동생을 만나러 귀향하던 길이었던 것입니다. 돌아오지 않는 자식에 대한 원망이 미움을 낳고 이것이 남을 죽이고 자식을 죽이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돌아오지 않는 자식과 자신의 욕구가 채워지지 않는 분노가 낳은 비극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으면 아름다운 열매를 맺습니다.

중학교 때 축구공에 맞아 양쪽 눈이 실명된 소년이 그 시각장애를 극복하고 노력하던 중, 1972년 장애인 유학생 1호로 미국에 건너가 피츠버그 대학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 후 일리노이대 교수, 유엔 세계장애위원회 부의장을 역임하며 루즈벨트 장애인상을 받는 등 왕성한 활동을 펴고 있습니다. 이 분이 강영우(57)박사입니다. 이분이 지은 <아버지와 아들의 꿈>이라는 책이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이 분에게는 두 아들이 있는데 각각 법학과 의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두 아들은 아버지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아버지가 저희를 행복의 길로 이끌어 주셨어요. 잠들 무렵 점자책을 더듬으며 읽어주신 동화속으로 우리는 상상의 나래를 폈고, 꿈도 영글어 갔지요. 아버지는 진정 우리들의 영웅입니다." 강영우 박사는 그 엄청난 시련을 이겨냈을 뿐 아니라 자녀들에게도 훌륭한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그 는 이러게 말하였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시련이 있더라도 신앙으로 이기지 못할 것은 없다." 그는 좌절할만한 고난과 시련을 성숙과 성장의 기회로 삼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은 요셉은 원망과 불평대신 양육의 사명을 감당하겠다고 합니다. 우리도 요셉처럼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으며 양육 합시다.


  용서하며

  용서는 쉬운 것은 아닙니다.

폴란드 아우슈비츠에서는 아우슈비츠 해방 50주년을 맞아 〈죽음의 행진〉을 재현함으로써,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유대인들이 가스실로 끌려가던, 그 때의 그 고통스러운 과거를 되새기는 행사가 있었습니다. 이 행사에 참석한 유대인들은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 유태 어린이들을 학살한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마소서. 이곳을 만든 자들에 대해서도 자비를 베풀지 마시고, 이곳에서 학살을 저지른 자들을 용서치 마소서.」

손톱만큼의 예외가 전혀 없이 유대인들을 무조건 가스실로 집어넣어 죽이는 가운데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그들로서는, 그러한 기도를 올리고도 남음이 있는 일입니다. 고통스러운 과거가 50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리기에 그들은,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여, 제발 유대인 학살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말아달라」고 절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무슨 잘못이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유대 민족이라는 이유로 죽임을 당해야 했으니, 그 억울함과 분통스러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특히 어린이들까지 모조리 무자비하게 학살을 했다고 하니, 그 비정함과 잔인함은 극에 달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들은 이러하기에 그렇다 하나 가족도 용서하기가 힘듭니다.




어떤 부인이 자기 집 화장실에 세수 비누를 사다 두는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남편이 목욕을 하다 보니까 비누가 없어요. 화가 나서 한 마디 했습니다. "내가 비누 없이 목욕한 지 일주일이 넘었어." 그러자 부인이 발끈합니다. "뭐요? 일주일이나 되었다고?" 그래서 이 부부는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7개월 동안 그 부부는 방을 따로 쓰고, 세 끼 밥 먹을 때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노벨상 수상작가인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즈(Gabriel Garcia Marquez)' 교수가 쓴 <콜레라 시대의 사랑>이란 책의 내용입니다.  어떻게 비누 한 장 때문에 7개월 동안 그럴 수가 있을까? 대답은 이렇습니다. "미안해요. 용서하세요." 이 말을 아무도 먼저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합니다. 그래서 용서를 통하여 받는 치유 받는 최초의 사람은 바로 용서하는 자 자신이라고 합니다.




  용서는 변화와 자유를 줍니다.

간디의 자서전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그가 15살 때 형의 금을 훔쳤습니다. 그는 죄 책에 많이 아파하다가 결국 아버지에게 그 사실을 다 털어놓고 용서를 빌기로 결심했습니다. 아버지는 그 때 몸이 많이 아프셔서 몸져 누어 계실 때였습니다. 그래서 먼저 자기의 잘못을 글로 적어서 아버지께 보여 드리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종이 위에 잘못을 고백하고 벌을 달게 받겠다고 썼습니다. 그리고는 다시는 남의 것을 훔치지 않겠다고 서약했습니다. 그는 두려워 떨면서 그 종이쪽지를, 누워 앓고 계신 아버지에게 갖다 드렸습니다. 아버지는 아픈 몸을 억지로 일으키시더니 그 편지 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시더니 그의 볼에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드디어 그 눈물이 그 종이쪽지를 적시었습니다. 한동안 눈을 감으셨다가 그 종이쪽지를 한 마디 말씀도 없이 찢어버렸습니다. 이 때 간디는 참회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간디는 그 사건을 다음과 같이 끝맺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의 눈물방울이 나의 마음을 정결하게 씻겼고 나의 죄를 지워버렸습니다." 아버지의 용서가 간디를 새 사람으로 출발 시켰습니다. 진정한 용서는 죄지은 자를 변화시킵니다. 용서는 나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죄를 지은 상대방을 자유하게 만듭니다.

요셉은 용서하며 양육합니다. 우리도 용서하며 양육합니다.




  사랑하며

원숭이 실험결과 이야기입니다. 원숭이를 철판이 깔린 우리에 집어넣고 그 철판에 전기를 통하게 했습니다.  죽을 정도는 아니지만 상당히 고통을 받을만한 전류가 흐릅니다. 어미 원숭이와 애기 원숭이를 한 우리에 넣고 전기를 통하게 하면 처음엔 둘이 껑충깡충 점프를 하다가 어미원숭이가 얼른 애기 원숭이를 머리위에 이고 점프를 한답니다. 다음은 같은 우리에 아비 원숭이와 애기원숭이를 넣고 전기를 통하게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이들도 저마다 껑충, 깡충, 비명을 꽥꽥지르며 뛰더니 애비원숭이가 얼른 새끼원숭이를 우악스럽게 끌어다 발밑에 깔더니 냉큼 새끼원숭이 위로 올라타더랍니다.

6.25 사변 때의 실화라 합니다. 길을 메우고 피난 가던 피난민 행렬에 갑자기 적기가 나타나 기총소사를 받았습니다. 등에 메고, 머리에 이고, 포장 안 된 도로의 먼지 속을 땀이 비 오듯 흘리며 허기와 갈증에 걷던 그 피난길이 갑자기아수라장이 되고 맙니다. 여기저기 고함과 울부짖음과 신음소리와 아이를 엎고 가다가 길바닥에 무참하게 쓸어 진 엄마들이 많은데 정말 신기한 것은 애를 등에 업은 체 쓰러진 엄마는 단 한사람도 없더라는 사실입니다. 하나같이 아기를 돌려서 품에 안고 엎어져 있는데 엄마는 죽고 아이는 살아있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사랑은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옷을 디자인해서 만드는 어느 자매님이 남편과 전혀 싸울만한 이유도 못되는 사소한 일로 심한 언쟁을 하고는 직장으로 출근을 했습니다. 마음이 편할 리가 있습니까? 하루 종일 마음속으로 남편과 싸운, 언쟁이 생각나 우울합니다. 남편이 했던 말들, 그리고 그가 했던 말들 그리고 두 사람 사이 도저히 조화를 이루지 못할 것 같은 의견과 개성에 대해 생각하니 앞이 깜깜합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 항의를 합니다. "하나님, 우리는 왜 이렇게 달라야 합니까? 결혼을 통하여 우리 두 사람은 하나가 될 것이라고 당신은 약속하시지 않으셨던가요?" 그리고는 옷을 만들려고 테이블 위에 있는 옷감을 잘랐습니다. 양팔을 만들 차례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 순간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주의를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만 두 쪽 모두 똑같이 만들고 말았던 것입니다. 왼쪽 팔만을 디자인해서 잘랐던 것입니다. 그것으로는 도저히 옷이 만들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두 개의 똑같은 왼쪽 팔 조각으로는 아무것도 만들지 못한 것입니다. 그제서야 그녀는 뭔가 언 듯 스쳐가는 영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렇구나 아마 똑같은 두 사람도 역시 그럴 것이다. 만일 내가 우리의 결혼이 하나님의 디자인임을 발견하게 되었다면, 그것은 어쩌면 우리의 차이점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을까? 그것은 어쩌면 조끼의 두 조각처럼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길이 아니었을까?"라는 마음에 느낌이 들더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녀는 그 즉시 남편에게 전화하여 자기가 깨달은 이야기를 전했고 두 사람은 그날 저녁 외식을 하면서 화해를 했답니다. 그리고 서로 다른 부분이 많지만 두 사람을 만나게 해주신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에 감사를 했답니다.




  신앙 안에서 진정한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각계에 탄원서를 내어 두 아들을 죽인 안재선이 석방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그를 양아들로 삼았습니다. 안재선은 그 사랑에 감화되어 예수님을 믿고 신학 공부를 하게 됩니다. 하지만 목사님은 그 무렵을 이렇게 회상하였습니다.

"사랑하는 두 아들이 앉았던 그 밥상에 아들들을 죽인 원수를 앉히고 아침밥을 먹을 때, 밥알이 아니라 모래알을 씹는 듯 했다. 시간이 한참이나 지나서야 마음이 누그러졌다."고 말입니다.

솔직한 인간적 고뇌를 표현한 것입니다.

한편 어떤 사람이 그 모든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수 순천에서 반란사건이 났다기에 얼굴을 찌푸리고 놀랐고, 순진한 두 학생이 죽었다기에 큰 슬픔으로 놀랐고, 그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용서하여 자기 아들로 삼았다기에 의심을 하며 놀랐고, 그가 진실한 크리스챤이 되었다기에 무릎을 치며 놀랐다."

과연 사랑이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고, 또한 아름다운 일입니다. 사랑하는 자신과, 사랑받는 당사자와, 그리고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 이 모두를 구원으로 안내하는 귀한 일입니다.

요셉은 사랑으로 양육하겠다고 합니다. 우리도 사랑하며 양육 합시다.

요셉은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용서와 사랑의 정신으로 부모와 가족들을 양육 하겠다고 합니다. 우리도 요셉을 본받아 양육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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