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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생을 기쁨으로 채우라 (시 9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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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한용근 목사

  어느 목사님이 주일에 천국의 아름다움과 그곳에서 누릴 행복과 평화에 대해 설교를 했습니다. 그 후에 설교의 마지막 부분에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자 여러분, 이처럼 좋은 천국에 장차 가기를 원하시는 분은 어디 한 번 솔직하게 손을 높이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 자리에 참석한 교인 전부가 너나 할 것 없이 손을 높이 들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난 목사님은 그분들에게 다시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가운데 저 좋은 천국에 지금 당장 가시기를 원하시는 분은 다시 한 번 손을 높이 들어 주십시오.”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서로 얼굴만 처다 볼 뿐 손을 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답니다.

  이 모습이 바로 우리 자신들의 모습일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천국 갈 마음이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 갈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지금 당장 가지 않고 하루의 생명을 호흡하며 평안히 이 세상에 조금이라도 더 머물고 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인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인생들이 기쁨으로 가득하고 감사가 넘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어떻게 항상 기뻐하고 항상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그 첫째는 우리 자신 속에 있는 죄의 문제가 해결 되어야 합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예수님의 조상들을 보면 이 사람들이 정말 의로운 사람들인가 의심스러울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의 가문을 유다 지파의 가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유다가 어떤 사람입니까? 그 사람은 며느리 다말을 창녀라고 생각하고 동침한 사람입니다. 그 시아버지와 동침해서 낳은 자식이 베레스라는 자녀입니다. 그 베레스가 예수님의 조상 중의 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족보 중에 라합이라는 여자가 나오고 있습니다. 라합이라는 여자는 가나안 땅에 살고 있었던 이방여인이었습니다. 그녀의 직업은 술을 팔고 몸을 파는 술집여인이요 창부였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을 통해서 보아스라는 사람이 태어났습니다. 보아스는 예수님의 조상에 있습니다. 이 보아스는 다윗의 할아버지입니다. 그 보아스의 어머니가 유명한 룻입니다. 룻은 모압지방의 여인으로서 한번 가정에 실패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다윗의 할아버지인 보아스를 두 번째 남편으로 맞이한 재혼녀였습니다. 흔히 성경은 예수님을 다윗의 후손이라고 말합니다. 다윗의 후손으로는 솔로몬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솔로몬의 계보를 통해 오셨습니다. 솔로몬의 어머니는 누구입니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입니다. 다윗은 어려서는 목동이었고, 젊어서는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 왕을 피해 동굴 생활을 하는 나그네였습니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을 때 젊은 여인이 목욕하는 모습을 보고 그만 육신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고 말았습니다. 그 여자의 남편은 자신을 위해 생명을 다해 충성하는 우리아라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죄를 짓고 그 죄를 감추려고 했습니다. 자신의 충성된 신하를 불러 들여 그 여인과 동침하도록 유혹했습니다. 그의 계략이 실패하자 그는 그 충성된 우리아를 계획적으로 치열한 전쟁터의 선봉장으로 내 보내 살해하는 잔인함을 드러냈습니다.

  유다나 라합이나 룻이나 다윗 모두는 인생의 실패자였습니다. 그들의 가슴에는 큰 상처와 고통과 아픔이 있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사람들이 모두 특별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만일 우리들이 따를 수 없는 아주 특별함이 그들에게 있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의 조상들을 보면 결코 의인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 공통점은 모두는 실패자요 패배자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들이 그토록 큰 명성을 얻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그들의 실패한 인생 뒤에 철저한 회개의 눈물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결코 죄로 인해오는 두려움과 공포감 그리고 수치심과 자책감과 같은 것으로 넘어지지 않고, 그 자리에서 일어나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였습니다.

  죄는 우리를 고통스럽게 합니다. 아프게 만듭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두려움과 공포심과 수치심을 우리 속에 둡니다. 우리는 여기서 끝나면 안 됩니다. 가룟 유다도 예수님을 배반했지만, 예수님과 함께 죽을 것이라고 그렇게 맹세하던 베드로도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베드로와 가룟 유다의 차이는 바로 회개입니다. 유다는 수치심을 가졌습니다. 양심의 고통스러운 소리를 들었습니다. 자책감이 그를 사로잡았습니다. 이것은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다는 은 30냥을 집어 던지고 밧줄을 잡고 나무에 목을 걸었습니다. 베드로는 심히 통곡하며 가슴을 치면서 자신의 연약함을 회개했습니다. 베드로 역시 나무에 매달려 죽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죽었지만, 주님 앞에 부끄러워 거꾸로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유다는 자신의 매달린 나무가 부러지면서 창자가 터져 뱃속에서 흘러나와 땅을 적시는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선이나 의로움을 의지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의지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분의 희생과 보혈의 공로와 십자가의 피를 통해 구원에 이를 수 있음을 고백하며 그분을 자신의 주인으로 고백하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 앞에서는 살인자도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간음자도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겉과 속이 다른 이중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도 예수 십자가의 피를 통해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인생의 어떤 실패를 만난자도 그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능력이며 구원의 능력입니다. 문제는 내가 진실로 가슴을 찢으면서 회개하고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간음의 죄를 범한 후에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51:17). 마음에 평안이 없고, 마음에 기쁨이 없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그 십자가의 은혜를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신 분이 우리가 필요한 것을 더욱 채워주지 아니하시겠습니까? 문제는 우리가 죄에서 벗어나 가슴을 찢고 자신의 죄악에서 돌이켜 회개의 은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대학입시 수능시험을 치른 수험생을 둔 두 가정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시험이 크게 어려워서 인지 두 집의 자녀 모두가 성적이 아주 안 좋게 나왔습니다. 그런데, 한 가정은 기쁨이 넘쳤고, 한 가정은 가정불화가 심해 수험생이었던 딸이 가출해버렸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겠습니까? 가출한 집을 보면 시험을 망치고 시무룩해 집에 들어온 딸을 두고 부부싸움이 났습니다. 남편은 딸의 실패는 전적으로 아내의 책임이라고 따졌습니다. 아내 역시 왜 자신에게 모든 걸 뒤집어씌우느냐며 소리를 높였습니다. 안방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던 딸은 큰 소리로 “내가 나가면 될 것 아니냐”고 했습니다. 이 말에 화가 난 아버지는 “당장 없어져라”고 큰 소리로 나무랐습니다. 딸은 그길로 집을 나갔고 부모들은 이틀 뒤부터 딸을 찾느라 더 큰 걱정에 붙잡히게 되었습니다. 다른 한 집은 사정이 전혀 달랐습니다. 그 집 아들도 시험에 좋은 점수를 얻지 못했습니다. 시험을 친후 크게 낙심해 돌아온 아들에게 아버지가 “모든 게 이 아빠의 무관심 때문”이라며 기운을 내라고 아들을 격려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왜 당신 때문이에요. 집에서 아들을 잘못 보살핀 내 탓이지요”하고 거들었습니다. 그러자 아들은 부모님 앞에 무릎을 꿇고 “무능한 아들을 한번만 용서해 달라”고 눈물로 호소했습니다.

  다윗은 오늘 말씀을 통해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로 그를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 대저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오 모든 신위에 크신 왕이시로다”라고 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부족함을 잘 아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결함과 어그러짐과 마음의 가시와 고통을 잘 아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왕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쉴만한 그늘입니다. 그분의 상처 난 이들의 둥지이십니다. 목마른 사람들에게는 생명수가 되십니다. 우리가 기쁨을 가진다는 것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내 자신이 마음에 상처를 가진 인생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의 죄를 인정하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은 말할 수 없는 기쁨과 감사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기뻐하며 왕께 노래 부르리/ 소리 높여 할렐루야 부르리/ 주님 앞에 나와 찬양드리며/ 우리 주님과 함께 기뻐하리라/ 나의 창조자 나의 구원자/ 가장 귀한 나의 예수님 찬양합니다./ 나의 치료자 나의 선한 목자 되신 주/ 예수 나의 주 찬양하리”

둘째는 하나님이 만물의 주인시고 인생의 주인이심을 받아들이고 인정해야 기쁨과 감사가 넘쳐납니다. 우리는 4절부터 6절 사이에서 하나님께서 땅과 산과 바다와이 세상에 있는 모든 만물의 창조자 되신다는 고백을 볼 수 있습니다. 특별히, 7절에는 주님께서는 우리의 하나님시고 우리는 그분께서 기르는 백성이요 그 손에 있는 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금 좋은 곳으로 선한 것을 주시기 위해 인도하고 계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분명히 다윗은 시편 23편을 통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로 믿었습니다. 자신의 인생의 창조자로 믿었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길을 가도, 환난의 길을 가도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자로서 늘 지키심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날 때 그는 자신의 인생이 어디로 가야할 지를 몰랐지만 분명하게 그가 믿은 것이 있었다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에게 좋은 것을 이미 예비하고 계시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는 인생을 통해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체험하였습니다. 야곱이 삼촌 라반의 집을 향해 갈 때도 그는 장래와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심으로 자신이 형통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좋은 것을 예비하고 계시다.” 할렐루야!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렘 29:11). 다윗은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도소이다 내가 들어 말하고자 하나 주의 앞에 베풀 수도 없고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시40:5)고 했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은 셀 수 없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현재 뿐 아니라 미래에 대한 계획도 가지고 계십니다. 이 세상 삶 뿐 아니라 영원한 천국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기쁘고도 좋은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보이는 육신의 생활 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적인 삶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갖고 계십니다. 본문 7절에서도 우리는 여호와가 나의 하나님이 되시고 목자이며, 우리는 그분 손에 있는 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목자되신 하나님은 그분의 양들을 위해 아주 좋은 것을 준비해 놓고 계십니다. 이런 찬양이 있습니다. 

  “주님 내길 예비하시니 참 감사합니다. 주님 내 길 예비하시니 참 감사합니다. 여호와 이레 여호와 이레 주님 내 길 예비하시니 참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셋째는 마귀에게 미혹되어 마음이 강퍅하게 하지 말아야 기쁨과 감사가 있습니다. 마음이 강퍅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광야에서 40년을 지내는 동안 아침에는 만나를 낮은 구름기둥을 밤에는 불기둥으로 지키시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목이 마를 때는 반석에서 물이 나왔고, 그들이 광야를 걷기가 어려움을 아시고 그들의 발리 부릍지 않도록 하나님은 그들에게 신발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감사가 없었습니다. 광야의 삶을 살아가는 동안 늘 불평이 있었습니다. 늘 입만 열면 불평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조심해야 합니다. 민수기 14:28에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말을 하고 있습니까? 성공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긍정적인 말을 합니다. 믿음의 말을 합니다. 우리나라가 자살 율이 세계 헝가리, 일본, 핀란드에 이어 세계 4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가 그럴 만도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툭하면 “죽겠다”는 말을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배고파도 죽고, 배불러도 죽고, 힘들어도 죽고, 기뻐도 죽으니.... 그 말대로 죽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지금부터 언어를 바꾸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조금만 힘들면 죽겠다라고 했습니다. 배고파 죽겠다. 더워 죽겠다. 목말라 죽겠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그들은 그들의 말한대로 광야에서 모두 죽고, 오직 살겠다고 말한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약속의 땅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아무리 어려워도 죽겠다 죽겠다하면 안됩니다. 무조건 살겠다 살겠다해야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럼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죽겠다 죽겠다고 한 것일까요? 오늘 말씀에 보니 그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10절의 말씀에 보니 그들의 마음이 미혹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사탄이 와서 그 마음의 밭에 못된 가라지를 뿌렸기 때문입니다. 가라지 때문에 마음이 미혹되어 감사가 사라졌습니다. 기쁨이 사라졌습니다. 찬송이 사라졌습니다. 마귀는 우리의 마음에 불평의 가라지를 심습니다. 죄의 가라지를 심습니다. 마음을 아주 쇳덩이처럼 돌덩이처럼 단단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시편 37:4절에는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고 했습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라는 이 말씀을 NIV 영어 성경에는 “Delight yourself in the Lord and he will give you the desires of your heart”라고 했습니다. 즉, 주님 안에서 슬퍼도 괴로워도 기뻐하려고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의 마음을 강퍅하게 만들고, 마음을 병들게 하고, 어둡게 하는 모든 마귀의 세력과 더러운 귀신과 어둠의 영들이 이 시간에 모두 물러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찬양하겠습니다. “찬양하라 내 영혼아! 찬양하라 내 영혼아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내 찬양하라. 기뻐하라 내 영혼아!/ 감사하라 내 영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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