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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분노를 극복하는 지혜 (삼상 17: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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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황요한 목사

11월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열두달중에 이제 두달을 남기고 있는데, 남은 두달이 지난 열달보다 더 보람되고 더 소중한 남은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달 밖에 안 남았네, 그리고 남은 두달을 소홀히 여기고 새해부터 잘 해야지. 그런 분은 없기를 바랍니다. 그런 마음을 가졌다면 지난 열달도 앞으로 주어지는 새 달도 그에게는 별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에 온전히 붙잡혀서 하나님의 일꾼으로서의 온전한 쓰임을 받는 여러분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엘라골짜기에서 이스라엘 군대가 항오를 벌이고 서로 싸움을 돋우면서 고함을 치고, 전
쟁의 험악한 분위기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외형적으로는 두 군대가 항오를 벌이고, 각각 산등성을 등에 지고, 골짜기를 바라보면서 전쟁의 모습을 갖추었지만, 내적으로 들여다보면 이것은 일방적인 전쟁이었습니다. 이제 곧 한 쪽은 무너질 것 같은, 한 쪽은 삼킬 것 같은 그런 분위기였습니다. 한 쪽은 사기가 충천해 있었고, 한 쪽은 사기가 땅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블레셋 진영에서 가드 사람 골리앗이 나와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모욕하고, 그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고 있는 동안에 이스라엘 진영에서는 어느 누구도 대항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평소에 이스라엘의 법을 보면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는 것만으로도 성전에 이방인이 발걸음을 들인 것만으로도 그들은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바울사도께서 1,2,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려고 그럴 때에 에베소의 장로들과 수많은 기도의 사람들이 당신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면 환란과 핍박이 기다리고 있다고 하면서 돌아가지 않기를 원했지만,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것은 환란과 핍박을 모르게 때문이 아니라 알지만 내가 선교의 중심, 곧 로마로 가기 위해서 내가 예루살렘으로 가야 하리라고 자원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서 그는 환란과 핍박을 견디었고, 많이 당했습니다.

예루살렘에 도착한 사도 바울을 유대인들이 고소한 고소의 제목 중에 하나가 이방인을 예루살렘 성전에 발을 들이게 했다고 하는 제목이었는데, 우리로 보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그들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일이었어요. 바울은 체포가 되었고, 감옥에서 재판을 기다리면서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겪게 됩니다.

그만큼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거나 성전을 모욕한다고 하는 것은 목숨을 내 놓아야 할만한 큰 일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의 사람들이 가드 사람 골리앗이 사실은 하나님을 모욕하고,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지만, 이번에는 웬일인지 분노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나라의 장수로 높임 받은 엘리트 군인들도 아무도 나서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분노를 부추기기 위해서 그들의 의욕과 전쟁에 대한 열정을 북돋우기 위해서 사울왕은 세 가지를 제시했습니다. 이 싸움에서 이기게 하는 사람에게는 많은 재산을 주겠노라고 그랬습니다. 두 번째로 그 사람을 자기의 사위로 삼겠다는 것입니다. 출세는 보장이 되는 것이지요. 마지막으로 그 사람의 부모의 가정은 자유하게 하리라. 그 자유하게 하리라는 의미는 모든 세금을 면제하여 주리라 하는 뜻입니다.

이렇게 엄청난 보상을 공약으로 내세웠지만 아무도 골리앗을 대항해서 나가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미 골리앗은 이스라엘 진영의 어떤 싸움의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다 싸울 것 없이 나는 블레셋의 대표로 나왔으니까, 이스라엘 중에 누구 한 사람 대표로 나와서 나와 싸움으로 한 번 겨루어보자. 이기는 자는 지는 자의 노예로 삼자. 내가 지면 블레셋이 이스라엘이 블레셋의 노예가 되고, 이스라엘이 지면 이스라엘이 노예가 되는 것이다.

국가의 운명을 걸고 한 판 벌이자고 골리앗이 이야기 하지만, 아무도 대항하지 않았습니다. 평소 같으면 작은 일에도 분노하던 그들입니다. 평소 같으면 조금만 상처만 받아도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도 분노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다윗은 아버지의 심부름을 받았습니다. 위의 형 세사람이 장군으로 있는 전쟁터에 안부를 묻고 오라는 것입니다. 빵과 치즈를 가지고 전쟁터에 가서 형들을 만나서 안부를 물었습니다. 당연히 전쟁터에서 지금까지 이스라엘을 의지하던 하나님의 군대라면 과거의 블레셋은 싸움의 대상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분위기가 이상했습니다. 한 쪽에 와서 가만히 들어보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모욕하는 소리가 귀에 쩡쩡거리지만, 이상하게도 이스라엘 자손 중에 움직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하고 물었을 때, 사람들이 왕이 여차저차히 이런 보상을 제시했지만, 어느 누구도 싸우는 사람이 없노라고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오히려 모욕을 당하면서도 이스라엘 군사들의 반응을 보면 24절, 25절 세가지로 볼 수 있었습니다. 한 그룹들은 심히 두려워서 어쩔 줄 몰랐습니다. 이번 싸움에 우리가 잘 못 나온 것이다. 우리가 군대로 오지 않았어야 하는데 잘 못 온 것이다. 두려워서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블레셋 군대 앞에서 도망치는 군사들도 생기기 시작을 했습니다. 더러는 이스라엘을 블레셋이 모욕하고 있다고, 골리앗이 모욕하고 있다고, 분개하는 정도였습니다. 이미 이스라엘 진영의 싸움은 끝이 난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우리 군사하고 아무리 엄청난 포상을 제시했더라도 그들에게는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을 보면서 다윗에게 분노가 생겼습니다. 저는 이 분노를 거룩한 분노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평소에 분을 잘 내는 사람들도 그 분을 내는 동기를 보면 주로 이기적인 것입니다. 내 자존심을 건드렸다든지, 나를 우습게 생각했다든지 이런 것 때문에는 분노합니다.

성도들 관계도 이런 저런 말실수 때문에 서로 다투기도 하고, 속회를 안나오기도 하고, 심지어는 교회를 나오니, 안 나오니, 그런 소리를 들을 때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 정도로 심각한 일인가 들어보면 우습기 짝이 없는 이야기예요. 꼭 애들 장난 같은 일들이 어른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유치하지요?

우리의 분노의 동기가 알고 보면 굉장히 유치한 수준입니다. 여러분들은 교회생활 하면서 분노를 가졌을 때, 그 분노의 동기가 어떤 것들이었습니까? 거룩한 분노를 가지셨습니까? 정작 하나님을 모욕하는 이 엄청난 현실 앞에서는 그들은 분노하지 않았습니다.

형들을 위로하고 안부를 엿보러 왔던 다윗의 분노가 형들에게 전해지고, 왕에게 전해졌습니다. 다윗의 분노, 왜 다윗은 분노하고 있는가? 우리는 26절에서 두 마디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 누구관대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고 있느냐?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라고 하는 이 두 마디 속에 다윗의 현실인식을 우리는 잘 엿볼 수 있습니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하이데거는 말합니다. 실수로 나오는 언어는 거의 없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 우리의 실존 속에 내재되어 있던 생각과 사상들이 언어라고 하는 것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지금 다윗이 이런 고백을 한다고 하는 것은 다윗의 내재된 신앙이 어떤 것인가를 잘 알 수 있는 대목들입니다.

하나님과 상관없는 이방인이 감히 살아계신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할 수 있는가? 그냥 군대가 아닙니다. 여러분 잘 기억해야 할 것은 블레셋의 골리앗은 군대를 가리켜서 뭐라고 그랬느냐 하면 사울의 군대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 군대를 보는 시각이 달랐어요. 사울의 군대가 아니라 하나님의 군대라고 이야기를 했어요. 이것은 엄청난 차이입니다.

오늘 아침 1부를 마치고, 새가족 양육공부가 있었습니다. 교회에 대해서 공부했어요.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의 머리는 누구인가? 교회의 주인은 누구인가? 교회의 주인은 김경원장로님이다. O,X. 그런데 우리 새가족들이 고민해요. 아, 누가 주인이지? 교회의 주인은 황요한목사다. 뭐가 맞지? 교회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신 줄 믿습니다.

군대가 사울의 군대가 아니라 하나님의 군대라고 보고 있는 이 다윗의 시각을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군대를 이야기 할 때 사울의 군대들아, 들어라. 사울의 군대들아 나하고 한 판 해보자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지만, 다윗은 아니었어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는 저 골리앗을 내가 그냥 넘어갈 수 없다라는 거예요. 다윗의 분노에는 분명한 동기가 있었습니다.

제가 저번 주 사무엘상 17장을 시작하면서 이 내용이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라고 하는 전제로 가지고 있던 우리의 기본적인 생각을 벗어버리자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싸움이 어떤 싸움인가를 제가 다음다음주에 계속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하여 싸우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 하나님이 다윗편을 들어준 것이 아닙니다. 이 정도 이야기 하면 60점 정도 밖에 안 됩니다. 그냥 과목 낙제 겨우 면할 정도입니다. 교회학교 정도에서 수준입니다. 이 자리에서는 그 정도에 성경적 해석을 가지고 있으면 안됩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 아니예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 하나님이 편들어 준 것이 아니예요.

골리앗 사건의 핵심은 지금 다윗이 분노하고 있는 이 분노의 핵심은 결국 하나님에 대한 모욕에서부터 다윗의 분노가 시작됐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싸움을 걸고 있는 거예요. 골리앗은 사울에게, 혹은 이스라엘 군대에게, 혹은 다윗에게 싸움을 걸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골리앗은 싸움을 걸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 싸움은 곧 하나님의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45절에 다윗의 고백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제 골리앗과 다윗이 마주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 앞에서 선포합니다. 나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노라. 그리고 조금더 분명하게 자기의 정체성을 말합니다. 나는 네가 모욕한 하나님의 이름으로 가노라.

사울왕 앞에 다윗이 불림을 당합니다. 모두가 기 죽어서 엄청난 보상을 제시했지만, 장수들조차도 나갈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은데, 어떤 젊은이가 나가겠다고 하니까 왕에게 그 소리가 들리고, 왕이 그를 불렀습니다. 모르는 사람은 아니지요? 이미 다윗은 사울왕에게 음악치료에 효과를 보게 했던 사람입니다.

고맙지요? 아무도 나가려고 하지 않은 험한 자리, 어쩌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자리에 다윗이 나가야 한다고 하니까 아직 군대는 소집을 받지 않을 그 나이, 18세에서 60세가 장정으로 소집을 받아야 하는 이 상황에서 아직 소집이 이른 청소년인 다윗이 나가겠다고 하니까 왕은 고마웠습니다.

사실은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는 골리앗을 보면서 그는 내가 나갈 수 있겠느냐? 하고 말했을 때, 다윗은 왕 앞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36절입니다.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내가 못 나가야 하는 이유가 뭡니까? 내가 나가야 합니다. 내가 살아있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바로 그 믿음이 살아있는 믿음이라면 지금 이 믿음을 써야 할 때가 아닙니까?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믿음은 적절할 때 사용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전가의 보도라도 전쟁터에서 그 칼을 가지고 나가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 믿음이 있노라 하면서 정작 믿음을 사용해야 할 때, 믿음을 사용하지 못할 때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여러분들에게 믿음이 있습니까? 여러분들의 믿음이 있다면 적절한 곳에 여러분이 쓸 수 있는 용기와 결단을 가지고 있습니까? 오늘 말씀의 제목은 분노를 극복하는 지혜라고 그랬는데, 다른 말로 하면 분노를 사용하는 용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지혜와 용기는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 하나님을 모욕하는 사람들 앞에 여러분들이 분노할 수 있고, 여러분의 생명을 걸고 믿음을 가지고 나아갈 수 있느냐 하는 것이지요.

다윗이 분노하고 있는 동안 또 한사람이 분노했습니다. 28절을 보겠습니다. 장형 엘리압이 다윗의 사람들에게 하는 말을 들은지라. 다윗에게 노를 발하여 가로되 내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 너 양치라고 양을 맡겼더니 너 도대체 뭐하고 있는거냐? 지금 이 전쟁터에 올 수 있는 그런 사람이냐? 양이나 치고 있지. 도대체 그 양은 누구에게 맡기고 이 전쟁터로 왔느냐 그 말이지요. 나는 네 교만과 네 완악함을 안다.

우리는 이런 장면을 가리켜서 적반하장이라고 그럽니다. 다윗에게서 어찌 그런 표현이 적절하겠습니까? 다윗의 교만과 완악함이라고 하는 단어가 다윗의 인격에 어울리기나 하는 말입니까? 그런데 장형 엘리압은 다윗을 억누르기 위해서 어울리지도 않는 말을 가져다가 쓰고 있습니다.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 사실 징집대상은 아닌 다윗이지만, 다윗에게는 거룩한 분노가 있었습니다. 사실은 다윗이 분노해야 할 것이 아니지요. 누가 분노해야 합니까? 사울왕이 분노해야 하고, 장형 엘리압을 비롯해서 장군들이 분노해야 하고, 이스라엘의 군대가 분노해야 하는데, 정작 분노해야 할 사람들은 침묵을 지키고 있지요.

주님은 뭐라고 그럽니까? 너희가 입을 열어 주를 그리스도라 일컫어 증거하지 않으면 내가 돌들을 들어서 증거하리라. 지금 다윗은 하나님이 비유하신 돌입니다. 정작 분노해야할 사람들이 분노하지 못하고 있으니까 하나님께서는 징집대상도 안 되는 다윗을 통해서 분노케 하시는 거예요. 그런 다윗을 보고 큰형 엘리압이 분노하고 있습니다. 책망하고 있어요.

성도여러분, 우리가 이런 현실을 교회에 적용해보면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이 장형 엘리압은 교회 생활에서 오래된 사람을 말할 수 있습니다. 기득권을 가진 사람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거룩한 분노를 가지고 아직 세상적으로 연령적으로 외적으로 부족하지만, 주를 향한 열정을 가지고 헌신해 보겠다고 할 때에 책망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동맥경화에 걸린 사람들처럼 교회 조직이 그렇게 막혀 있으면 곤란합니다. 1년이 되었더라도 속장이 될 수 있고, 강사가 될 수 있고, 교사를 할 수 있고, 성가대를 할 수 있고, 선교회장도 할 수 있는 거예요. 어떤 교회 요직도 녹녹히 할 수 있는 열린교회.

교회가 교회답지 못한 것 중에 하나는 이런 엘리압과 같은 존재가 도처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다윗과 같은 열정의 싹을 처음부터 짤라 버리는 거지요. 새로운 사람들이 조금 열심히 하려고 그러면 거의 고정된 문장이지요. 지가 온 지 몇 년이나 됐다고? 지가 온 지 얼마나 됐다고? 그러면서 한 마디로 그 의욕을 짤라 버립니다.

많이 쓰이는 말이 있지요?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빼낸다. 그러면서 새로운 사람들이 헌신과 열정을 가지면 눈치를 주고, 부담을 주고, 책망을 해서 분위기를 떨어뜨려요. 어휴, 여기서는 일 하면 안 되겠네. 그럼 시름시름 앓다가 여긴 내 자리가 아닌가 보다 하면서 교회를 떠납니다.

이 교회 안에도 기득권이라고 하는 좋지 못한 분위기가 자리 잡으면 교회는 동맥경화에 걸려요. 결국 죽는 것입니다. 교회가 죽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들이, 특별히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 속에 쓰임 받는 그런 기회를 주실 때에 우리는 머뭇거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래서 다윗이 마지막절 29절에서 항변하는 의사표시를 봅니다. 어찌 이유가 없으리이까. 다윗이 하나님의 일꾼으로 쓰임받기 위해서 넘어야 할 산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산은 다름이 아니라 엘리압이었습니다. 엘리압을 극복하지 못하고서는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 앞에 장형 엘리압과 같은 존재들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나는 우리 선교회에서 누구 때문에 나는 못 하겠어. 분명히 여러분의 사역에 걸림돌이 되는 엘리압 같은 존재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는 멋진 갑옷을 입고, 태양 빛에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위세를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정작 전쟁에서 필요로 할 때는 침묵을 지키는 무력한 존재에 불과했습니다.

우리가 이 엘리압을 극복하지 못하면 우리는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습니다. 엘리압이 없는 곳으로 가서 일한다고요? 이 세상 어디에 가도 엘리압 없는 곳은 없습니다. 가정에서도 신앙생활 제대로 하려고 하면 가정내 엘리압도 있어요. 교회 안에서도 있습니다. 이 사회 안에서도 있습니다.

다윗은 엘리압을 두려워 하지 않았습니다. 어찌 이유가 없겠습니까? 내가 분노해야 할 이유 분명히 있습니다. 한 번 들어보실래요? 다윗은 분명하게 자신의 분노에 대한 이유를 이야기 했습니다. 사실 이 엘리압 큰형은 이 막내 다윗을 얼마나 무시했는지, 너 집에서 양이나 치고 있지. 전쟁을 구경하러 왔냐고 했지만, 사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종 사무엘은 다윗을 기름을 부어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인정해 주셨는데, 주의 종은 인정해 주었는데, 왜 여러분들은 인정하지 못합니까? 우리 교회도 점점 젊어져야 합니다. 많이 늙어 있어요. 권사는 30세 이상이면 가능하고, 장로는 35세 이상이면 가능합니다. 40세쯤 된 분을 권사로 세우려고 하면 아유, 새파랗게 젊은 사람을 무슨 권사야.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면, 죄송합니다. 평안의 교인 될 자격이 없습니다.

그 법은 벌써 수십년 전에 세운 법입니다. 우리 감리교회가 얼마나 앞서가는지 몰라요. 권사를 30세 이상, 그것도 남녀를 구별하지 않고, 보수라고 하는 장로교단들이 권사하면서 여자만 주고, 그것도 45세, 50세라고 헌법에 딱 못을 박았다가 요즘에 와서 헌법 개정들을 했어요. 그래서 우리도 감리교회처럼 권사들을 젊은 사람들을 세우자 해서 헌법들을 개정해서 이제는 35세, 30세로 다 앞으로 당겼습니다.

얼마나 우리가 앞서가고 있는지 아십니까? 앞서가는지도 모르고 새파란 사람들이 권사냐고, 뒤떨어진 뒷북 치는 사람들이 있다면 분명히 그는 평안의 교회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생각도 젊어야 하고, 우리의 삶도 젊어야 합니다.

지금 이 다윗을 책망하는 엘리압, 나이가 들만큼 들었고, 지위도 가질 만큼 가졌지만,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거지요. 하나님은 이제 이 다윗을 당신의 전쟁에 귀중한 도구로 사용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본문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들의 심령 속에 자신의 이기심을 위한 분노는 억제할 수록 좋아요. 성을 빼앗는 장수보다 마음을 지키는 자가 더 귀하고 강하다고 그랬습니다. 이기적인 부분일수록 우리는 분노를 억제해야 합니다. 이 사회 생활에서 얼마나 자신의 분노를 다스릴 수 있느냐가 성공의 지름길이기도 합니다. 한번 딱 엎어 놓고서 뒤돌면 끝이지요? 그런 사람은 사회 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의 남편들이 직장에서 얼마나 많은 모욕과 멸시를 당하면서 다시 가정을 향해 돌아오면서 내일 출근을 위해서 다짐하고 있는 줄 아십니까? 격려해야 합니다. 이 사회속에서 견뎌나가기 위해서 참고 견뎌 나갑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는 이보다 한결 더 다른 분노를 말하고 있습니다.

엘리압이 가졌던 그 세속적인 시기와 편견이 담겨진 그런 분노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열정에서 오는 다윗의 분노가 여러분들 삶 속에 중요한 동기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가 충성할 수 있는 이유, 내가 헌신해야 할 동기가 어디에 있냐고 하는 것이지요. 이 거룩한 분노가 여러분들 삶의 원동력이 되기를 다시 한번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할례없는 블레셋 사람이 누구관대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느냐며, 분노했던 다윗을 생각합니다. 이기적인 일에 분노하기 좋아했던, 분노하기 쉬웠던 우리들의 연약한 모습들을 회개하고, 하나님을 위하여 생명이라도 걸 수 있을 만한 진정한 헌신에 사람들이 이 평안의 제단을 지키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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