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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시 쓰는 역사 (눅 1: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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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한양국 목사   

여러분은 혹시 아십니까? 탁월한 설교자의 설교 자리를 어쩔 수 없이 대신해야 하는 어눌한 부목사의 고민의 무게를 말입니다. 동안교회의 담임의 자리가 얼마나 큰 자리인가를 실감하는 것 같습니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이 자리를 우리 담임 목사님이 계속 강건하게 지켜 나갈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고 그런 마음으로 오늘 주님이 주시는 말씀 앞으로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제가 신학교를 다닐 때였습니다. 저는 그렇게 훌륭한 신학생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처자식이 고생하는 것을 보면서 가끔은 ‘내가 정말 이 길을 가야하는지?’ 많이 고민하고 흔들렸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때마다 저를 붙들어 주는 책이 있었습니다. 김진홍 목사의 ‘새벽을 깨우리로다’라는 책이 바로 그것입니다. 아시는 것처럼 김진홍 목사님, 신학교 때부터 참 별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가 무슨 홍길동이라고 신학교 시절에 활빈의 꿈을 안고 판자촌이 밀집되어 있었던 청계천 빈민가로 들어가 활빈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가난과 질병에 그냥 쓰레기처럼 버려진 사람들이 사는 곳이었습니다. 술 도박 칼부림이 난무하는 곳이었어요. 그런데 목사님은 그들과 생사고락을 같이 합니다. 그러다가 자신도 병이 들고, 나중에는 아들까지 병이 걸립니다. 그러자 견디다 못한 사모님은 아이들을 데리고 떠나버립니다. 김진홍 목사님도 떠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날이었습니다. 이틀을 굶고 배고파 우는 네 명의 아이들의 눈물에서 그는 그리스도의 눈물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사람으로 살 수 없었던 그 황폐한 마을의 역사를 다시 쓰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민족교회의 모델이 되는 두레 공동체로 만들고야 말았습니다. 

저는 오늘, 김진홍 목사처럼, 역사를, 하나님의 거대한 구속의 역사를 다시 쓴 강철 같은 주님의 사람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세례요한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짧은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신 사명을 위해서 불꽃같은 인생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여자가 나은 자 중에 이 보다 더 큰 사람이 없다’, 주님의 격찬을 받은 위대한 인생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그의 짧은 생애를 통해서 마냥 타락하고 침체해 온 구약시대를 찍어버립니다. 그리고 옴 몸으로 신약시대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은혜의 시대의 서막을 엽니다. 율법이라는 죽음의 시대에 마침표를 찍습니다. 그리고 온 몸으로 복음이라는 생명의 시대의 서문을 작성한 사람, 빗나간 하나님의 구속역사를 다시 쓰기 시작한 사람, 그가 바로 세례요한이었습니다. 

저는 오늘 세례요한처럼 우리에게도 ‘다시 쓰는 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 내 인생의 이야기를 다시 쓰기를 원합니다. 내 가정의 역사를, 내 교회의 역사를, 특별히, 우리 교회학교의 역사를 다시 쓰는 은혜가 불길같이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무언가 문제가 많고 잘못되어 온 역사였기에 다시 쓰자는 말이 아닙니다. 너무나도 소중한 역사이기에, 너무나도 소중한 우리들의 자녀이기에 다시 쓰자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에 보다 선명한 복음의 기록을, 그래서 영원히 지울 수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온 몸으로 다시 써내려가고 싶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가능할까요? 본문이 요약해 주는 세례요한의 생애가 그 길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세례요한은 ‘주 앞에서 큰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큰 사람이 아닙니다. 주 앞에서 큰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유력하고 유명한 사람이 아닙니다. 천국에서 유력하고 유명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이 주 앞에서 큰 사람이 되는 것일까요?  삶의 스케일과 영향력이 큰 사람입니까?,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입니까? 네, 세상은 그런 사람이 크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교회에서 조차 그렇습니다. 대형교회를 시무하면 목사는 큰 목사이고, 작은 교회를 시무하면 작은 목사라고 부릅니다. 주로 작은 교회에 있었던 저로서는 되게 기분 나쁜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걸 아셔야 합니다. 주 앞에서 크다는 것은 삶의 스케일이나 지위와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주 앞에서 큰 사람은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주님의 뜻을 받드는 사람입니다. 어느 날, 누가 크냐고 서로 싸우는 제자들에게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이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받드는 그 사람이 하늘에서 큰 사람이다.’ 크게 보이던지 작게 보이든지, 귀하게 보이든지 천하게 보이든지, 내게 아픔이 되든지 기쁨이 되든지, 주님의 뜻이라면 겸손히 받아드리고, 그 뜻을 성실히 살아내는 사람 그가 주 앞에서 큰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2년 전 겨울 어느 날이었습니다. 제주도에서 부목을 하고 있는 후배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위로 딸만 둘이었는데 아들을 낳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왕 축하해 주는 것 크게 축하해 주고 싶어서, “야 이 녀석, 홈런을 깠구나. 기술도 좋다. 나 좀 가르쳐주라.” 호들갑을 떨면서 축하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건지 제 호들갑에 후배가 울음을 터트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 이번에 낳은 막내가 제일 이뻐. 그런데 양손 양발에 두 번째 세 번째 손가락 발가락이 없어. 아이를 가질  때, 독생자를 내어준 하나님의 사랑을 이 아이를 통해서 알게 해 달라고 기도했는데, 그래서 그런 것일까? 나는 그렇다 치지만, 그런 몸으로 살아가야 할 아이의 인생의 무게는 누가 감당해야 하는 거지?" 막 우는 것입니다. 저도 어떤 말을 해주어야 할 지 몰라서 그냥 듣고만 있었어요.

그런데 얼마 후, 이런 내용의 이메일이 왔습니다.

'형, 내 이야기 듣고 많이 심난하죠? 하지만 그러지 마세요. 사실 나도 평소에는 괜찮은데 누군가에게 우리 아들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목이 메고 눈물이 흐르곤 해요.  하지만 이젠 여러 사람들이 함께 기도해 주니까 한결 마음이 든든해졌어요.
사실 내 나름대로 하나님의 뜻을 찾아보려고 애를 쓰고 있는데---.
그러는 가운데 몇 가지 찾아보았고, 또한 감사할 일이 많이 생겼어요. 전에도 이야기 했는지 모르지만, 아들을 통해서 독생자 예수를 향한 하나님의 아픈 마음을 더 알게 되었고, 호세아나 에스겔의 가정생활을 통해 보여주셨던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아픈 마음을 보다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게 되었어요. 남들은 그저 기뻐하고 말일이지만 나는 이 일을 통해서 오히려 더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게 되고, 주님만 의지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리고 이 아이를 통해서 받으실 하나님의 영광을 기대하면 하나도 힘들지 않아요. 물론 앞으로 몇 차례  수술을 받아야 하지만 말입니다. 참 우리 아이 이름을 한결이라고 했어요. 평생을 하나님께 성결하게 살기를 원해서 한결이, 일평생 한결같이 주님을 사랑하며 살기를 원해서 한결이, 한겨례 자손이라 한결이, 한겨울에 태어난 아이라 한결이, 너무 복잡하게 느껴지지만 억지는 아니죠? 우리 한결이 사진 보낼테니까 형도 하루 한번 보면서 기도해 주세요.'

저는 눈물로 이 메일을 읽었습니다. 여러분, 누가 주님 앞에서 큰 사람입니까?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내 후배라고 편드는 것 아닙니다. 정말 이런 사람이 큰 사람입니다. 아파도, 이해할 수 없어도, 주님의 뜻이기에 사랑과 감사로 수용하려고 애쓰는 사람, 그런 사람이 주 앞에서 큰 사람입니다. 세례요한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의 뜻이면 무조건 받아드렸어요. 한번은 그의 제자들이 찾아와서 사람들이 예수에게로 몰려간다고 야단이었습니다. 그러자 세례요한이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그는 흥해야 하고, 나는 쇠해야 하리라.’ 참 대단한 사람입니다. 세례요한이라고 섭섭한 마음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내가 쇠해야 하는 것이라면, 내가 망해야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아프지만 받아드리겠다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순종의 사람 그가 바로 세례요한이었습니다. 이것이 그를 주 앞에서 크게 한 것입니다. 20세기 초 일본이 나은 세계적인 신학자이면서 사상가가 있습니다. 우찌무라 간조우라는 사람입니다. 이 분은 1968년 명치유신 100년이 되던 해에 일본정부로부터 일본을 근대화 시킨 20명의 선각자 중에 한 사람으로 선정되기도 한 분입니다. 그 이유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우찌무라 간조우는 6평짜리 성경공부방에서 전후 잿더미가 된 일본을 다시 일으켜 세운 위대한 인물들이 배출되었기 때문에 선각자 20명 중에 한사람으로 선정되었던 것입니다. 걸출한 수상 오히라가 그 성경학교 출신이었고, 동경대 총장 세 명이 그 성경공부반 출신이었고, 전후 일본의 복지정책을 입안한 사회당 창당멤버들이 거의 다 그의 성경공부방 출신이었다는 것입니다. 비좁은 6평짜리 성경공부방에서 오늘의 일본이 성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함석헌, 유영모, 김교신, 최태영 등도 사실 그의 성경공부방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이 이런 것이 아닙니다. 도대체 그는 어떤 정신으로 사람을 길렀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가 일본 제국주의의 반역자로 몰려서 직장도 잃고 교회로부터도 비난을 받고 있을 때, 그리스도인의 위로라는 책에 이런 시를 남겼습니다.

내가 세상에 보냄을 받은 것은/ 내 뜻을 펴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그의 뜻을 이루기 위함이라/ 눈물 골짜기와 웃음동산/ 기쁨과 함께 슬픔도 오리니/ 기꺼이 받으리라 둘 다/ 하나님의 뜻일진대/
용사의 억센 힘도 교사의 불붙는 웅변도/ 내가 원치 않는 것은 아니지만/ 주 뜻대로 되어짐 보다는 못하리라/ 연약한 이 몸이 어떻게 그 책임을 다할 것인가/ 나는 몰라도 하나님은 아시느니, 하나님을 의지함이 헛되지 않음을/
작은 일이 결코 작은 일이 아니요/ 세상을 뒤엎는다고 큰 일이 아니라/ 작은 일은 내 뜻을 이루는 것/큰 일은 주님의 뜻 따름에 있다./
내 손을 잡으소서 내하나님이여/ 내가 가는 길 인도하소서/ 내 목적은 주님의 뜻을 행하든가 견딤에 있는 것이어니./

여러분, 그렇습니다. 작다고 작은 것 아닙니다. 세상을 뒤집어 엎는다고 큰 것이 아닙니다. 작은 것은 내 뜻을 이루는 것이요, 큰 것은 주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런 의식을 가진 사람, 이런 생애를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 그런 사람을 통해서 역사는 다시  쓰여 지게 되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처럼 주 앞에서 큰 사람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또 세례요한은 한 평생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않고,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기분 나쁠 때는 한잔 걸치고 기분 좋을 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상황이 어려울 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한 평생을 일관되게 주님을 섬기고 사랑하며, 거룩하게 구별된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성령이 충만한 삶을 살았습니다. 여러분, 성령이 임하시면 꿈을 꿉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처럼 500년 1000년, 아니 역사의 종점까지 앞을 내다보는 놀라운 비젼이 생깁니다. 그런데 성령이 충만해지면 꿈을 실현하는 사람이 됩니다. 사실 우리들이 가진 문제가 무엇입니까? 꿈이 없어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정작 우리들의 문제는 꿈은 있는데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서 문제입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저녁 뉴스에 일가족이 자살을 했다는 뉴스가 보도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아내가 제게 물었습니다. “저 사람들은 그렇게도 꿈이 없었을까요?” 제가 이런 대답을 했습니다. “아니야, 꿈은 있는데, 실현할 능력이 없었던 거지.” 여러분, 제 대답이 틀린 대답입니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꿈이 없으면 절대 죽지 않아요, 아무리 힘들어도 짐승처럼 살아갑니다. 꿈은 있지만 해결할 능력이 없어서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꿈을 꾸는 것도 소중하지만 꿈을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이 더 소중한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충만하면 꿈을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요셉이 그렇습니다. 바로가 꿈을 꿉니다. 한 시대, 한 제국의 운명이 걸려있는 엄청난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대 어느 누구도 그 꿈을 풀어내지 못합니다. 정치도 경제도 애굽의 그 수많은 박사들도 풀어내지 못합니다.  그런데 서른의 젊은 요셉이 풀어냅니다. 그 꿈을 현실화합니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것은 꿈을 풀어낸 그 다음 절에 기록된 성경의 말씀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신에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이었다.’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기에 꿈을 풀어내고 한 제국의 역사를 다시 쓸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례요한처럼 우리의 한평생을 구별해서 일관되게 주님을 섬기시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세례요한처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 되도록 애써보십시다. 꿈이 이루어집니다. 우리 인생을 통해 새로운 역사를 다시 쓰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세례요한은 앞서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의식도 앞서 갔지만, 앞서서 본을 보인 사람이었습니다. 그 시대 어느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수고한 스티그마(흔적)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바로 여기에 한 시대를 설득할 수 있는 남다른 권위가 있었던 것입니다.

한번은 김동호 목사님께서 이런 고백을 하셨던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오래 전에 서울대에서 청년집회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 때 자신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복음을 전해서 많은 호응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음 날 김진홍 목사님이 설교를 하는데,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그 분은 절대로 피를 토하듯 설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힘 하나 드리지 않고 설교 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경상도 사투리로 느릿 느릿, 그저 자신이 경험한 이야기를 하는데도 학생들이 눈물바다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같은 목회자로 약도 오르고, 시기도 났었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까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김진홍 목사님은 자신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그리스도를 위해서 헌신한 흔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정확한 분석입니다. 사람을 설득시키는 가장 큰 권위와 능력은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권위라는 말의 헬라어는 ‘엑수시아’인데, 분석해 보면 엑스는 ‘--로부터’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우시아는 ‘존재’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웃 오브 비잉(out of being)’입니다. 권위는 '존재로부터 흘러나온다' 라는 것입니다. 참 기가막힌 단어가 아닙니까? 

여러분, 권위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권위 있는 부모, 권위 있는 교사, 권위 있는 목사 장로 권사 집사가 되고 싶습니까?  앞서서 본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더 많은 고난의 흔적을 갖는 것입니다. 그 흔적을 가지면 가질수록 더 많은 설득력이라는 권위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주에게로 돌아오는 새로운 역사를 다시 쓰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정말 다시 쓰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아-, 정말 찍어내어버려야 할 내 인생의 어둠에 마침표를 찍고, 내 인생의 이야기를 다시 쓰고 싶습니다. 내 가정의 역사를 다시 쓰고 싶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 교회학교의 역사를 다시 쓰고 싶습니다. 너무나 소중한 역사이기에, 너무나 소중한 우리들의 자녀이기에, 그들 가슴에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선명한 복음의 기록을 남기고 싶습니다. 이 거룩한 일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여러분과 함께 동안교회의 역사를 다시 쓰고 싶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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