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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무엘이 여호와를 섬길 때 (삼상 3:1-9, 롬 13:11-13, 마 3: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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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오동 목사

1. 오늘 여러분은 하루중 대부분의 시간을 어디서 보내게 됩니까?

미국의 통계이긴 한데 우리와 비슷해서 한번 소개해 보겠습니다. 미국 가정의 98.3%가 텔레비전을 갖고 있는데, 가구 당 평균 2.2대를 보유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보통 한 가정에서 하루 7시간 이상 텔레비전을 켜놓고 있으며 한 사람이 대략 하루에 4시간 30분 정도 텔레비전을 시청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현실에서 청소년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기까지 학교에 있는 시간보다 텔레비전 앞에 있는 시간이 더 많다고 했습니다. 그 대신 매일 부모와 자녀가 함께 하는 가장 소중한 시간은 몇 분에서 심지어 몇 초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고전13:에 보면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여 본다(face to face)”는 말씀이 있습니다. 옛날에는 가족들이 함께 둘러앉아 얼굴을 마주보며 서로 이야기하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최소한 식사시간은 함께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들 가정에서는 서로 얼굴 마주 대하여 보기가 매우 어렵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가정 부재 내지 가정 해체의 위기가 있습니다.

최근에 이레서원에서 미르바 던이라는 사람이 쓴 「고귀한 시간 낭비」라는 책이 번역 출판되어 나왔습니다. 거기서 저자는 텔레비전이 끼치는 해악에 대하여 10가지를 지적했습니다. 그 중요한 몇 가지를 들어봅시다.

(1)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낭비한다는 것입니다. 교회 봉사에는 시간이 없다는 사람들도 텔레비전 앞에서는 마음놓고 앉아 있다고 합니다. 보통 교인들이 텔레비전 앞에서 보내는 시간이면 1년에 최소한 성경을 15번은 읽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2)텔레비전 시청은 우리의 상상력을 자라지 못하게 한다고 합니다. 그 결과 우리의 묵상 능력을 저하시키므로 우리 영성을 파괴하게 됩니다. (3)텔레비전을 많이 보는 아이는 그렇지 않은 아이보다 뇌가 작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로 덜 생각하게 하므로 우리 믿음에 파괴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고 합니다. (4)폭력과 성적 부도덕을 조장하며, 서로 친밀하게 되는 기술을 빼앗기 때문에 이 땅의 평화와 성도간의 교제를 파괴하게 된다고 합니다. (5)텔레비전은 탐욕을 조장하며 우리의 현실 감각을 둔하게 하여 소비 지향적이 되게 하고, 전도된 가치관을 심어주게 된다고 했습니다. (6)그리고 온갖 거짓 정보를 제공하고, 특히 종교에 대하여 피상적이고 편파적인 보도를 통하여 사람들 마음에서 종교심을 빼앗아 가게 된다고 합니다.

오늘 사무엘서 3:에 보면 “사무엘이....여호와를 섬겼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2:11과 18절에도 나옵니다. 특히 2:18에는 “사무엘이 하나님 앞에서 섬겼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텔레비전 앞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섬기는 일 즉 예배를 꼭 드려야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미르바 던의 이야기를 들어 보겠습니다.

(1)우리가 흔히 교회에 간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우리가 바로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교회로 사는 법을 배우기 위하여 예배하러 간다고 했습니다. (2)몸인 교회의 한 지체인 내가 예배에 참석하지 않으면 그만큼 교회가 잘 돌아가지 않기 때문에 지체된 본분을 다하기 위하여 예배에 가야한다고 했습니다. (3)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과 그의 은사에 관하여 많은 새로운 것을 배우게 되기 때문에 예배에 가야한다고 했습니다. (4)우리가 예배에 참석해야 하는 이유는 거기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5)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기 때문에 내가 예배에 참석하므로 다른 성도가 그만큼 유익을 얻게 된다고 했습니다. (6)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예배시간에 나를 필요로 하시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집에서 우리와 함께 하는 것을 그렇게 좋아하실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나는 지금 텔레비전 앞에 있는 것과 하나님 앞에 있는 것을 비교해서 말씀 드렸습니다. 요즈음 여러분은 주로 어디에서 시간을 보내십니까? 세상 것으로 대표되는 텔레비전 앞입니까 아니면 신령한 것으로 대표되는 하나님 앞입니까? 하나님께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듯이 오늘 여러분은 도대체 어디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가를 물으십니다.

2. 오늘 사무엘 3:을 보면 부패한 종교를 대변하는 엘리 가(家)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시대에 하나님께서 미리 준비하고 계신 한 사람 즉 사무엘의 성장 모습을 또한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여호와 이레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노아 홍수 때 온 세상이 다 망할 수밖에 없었으나 하나님은 경건한 의인 노아를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갈대아 우르를 위시하여 온 세상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 숭배에 빠져갈 때 하나님은 한 사람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를 가나안 땅으로 보내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바로 압제 아래서 전멸의 위기에 봉착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그 바로의 궁중에서 모세를 양육하도록 섭리하셨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지금 엘리 가로 대표되는 이스라엘 종교의 부패 현실 한 가운데 사무엘이라고 하는 한 아이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1절에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겼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준비를 말합니다. 이 아이를 통하여 하나님은 새 시대를 열어나가시므로 당시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현실 때문에 절망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은 가정적으로도 그렇고, 우리 교회에서도 그렇고, 그리고 국가적인 현실 또는 시대 상황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역사를 주장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종국적으로 하나님께서 승리하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현실에서 나는 어떠냐 하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께 용도 폐기 당하는 엘리 편에 서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이 사용하시기 위하여 성별 해 세운 사무엘 편에 서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옛날 엘리야 선지자가 850명의 바알 및 앗세라 선지자들과 대결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외친 말이 있습니다. “너희가 언제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려느냐? 오늘 너희 섬길 자를 택하라. 여호와가 하나님이면 그를 택하고 바알이 하나님이면 그를 택하라”고 촉구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여러분도 신앙의 태도를 확실하게 표명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엘리 당시 이스라엘 종교의 형편은 어떠했습니까?

(1) 오늘 삼상3:의 배경은 캄캄한 밤입니다. 다시 말하면 암흑시대입니다. 우리는 사사시대를 암흑시대라고 하는데 사무엘은 마지막 사사입니다. 우리가 중세기를 암흑시대라고 하는데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을 통하여 중세기 암흑시대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야말로 다른 모든 부면에서도 그렇지만 종교적으로도 암흑시대입니다. 특히 한국 교회 현실은 바로 그 중세기 암흑시대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가 교회다워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정체성을 확립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우리가 서야할 자리 우리 현주소를 “하나님 앞”으로 새롭게 정립해야 합니다.

(2)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였다”고 했습니다. 말씀이 없는 시대였습니다. 엘리의 자녀들을 보듯이 그들은 여호와의 말씀을 듣는데도 전하는데도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이러하였다면 일반 백성들이야 말할 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도 없었거니와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인 말라기 이후 400여 년 동안 이스라엘에는 선지자가 끊어졌습니다. 아모스 선지자가 예언한대로 양식이나 물이 없어서 기근 또는 기갈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근이 왔습니다. 그때 세례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했습니다.

중세기 천주교회를 부패하고 타락하게 만든 요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그들에게 말씀이 사라졌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가 심혈을 기울여 한 일이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나라 말로 번역하여 그 말씀을 일반 성도들의 귀에 들려 준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시대는 우리 찬송가 가사 대로 “외치는 자 많건 만은 생명수는 말라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일은 말씀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하고, 그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것만이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받는 비결입니다.

(3)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여기 “이상”은 영어로 “비전(vision)”입니다. 베드로가 오순절 날 설교할 때 성령이 임하시게 되면 젊은이들이 비전을 보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비전이 있습니까? 아니 지금 이 나라와 이 민족에게 어떤 비전이 있습니까? 우리 역사에서 오늘처럼 절망적인 시대가 그렇게 흔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잠언에 보면 “비전이 없으면 백성이 망한다”고 했습니다. 이 얼마나 두려운 말씀입니까?

그러면 교회는 어떠합니까? 오늘 교회가 이 민족에게 비전을 주고 있습니까? 오히려 교회가 세속 가치관에 빠져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염려하게 되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교회가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시대의 십자가를 교회가 져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시므로 절망 중에 빠진 온 인류에게 소망을 주셨습니다. 생명을 주셨습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사망이라는 절망적 현실을 이기시고 부활로 승리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비전입니다. 부활의 복음이 비전입니다. 온통 죽음의 세력이 뒤덮고 있는 이 땅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의 삶을 살고,  이 부활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2) 그런데 정말 답답한 현실은 엘리의 눈은 점점 어두워가고, 그 엘리는 지금 자기 처소에 누워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종교가 아예 그 역할을 포기해 버렸습니다. 눈이 어둡다고 하는 것은 물론 그가 노령이 되어 시력이 약화된 것을 말하지만 여기에는 상당한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교회가 앞을 내다보는 혜안을 갖지 못한 것을 말합니다. 눈앞의 이해에 집착해 버린 것을 말합니다. 노회나 총회에 가보십시오. 온 힘을 오직 자리 차지하기에 쏟고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있는 힘과 능력을 총동원합니다. 교인들이 하나님 앞에 헌금한 돈을 매우 부당한 방법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안건들은 귀찮고 힘든다고 뒤로 밀쳐버리거나 대강대강 넘겨 버립니다. 우리들 눈이 어두워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여기서 벗어나기 위하여 우리는 더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기 위하여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주여, 우리로 하여금 무익한 일들에 대하여는 눈을 어둡게 해주시고 신령한 일을 위해서는 우리 눈을 밝혀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3. 그러나 우리는 이런 현실에서도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볼 수 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라”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등불은 성령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이 아직 거두어지지 않은 것을 말합니다. 아직 우리 앞에 기회가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어린 사무엘이 그 성전에서 자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소망은 오직 이 사무엘에게 있습니다. 사무엘이야 말로 어려운 시대를 위하여 하나님이 마련해 놓으신 남은 백성입니다.

그런데 이 사무엘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저와 여러분이어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처럼 “누가 가겠느냐?”고 하실 때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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