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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근원을 고치자 (왕하 2: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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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이용호 목사

부러운 선거문화

미국 대통령 선거가 끝났습니다. 온 세계 관심사의 초점이었습니다. 우리나라 방송에서도 만 한나절을 특집으로 보도한 바가 있습니다. 미국 대통령이 누가 되느냐에 따라 각국의 이해관계가 중대하게 대립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방송을 보는 중에 케리 후보의 패자연설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연설 중의 한 대목입니다. “미국 선거에서 패자는 없습니다. 당선과 낙선에 관계없이 모든 후보는 다음날 아침이면 미국인으로 눈을 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가장 영광스러운 재산입니다.” 제가 태평양 건너서 들었지만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패자가 이런 연설을 할 수 있는가? 미국의 선거문화와 그 풍토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패자도 이런 연설을 할 수 있는 나라, 이런 나라가 진정 복된 나라요 훌륭한 나라라고 치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시는 이런 말로 응답을 했습니다. 그 중의 한 마디가 인상적입니다. “당신은 여전히 내 곁에 있습니다.” 이 말은 나는 당선자이고 당신은 낙선자이지만 우리는 함께 있습니다. 함께 미국을 위해서 일하는 이 나라의 지도자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말입니다.

  이와 같은 승자와 패자의 페어플레이는 아무렇게나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미국이 갖고 있는 사회, 정치, 문화의 바탕에 그 저력이 있는 것입니다. 후진국은 대통령 선거를 하고 나면 내가 지지한 대통령을 나의 대통령으로 규정합니다. ‘이건 내 대통령이다.’ ‘너는 손대지 마라.’ ‘우리 당의 대통령이야.’ 이와 같은 모습으로 패자를 향해서 굴림하고 윽박지르기 때문에 훌륭한 승복을 기대할 수 없는지도 모릅니다. 미국인들은 자기가 뽑았다 해서 나의 대통령이라는 관점을 갖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는 미국인으로 다시 눈을 뜹니다.”라는 말은 미국이라는 국가 앞에 당선과 낙선자는 없다는 말입니다. 케리의 강연은 우리가 새겨둘만한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물이 좋지 못하니

  엘리사 선지자가 여리고성을 방문했는데 여리고성 사람들이 이런 호소를 합니다. “이 성읍의 터는 아름다우나 물이 좋지 못하므로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집니다.”라고 했습니다. 아주 안타까운 일입니다. 여리고는 터가 좋은 곳입니다. 땅이 좋습니다. 토양이 우수한 동네입니다. 그러나 물이 좋지 못하여 농사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열매가 익지 않고 과실이 떨어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리고는 물 좋기로 유명한 지방입니다. 아마 엘리사가 여리고의 물을 고치기 전에는 물이 좋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물이 좋지 않으면 농사가 되지 않습니다. 물은 생명이 있습니다. 살아 있는 물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염된 물이나 썩은 물은 농사가 되지 않습니다. 그 물이 스며드는 곳마다 모든 생명체가 죽습니다. 그 물을 사람이 마시면 죽습니다. 그만큼 물은 생명의 근원입니다. 여리고 사람들이 물이 좋지 못하여 엘리사에게 와서 고쳐달라는 호소는 절실합니다.

  ‘터’라는 것은 보이는 것입니다. 땅은 보이는 것입니다. 흙은 손에 잡힐 수 있는 것입니다. 과실나무는 눈에 보입니다. 그러나 곡식을 익게 하고 과실나무의 결실을 익게 하는 근본은 땅 밑으로 스며드는 물이 좋아야 합니다. 물이 좋지 못하면 보이는 과실나무, 보이는 토양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엘리사는 소금을 그릇에 담아오라고 합니다. “물 근원으로 나아가서 소금을 그 가운데 던지며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물을 고쳤으니 이로조차 죽음이나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짐이 없을지니라 하셨느니라.” 엘리사가 소금을 뿌려 물 근원을 고쳤습니다. 물이 흘러나오는 근원을 고쳤습니다. 근원을 고쳤다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바탕이 중요하다

  사람은 외형이 있습니다. 결혼한 사람들 중에 첫날부터 결혼의 환상이 깨어지고 남녀간에 꿈이 산산조각 나는 사례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니라고 합니다. 제가 아는 사람의 경우도 있지만 전문 상담기관에서 우리에게 보도해 주는 일은 아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느 신혼부부가 여행을 갔습니다. 샤워를 하고 있는 신부를 향하여 신랑이 물을 한 컵 갖다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지금 샤워하고 있으니 당신이 갖다 먹으라고 한마디 했습니다. 그런데 샤워를 하고 나오니 남자의 반응이 상상을 초월하는 반응입니다. 그 순간부터 결혼의 환상이 무너졌습니다. 이와 같은 극단적인 사례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젊은이, 넉넉한 가문에서 자란 젊은이, 외형을 보면 일등 신랑감으로 하나도 손색이 없는데 상상을 초월하는 못된 버릇들이 내면에 있다는 것입니다. 옛 여성과의 관계를 청산하지 못하고, 옛 남성과의 관계를 청산하지 못하고 결혼생활을 하다가 얼마 후에 그것으로 인해서 파경으로 이르는 부부가 많다는 것입니다. 결혼 전의 이성관계는 깨끗이 청산하면 무죄가 됩니다. 그런데 결혼 후에도 청산을 못한다는 것은 중대한 문제가 됩니다. 바탕이 중요합니다. 요즘은 외형이 너무 중시되는 시대입니다. 외형을 가지고 모두 열광을 합니다. 사실 인간은 내면이 중요합니다.

  한 때 결혼조건을 논하는 이런 글들이 있었습니다. 결혼 조건에는 A, B, C, D, E, F가 충족되어야 한다, A는 나이, B는 용모, C는 성격, D는 학위, E는 경제력, F는 신앙입니다. 신앙이 맨 꼴찌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신앙은 조건에 넣지도 않습니다. 그저 보이는 것을 따라서 결혼을 하고 여기에 자식들의 행복이 있는 것처럼 부모들이 환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면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외형은 하나의 결과입니다. 과일나무도 중요합니다. 보이는 토양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물이 좋아야 합니다. 물이 나쁜데 다 갖추었다 하더라도 농사는 실패합니다. 인간에게 있어서도 내면은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상구박사가 엔돌핀 선풍을 일으킨 적이 있습니다. 우리 몸 안에 엔돌핀이라는 호르몬이 분비될 때 그것이 우리에게 자신감을 주고, 희망을 주고, 상상을 초월하는 능력을 발휘하게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전부 생리적인 영역입니다. 그런데 최근에 다이돌핀이라는 이론이 소개된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영역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믿음을 가졌을 때 같은 여건에서 신앙생활을 하지만 10배, 100배, 1000배의 일을 해 내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외형은 비슷하지만 내면에 주님을 사랑하는 뜨거운 믿음과 주 하나님께 감사할 줄 아는 믿음을 가지면 이것을 못 가진 사람보다 몇 백배, 몇 천배의 능력을 일으킬 수 있다는 이론입니다. 여러분들은 다이돌핀으로 충만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주를 위해서 큰일을 무엇으로 합니까? 주님을 사랑하는 믿음으로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랑함이 많은 자는 많이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랑의 분량입니다. 믿음의 분량입니다. 이 분량이 있어야만 우리가 주를 위해 행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근원

  2002년 3월에 우리는 건축헌금을 작정했습니다. 24억원이 작정되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큰 돈입니다. 여러분들은 그 내용을 알지 못하겠지만 저는 담임목사로서 성도들이 헌금한 것을 보고 하나님 앞에 감사의 기도를 드린 바가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참으로 이해할 수 없이 너무나 큰 헌금을 힘에 지나도록 한 분들이 여러 명이 있습니다. 자랑할 만한 큰 집도 없는 사람이고, 외형적으로 볼 때 별 수입도 없는 사람입니다. 큰 여유도 없는 사람인데도 힘에 지나도록 큰 헌금을 한 손길들이 여럿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의 헌금이 모여 24억원이 된 것입니다. 여건이 갖추어져 있어도 주님을 사랑할 줄 모르면 주를 섬길 줄 모릅니다. 몇 배의 좋은 조건에 있어도 헌금은 푼돈으로 하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여러분, 주님을 사랑하는 믿음, 교회를 사랑하는 믿음, 우리가 자식을 향해서 그토록 큰 희생을 하고도 아깝지 않은 것은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 때문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다이돌핀의 역사가 우리 안에 일어나길 바랍니다. 이것이 일어날 때 몇 배의 큰일을 합니다. 나이가 겨우 30안팎의 젊은 분들이 놀라운 건축헌금을 드린 것을 보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자기도 지금 자기 모습을 갖추지 못했는데 어떻게 이런 큰 희생을 하는가? 교회를 위해 큰 헌신을 하는 것은 그들 마음속에 있는 주님을 사랑하는 믿음이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우리의 바탕이 중요합니다. 물 근원을 치유해야만 여리고의 농사를 치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신앙생활의 갈등이 있거든 물 근원을 찾으십시오. 오늘 나의 갈등이 무엇인가? 내 신앙생활의 근원이 무엇인가? 거기에 대해서 치유가 있어야 합니다. 여리고 사람들은 과실이 익지 않고 떨어지는 원인을 알았습니다. 물 근원을 찾았습니다. 문제의 근본을 찾았습니다. 거기에서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내 신앙생활의 근원을 붙잡고 근원의 맥을 붙잡고 기도하고 회개하고 매달려야만 치유가 일어납니다.

  물의 회복처럼

  소금을 던졌습니다. 소금은 부패를 막아주고, 음식 맛을 내게 하고, 치유를 일으키는 역할을 합니다. 소금이 던져지는 것은 상징적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소금을 던진 것도 엘리사가 던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던진 것입니다. 물은 엘리사가 고쳤습니다. 엘리사가 소금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엘리사의 증언은 여호와의 말씀으로 치유되었고, 여호와가 말씀하는 바를 내가 순종함으로 치유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위로부터 말씀하시는 계시와 그 말씀에 순종하는 나의 응답이 합해질 때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엘리사가 순종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응답입니다. 이 말씀의 역사와 엘리사의 순종은 물을 치유하는 능력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예배드리러 나왔습니다. 이것은 매우 훌륭한 신앙의 표현입니다. 아침에 제가 일찍 오니 교문 앞에 관광버스가 3대가 서 있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그 버스를 타고 단풍놀이 가려고 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좋은 날씨에 단풍놀이 가지 않고 여기에 오신 것은 우리의 믿음의 표현입니다. 오늘 여기서 예배드리고 있는 것 자체가 믿음의 표현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오늘 주일을 알게 하고 여기에 나아와 예배를 드리게 한 그 바탕이 더 중요합니다. 무엇이 나를 오늘 여기 오게 했는가? 무엇이 나를 예배드리게 하는가? 그것은 주님을 향한 구원에 대한 감사요, 주님을 사랑하는 우리의 믿음 때문에 우리를 여기 오게 한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배 마치고 나가면서 인사합니다. 인사는 반드시 주고받는 것입니다. 인사를 받기만 하고 지나치면 인사를 한 사람에게 큰 결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축도하고 나면 날쌔게 예배당을 나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 성도 중에는 직장에서 주일날 휴일이 아닌데 예배시간만 허락을 받고 예배드리고 가는 분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예배 마치고 바로 가셔야 하는 특수한 예입니다. 그렇지도 않는 분들인데 쏜살같이 나가는 분이 있습니다. 여러분, 교제라는 것은 내가 남의 것을 보았으면 내 것도 보여주는 것이 교제입니다. 여러분들이 교회에 와서 자기를 너무 숨기려 하지 마십시오. 나는 남의 것 다 보면서 왜 내 모습은 감추려고 합니까? 여러분, 우리 성도들이 성도로서 교제한다면 내 약점도 너무 크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성도들은 남의 약점도 친구처럼 보아줄 줄 아는 넓은 마음을 가지십시오. 성도들은 남 앞에 자기를 보여주는 측면이 있어야 합니다. 보여주기 위해서 전도회를 하는 것이고, 보여주기 위해서 구역예배 하는 것이고, 보여주기 위해서 교회에 와서 섬기는 것입니다. 나를 교인들 앞에 보여주는 것이 교제입니다. 거기서 믿음이 자라갑니다. 거기에 우리 신앙의 갈등이 치유됩니다.

  믿음의 응답

  우리는 신앙생활을 통해서 교회가 하는 일마다 참여를 해야 합니다. 시간을 내어서 참여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시간을 내지 못하면 기도라도 참여해야 합니다. 기도하면서 참여하고, 회비로서 참여하고, 얼마든지 참여할 수 있습니다. 선교사로 직접가지 못하면 선교사를 위해 기도하고, 선교회비를 내서 선교를 도우면서 참여하십시오. 내 것을 보여 주십시오. 거기에서 하나님의 치유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성령은 우리의 삶 속에 축복하십니다. 하나님의 모든 일과 담을 쌓고 나는 3부예배만 드린 것으로 주일 지켰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에 나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교회의 관심사에 나 자신을 보여야 합니다. 거기에서 물 근원이 치유되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 성도들 중에서 수술 받으신 분들이 여러분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 은혜로 병 낫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약을 사용하지 않았는데도, 수술하지 않았는데도, 치료를 안 받았는데도 병이 낫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저는 병원에 환자들을 보러 가면 감사기도가 나옵니다. ‘주님, 이런 좋은 병원을 만나게 된 것을 감사합니다. 이런 좋은 의사를 만나게 된 것 감사합니다. 이렇게 좋은 약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을 감사합니다. 그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의사가 수술할 때 우리는 의사가 치료하는 줄 압니다. 의사가 수술할 때 멀쩡한 우리 배를 자릅니다. 가만히 있는 나를 휘저어 우리 내장을 새로 작업하는 것이 수술입니다. 물론 기술에 의해서 그렇게 해야만 병이 낫는 의술에 근거해서 합니다. 실제적으로는 우리 몸을 휘젓는 것이 의술입니다. 수술은 절대 병을 낫게 하지 못하고, 의사도 절대 병을 낫게 하지 못합니다. 환자가 고독하게 혼자 투병을 해야 합니다. 마취가 깨어난 후에 고통도 환자가 참아야 합니다. 수술한 의사가 참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수술 한 후에 살이 돋아나는 것도 환자 자신의 몫입니다. 환자 자신이 면역성을 가지고, 정신력을 가지고, 주 하나님께 생명을 맡기고 인내하면서 우리 안에 면역성이 발동하고 우리 안에 살이 돋아 오르고 내 몸 안에서 병을 이기는 역사가 일어나야 회복이 되는 것입니다. 의사가 수술하고 나가버린다고, 수술실을 나온다고 환자가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중환자실에서 간병인이 물을 먹여주고 식사를 먹입니다. 그것은 남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소화는 간병인이 대신 못해줍니다. 소화는 환자 자신이 해야 합니다. 먹여주는 것은 남이 해도 모든 몫은 환자 자신의 몫입니다.

  소금을 뿌리고 병을 치유하는 역사는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주 하나님의 능력은 물을 고치는 능력으로 나타나지만 물을 고치기 위해서는 물 근원이 잘못된 것을 정확하게 알아야 하고 거기에 말씀대로 소금을 뿌리는 엘리사의 순종이 따랐기 때문에 물은 치유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신앙생활의 원리가 이렇게 간단합니다. 치유의 근원이 무엇입니까? 치유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를 보면 말로 못하는 문제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신용불량자가 400만명이 넘었는데 그중에서 160만명은 해결을 해 주어도 또 불량자가 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망가져 있다는 것입니다. 돈으로 망가졌지만 돈으로 해결해 주어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면 모두 돈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러나 그 돈 때문에 인간성이 망가져 버렸습니다. 우리 내면이 망가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돈으로 해결을 해 주어도 인간의 행복을 유지할 줄 모르는 인간으로 전락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맺는 말

  수많은 사람들이 자살로 죽어갑니다. 가정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흉악범이 상상할 수 없이 자꾸만 늘어갑니다. 심적으로 너무 불안해서 열쇠를 이중장치를 하지 않고는 잠을 잘 수 없습니다. 실제로 너무 많은 사람들이 사소한 좀도둑을 당하고 삽니다. 우리사회의 현실입니다. 언제 우리가 마음을 열고 이런 것을 염려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될까? 2만불, 3만불은 절대로 행복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비록 국민소득 천불시대를 산다 하더라도 열쇠없이 사는 세상이라면 거기에 아마도 더 큰 행복과 만족이 있을 줄 압니다.

  하나님이 고치시는 역사, 여러분 신앙생활의 근원을 한번 살핍시다. 여러분의 삶의 근원을 점검하십시오. 거기에 물이 고장 나 있으면 물을 고쳐야 합니다. 우리 신앙의 근원을 고쳐야 합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축복과 영광이 함께 있는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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