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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감사가 없는 이유 (롬 1: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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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임경택 목사

날씨가 늦가을의 쌀쌀한 날씨로 바뀌면서 서민들의 마음도 추워지는 때입니다.
체감경기 전망이 더 나빠졌다고들 말합니다.

통계청 조사를 보면 수입이 1년 전보다 늘었다는 응답은 16%에 불과한 반면 줄었다는 대답은 37%에 달했습니다. 빚이 늘었다는 가구는 저축이 늘었다는 가구보다 2배 이상 높았습니다. 이런 통계를 들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기회복에 대해 더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나라가 아르헨티나나 브라질 같이 되지 않나? 하고 염려하는 사람들이도 많습니다. 예전에 아르헨티나나 브라질은 한때 선진국에 진입 할 정도로 경제가 발전한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요새 브라질은 좀 좋아 졌지만 엉망으로 추락했습니다. 오늘 우리나라의 현실이 그와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정치가 혼란하다 보니 사람들의 입으로 통해서 불평과 불만의 원성이 점점 퍼져 가는 때입니다. 사람들은 주변사람들의 말에 쉽게 동화되고 움직입니다. 그럼에도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의학자들이 위장병 환자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했습니다. 일정기간동안 한 그룹의 환자들에게 ‘새로 개발한 특별 약’을 투약하고 다른 그룹의 환자들에게는 ‘기존의 보통 약’을 투약했습니다. 일정한 기간이 지난 뒤 환자들의 위장 상태를 검사했더니 ‘새로 개발한 특별 약’을 투약한 그룹의 위장 상태가 눈에 띄게 좋아졌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새로 개발한 특별 약’이라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 ‘영양제’였습니다. 그리고 ‘기존의 보통약’이란 것도 똑같은 영양제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그룹이 서로 다른 효과를 내는 것은 약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환자의 심리적 상태, 기대감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의학계에서는 ‘가짜 약’이란 뜻의 ‘플라시보 효과’(Placebo effect)라고 말합니다.

반대로 ‘노시보 효과(Nocebo effect)’라는 것도 있습니다. 노시보란 '해를 끼친다'는 뜻을 가진 라틴어입니다. 혈액응고방지 목적으로 아스피린을 장기 처방받은 한 그룹에게는 위장관 부작용이 있다고 경고해 주었고 다른 한 그룹에게는 전혀 주의사항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두 그룹의 위 내시경 결과, 주의사항을 듣지 않은 그룹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나 위장관 부작용 주의를 들은 그룹은 듣지 않은 그룹보다 3배 이상 통증과 부작용을 호소했습니다.
플라시보 효과와 노시보 효과는 모두 사람의 마음가짐, 태도, 감정의 상태가 사람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어떤 불치병에 걸린 외아들의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밤을 새워 아들을 위하여 서원 기도를 드렸습니다. “아들의 병만 고쳐주신다면 전 재산의 반을 주께 드리겠나이다.” 그러나 아들은 기도의 보람도 없이 가고 말았습니다. 장례식을 치르고 나서 주일날 그 어머니가 하나님께 감사 헌금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거액의 감사헌금을 드렸습니다. 전 재산의 반을 드렸던 것입니다. 주위의 사람들이 어떻게 된 영문인지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그 부인은 이렇게 간증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들을 사랑하셔서 세상보다 더 좋은 천국으로 데려가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너무나 훌륭한 신앙의 고백입니다.

전북 장수군에 ‘ET할아버지’로 잘 알려진 두밀리 자연학교 채규철 교장(65)선생님이 계십니다. 농촌운동을 하다 덴마크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사회운동에 뛰어들었던 지난 1968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얼굴을 비롯한 온 몸이 녹아버렸습니다. 죽을 고비를 몇 차례 넘기며 27차례의 수술로도 그의 몸은 정상을 되찾지 못하고 E.T가 되어버렸습니다.

그의 얼굴은 외계인같고, 유령같고, 귀신같습니다. 다방에 들어서면 종업원이 비명을 지르며 동전을 던져주며 등을 떠밀어낸다고 합니다. 이런 멸시와 천대를 술로 달래다 절망에 빠진 어느날 아내는 구약성경 욥기를 거듭 읽어 주었다는 것입니다. 듣고 또 들으며 전 재산은 물론 사랑하는 자식들까지 다 잃으면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으며 감사했던 욥의 신앙을 갖고자 하는 열망이 불타게 되었습니다. 그는 죽을 때 까지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는 욥이 되기로 결심 했던 것입니다. 그 때부터 채교장은 늘 ‘감사하다’고 말하며 두밀리 자연학교를 섬기며 살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형체는 온전하지 않지만 한쪽 눈이 살아있어서 감사하고, 오그라든 손이나마 수저를 들 수 있어서 감사하고, 귀가 다 녹아버렸지만 안경은 걸칠 수 있어서 감사하고 . . .모두 감사하며 산다는 말을 듣고 참 감사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감사는 새로운 삶을 되찾는 원동력입니다.

감사하지 못하는 이유는

1. 하나님의 창조하심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보면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불신앙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불신앙은 감사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1743.4.13-1826.7.4)은 그는 부자 집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미합중국의 3대 대통령이자 미국 독립선언문을 기초한 사람입니다. 이만하면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토마스 제퍼슨이 대통령이 된 이후 이 감사절을 폐지시켰습니다. 그러다가 1828년 잡지사의 편집장인 사라 헤일(Sara Hale)이라는 여성이 ‘감사절을 회복시켜야 한다.’며 캠페인을 벌였고 여러 가지 우여곡절 끝에 1863년 링컨 대통령에게 보낸 그녀의 탄원서가 접수되면서부터 11월 넷째 목요일이 공식적인 ‘감사절’로 선언된 것입니다.
제퍼슨이란 대통령이 감사절 제도를 폐지한 것은 그 사람 마음에 감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까지도 감사하지 못하도록 한 사람입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것이 타락한 인간의 모습이다.

우리가 감사할 근거는 하나님의 창조를 믿음에서 나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일에 대해서 누가 이 엄연한 진리를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본문 20절 “창세로 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하나님의 만드신 자연 속에 하나님의 모습이 드러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성, 거룩하심이 나타나 있습니다. 결코 부인 할 수 없습니다.
이 우주 만물은 하나님의 신비한 손길로 만드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을 알만한 지식을 줄 수 있기에 충분합니다.

칼빈은 “자연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보낸 편지다.” 라고 했습니다.
편지를 읽어 보면 편지 보낸 사람을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이 보낸 자연이라는 편지를 통해서 하나님은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을 알도록 자연에게 계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감사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연을 보면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알 수 있습니다. 요즘 가을은 단풍이 가장 좋을 때입니다. 온 가을 산을 뒤덮고 있는 단풍들을 보십시오. 아름다운 색채를 가진 가을의 나무들을 볼 때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늘과 바다, 산과 들, 나무와 꽃과 새들, 크고 작은 생물들의 자연스러운 조화를 순수한 마음으로 들여다보면 그 신비한 형태와 질서 앞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하고 줄기세포를 연구해서 인간의 질병을 치유하는 시대라고 해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신비하게 생긴 꽃잎이나 나뭇잎 하나를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요즘 젊은 임산부들을 보면 혼자서 아기 낳고 뒤처리하는 것 할 줄 모릅니다. 그래서 다 산부인과에 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짐승들이나 곤충들을 보면 스스로 새끼를 낳고 탯줄도 끊고 뒤처리를 완벽하게 합니다. 가르쳐 주지도 않았지만 완벽하게 해 냅니다. 이것이 창조의 질서요 섭리인 것입니다. 그런 모습들을 바라보면 하나님의 섭리 앞에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할 의무는 오직 단 한가지, 그에게 감사하는 일 밖에는 없습니다.

2. 썩어질 것들에 관심이 많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무엇에 관심을 갖느냐에 따라 그의 삶이 달라집니다. 잠언 23:7절에 보면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하다”라고 하였습니다. 생각이 고상한 사람은 고상한 사람이 되고 생각이 천한 사람은 천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오늘 현대인들은 점점 육신에 대한 관심으로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
딤후3:1-5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감사가 없는 사람은 세상에 많은 관심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롬1: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썩어질 것들이 무엇입니까? 물질이나 쾌락, 세상의 부와 권력. 이것은 영원한 것이 못됩니다. 반드시 썩어 없어져 버릴 것들입니다.

요즘 현대인들의 관심은 돈, 건강, 미모입니다. 이런 것들이 오늘의 우상입니다. 숭배의 대상입니다. 돈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합니다.
사람은 돈(물질) 때문에 속고 속이면서 삶을 살아갑니다. 돈 때문에, 물질 때문에 가까운 형제와 싸우고 재판하게 되고, 감옥에 가고 . . .

디모데전서6장 10절 말씀보면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라고 말씀했습니다.
그 말씀대로 상속때문에 형제들이 싸우고 죽이고 칼부림나고, 돈 때문에 청부 살인을 하고. . . 돈이 무엇입니까? 마치 소꼽 놀이하는 애들이 저녁에 엄마가 밥먹으라고 하면 미련없이 손털고 일어나듯이 애주중지 하던 돈, 컴퓨터, 지식, 세상의 권력은 하나님이 오라고할 때 다 놓고가야 합니다.

어떤 부자가 집을 잘 지어서 행복하게 삶을 살길 원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물질을 투자해서 큰 집을 짓게 되었는데 지하실에는 비밀창고를 아무도 모르게 설계해서 집을 짓게 되었습니다. 그 지하실 문에는 한 번 열고 들어가면 자동적으로 잠겨 버리는 특수장치를 해서 창고를 만들었습니다. 하루는 이 부자는 비밀창고가 잘 있나 확인하기 위해서 비밀창고 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비밀창고 문이 닫혀지고, 그 부자는 나오지 못하고 결국 죽게 되었습니다. 몇 십년이 지나자 그 큰집이 도로 구획정리로 헐리게 되자, 그 때서야 많은 사람들은 이 부자가 비밀창고에서 죽게 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물질에 속고 물질 때문에 죽습니다.

최근에는 국민의 건강에 대한 관심이 지나친 나머지 때로는 건겅에 관한 유명한 학자도, 광고에 나오는 연에인도 신봉할 정도입니다.

오늘 우리시대의 키워드는 몸(body)입니다. ‘얼짱’ ‘몸짱’이라는 말도 그렇고 “머리 나쁜 건 참아도 못생긴 건 용서 못한다”, “과거가 있는 여자는 용서해도, 뚱뚱한 여자는 용서하지 못한다” 이런 말들은 몸에 대한 외형지상주의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사회에는 건강, 젊음, 아름다움을 위한 현대인들의 관심과 노력은 신체 콤플렉스에 시달리고 있다고 할만 합니다. 1998년에 실시한 라이프스타일 조사(대홍기획,1998)에서도 “나 자신을 꾸미는데 돈을 들이는 것은 아깝지 않다”에 대해 10대와 20대의 경우 절반에 가까운 47%가 ‘그렇다’고 응답했으며, “아름다워질 수 있다면 성형수술을 할 수 있다”에 대해서는 약 30%가, 그리고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 외모에 신경을 쓴다”에 대해서도 63%가 동의했습니다. 현대인들의 관심사를 잘 보여 주는 말이라고 할 것입니다. 현대인들의 우상은 미모입니다. 속은 어떻든지 관계하지 않습니다. 썩어질 것들에 대한 관심히 그렇게 많아요.

어떤 교회에 남자 집사님 한 분이 계셨습니다.
부친은 그 교회 장로님이셨고 모친은 권사님이셨습니다. 그는 사업을잘했습니다. 돈도 많이 벌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신앙 생활은 형편 없었습니다.
그는 영의 일보다는 육의 일에 치중했습니다. 그는 주일이 되면 절반은 거래처 사람들과 어울려 골프장에 갔습니다. 하루는 그 교회에서 권사를 천거하는데 당사자는 별 볼일이 없었지만 부모님이 장로님, 권사님이신지라 그의 부모님을 생각하면서 교인들은 그를 권사로 뽑아 주었습니다. 직분을 받았으면 정신을 차려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그저 육신의 일에만 늘 분주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를 치셨습니다. 검진을 해 보니 위암 3기였습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에 흐느끼면서 이렇게 유언했습니다.
"내 사랑하는 아내, 내 사랑하는 자녀들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내게 장로님, 권사님의 부모님을 주셨고 나로 하여금 어릴 때부터 예수님을 믿게 하셨건만 내가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감사하지 못했고 형편없는 나를 그래도 하나님은 쓰시겠다고 권사로 뽑아주셨건만 그래도 내가 깨닫지 못하고 정신차리지 못했다. 나를 그대로 내버려두면 내 육신, 내 영혼이 둘 다 지옥에 떨어질까봐 하나님은 지금 나를 부르시는 구나. 얘들아, 너희들은 어찌 하든지 예수님을 잘 믿고 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라. 그럼 우리 모두 이 다음에 천국에 가서 다시 만나자!"
장례식 때 그의 육성이 녹음기를 통해서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귀에 전해졌습니다.
모두가 그 소리를 듣고 함께 흐느꼈습니다.

썩어질 것들에 관심을 많이 가지는 사람들은 감사하지 않습니다. 영적인 것들에 관심이 없습니다. 예배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감사가 없습니다. 찬양이 없습니다. 썩어질 것들이 그런 보화들을 빼앗는 것입니다.
우리의 관심을 영적인 것들로 돌려야 할 것입니다.
“위엣것을 생각하고 땅엣것을 생각하지말라”(골로새서3:2)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육적인것을 무시하거나 포기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것을 더 귀히여기고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살아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예배에 관심을 가지십시오. 예배하는 것을 즐거워하시고 찬양하는 것을 즐거워하시고 기도하기를 사모하십시오.
영적인 것은 감사를 가져오고 기쁨을 가져옵니다. 그러나 육적인 것은 비교의식에 빠지게 하고 실망하게 만들고 욕심을 가져오게 하고 불평하게 합니다. 죄악에 빠지게 하는 것입니다.

3. 어리석기 때문입니다.

롬1:21-23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고대 7대 불가사의를 비롯하여 인류가 이룩한 문명을 보면 인간의 지혜의 위대함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을 어리석다고 말씀합니다.
①이집트의 피라미드 : BC 2575-2565년경 나일강 서안(西岸)의 세워진 밑변 평균 길이 230.4m 높이는 147m. ②바빌론의 공중정원 ③올림피아의 제우스상 ④에베소의 아르테미스 신전 : BC 6세기 120년이 걸려 완성된 높이20m 정도로 흰 대리석을 깎아, 127개의 기둥으로 . . ⑤할리카르나소스의 마우솔로스왕 영묘 ⑥로도스섬의 거상
높이 36m의 태양의 신 헬리오스의 청동상 ⑦알렉산드리아 파로스의 등대 : 대리석으로 된 등대의 높이는 135m.

그래서 인간들은 스스로의 지혜를 자랑합니다. 자신들의 지혜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은 신의 영역인 인간생명의 창조까지 인간들의 지혜로 가능하다고 큰소리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인간들이 과연 지혜로운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정말 지혜롭다면 이 땅의 우상들을 숭배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일까요? 돼지머리 잘라다 놓고 . . .미개스럽습니다.
우리나라에 무속인이 우리나라에 30만명이 된다고 합니다. 엄청난 수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예술을 하는 사람들, 스포츠 선수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고사를 지내는 일을 자주 봅니다. 프로야구를 시작할 때 선수들과 감독들이 돼지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좋은 성적 올려달라고 기원합니다. 영화를 찍기 전에 상을 차려놓고 예외 없이 엎드려 절합니다. 사업을 시작할 때, 집을 장만했을 때 . . . 이런 미신적인 행위를 하는 것을 민족문화라고 합니다.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많이 배운 사람들이 더 합니다. 부자들이 더 합니다. 연예인들도 . . . 인터넷을 통해서도 점을 보는 사람들이 무수하게 많습니다.
이런 문명이 개화된 문명입니까? 아니면 미개한 문명입니까? 교인들도 점집을 찾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참 한심한 노릇입니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의식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신의식은 선천적입니다. 플푸타크라는 사람은 “여러분, 성벽이나 문학이나 왕이나 집이나 체육관이나 극장이 없는 도시들은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디를 가도 신전이나 신들이 없는 도시는 절대 발견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도시면 도시, 마을이면 마을, 신들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고상한 신이든지, 그렇지 못하든지 항상 신들이 있습니다. 사람은 쓸데없는 부지깽이라도 의지합니다. 복조리라도 달아놓아야 안심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신의식입니다. 본능입니다.

신의식이 있다는 것은 너무나 지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본래 주신 인간의 신의식이 변질되어 우상을 숭배하게 된 것입니다. 아무런 능력도 없는 존재 말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하는 것을을 섬기고 숭배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입니까?
그뿐 아니라 현대인들은 하나님보다 더 숭배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정치스타, 경제스타, 스포츠스타, 연예인스타 . . 신문이나 인터넷을 보면 인간 우상에 대해 도배질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편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시14:1)
하나님을 부인하는 최후의 발악들입니다.
하나님을 버리면 우둔하게 되어 우상숭배로 떨어진다.

하나님이 존재하심을 느끼면서도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치도 아니하면, 그 생각이 허망하여 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집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하며 감사하며 살 수 있는 이것은 복입니다. 이것을 버리게 되면 허망해 집니다. 허탈에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버림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멀리하는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하나님의 버림을 받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이 많을 수록 나라가 복을 받습니다.

88올림픽이 열리기 전만 해도 공산주의 세력은 엄청났습니다. 전 세계를 공산화할 것 같은 기세로 민주세력을 위협하며 냉전시대를 이끌어갔습니다. 그러나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것 같았던 소련의 공산주의가 70년 만에 이 지구상에서 사라졌습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체코를 비롯한 동구권의 공산주의도 줄줄이 다 망했습니다. 북한 하나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북한의 공산주의도 곧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시14:1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것 처럼 어리석은 것이 없습니다.
우리나라가 하나님의 복을 넘치게 받는 나라가 되기 위해서 복음을 곳곳마다, 골짜기 마다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감사를 되찾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존 웨슬레는 “감사는 하나님 자녀의 표적”이라고 했습니다. R.A 토레이는 “성령과 연합된 사람의 자연스러운 표현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감사의 사람이 됩시다.
시편50편 23절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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