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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화해의 기술 (창 4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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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피영민 목사

1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에게 자기를 알리니 때에 그와 함께 한 자가 없었더라 2 요셉이 방성대곡하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 3 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능히 대답하지 못하는지라 4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가로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5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 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6 이 땅에 이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년은 기경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7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

(서론)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중요한 세 가지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첫째는 하나님과의 계인 대신 관계입니다. 두 번째는 사람과의 관계인 대인 관계입니다. 셋째는 물질과의 관계인 대물 관계입니다. 우리 조상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이 세 가지 관계가 모두 파괴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고, 대인 관계에서 갈등과 다툼이 일어나게 되었고, 대물 관계에서도 땅이 저주를 받아 가시와 엉겅퀴를 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이 세 가지 관계가 회복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사람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친한 관계가 된 것입니다. 땅이 저주를 받아 가시와 엉겅퀴를 내었지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하늘에 아름다운 보고(寶庫)를 열어주셔서 물질의 축복을 부어주십니다. 반면에 가장 회복이 어려운 관계가 인간관계입니다. 깨어진 대인관계의 회복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려운 것입니다. 의외로 불신자들은 싸우다가도 갖가지 방법으로 풀기도 하고, 밖에 나가서 한바탕 치고받고 싸우기도 하면서 해결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 인간관계는 한 번 막히면 도무지 풀길이 없습니다. 오히려 시간이 더 지나면 관계가 더 악화되는 것을 자주 봅니다.

  인간관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는 구약성경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율법을 주셨는데 그 율법은 두 개의 돌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의 돌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규정하는 돌비요, 다른 하나는 인간과의 관계를 규정한 돌비입니다. 십계명 중에서 대신관계에 해당하는 계명은 네 개이고, 대인관계에 해당하는 계명은 여섯 개입니다. 비율로만 따져도 대인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대인관계의 회복이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그리고 하나님과 동행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깨어진 인간관계의 회복을 보는 것처럼 감동적인 것도 없을 것입니다. 남한과 북한의 이산가족이 만나는 장면을 볼 때 참 많이 울게 되는 경우를 봐도 그렇습니다.

  창세기 45장이 감동을 주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원수되었던 가족이 다시 만나 화해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장(章)에서 인간끼리의 화해의 기술을 배우게 됩니다. 그렇다면 인간관계의 회복은 어떻게 이루어지게 될까요?

1. 인간관계의 회복은 가해자 측의 회개가 있어야 한다.

  첫째, 인간관계의 회복은 해를 가한 가해자 측에서 먼저 회개가 있어야 됩니다. 즉 가해자는 회개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45장까지의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된 후, 가나안 땅에도 기근이 임하여 요셉의 형들이 양곡을 얻으러 왔습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양곡을 먼저 주지만 이들을 정탐꾼으로 몰아서 그들의 가족관계를 자세히 묻습니다. 그러자 형들이 “우리는 형제들이고, 아버지는 살아계시고 막내 동생이 있는데 그 동생은 두고 왔다”고 대답합니다. 막내 베냐민은 어머니 라헬에게서 난 친동생이 아닙니까? 그래서 요셉은 다음에 다시 올 때 막내 베냐민을 데리고 와야 정탐꾼의 누명을 벗겨 주겠다고 하면서 둘째 시므온을 결박해서 감옥에 가둡니다.

  반면 야곱의 집은 아들들이 처음 얻어온 양곡으로 살다가 그 양곡이 다 떨어지게 되어 큰일입니다. 그리고 다시 아들들이 돌아오자 양식의 문제는 해결 되었는데 둘째 시므온이 결박되어있고, 애굽의 총리가 베냐민이 오기를 원한다는 이야기에 아버지 야곱은 자기가 사랑하는 아내에게서 얻은 두 아들 중 하나는 이미 짐승에 찢겨 죽었는데 나머지 하나 베냐민마저 잘못될까 걱정이 되어 보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들들이 자기들의 생명과 자녀들의 생명을 담보로 잡고 베냐민의 생명을 보전해 오겠다고 약속을 하고 우여곡절 끝에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으로 가게 됩니다. 요셉은 동생 베냐민을 보자 마음이 타는 듯해서 방에 들어가 실컷 울고 마음을 정리한 후에 나와서 형들에게 음식을 주고 막내에게는 음식을 다섯 배나 주고 가지고 온 돈도 돌려보냅니다. 그런데 요셉은 한 가지 이상한 일을 합니다. 자기가 사용하던 은잔을 막내 베냐민의 자루에 집어넣은 것입니다. 잠시 후에 부하들을 보내 이들을 추격하게 합니다.

그리고 이들을 도적으로 몹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우리 주인의 쓰시는 은잔을 도적질하였느냐!” 그러자 형들이 “어찌 그럴 수 있습니까! 우리의 돈도 다시 돌려주시는 분에게 그럴 수 없습니다. 그 은잔이 발견되는 자는 반드시 죽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군사들이 자루를 검색하자 베냐민의 자루에서 은잔이 발견됩니다. 얼마나 큰일입니까. 요셉의 형들이 다 요셉에게 돌아가서 요셉에게 엎드립니다. 요셉이 누구의 자루에서 발견되었느냐 묻고 베냐민의 자루라 하니 베냐민만 종으로 남고 모두 돌아가라고 합니다. 형들은 난리가 났습니다. 막내를 데려오라고 아버지가 신신당부를 했는데 막내 베냐민이 종으로 남게 되었으니 어떡합니까. 그때 넷째 형 ‘유다’가 나와 회개를 하게 됩니다. “이 아이의 생명과 우리 아버지의 생명이 결탁되어 있습니다. 이 아이가 여기에서 종이 되면 우리 아버지의 흰 머리가 음부에 내려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총리시여! 이 아이를 돌려보내 주시고 대신 나를 종으로 삼아 주십시오.” 유다가 어떤 사람입니까? 22년 전에 요셉을 은 20냥에 노예로 판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이젠 동생을 풀어주고 자신을 종으로 삼아달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다의 대변화요 대회개인 것입니다. 요셉이 그 소리를 들을 때에 정을 억제할 수가 없어서 애굽 언어로 시위하고 있는 모든 사람을 다 내보내고 방성대곡을 합니다.

그리고는 애굽 언어가 아닌 히브리어로 말하기 시작합니다.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계시나이까?” 얼마나 형들이 놀랐겠습니까. 시체가 관을 열고 살아 나오는 듯한 공포가 그들에게 임했을 것이고, 그들의 피가 역류하는 듯 했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노예로 팔아 죽었을 것이라고 확신했던 요셉이 지금 애굽의 총리의 모습으로 자신들의 앞에서 말을 하고 있으니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이렇게 유다의 회개가 요셉의 감정을 터뜨렸습니다. 가해자 측의 회개는 화해의 첫 걸음입니다. 우리는 남에게 조금이라도 피해를 주었거나 어려움을 주었다면 “잘못했습니다.”라고 말을 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사람의 죄를 용서하실 때 그냥 용서하지 않으십니다. 잘못했다고 용서를 구할 때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2. 인간관계의 회복은 피해자 측의 좋은 태도에 달려 있다.

  둘째, 깨어진 인간관계의 회복은 피해자 측의 좋은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피해자가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좋은 태도를 갖게 되면 관계 회복은 이루어집니다. 요셉의 훌륭한 점은 머리가 좋다는 것보다, 행정 능력이 탁월하다는 것보다, 긍정적인 태도를 가졌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은, 만나면 짐이 되는 사람과 힘이 되는 사람,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짐이 되는 사람은 태도가 나쁜 사람입니다. 만나기만 하면 이용하려고 하고, 지배하려고 하고, 교만하고, 비판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입니다. 하지만 만나기만 하면 힘이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늘 기쁜 태도, 적극적인 태도, 용서하는 태도, 친절한 태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그런 사람입니다.

  요셉처럼 22년 동안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산 사람은 두 가지 행위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한 가지는 복수의 칼을 날카롭게 갈아서 품고 있다가 상대의 가슴을 찌르는 행위입니다. 이렇게 한다고 해서 누가 요셉을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요셉은 나쁜 태도를 가지지 않았습니다. 다른 한 가지 행위인 ‘용서’의 행위를 선택한 것입니다. 요셉은 고난 중에도 좋은 태도를 잃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나쁜 태도를 계속 지니고 있게 되면 결국 함께 멸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용서의 태도는 상생(相生)의 길을 가게 됩니다.

3. 좋은 태도는 하나님 주권의 신앙에서 나온다.

  셋째, 요셉의 이런 좋은 태도는 하나님의 주권(Sovereignty of God)의 신앙에서 나온 것입니다. 요셉은 철저히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의 마음은 하나님을 떠난 적이 없고 그의 입술은 하나님에 대한 언급을 중지한 적이 없습니다. 창세기 39장 9절에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할 때도 요셉은 어떻게 말했습니까? “내가 어찌 하나님 앞에 이런 큰 악을 행하여 득죄하리이까”하며 하나님을 이야기합니다. 창세가 40장 8절에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석할 때도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나이까”라며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창세기 41장 16절에서 바로 왕의 꿈을 해석할 때도 “하나님이 바로 왕에게 평안한 대답을 주시리이다”라고 하나님 이야기를 합니다. 자녀의 이름을 지을 때에도 하나님과 연관해서 지었습니다. 맏아들은 므낫세요, 둘째 아들은 에브라임입니다. 므낫세는 ‘하나님이 나의 고난을 잊어버리게 하셨다’는 뜻이고, 에브라임은 ‘하나님이 나의 수고한 땅에서 창성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는 모든 것을 하나님과 연관지어 생각한 것입니다. 창세기 42장 18절에 형들이 곡식을 얻기 위해 1차 여행을 왔을 때에도 요셉은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 말합니다. 43장 29절에 아우 베냐민을 만났을 때에도 “소자여 하나님이 네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노라”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요셉은 죽을 때에도 창세기 50장 25절에 “이스라엘 자손에게 유언을 남기기를 하나님이 정녕 너희를 권고하시리라”라고 합니다. 하나님 이야기를 그치지 않습니다. 요셉은 평생 그 마음 중심에 하나님이 계셨고 그 입술의 언어에서 하나님을 잃지 아니했습니다. 하나님이 주권자이시오, 자신의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하나님께서 연출하고 계시는 일이라는 것을 요셉은 믿고 의지했던 것입니다.

  요셉의 신앙이 아름답게 표현된 부분이 7절과 8절입니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형들의 잘못 뒤에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있다는 고백입니다. 이런 신앙이 요셉에게 어떤 태도를 갖게 했습니까? 4절과 5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가로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얼마나 태도가 좋습니까! 이처럼 우리 인생에 일어난 모든 일은 하나님과 다 연관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결론)

  그리스도인이란 예수님을 닮아가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태도를 배우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죄가 있으면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잘못이 있으면 잘못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바른 태도인줄 믿습니다. 이런 회개가 없이는 인간관계의 회복은 이루어질 수도 없고 오히려 더욱 낙화될 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어느 경우에나 부정적인 태도를 갖지 않으셨습니다. 요한복음 9장 1절에서 7절에 날 때부터 소경된 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사람을 볼 때 제자들의 태도는 철두철미하게 부정적입니다. 예수님에게 묻기를 “랍비여! 날 때부터 소경된 것이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부정적인 측면으로만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대답은 매우 긍정적입니다. “이 사람의 죄도 아니고 부모의 죄도 아니고 그에게서 하나님의 행하실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라” 하셨습니다.

  우리는 요셉에게서 좋은 태도를 배우고, 예수님에게서 긍정적인 태도를 배워야합니다. 기술도 중요하고 지식도 중요하지만 인생의 좋은 태도는 인생 성공의 가장 중요한 비결인 것입니다. 사람과의 화해, 원수와의 화해에서 원수의 회개도 중요하지만 피해를 입은 내가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요셉이 좋은 태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유다가 회개한 것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22년 동안 요셉을 찌르는 가시와 엉겅퀴였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바른 신앙으로 좋은 태도를 개발함으로 그 가시의 독을 제한 것입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가족은 화해를 하게 되었고, 살 길을 얻었습니다. 기근 시에도 더 번창하는 축복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잠언 16장 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 여러분에게 원수가 있습니까? 먼저 우리가 바른 태도를 가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때 원수도 우리와 화목하게 되는 위대한 역사가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나쁜 태도를 바꾸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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