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더 나은 의 (6) (마 5:43-48)

  • 잡초 잡초
  • 311
  • 0

첨부 1


- 설교 : 노강국 목사

오늘 본문의 말씀에는 기독교를 대표한다고 알려진 말씀이 들어있습니다. 그것은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예수님의 명령의 말씀입니다. 기독교를 대표한다고까지 여겨지는 이 말씀은 그런 점에서 독특한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독특함의 하나는 아주 매력적으로 들려지는 말씀이라는 사실입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 - 이 말씀은 아주 듣기 좋은 훌륭한 말씀입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위대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또 하나의 독특한 모습은 이 말씀에는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모습이 있다는 것입니다. 원수로 여길 수 있는 사람이 없을 때에는 이 말씀이 아주 아름답고 훌륭한 말씀이겠지만, 원수처럼 느껴지는 사람이 나의 주변에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면 그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은, 아니 그렇게 해서는 안 될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말씀을 우리가 그냥 머릿속으로 아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가 믿고 따르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우리가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이 말씀을 무엇보다도 나 자신에게 적용하는 마음으로 이 말씀을 이해하고자 하는 자세가 요구된다고 하겠습니다. 모든 성경의 가르침도 마찬가지겠습니다만, 이 말씀은 특히 더 그러한 자세를 요구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기독교를 대표한다고까지 할 수 있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대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고자 하여, “예수님은 ‘네 원수를 사랑하라’고까지 말씀하셨는데, 왜 아무개는 그렇게 살지 못하지?”라는 자세가 아니라,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이 주님의 명령을 나는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적용해야 할까?” 하는 자세로 대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남에게 원수 될만한 잘못을 저질러놓고서 하는 말이,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했는데, 나를 용서해라”는 식으로 자기의 잘못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으로 임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질문을 해 보는 것이 좋을 듯싶습니다. (1) 예수님이 언급하는 “원수”란 과연 누구인가?(What kind of enemy did Jesus have in mind?) (2) 예수님이 말씀하는 “사랑”은 과연 어떤 사랑인가?(What did he mean by love?) (3) 일반적인 사람들의 마음이나 감정에 배치되는 이 명령을 예수님은 무슨 근거에서 하시는가?(What is the theological grounding for this command that so cuts against the grain of normal human emotion?) 이렇게 입장을 좁혀가면서 생각해본다면 오늘 본문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봅니다.

1. 예수님이 언급하는 “원수”란 과연 누구인가?

오늘 본문의 말씀을 예수님께서 하시면서 제시하시는 그 당시 사람들의 사랑에 대한 율법이해를 43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이 말씀은 구약 레위기 19:18에 나와 있는 말씀을 원용한 것입니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그런데 이 말씀에는 “네 이웃을 사랑하고”라는 말은 있지만, “네 원수를 미워하라”라는 말씀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과장되게 하셨든지 아니면 거짓말을 하신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됩니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구약성경에는 없는 “원수를 미워하라”는 가르침이 시대가 흐르면서 예수님 시대에 와서는 유대인들의 의식이나 가르침 속에 자리 잡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일에는 “보복하지 말라”는 취지의 말씀에서 우리는 유대인들을 로마로부터의 독립을 쟁취시키기 위해 무력을 동원한 보복까지도 서슴지 않는 열심당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바리새파, 사두개파, 그리고 이 열심당과 더불어 또 한 그룹이 있었습니다. 이들을 우리는 엣세네파(The Essenes)라고 하는데, 이들은 무엇보다도 율법의 말씀을 철저히 지키고 율법의 말씀에 완전히 헌신하며 사는 사람들의 모임이었습니다. 이들은 사막의 사람들이 없는 동굴에서 공동체로 모여  생활을 하였습니다. 이 동굴에서 이들이 가르치고 배우던 문서가 발견되었는데, 거기에는 이런 명령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하나님)가 선택한 모든 것을 사랑하고, 그가 거절한 모든 것을 미워하라.” 또 “모든 빛의 아들들을 사랑하며, 모든 어둠의 자식들을 미워하라.”

이런 사실들을 미루어 볼 때,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라는 말을 너희는 들었으나”하는 말씀은 과장되거나 거짓된 말씀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을 유대인들이 아무런 저항감 없이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원수를 미워하라”라는 의식이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보편적으로 적용되고 있었음을 알게 해 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생각하던 원수가 “어둠의 자식들”처럼 일반적이라는 사실에서 볼 때, 여기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이 “원수” 역시 어느 누구를 특별히 지칭할 수 있는 구체적인 대상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원수는 누구이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해를 입히는 그 당사자가 바로 원수이겠느냐 아니면 나에게 직접적으로 해는 입히지 않더라도 일반적으로 나쁜 일들을 한다고 여겨지는 그 사람들이나 단체가 원수일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께서 언급한 “원수”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무엇보다도 먼저 누군가를 원수로 여기게 되는 바로 나 자신을 먼저 바라볼 수 있는 자세를 지녀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누군가를 원수로 여기는 데에 바로 원수가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의시에서 오늘 본문을 생각하고자 해야 할 것입니다.

2. 예수님이 말씀하는 “사랑”은 과연 어떤 사랑인가?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여기서의 사랑은 과연 어떤 모습을 지니는 것이 사랑일까 하는 문제가 대두될 것입니다. 과연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할 때의 그 사랑은 무엇일까요?

저는 이 구절을 볼 때마다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지금부터 20년 전, 1984년도에 한국의 연세대학의 한태동 교수라는 분이 은퇴를 앞두고 은퇴 강연을 서울 새문안 교회에서 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 한태동 교수라는 분은 신학자로서 목사이기도 합니다. 미국의 프린스턴 신학대학에서 “역사방법론”(The Methodolgy of History)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일찍이 연세대학 신과대학 교수로 수고하신 분입니다. 이분의 고별 강연에 제가 참석하였습니다. 이분이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교수를 하시니까, 가끔 종교계의 여러 분들이 찾아와서 질문도 하고, 상의도 하고 때로는 논쟁도 하곤 했답니다. 가끔 불교의 스님들도 찾아와서 종교에 대해 같이 이야기하는 기회가 많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불교의 스님들이 올 때, 이 한태동 박사께서는 장난끼가 발동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주 어려운 문제를 내놓고는 스님들이 쩔쩔매는 모습을 은근히 즐기기도 하곤 했다고 합니다. 그 중에 단골로 등장하는 질문이 바로 오늘 본문의 내용이었다고 합니다. “우리 기독교에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는데, 불교에서는 어떻게 가르치십니까?” 하는 질문을 할 때마다 스님들은 난처한 표정을 짓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번은 어느 초라한 노승(老僧) 한 분이 온 적이 있었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이 스님에게 이 질문을 던졌답니다. 마음 한 구석에서는 “이제 쩔쩔 매겠구나” 하는 고소한 마음으로 대답을 기다렸답니다. 한참 후에 이 노승이 대답하기를, “글쎄, 우리에게 무슨 원수가 있나요?” 하더랍니다. 이 대답을 들은 한태동 교수는 갑자기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같이 앞이 캄캄해지더랍니다. “아니, 우리는 ‘원수를 사랑해야 하느냐, 못하느냐’를 가지고 고민하는데, 이 스님에게는 원수라는 생각조차 없다니..”하고 생각하니 아찔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지금 불교는 경마장의 말처럼 옆을 못 보고 앞만 보고 달리도록 가리개로 가려서 그렇지, 만일 그 가리개를 풀어놓으면 너희들은 다 맥도 못 출 것이야”라고 경고를 하시더군요.

그렇습니다. 만일 상대방을 원수로조차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 원수를 사랑하지 못해서 고민하고 애쓰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원수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원수를 원수로 여기지 않는 자세가 필요한 줄 압니다. 사실,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들이 이웃을 어떤 특정한 사람이나 단체, 종교, 민족, 국가 등으로 한정지으려는 그 모든 한계를 제거하고자 하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이러한 자세를 지니고자 하는 훈련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가치판단적인 태도나 어떤 사람에 대해 쉽게 정죄하는 그러한 태도를 버리도록 하는 훈련 말입니다.

또한 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단순히 어떤 감정적인 사랑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중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눅 14: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 여기서 “미워한다”는 말이 자기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 모두를 향해 미워하는 감정을 강하게 키우라는 말이 아닌 것처럼,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 역시 감정적인 사랑을 의미하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말은 감정적인 측면도 배제하지는 않지만, 무엇보다도 행동적인 측면을 말씀하고자 사용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러한 행동적인 측면을 대표적으로 제시한 것이 44절의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기도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들의 태도나 행위를 바꾸어달라고 하나님께 요청하는 것 이상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원수를 위해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그들을 바라보려는 진지한 시도를 갖고자 하는 자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Praying for enemies involves a serious attempt to see them from God's point of view.)

현명한 부모들은 자녀들을 대할 때, 그 자녀와 그 자녀의 행위를 늘 구별합니다. 때로는 자녀들이 잘못할 때에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단다. 하지만 너의 지금 그 행동은 좋아하지 않는단다”(I love you, but I don't like what you are doing.) 라고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부모 된 마음을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들의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미워하고 학대하는 자들도 사랑하실 수 있다는 것을 우리 스스로가 기억하지 않고서는 우리의 원수들을 위하여 뜨겁게 기도할 수 없을 것입니다.(We cannot pray fervently for our enemies without reminding ourselves that the God who is able to love us despite our disobedience is able to love also those who hate and abuse us.) 바로 이러한 자세와 마음가짐으로 원수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바로 원수를 사랑하는 하나의 구체적인 모습입니다.

3. 일반적인 사람들의 마음이나 감정에 배치되는 이 명령을 예수님은 무슨 근거로 하시는가?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고 명하시는 주님은 무슨 이유로 이러한 명령을 하시는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그것은 45절의 말씀에 아주 간단하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렇게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모습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아들”이라는 비유적인 표현은 우리 동양권에서는 어떤 특정한 근원의 성품이나 속성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상을 나타내는데 쓰이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성격이 아주 급하고 불같은 야고보와 요한을 “우뢰의 아들”이라 불렀습니다(막 3:17). 바나바는 “위로의 아들”이라 나타나고(행 4:36), 가룟 유다는 “멸망의 아들”(요 17:12)이라고 성경에 나타납니다. 사도 바울은 살전 5:5에서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어진 모든 이에 대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나타냄으로써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을 말합니다. (In Semitic thought, "son"(or daughter) is used figuratively to express the idea that a person shares the quality or nature of the source specified. Jesus named James and John :sons of thunder"(Mk 3:17). Barnabas was known as "son of consolation"(Acts 4:36) and Judas as "son of perdition"(Jn 17:12). In I Thess 5:5, Paul writes, "For you are all children of light and children of day." To become a son or a daughter of God, then, is to participate in the divine nature by reflecting God's unconditional love for all made in God's image.)

이렇게 원수를 사랑하는 모습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비결이 있습니다. 우리는 마 5:9에서 이와 비슷한 언급을 봅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우리는 이 말씀에서 원수를 사랑하는 거기에 화평이 이루어짐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자기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화평케 하심에 참여하는 것이며, 그리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게 되는 것입니다. (To love one's enemies is to share in God's peacemaking and thereby to manifest the glory of God.)

이렇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는 이유라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두 번째 이유가 있습니다. 48절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두 번째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온전하게 하시려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온전하게 되기 위해서 예수님이 제시한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이 46절과 47절입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우리가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온전하다”고 하는 모습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한 마디로 “달라야 한다”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그리고 우리의 형제들에게만 문안한다면 세리나 이방인과 다른 모습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온전해진다는 것은 달라야 한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 다르다는 말을 하나님과 관련시켜서 표현할 때 쓰는 말이 바로 “거룩”이라는 말입니다. “거룩하다”라는 말의 기본적인 의미는 “다르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는 이 말씀과 같은 패턴의 말씀이 구약 레위기 19:2에 나오고 있습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그러므로 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는 이 말씀을 이렇게 다시 풀어서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이 다른 것같이 너희도 달라야 한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모든 백성이 거룩하게 되기를 원하신 것처럼 예수님은 모든 제자들이 하나님이 온전하신 것처럼 온전하게 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일반 사람들과 이러한 질적인 차원에서 다름으로 인한 모습이 바로 거룩한 모습이고 이러한 거룩한 모습이 바로 온전케 되는 비결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들이 하나님처럼 온전케 되는 모습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모습인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함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평화가 이루어지는 데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 것처럼 말입니다. “영광”이란 하나님께서 존재하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이 “영광”이란 단어는 사람에게는 거의 쓰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영광”이란 거룩한 것입니다. 즉, 우리 인간의 현실과는 다른 차원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광이 드러나는 데에는 무엇보다도 질적으로 달라야 하며, 거기서 비롯되는 온전함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현실이 바로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다고 고백합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 이유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바로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십자가의 죽음은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신 예수님께서 사셨던 삶의 방법이요 자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의 이론이나 추상적이고 듣기 좋은 말에 그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고, 우리들도 우리의 삶의 현실에서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자리로 나아감으로 하나님의 자녀 됨과 하나님의 온전하심에 동참할 수 있는 사람들이 다 되어야 하겠습니다.

<기도>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까지 보내주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우리의 죄 된 행위는 용납하시지 못하여 독생자를 희생의 자리로 나아가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한 번 깨닫습니다. 이러한 아버지의 뜻을 알고 오신 예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원수까지도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될 뿐 아니라, 아버지의 온전하심에 나아가기를 가르치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면서, 핍박을 받으면서도 그들을 위하여 기도했던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을 기억합니다. 저희들도 마땅히 그리고 능히 이러한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특히 교회라고 하는 신앙과 말씀의 공동체를 저희들에게 허락하심은 바로 이러한 삶을 이 교회 공동체를 통해 연습하게 하심인 줄 아오니, 저희 교회가 이러한 귀한 모습으로 가득 채워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