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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한결같은 충성 (빌 2: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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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서해원 목사

  이번 주 수요일인 17일은 수능시험을 보는 날입니다. 이번에도 우리 교회에 속한 29명의 재학생과 또 여러 재수생들이 시험을 봅니다. 어떻게 보면 학생들이 살아오면서 지금이 가장 힘든 기간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사람에 따라 일찍 삶의 어려움을 겪었던 학생도 있겠지만 공식적으로 자기 인생에서 처음으로 두렵고 떨리는 순간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평안함을 갖도록 기도해 주어야 하고, 지치지 않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수험생들을 격려하기 위해 주던 것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먹고 싶은 것을 많이 사준 것으로 기억됩니다. 마음대로 먹지 못하던 시대였기에 잘 먹고 힘을 내라고 실컷 먹게 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다가 엿을 사주는 풍습이 생겼습니다. 끈적끈적한 엿처럼 가서 떨어지지 말고 잘 붙으라고 주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이것이 사라졌습니다. 최근에는 ‘포크’를 선물하는 것도 생겼습니다. 가서 잘 찍으라고 준다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요행을 바라는 것이기에 좋지 않습니다. 시험은 평가인데, 요행을 바래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이런 요행을 방지하기 위해서 SAT라는 시험을 볼 때, 틀린 답에 동그라미를 하면 감점을 당합니다. 요행을 바라면서 대충 찍으면 여지없이 형편없는 점수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포크도 그래서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요즘 신세대는 ‘카스테라’를 선물한다고 합니다. 이유는 “카스테라, 가서 되라”는 마음을 담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시험을 통해 시대가 바뀐 것을 실감나게 합니다.

  시험을 앞둔 학생에게 가장 귀한 선물은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큰 힘이 되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많은 말씀가운데 오늘 본문을 주면 더욱 좋으리라 생각됩니다. 본문은 예수님에 관한 말씀인데, 특히 9절 이하에 이렇게 강조합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떠난 이름을 주사...”
하나님이 주님을 지극히 높여 주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동일하게 우리 자녀들을 높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영예, 부모의 기쁨,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실 것입니다.

  문제는 9절의 가장 처음에 나오는 ‘이러므로’라는 단어입니다. 이 말은 지금까지 높여진 것은 결과이고, 이런 결과에 이르기까지 원인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이렇게 높임을 받게 된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높은 것만 생각하지 그런 결과를 위해 우리가 해야 할 것을 잘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좋은 결과를 위해 바른 원인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본문의 초점은 ‘이러므로’ 바로 앞에 나오는 부분입니다. 여기에서 주님이 보이셨던 모습은 한마디로 ‘충성’입니다. 주님의 충성이 이런 결과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높아지기 위해, 충성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어떻게 충성하셨을까요? 우리가 충성의 열매를 맺어야 하는데, 성경은 주님의 충성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할까요?

  첫째, ‘하늘 영광을 버리기까지’입니다. 6절에서 이것을 잘 보여줍니다. 주님은 원래 하늘에 계셔야 하는 분이셨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과 본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과 동일하신 권능을 가지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영원토록 하늘에 계시고, 큰 영광을 받으셔야 하는 것처럼, 주님도 영원토록 하늘에 계셔서 피조물의 영광을 받아야 하는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영광의 자리를 포기하셨습니다. 하늘의 권리를 버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낮고 천한 이 땅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충성입니다.

  이것은 곧 충성에 있어서 ‘충성의 범위’를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충성에도 범위가 있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공간을 포함합니다. 하늘이나 땅이나,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안에서나 밖에서나, 내가 있는 곳, 바로 거기에서 충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충성입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이 속한 삶의 영역은 크게 3가지로 구분됩니다. 교회, 가정, 그리고 사회입니다. 누구도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충성을 말할 때, 어느 한곳에만 치중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 3가지 모든 영역에서 충성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사회에서는 잘 하는데 교회에서는 충성하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사회에서, 우리가 속한 일터와 삶의 현장에서 하는 것만큼 교회에 충성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자신에게도 큰 보람이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봉사’이고 사회는 ‘댓가’라고 생각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교회에서는 잘 하는데 가정은 잘 돌보지 않습니다. 이것도 또한 문제입니다. 교회 일은 정말 물불을 가리지 않고 하는데, 가정의 일은 등한시합니다. 그래서 어려움을 겪는 가정이 우리 가운데 의외로 많습니다. 집안의 살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자녀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관심이 없고 오직 교회 일에만 몰두합니다. 이것은 아주 좋은 것 같지만 결코 주님이 원하시는 삶이 아닙니다. 교회만큼 가정이 중요하고, 가정만큼 사회가 중요한 것입니다. 내가 속한 곳, 내가 있는 곳, 바로 그곳이 어디든지 내가 서 있는 거기에서 충성해야 합니다. 이것을 주님이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종종 오해하는 것 중에 하나가 교회 일은 거룩하고 세상일은 거룩하지 못하다고 믿는 것입니다. 내가 거룩한 것이지 일에 따라 구분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교회 일만이 거룩한 것이라고 말한다면 모두 목사나 선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가 않습니다. 내가 목회자가 아니더라도, 주님의 제자로 부름 받고 사는 내 삶의 모든 현장이 거룩한 것이요, 거룩한 일입니다. 그 자리, 그 위치, 그 현장에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그곳이 내게 맡긴 사명으로 알고 충실해야 합니다.

  내가 속한 직장과 일터, 학교에서 충성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열심만큼 교회 일에도 충실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가정에도 충실해야 합니다. 나의 부족은 어디인지를 돌아보시고, 내가 속한 영역에서 충성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스스로 종이 되기까지’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주님은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지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충성입니다. 주님은 하늘영광의 자리만 포기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 계실 때에도 스스로 종이 되셨습니다. 한없이 낮아지셨고, 스스로 종이 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3장에서 주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는 세족식을 거행한 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주님은 선생과 주인으로서 대접을 받아야 하는데 친히 종이 되셨다는 뜻입니다.

  마가복음 10장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러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게 무슨 뜻입니까? 주님은 이 땅에 친히 종이 되기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종처럼 섬기기 위해 오셨다는 말입니다.

  ‘스스로 종이 되기까지’ 라는 말은 충성에 있어서의 ‘자세’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충성하되 어떤 자세와 태도를 가지는가가 중요합니다. 옛날 주님의 시대에 노예나 종처럼, 신실하게, 믿음직스럽게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로 충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형식으로 충성해서도 안됩니다. 참되고 진실하여 하나님과 사람을 감동시키는 충성을 해야 합니다.

  한국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미국의 위대한 영웅, 맥아더 장군의 회고록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1950년 6.25 전쟁이 터지자 연합군 총사령관이었던 맥아더 장군이 한국의 전황을 살피기 위해서 한강 인도교까지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쌍안경을 가지고 강 건너편의 형편을 살피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이 때는 한강 인도교가 폭파되어 있었고, 강 건너편에는 인민군들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쌍안경으로 보는 중에 맥아더의 눈에 문뜩 강 이쪽 편에 부동자세의 군인 한 사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장군은 이상하게 생각하고 지프차를 타고 병사에게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자네는 왜 끊어진 다리 앞에 서 있는가?’ 병사가 대답했습니다. ‘이것이 제 임무이기 때문입니다.’ 맥아더 장군은 이상하게 생각하고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언제까지 여기 서 있을 작정인가?’ 이때 이 병사는 다시 대답했습니다. ‘새로운 명령이 하달될 때까지입니다.’ 전세는 위급하고, 지휘 계통은 사라지고, 지휘관들도 도망하는 상황에서, 그리고 지금 적이 바로 코앞에 와 있는데도 도망칠 생각을 하지 않고 끝까지 자기 자리를 지키는 이 병사의 투철한 군인 정신을 목격한 맥아더 장군은 감탄했습니다. 그래서 외쳤다고 합니다. ‘이런 군인이 있는 나라는 절대로 망하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 감동을 받은 맥아더는 그날로 당장 미군 병력의 출동 명령을 내렸고, 유엔군이 참전하도록 조문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한국전쟁을 뒤집어 놓은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군인에게 있어서 정말 필요한 것이 충성인데, 이 병사와 같은 신실한 자기 자리를 지킨 충성이 그야말로 기적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충성을 다짐하되,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종처럼 신실하고, 믿음직스럽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바울처럼, 이렇게 종의 자세로 충성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으심이라” 주님은 하늘 영광의 보좌를 포기하셨고, 스스로 종이 되어 충성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충성입니다.

  이처럼 죽기까지 충성하신 주님께서 핍박과 시련으로 말할 수 없는 고통가운데 있는 서머나 교회의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여기 ‘죽기까지’ 라는 말은 충성에 있어서 충성의 ‘기간’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충성하되 언제까지 할 것인가, 얼 만큼 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죽기까지, 죽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 사는 동안, 내 생명이 끝나는 그 순간이 오기까지, 한결같이, 변함없이 충성하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우리 믿는 자에게 요구하시는 충성입니다.

  누구나 시작은 잘 할 수 있습니다. 시작도 못하면 사람이 아닙니다. 모두 시작은 너무도 잘합니다. 그런데 지속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작심삼일, 용두사미’란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의 핵심은 바로 ‘한결같이’에 있습니다. 한결같이 충성하고, 변함없이 지속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잘 안됩니다. 자꾸 갈수록 흐지부지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어려움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기뻐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항상’ 기뻐하는 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가 간절히, 뜨겁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게 어렵습니다. 우리가 얼마든지 감사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힘든 것입니다. 우리 삶에 이것만 제대로 행해도 신앙은 성공이라고 믿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찾는데, 이 뜻만 제대로 실천해도 열매와 성숙은 문제가 없습니다. 한결같이 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죽기까지 신실하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늘 자신을 돌아보며 다짐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스트리아 빈 출신의 유명한 학자 중에 ‘콘라드 로렌츠’(Konrad Lorenz)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동물의 생태를 연구하여 1973년에 노벨상을 수상한 사람입니다. 그는 동물의 대부라 불리고, 동물에 관하여는 아주 탁월한 지식을 가진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그가 지은 책 가운데 ‘인간은 개와 어떻게 친구가 되었는가?’는 것이 있습니다. 집중적으로 개를 연구한 내용을 담고 있는 책입니다. 그는 스스로 ‘개가 인간으로 보인다’ 라고 말할 정도로 개는 인간의 삶에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고 말합니다. 개를 키워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영물이란 생각을 하게 합니다. 한번 정을 주면 떨어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개를 키우지 말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가 지적하는 것처럼, 개의 영리함과 탁월함의 이야기가 인간 역사에 종종 등장하는 것을 봅니다. 고대 희랍의 유명한 배우의 애견은 주인을 화장하는 불 속에 같이 뛰어들어 함께 죽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로마시대에 어떤 충신의 애견은 황제가 그를 죽여 강물에 버리자 그 개도 강물에 뛰어들어 주인의 사체를 끌어올리려다 지쳐 죽었다고 합니다. 스코트랜드의 어떤 개는 주인이 죽자 그의 무덤에서 14년을 한결같이 자리를 떠나지 않고 주인을 지켰다고 합니다. 주인의 무덤을 떠나지 않으니까 사람들이 개밥을 무덤으로 날라주었다고 합니다. 우리 나라에도 개에 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고려시대에 어떤 개는 눈먼 주인을 위해 손과 발이 된 것을 기특하게 여겨 조정에서 정삼품의 벼슬까지 내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정선이란 고장에 ‘효구총’이란 것이 있는데, 이것은 사람이 잡아먹고 버린 어미개의 뼈를 새끼개가 양지 바른 곳에 옮겨 묻고 곁에서 죽어간 개 무덤이라고 합니다.

  동물가운데 개만큼 인간 삶에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동물이 없다는 것을 알려주면서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은 개만큼 인간을 위해 충성하는 동물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먹을 것을 주고, 잠자리를 제공하고, 사랑해 주었다는 오직 그 이유만으로 개는 주인을 위해 충성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야기 끝에 이렇게 말합니다. ‘개는 나를 위해 언제나 목숨을 바칠 용의가 있다. 사자나 호랑이가 내 생명을 위협한다면 나의 개는 모두 내 생명을 단 몇 초간이라도 보호하기 위해 한 순간도 주저 없이 그 승산 없는 싸움에 뛰어들 것이다. 그런데 나는...’

  여러분, 말 못하는 동물도 이처럼 충성합니다. 한결같이 충성합니다. 그런데 나는 어떻습니까? 사람인 나는 어떠한가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동물보다도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며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 도다’(사1:3)

  히브리서 3장 5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 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저가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충성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으니 저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주님은 충성하신 분이셨습니다. 하늘 영광의 보좌를 버리기까지, 스스로 종이 되기까지,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충성하셨습니다. 이 아침에 주신 이 말씀을 기억하며 이제 나도 주님을 본받아 가기를 다짐하면서, 한 주간도 내 삶의 모든 영역에서 충성하며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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