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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한밤중의 찬미 (행 16: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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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주승중 목사 (동안교회)
 
I. 들어가는 말

시편 22:3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찬송 중에 거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찬송을 기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찬송 받으시기를 기뻐하신다는 사실은 시편기자가 시편 69:31에서 이렇게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광대하시다 하리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 즉,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찬송을 너무나도 기뻐하시며, 그래서 그들이 찬송을 부를 때에 그들 가운데 함께 거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을 지으신 이유가 바로 이 찬송을 부르는 것에 있다고까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찬송을 부르기 위하여 지음을 받은 백성들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찬송은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찬송을 부를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찬송을 기뻐하시며, 우리의 찬송 가운데 임재하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진정 기쁨과 감사로 하나님을 찬송할 때, 여러 가지 놀라운 역사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찬송 가운데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여기 오늘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우리는 인생의 가장 깊은 밤중에 찬송을 부르고 있는 초대 교인들의 청아한 음악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누구입니까? 그들은 바로 바울과 실라입니다.


II. 몸 말
1. 본문의 배경

오늘 본문에는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지방에 가서 전도를 하다가 일어난 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 지역에서 전도를 하다가 불쌍한 한 여인을 만났습니다. 그녀는 점치는 귀신들린 불쌍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주인은 이 하녀의 점치는 재주로 많은 수입을 얻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과 실리가 그녀를 불쌍히 여겨 그녀에게 복음을 전했을 때, 여인을 괴롭히던 귀신은 떠나가고 그녀는 정신이 온전해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제 그녀는 더 이상 사람들의 점을 쳐주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녀의 주인은 자신의 수입원이 없어졌다는 이유로 펄펄뛰면서 바울과 실라를 잡아 로마 관헌들에게 넘겼습니다. 그리고 그 주인은 거짓말로 송사를 했습니다. 그는 바울과 실라가 복음을 전한 것을 가리켜 “우리 성을 심히 요란케 하여 로마 사람들이 받지도 못하고 행치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고 거짓말로 사람들을 선동하였습니다(20-21).

그러자 사람들은 재판도 하지 않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도 전에 주인의 말만 듣고 일제히 일어나 바울과 실라를 공격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지방을 다스리던 행정관도 주인의 말만 듣고 이유를 불문하고 무조건적으로 그들에게 형벌을 가하였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참으로 억울하게 엄청난 고통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행한 일이 무엇입니까? 귀신들려 자신을 잃어버린 체, 하나의 돈 버는 기계로 전락하여 이용당하고 있는 한 불쌍한 여인을 복음으로 치유해 주었습니다. 이것은 칭찬을 들을 일이지 그렇게 부당하게 얻어맞고 고난을 당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당한 고난을 오늘 본문 22절부터 24절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를 치라 하여,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분부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그가 이러한 영을 받아 저희를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에 착고를 튼튼히 채웠더니”

여기에 보면 바울과 실라가 당한 고난을 세 가지로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옷을 찢고 매로 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과 실리가 태장을 맞은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후에 바울이 고린도전서 11장 23절 이하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 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였는데” 그런데 바울이 이 빌립보에서 맞은 매질은 아마도 그가 밝히고 있는 대로 세 번 태장을 맞은 것 가운데 하나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맞은 이 태장은 유대인들의 매 보다도 더 잔인한 매질이었습니다. 원래 유대인들은 율법에 의해서 40대의 매질을 못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매질을 40회 이상 맞으면 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39대 까지만 때릴 수 있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이방인들에게는 그런 법조차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40이고, 50이고, 60이고, 자기들의 분이 풀릴 때까지 사람을 마구 때리는 잔인한 매질을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유대인들에게서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고, 세 번은 태장으로 맞았다고 자신이 매질 당한 것을 구분 지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렇게 바울과 실라는 엄청난 매질을 당하였습니다.

그 다음에 그는 “깊은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냥 감옥에 갇힌 것이 아니라, “깊은 감옥”에 갇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행전의 저자인 의사 누가는 왜 바울과 실라가 깊은 감옥에 갇혔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에 대해서는 성경 주석가들이 여러 가지로 설명을 하지만, 역시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 당시에 감옥의 가장 깊은 곳에는 “고문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당시의 감옥의 구조상으로 보아 가장 깊은 감옥에는 고문실이 있었으므로, 아마도 바울과 실라는 그곳에서 심지어는 고문까지 당하였을 확률이 높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들의 발에는 차꼬까지 채웠다고 했습니다. 그 당시 차꼬는 송판에 겨우 발이 들어갈 수 있을 만큼의 구멍이 뚫려 있고, 그 구멍의 좌우에는 쇳조각이 붙어 있어서 발을 조금만 움직여도 옆의 쇳조각에 살이 찢어지고 피가 흐르도록 되어 있는 도구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으로 미루어 보아 바울과 실라는 그 이튿날 사형을 당할 수도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때리고 고문하고 차꼬까지 채우는 것은 사형수들에게나 하던 가장 엄한 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아까도 제가 잠시 언급하였지만, 도대체 바울과 실라는 무슨 죄가 있어서 이런 고통을 겪고 있는 것입니까? 생각해 보면 참으로 억울하기 짝이 없는 상황입니다. 그들은 지금 복음을 전하고, 귀신들린 불쌍한 여인을 고쳐준 죄로, 즉 선을 행한 죄로 인하여 이 고난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바울과 실라가 당하고 이 억울한 고난을 보면서 베드로가 한 이런 말씀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것은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답다”(벧전 2:19)는 말씀입니다.

만일 저와 여러분이 이런 상황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리가 우리의 실수나 잘못 때문이 아니라, 이렇게 억울하게 선을 행하고도 고통을 당한다면 저와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여러분, 지금 아주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 분들이 있습니까? 내가 뭐 별로 잘못한 일도 없는 데 계속되는 고난과 시련으로 인해서 고통스러워하는 분들이 있습니까? 도무지 사방이 막혀 있는 감옥과 같은 그런 상태, 어디를 보아도 도움의 손길이 보이지 않는 그런 사면초가와 같은 상태에 놓여있는 분들이 있습니까?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오늘 바울과 실라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가 그런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 처한다 할지라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2. 감사의 기도를 하라

하나님께서는 바울과 실라의 모습을 통해서 무엇보다 먼저 우리가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바울과 실라의 상황은 아무리 생각해도 기도할 수 있는 그런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원망과 탄식이 나올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상황 속에서 바울과 실라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그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기도했다고 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밤중 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25절)

아마도 바울과 실라는 실컷 얻어맞고, 고문까지 당한 뒤에 기절을 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밤중에 깨어났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깨어나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그 상황 속에서 무엇보다 먼저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우리가 성경 원문을 찾아보면, “기도”라고 번역된 단어의 뜻은 그들이 “경배(adoration)”하고 “예배(worship)”했다는 단어입니다. 그들은 살려달라고 하나님께 청원하는 기도(petition)를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경배를 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들의 기도는 그냥 기도가 아니라 감사의 기도였다는 말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상황 속에서 그들이 원망하지 않고 기도했다는 것조차도 놀라운 일인데, 그들은 그 상황 속에서 감사하며 경배를 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럴 수 있는 것입니까? 어떻게 이 억울하고 기가 막힌 상황 속에서 감사가 터져 나오며, 기도가 터져 나올 수 있다는 말입니까?

사랑하는 동안교회 성도 여러분, 기도가 무엇입니까? 기도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께로만 향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내가 지금 당하고 있는 어려움과 환란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께로만 향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의 시선은 나를 괴롭히고, 나를 억울하게 때리는 사람들, 나를 얽어매고 있는 그 억울하고 기막힌 상황을 향할 것이 아니라, 기도를 통해 주님께로 향한다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다음에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과 섭리를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비록 내가 지금 당하고 있는 고통의 의미를 지금은 다 깨닫지는 못하지만,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섭리가 나와 함께 있음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지금 바울과 실라가 이런 상황 속에서도 기도하고 찬양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아름다운 말씀들 가운데 이 말씀을 기억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지금 내가 경험하고 있는 고통을 왜 하나님께서 허용하셨는지 그 이유를 당장은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우리가 확실히 믿는다면, 아무 것도 하나님의 뜻을 떠나서는 우리에게 허용될 수 없다는 것을 참으로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내 머리카락까지도 세시고 계시는 하나님,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 내 과거를 지금까지 인도하셨고, 내 현재를 아시고, 내 미래를 섭리하시는 하나님께서, 오늘 이 순간 내가 당하는 이 고통과 이 역경조차도 마침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 삶 전체를 아시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지금 이 고통을 허용하셨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는다면, 그래서 그 분의 내 삶에 대한 주권과 섭리를 확실히 믿는다면, 우리는 이 고통 속에서도 주님께 기도하며, 찬미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하나님의 놀라운 주권과 섭리에 대한 믿음이 바울과 실라에게 찬송과 감사의 기도로 나타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러한 모습은 실로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하므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참으로 아름답다”는 베드로의 고백이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참으로 억울하게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상황속에서 자신들을 때리고 죽이려고 하는 원수들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 억울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만을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와 주권을 바라보았습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입술에서 감사의 기도와 찬양이 터져 나오게 해 주셨습니다.
 
사실 우리가 오늘 본문 후반부를 자세히 묵상해보면, 여기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과 섭리가 담겨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천하보다도 귀한 한 생명, 즉 로마의 간수가 구원을 받게 되고, 더 나아가서 그의 온 가족이 구원받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유명한 말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이 들려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 사건 뒤에 옥에서 풀려난 바울과 실라는 자주 장사 루디아의 집에 가서 되어진 모든 일들을 전하고, 그들을 위로하고 그곳에 빌립보 교회를 세우고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간수와 루디아는 빌립보 교회의 중심인물들이 되었고, 그 빌립보 교회는 유럽의 복음화를 위한 전진기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빌립보 교회를 통해서 시작된 유럽의 복음화는 영국으로 건너하게 되고, 복음을 영국을 거쳐 미국으로 건너가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복음이 미국을 거쳐서 우리에게까지 전달이 되었습니다.
 
결국 무엇입니까? 바울과 실라는 이 모든 되어진 일들을 당하는 그 순간에는 다 알지는 못하였겠지만, 그들의 당한 그 억울한 고난에는 이런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계획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만나고 당하는 사건의 배후에는, 그것이 억울한 사건이든, 말로 다할 수 없는 시련과 역경이라 할지라도, 거기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가 깃들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일어나는 그 어떤 사건도 우연은 없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섭리만이 있을 뿐입니다. 
 
사랑하는 동안교회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 가운데 이해할 수 없는 슬픔과 고난 가운데 있는 분이 있습니까? 그 순간이 바로 우리 모두 함께 주님만을 바라보아야 할 순간입니다. 그 순간이 바로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놀라우신 사랑과 그 분의 헤아릴 수 없는 사랑과 섭리를 바라보아야 할 순간임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입술에서도 감사의 기도가 터져 나오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3. 찬양하라

그 다음에 우리 영혼의 이런 참된 감사 기도는 필연적으로 주님을 찬양하는 찬송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죽음의 그늘이 온 세계를 덮고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그 깊은 감옥에서 조차도, 그들이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믿음으로 감사의 기도를 드릴 때, 그들의 감사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아름다운 찬양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하심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위로와 능력이 함께 하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전개될지는 몰랐으나 거기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이제 그들의 입술에서는 참으로 아름다운 찬양이 흘러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무슨 찬송을 불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바울과 실라는 시편 23편을 불렀을지도 모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또한 그들은 시편 52편 8절의 “밤에는 그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라고 고백한 시편 기자의 심정으로 주님께 찬양하고 기도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시편찬송을 불렀을 것입니다. 시편찬송은 경건한 유대인들이 늘 부르던 노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감사기도가 변하여 찬송이 되었을 때, 놀라운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밤이 깊도록 하나님을 향하여 감사기도하고, 찬송을 부를 때, 갑자기 진동이 일어나고 옥터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진동은 두 사람의 찬송이 계속됨에 따라 더욱 심해졌습니다. 마침내 그들의 찬미소리와 함께 땅이 진동할 때 옥문이 활짝 열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발에 채워져 있던 차꼬도 풀리고 말았습니다. 실로 놀라운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이때 감옥을 지키던 간수는 천지가 진동을 하고, 감옥의 문이 열리자, 죄인들이 도망한 줄 알고, 칼을 뽑아 들고 자결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의 경거망동을 말리고 “네 몸을 상하게 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다”고 외쳤습니다. 마침내 간수는 정신을 차리고 등불을 켜고 바울과 실라 앞에 나와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그 때 바울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그 유명한 말씀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간수는 전도자들의 전도를 받아 들여 온 가족이 다 함께 세례를 받게 됩니다.

사랑하는 동안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찬양의 힘과 능력이 얼마나 큰가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바울과 실라가 밤중까지 찬송하고 있을 때 옥토가 흔들리고, 옥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믿음의 찬양은 우리의 환경조차도 실제로 변하게 한다는 진리를 가르쳐 줍니다. 바울과 실라가 그 억울한 상황 속에서도 실망하지 아니하고, 원망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보면서 기도하는 가운데 믿음의 찬양을 하였을 때, 그들의 한 밤의 찬양은 불의의 세력이 다져 놓았던 죄악의 굳은 지반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억울하게 매맞고, 부당하게 투옥을 당했다 해도, 하나님의 섭리와 구원을 믿고 찬미하는 세계는 더 이상 불의의 세력이 지배할 수 없게 됩니다.

사랑하는 동안교회 성도 여러분, 찬양은 불행으로 굳어진 현실에 변화를 가져오고, 비극으로 닫혀 진 옥문을 활짝 열어버립니다. 지옥 같은 우리의 현실을 천국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한 밤의 찬미는 원수들이 만들어 놓은 단단한 옥터를 뒤흔들었습니다. 한 밤의 찬미는 튼튼히 잠겨 있던 옥문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한 밤의 찬미는 간수가 죄수들 앞에 무릎을 꿇는 역설적인 장면을 만들었으며, 부패한 권력 밑에서 생계를 위해 종살이를 하던 한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였고, 그의 모든 가족을 영원한 세계로 인도하게 되었습니다.

찬양은 이렇게도 위대한 역사를 이루어 갑니다. 하나님께서 그 찬양 중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찬양은 위대합니다. 찬양이 있는 곳에 변화가 있고, 찬양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평강이 깃들게 됩니다. 찬양이 있는 곳에 사탄의 세력들이 물러가고, 찬양이 있는 곳에 모든 불안과 근심 걱정이 물러가게 됩니다. 찬양이 있는 곳에 천국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위로가 우리의 상한 심령을 어루만져 치유의 역사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찬양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구원이 임하게 됩니다. 
 
감리교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 목사의 일기에는 자살하려던 한 부인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 있습니다. 이 부인은 밤중에 뉴 리버(New River)라는 강에 투신하여 자살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강으로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강에 거의 이를 때쯤, 그녀는 웨슬리 목사를 비롯한 성도들이 기도회를 하면서 부르는 찬송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발걸음을 멈추었고, 그녀는 성도들이 부르는 찬송소리를 통해서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 줄 아느냐? 내가 너를 너무나 사랑하기에 내 아들까지 내어 놓았느니라”고 그녀의 마음속에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드디어 이 부인은 자살하려던 마음을 버리고, 하나님 안에서 살겠다고 결심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성도들의 부르는 찬송은 불행에 눈물을 흘리며 자살하려던 여인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찬송은 이렇게 생명을 구원하는 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찬송 가운데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III. 나가는 말

여기 한 밤중에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불렀던 한 여인의 모습이 있습니다. 그녀는 일본의 작고 가난한 한 교회의 목사님의 아내였습니다. 이 사모님은 악성 폐암에 걸려 44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분이었습니다. 떠나기 전에 투병생활을 하면서 그 사모님은 매일 매일 일기를 썼습니다. 힘이 드는데도 교회에 나가 기도하고, 찬송하다가 마침내 교회에 나갈 수 없게 되었을 때에는 집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기도하고, 찬송하며 일기를 썼습니다. 그녀는 죽기 하루 전날도 목사님에게 부탁을 하여 구술로 일기를 썼습니다. 그 일기가 나중에 책으로 출판이 되었습니다. 그 분이 남긴 이 책은 다른 어떤 책보다도 일본인들에게 강한 감동을 주었고,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오게 만드는 귀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녀는 소천하기 바로 이틀 전에 마지막 기력을 다하여 이런 시 한 수를 남겼습니다.

“내 신음이여, 내 찬미의 노래가 되어라.
내 괴로운 숨결이여, 내 신앙의 고백이 되어라.
내 눈물이여, 내 노래가 되어라. 주님 찬양하는 내 노래가 되어라.
내 병든 육체에서 나오는 모든 숨결이며, 호흡의 곤란이여, 기침이여,
주님을 찬송하라.
내 열이여, 땀이여, 내 숨결이여,
최후까지 내 구원의 주를 찬양할 노래가 되어라”

사랑하는 동안교회 성도 여러분, 인생의 가장 깊은 밤, 가장 어두운 때를 지나고 있는 분이 우리 가운데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때가 바로 우리의 신음, 괴로운 숨결, 우리의 눈물, 우리의 호흡, 우리의 기침, 우리의 열과 땀을 다하여 주님을 찬양해야 할 순간임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이 깊은 시련의 밤을 지나면서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있습니까? 오늘 우리는 어떤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 민족이 점점 더 노래를 잃어버려 가고 있습니다. 아니 노래를 잃어버려 가는 것이 아니라, 입을 열었다 하면, 좌절과 절망의 노래를, 원망과 불평의 노래를, 시기와 다툼의 노래를, 미움과 저주의 노래를, 심지어는 자살과 죽음의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죽음의 노래를 부르면서 자살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이런 때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떤 노래를 불러야 합니까? 그런데 안타깝게도 교회 안에서도 미움의 노래가, 원망의 노래가, 불평의 노래가, 싸움과 다툼의 노래가 들려지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런 우리의 노래를 들으시면 얼마나 가슴 아파 하실지?

이제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회개의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의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한 밤의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통한 회복의 역사를 바라보면서 기도하며 찬양합시다. 우리가 때로 사방이 막힌 감옥 같은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다 할지라도, 찬송할 수 없는 가장 어두운 밤이라고 생각되는 바로 그 순간이 오히려 우리가 바울과 실라처럼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돌려야 할 순간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찬송합시다.
 
그리하면 마침내 우리의 한 밤의 찬미는 어둠의 세력들이 다져놓은 옥터를 뒤흔들어 놓을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가장 힘들고 어두운 순간에 부르는 한 밤의 찬미는 우리를 갇히게 한 옥문을 활짝 열어 놓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부르는 한 밤의 찬미는 이 세상의 죄악의 터전을 흔들어 놓을 것이고, 우리 민족을 꼼짝 못하게 얽어 메고 있는 모든 쇠고랑이 풀리게 하며, 실망과 절망과 탄식으로 가득 찬 이 민족의 어두운 심령 속에 희망과 소망의 밝은 빛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

찬양, 그것은 오늘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탄식하고 있는 이 민족 가운데서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까? 절망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그들에게 나아가서 하나님을 향한 소망을 노래를 부르라고, 하나님의 구원의 노래를 부르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찬양, 이것은 오늘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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