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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교개혁주일] 날마다 일어나야 할 신앙갱신운동 (벧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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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임경택 목사

오늘은 487주년 종교개혁주일입니다.
개신교(Protestant)는 ‘반항하는 사람’, ‘저항하는 세력’을 의미합니다.
그들이 벌인 개혁(reformation)은 느슨해지고 일그러진 것을 원래의 완전한 모습으로 '회복'시키는 운동이었습니다. 마틴 루터를 비롯한 개혁자들은 교파나 교단을 만들 의사로 개혁을 일으킨 사람들이 아닙니다.
개혁이라는 말과 혁명이라는 말은 좀 다릅니다. 혁명이란 이미 있던 질서나 기존 이념을 근본적으로 뒤집는 것을 혁명이라 하며, 개혁이란 기존 이념을 그대로 놓아두고 변질되어 가는 제도나 질서를 본래 이념대로 다시 돌이키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본래 기독교는 성경에 의해서 시작되었고, 이것을 알고 그대로 믿고 그대로 사는 것입니다. 성경대로의 믿음은, 인간은 죄인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을 믿고 의롭다 함을 받아서 구원을 얻는 것이 복음입니다.
종교개혁의 기본원리는 복음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신학 자 칼 바르트는 “종교와 복음과는 확실히 구별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종교는 인간의 요구에 의해서 출발해 왔고, 복음은 하나님의 요구에서부터 출발했습니다. 복음은 사상과 철학이 아닙니다.
복음은 종교 이상입니다. 복음은 제도나 권위도 아닙니다. 복음은 곧 구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복음입니다. 마틴 루터가 외친 것은 종교를 새로 고칠려는 것이 아니라 복음에서 변질되어 가는 것을 다시 되 돌려 좋을려는 시도였습니다.

구원의 길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행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라고 했습니다. 기독교는 구원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 세상은 얼마나 변질되어 가고 있습니까? 세계적인 추세가 그렇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구원의 복음입니다. 구원얻는 그 길과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중세기에는 근본적으로 변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인위적으로 해석해서 교황의 권위로 바꾸었습니다. 돈으로 속죄권을 사고 돈으로 이미 죽은 사람 몫까지도 . .

종교개혁은 복음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개혁이란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것이라면 전통과 인습으로 굳어져 있어서 거대한 흐름을 타고 있을 지라도 과감하게 철폐하는 것입니다.
개신교는 개혁하는 교회입니다. 만일 우리가 개신교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개혁을 포기한다면 부패하였던 중세기 교회와 다름이 없습니다. 이 지상의 어느 곳에도 완전한 교회는 없고 완전한 신앙인도 없습니다. 완전을 지향하고 끊임없이 온전한 삶을 살아가고자 애쓰는 교회와 성도가 있을 때 그들을 가리켜 개신교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중세기 로마 가톨릭교회는 근본 복음에서 멀리 떠나 교황의 절대무오설, 성직자의 특권, 교회전통, 공적과 선행을 구원의 조건으로 내세우게 되었습니다. 로마 교황 레오 10세가 베드로 성당을 건축하면서 돈이 부족하여 속죄표를 팔았습니다. 신부 앞에 가서 이 티켓을 사면 죄가 면제된다는 것입니다.
내 부모나 형제가 예수를 믿지 않고 죽었기 때문에 ‘연옥’이라고 하는 지옥대합실에 가 있는데 그 죽은 사람을 위해서 속죄표를 사주면 지옥대합실에서 천당으로 옮겨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1517년 9월경 면죄부 판매에 오랜 경험과 수단돠 능숙한 구변을 갖춘 테첼(Tetzel 1465-1516)이란 사람이 외칩니다. “독일 사람들아 똑똑히 보라 나는 교황의 사신이다. 즐거워 하라! 나는 속죄증서를 1900장이나 가지고 왔다. 부모든지 어린아이든지 남녀 누구를 막론하고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너희들의 넣는 돈이 이 궤짝에 들어갈 때 딸랑 소리가 나자 마자 불쌍한 연옥에서부터 해방되어 뛰쳐 나오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당시의 부패의 상징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런 변질된 모습을 본 독일의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1517년 10월31일 비텐베르그 교회 정문에 95개 조항의 성경에서 이탈한 내용을 내걸고 면죄부 판매를 비난하며 종교개혁을 일으킨 것입니다.

루터는 당시 교황권의 쇠퇴, 교회의 타락, 하나님의 말씀과는 전혀 상관이 없이 전통과 관습으로 일관된 카톨릭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신앙 개혁 운동을 일으킨 날입니다. 루터는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일반인들도 쉽게 성경을 읽도록 하였습니다.
이 종교개혁은 단 한번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단 마귀는 인간의 마음을 유혹하고 변질시키고 교회를 변질시킵니다. 그래서 끊임없는 개혁이 우리 속에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보면 종교개혁이 끊임없이 계속됩니다.

1) 아사의 종교개혁
열왕기상 15장에 보면 아사의 종교개혁이 나옵니다. 솔로몬, 르호보암, 아비야에 이르기까지 우상숭배가 유다 땅에 들어와 하나님도 섬기면서 적당히 우상을 섬기는 것이 이미 유다의 전통이 되어 버렸습니다. 아사가 전통과 맞서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아사 왕은 그의 조모를 태후의 위에서 폐위시키는 싸움까지 하면서 개혁을 일으켰습니다. 아사는 그 조상 다윗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남색하는 자를 그 땅에서 쫓아내고 그 열조의 지은 모든 우상을 없이 했습니다.
아사 왕은 그 개혁의 대상에 있어서 그 누구도 제외될 수 없이 공의롭게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2) 여호사밧의 종교개혁
역대하 19장에 보면 여호사밧의 종교개혁이 나옵니다. 여호사밧이 1차, 2차에 걸쳐서 나라를 개혁하고 종교를 개혁하며 사법기구를 개혁하므로 나라의 평화와 번영이 있었습니다.

3) 요시야의 종교개혁
왕하22장에 보면 요시야의 종교개혁이 나옵니다. 그는 그의 일생을 통하여 끊임없이 개 개혁하며 살았습니다. 요시야가 종교개혁을 일으키기 전 이스라엘 나라는 극도로 타락을 했습니다. 나라와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대로 실천하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 바알신과 아세라 신과 하늘의 별들의 우상을 만들어 놓고 섬기는 타락한 민족이 되었습니다. 곳곳에 우상 산당을 만들었습니다. 또 몰록이라는 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자기 아들을 불로 태워 죽이는 일까지 했습니다.
그 때 성전을 수리하던 중 대제사장 힐기야가 율법책을 발견하여 서기관 사반이 요시야에게 그 율법책을 읽어줍니다. 왕이 그 율법책의 말씀을 듣고는 애통해 하며 자기의 옷을 찢고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왕하22:11). 요시야는 모든 백성들을 불러모으고 하나님의 말씀을 낭독하게 하였습니다. 그 때 모든 백성들은 그 언약을 따르기로 결심하며 나라가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4) 에스라의 종교개혁
에스라 10장에 보면 에스라의 종교개혁이 나옵니다. 에스라는 제사장이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페르시아 왕으로부터 권세도 위임받은 신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 같은 신분의 소유자로서 고향에 돌아 왔지만 백성들은 그에 대하여 배타적이었을 것이고 율법을 가르치려고 했지만 적극적으로 호응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에스라는 모든 백성들을 하나님의 성전 앞 광장에 모이게 하고 백성들의 죄상을 통렬히 지적한 다음 그 죄들을 추호의 변명도 없이 자복케 만들었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은 “당신의 말씀대로 우리가 마땅히 행할 것이니이다”라고 회개하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5) 느헤미야의 종교개혁
느헤미야는 페르시야 제국에서 귀국하여 영적으로 타락한 이스라엘을 갱신하기 위하여 하나님 말씀을 낭독하는 일부터 시작했습니다.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6) 예수님의 종교개혁
예수님은 외식하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을 향해서 회칠한 무덤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1장에는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셨을 때 성전안에는 매매하는 자들과 돈 바꾸는 자들로 붐비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상과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성전을 청결케 하심으로 종교개혁의 본을 보였습니다.
기독교역사에도 종교개혁은 루터 뿐만 아니라 많은 개혁들이 있었습니다.

종교개혁의 샛별이라고 불리우는 영국의 종교개혁자 위클리프(Wiclif) . . .
보헤미야의 신학자 요한 후스의 종교개혁 . . .후스가 1415년 가톨릭의 대표자 회의인 콘스탄스회의의 결정에 의해 화형에 처해지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작은 새 한 마리를 죽이고 있다. 그러나 100년 후에는 한 마리의 큰 황새가 나타날 것이고 그때는 여러분이 그 황새를 죽일 수 없을 것이다”우연의 일치일지 몰라도 속죄부 판매를 반대하다 화형에 처해진 후스가 죽은지 102년 만에 루터의 종교개혁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을 시작으로 유럽 전역에는 개혁의 물결이 쏟아져 나왔다.
스위스 쮜리히의 쯔빙글리(Huldreich Zwingli, 1484-1531)의 종교개혁이 있었습니다. 그는 로마교회는 성경에 기초한 종교가 아니라 부패한 인간 심성을 따라 생겨난 종교이며, 비성경적이고 비윤리적인 종교라고 비판하고 교회는 평신도와 성직자라는 계급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왕이신 그리스도 밑에서 평등한 관계를 유지하는 성도들의 모임이라고 참 교회 회복을 위해서 외쳤습니다.

죤 칼빈(John Calvin, 1509-1564, 스위스 제네바)의 종교개혁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저술, 주석을 통해 개혁운동을 일으킨 개혁자입니다.

죤 낙스(John Knox, 1515?-1572)의 종교개혁이 있었습니다. 그는 스코틀랜드의 개혁자로서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독려하였고 개혁운동을 위해 진력하고 칼빈의 교리를 받아들여 장로교회의 초석을 놓았습니다.

개혁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개혁이라는 말을 너무나 쉽게 사용합니다. 그러나 그 개혁이 실효를 거두기 위해서는 그릇된 것을 과감하게 버려야 합니다. 개혁은 이론이나 말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개혁과 갱신의 이론적이고 사변적인 것은 이제 더 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신앙생활과 인생관이 변해야 합니다. 교회의 구조적 개혁이 필요합니다.
오늘의 종교개혁은 먼저 자기개혁부터 일어나야 합니다. 기도하는 만큼 바른 생활을 하는 훈련과 모범이 절실히 요구되는 때입니다.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모두 새로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래 다녔다고 해서 신앙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타성이 붙고 요령만 생겨서 하나님 앞에 형식적인 믿음이 되어 버릴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불신자들과 비교할 때 하나님 앞에 얼마나 바른 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천하는 행함의 생활로 변화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들은 봉사니 헌신이니 하는 말들을 잘 합니다. 그러나 과연 주님을 위해서 얼마나 헌신하고 얼마나 봉사하고 있습니까?
나의 의지나 노력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으로만 되는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슥4:6)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름 받고 제자가 되었습니다만 처음부터 능력있는 삶을 산것이 아닙니다. 성령 받고난 다음부터 달라졌습니다. 바울도 성령받고 . .

1. 버릴 것은 버려야 합니다.

본문에서 버릴 것과 취할 것은 무엇이 있을 까요?
2:1-2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 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첫째는 모든 악독입니다. 이 말씀의 뜻은 다른 사람을 해치려고 하는 모든 악한 생각과 행동을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없는 자의 태도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이 믿는자에게 남아 있다면 이런 악독을 버려야 합니다. 기독교는 자기희생의 종교입니다. 오른 뺨을 때리면 왼뺨도 돌려대는 종교입니다. 먼저 우리자신의 마음의 독초를 뽑아야 하겠습니다.

둘째는 궤휼입니다. 이 말은 자기 유익을 위해서 남을 속이는 모든 잔꾀를 말합니다. 자기에게 유익만 된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하는 것은 간사한 지혜인 것입니다. 버려야 합니다.

셋째는 외식입니다. '외식'이라는 본래 말은 무대 위의 배우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두 얼굴을 가지고 살아가는 모습을 말합니다. 속고 같이 다른 것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실 때에 회칠한 무덤이라고 . .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는 원인들도 여기에 있습니다.

넷째로 시기하는 마음입니다. 시기는 남이 잘되는 것을 배아파하는 마음입니다. 타인의 행복을 원치 아니하는 악심입니다. 시기하는 마음은 그 사람을 저질 인간으로 만들어 버리며, 다른 사람과의 교제를 모두 단절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기의 잡초도 뽑아야 합니다.

다섯째로 비방하는 말입니다. 이는 다른 사람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악담을 말합니다.
이것 또한 버려야 합니다. 종교개혁은 버리는데서부터 시작됩니다. 회개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말만 뻔지르하게 잘하면 뭐합니까? 그 속에 있는 악한 마음을 버리지 않고서 새 것을 담은들 깨끗하겠습니까?
그 다음에는 우리가 해야 할 것들은 무엇이겠습니까?

2.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종교개혁의 핵심입니다. 오늘은 말씀의 홍수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변화된 삶이 없는 것이 오늘 우리의 문제입니다. 말씀이 우리의 가슴에 화살처럼 박히는 갱신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말씀에 바로 서 있어야 합니다. 말씀이 우리를 힘있게 합니다. 루터가 95개 조항을 내 걸었을 때 1521년 보름스 회의는 루터에게 그 글들을 없앨 것과 95개 조항을 철회하도록 요구했습니다. 만일 따르지 않으면 화형에 처하겠다고 위협했습니다. 그때 루터는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성경에 어긋나지아니한 어떤 것도 철회할 수 없습니다. ” 그리고 그의 외마디 기도가 있었습니다. “ 오 하나님, 나 여기 서 있습니다.”

요즘 만성피로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오늘처럼 피곤하고 지치는 이유가 우리의 힘이 되는 말씀이 고갈 되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먹으십시오. 매일의 영양소 하나님의 말씀을 늘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2:2)
우리의 영적인 부분이 자라나기 위해서는 이 신령한 젖이 필수불가결합니다.
그것이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늘 가까이 해야 우리는 깨끗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딤전:3-5)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이 진정한 종교 개혁입니다. 루터의 종교 개혁도 ‘오직 말씀으로’였습니다.
오늘의 종교 개혁도 말씀회복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에 생명력이 있습니다. 운동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히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말씀이 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혼과 영, 관절과 골수를 쪼갭니다. 말씀을 가까이 하면 잘못된 생각, 죄악된 마음, 잘못된 행동을 바르게 합니다. 개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달라집니다. 말씀을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그 말씀으로 어거스틴도 돌아 왔습니다. 그 말씀 때문에 존 웨슬리도 회심하고 영국을 죄악에서 건졌습니다. 말씀운동을 일으켜야 합니다. 말씀을 가까이하고 읽고 연구하고 묵상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3. 교회를 바르게 세워야 합니다.

교회를 신령한 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신령한 집은 단순한 벽돌이 아닙니다. 신령한 집은 교회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거룩하게 새롭게 지어져야 합니다. 한 사람이 중요합니다. 루터 한 사람의 개혁이 점차 확대 된것 처럼 . .

롬5: 에는 한 사람 아담의 범죄로 사망이 왕노릇 했고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선물이 모든 사람에게 넘치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게 버림을 받았고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택하셨고, 또한 보배롭게 하셔서 살아있는 돌(산돌)이 되게 하셨습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무시당하고 버림받는 것 같지만, 우리들도 산 돌이신 예수님과 함께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신령한 집을 세우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신령한 집을 세우는 각가지 재료들인 것입니다. 반석이란 돌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 돌이 죽은 돌인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돌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곧 산 돌이십니다.
벽돌이 하나 하나 연합되듯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마음되고, 성령의 능력으로 파워풀하게 연합되지 않으면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그 교회는 그리스도 없이 세워질 수 없습니다. 건축헌금하고 . . .돈 많이 있기만 하면 . . .봉사많이 하면 교회가 지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를 바르게 세워가야 합니다. 정중한 예배, 하나님을 경외하는 예배. . .예배는 인간적 만남과 교제의 수단이 아니라 예배를 바탕으로 하나님과의 관계 성도간의 교제와 이웃간의 관계가 바르게 되는 것이므로 예배를 바르게 세워가야 합니다. 예배를 소중히 여기고 예배에 동참해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예배를 회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십시오. 하나님과의 관계만 잘 되면 다른 것은 쉽게 해결됩니다. 우리가 우선으로 여겨야 하는 것은 영적으로 깨어있는 신앙입니다.
예배, 기도, 전도, 헌신, 감사 등 회복해야 할 것이 많습니다.

4. 신령한 제사장이 되라

제사장이 뭡니까?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의 사이를 연결시켜주는 중보자입니다. 세상은 죄 때문에 하나님과 관계없는 사람으로 단절되어 버렸습니다. 그 제사장으로 예수님께서 오셨고 우리에게 또한 그 제사장이 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신령한 한 제사장이 되어 한 손에는 하나님의 손을 잡고 또 한 손에는 죽어가는 세상을 붙잡고 살려내는 신령한 제사장이 됩시다.

롬12:1-2에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 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이런 생활이 영적 제사장의 생활입니다. 이 생활이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신령한 제사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삶을 늘 바르게 살아간다면 세상이 바뀝니다. 이것이 성도의 힘입니다.
우리교회와 우리의 신앙을 비른 기초위에 세우는데 힘을 함께 모으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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